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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110화 (110/432)

110화 - 제22장. 군자숙녀(君子淑女) (4)

진도건과 천서은은 그들을 따라 대청에 들어가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으니 첫 만남과 그때의 논의를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첫 만남의 기억이 멀지 않은데 치열한 전쟁을 겪고 나니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이 자리에서 다시 볼 수 있어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조태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절도사의 신속하고 적절한 판단들이 없었다면 아마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네 분을 비롯한 무림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이길 수 없었을 겁니다.”

영은성의 말에 조태번이 칭찬으로 화답하며 훈훈한 웃음이 이어졌다.

“창천맹주의 따님이 서둘러 달려와 야율재를 붙잡아 주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많은 군사기 외지에서 전사할 뻔했습니다. 전장에서 아쉽게 직접 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감사를 표할 길이 없었는데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버님께서 직접 참전하지 못하는 사정에 대해 양해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흑풍신마를 이기지 못했으니 위험할 뻔했습니다. 도건이 적절하게 나타났으니 운이 좋았죠.”

“여러모로 운이 좋았었습니다.”

천서은의 말에 진도건이 동조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진 대협, 별동대의 전술 행동은 전해 들어서 대략 내용은 알고 있습니다. 대체 야율재와의 대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흐음! 설명하자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을 겁니다. 어쨌든 적군의 화살 공세와 단도를 역이용해서 흑풍대를 붙잡았으나 야율재가 자유로웠다면 함께 도망치기 어려워질 것이기에 전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다시피 제 스승에 대한 은원도 있으니 그를 붙잡기는 손쉬운 일이었죠.”

“저희 걱정이 정말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영은성의 말에 진도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야율재. 예상보다 일찍 마주쳐 준비가 안 된 것도 있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치열하게 싸우긴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패배했고, 거의 죽었었습니다.”

“죽었다고요?”

“거의. 화산에서 폭주했던 혈마의 힘이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그게 날 살렸어. 아마도 마공이라는 건 힘이 강해지면 ‘마성’이라는 게 형성되는데 그게 일종의 ‘자아’를 갖추는 듯해. 야율재가 내 몸에 남긴 마기를 먹고 잠들어 있던 혈마가 깨어난 거지.”

“그럼 그때 화산에서처럼…….”

“그 정도로 폭주하진 않았어. 이번엔 이겨 낼 수 있었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야율재와 흑풍대는 돌아간 뒤였지. 난 바위 더미 아래에서 숨어 회복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운이 좋게도 서은이 야율재와 싸우던 시점에 전장에 돌아갈 수 있었던 거야.”

“무림의 이야기라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그럼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도 그때 변한 것입니까? 처음 봤을 때도 붉은 기운이 감돌긴 했었는데…….”

“그런 것 같습니다.”

“이거 참…… 제게는 하늘의 변덕이 진 대협에게 닿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색이 바뀌니 사람의 인상이 참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성격도 좀 변한 것 같고요.”

“성격은 그것 때문이 아닌 거 같은데…… 형수님 때문 아니겠습니까?”

최현걸이 팔짱을 낀 채 장난스러운 억양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좌중이 웃음을 터뜨렸는데 천서은이 한술 더 떴다.

“소개께서 눈치가 참 빠르시네요. 도건이 이제 바깥사람 된 것처럼 모시던 공녀에게 말을 편하게 하고 있으니 제 기분이 좀 그래요. 이러니 저도 위사라고 부를 수도 없고, 오라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고민이에요.”

“그러게 말입니다. 도건 형님이 워낙 평범하게 생겨서 천 낭자가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바뀌면서 개성이라도 생겼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형수님이 아까우신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천서은과 최현걸의 연속된 너스레에 다시 한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도건만이 사이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나와 비무 한 번 치르겠느냐?”

“시뻘건 눈으로 그리 쳐다보면 무섭소, 형님. 검객은 검객끼리 노시는 게 어떻습니까?”

“허, 가만히 있는 날 왜 갑자기?”

최현걸이 턱짓으로 가리키면서 눈이 마주친 영은성이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대화의 흐름과 어울리지 않아서 그렇지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검술도 진도건과의 비무를 통해 진일보했기에 여전히 배우는 자의 마음가짐을 갖추는 것이다.

천서은이 미소를 지으며 영은성을 바라보았다.

“영 도사가 묵허자께 화산파의 자하신공을 이었다고 들었어요. 정파의 내가기공 가운데서는 패도적인 것으로 으뜸인 무공이라 하는데 한 번 경험해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아… 저, 파천신공의 이루신 성취를 보건대, 제가 많이 부족하여 성에 차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데… 형수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진 대협과 맺어…지신 것 맞으시죠?”

“야이, 눈치도 없는 친구야. 그걸 꼭 말해 줘야 아느냐?”

“아, 아니! 그게 실례일 수도 있으니까…….”

“후후! 도건이 만약 절 떠나려고 하면 제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크흠!”

“그러니 두 분이 도건을 잘 감시하면서 혹시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거나 하면 제게 꼭 알려 주세요.”

진도건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 그 혼자만 빼고 모두 웃음이 터졌다.

곧 송 부인과 딸들, 하인들이 음식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가 가족 모두가 한 탁자에 모두 모여 앉아 식사까지 함께하였다. 여기에 모웅도 뒤늦게 합류하면서 인사를 나누었는데 몸에서 대장간의 열기가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아, 그러고 보니 야율재와의 대결로 제게 주신 무기들 모두 파손되고 회수하지도 못했습니다. 두 장군과 모 장인께 면구스럽습니다.”

조태상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본래 더 좋은 금속이 발견되고 기술도 따라 좋아지면서 옛 유물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법입니다. 그것들을 소모하여 전쟁 승리를 결정지어 주셨으니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고도 남습니다. 제가 두 분께 드릴 선물이 있다고 했는데, 모 장인이 바로 그 선물을 지금 준비하는 중입니다. 얼마나 완성되었는가?”

“형상을 만들고 연마를 마치려면 사나흘 이상은 걸릴 겁니다. 한주는 이곳에 머무시면서 두 분은 꼭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선물이 무엇입니까?”

“야율재가 죽고 그의 무기인 현철참마도를 전리품으로 입수하여 가져왔습니다. 워낙 거대한 무기이기 때문에 그걸 녹여서 태번이에게 줄 언월도용 칼날을 하나 만들 예정인데, 그 전에 검 두 자루를 만들어 야율재를 처단해 주신 두 분께 드리고자 합니다.”

“현철은 밀도가 매우 높고 강성도, 탄성도 매우 뛰어납니다. 그것으로 검을 만들면 일반 강철로 만든 검들은 부딪치면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고대의 간장막사검(干將莫邪劍)처럼 바위 정도는 두부 자르듯 할 것입니다.”

조태상의 말에 모웅이 설명을 보태었다.

“정말 기대되네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마침 빈손이라.”

“식사를 마치고 나면 어느 정도 길이와 폭이면 좋을지 알려 주십시오. 한 쌍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식사 자리는 더 화기애애하고 편안하게 이어졌다. 일상의 평범한 대화들이 오고 갔으며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조영과 조현은 잘생긴 영은성에게 관심이 있는 듯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었지만, 그가 도사라는 신분 때문에 혼인에 뜻이 없자 크게 아쉬워했다. 서혜와 조명은 진도건과 천서은에게 다가와 풀과 꽃을 엮어 만든 팔찌를 채워 주기도 했다. 조태상과 조태번은 금 황실에서 어떤 계획을 세울지 이야기했다. 천마신교의 발호가 군사적으로도 위협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개방의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최현걸의 생각을 묻기도 했다.

식사가 끝나고 담화들이 이어지면서 송 부인은 하인들을 불러 자리를 정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조태상이 진도건을 보며 말을 걸었다.

“아, 한 가지 진 대협의 판단이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저 말입니까?”

조태상이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식기들을 치우는 하인을 보았다.

“포로는 식사하였느냐?”

“예, 먹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알겠네.”

진도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포로?”

“가시지요.”

천서은을 포함한 사내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조태상의 뒤를 따라갔다. 모웅은 다시 작업 진행을 위해 대장간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전각을 빠져나와 빈객들을 모시는 별채로 향했다. 이곳도 잘 쓰는 곳이 아녀서 일주일에 한 번씩만 하인들이 청소하곤 했는데 최근 ‘포로’ 때문에 자주 청소를 하면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조태상은 별채의 가장 큰 방의 문 앞에 도착해서 잠깐 뒤로 사람들을 보았다.

“들어가겠소이다.”

“…….”

잠시 대답을 기다렸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거의 같은 식이었기에 조태상은 익숙하다는 듯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늑한 실내에서 두 손과 두 발을 족쇄와 사슬로 묶인 채 침상 위에 앉아 있는 거란족 여인이 있었다. 심드렁한 눈으로 조태상을 바라보던 그녀는 그 뒤에 나타난 진도건을 발견하고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이 여자는 흑풍대의…….”

“그렇습니다. 야율재의 사촌인 야율균은입니다.”

철컹!

강철 족쇄로 두 손목을 함께 봉인해 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야율균은은 자신의 힘으로 풀어낼 수 없었다.

잠깐 진도건을 살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그의 옆에 바짝 붙은 천서은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진도건은 야율균은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야율재와 싸우기 직전에 그녀를 물리친 기억이 있었고, 마지막 전장에서도 그녀와 눈이 잠깐 마주친 기억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다만 적장으로서의 인식이 남아 있는 것이지 특별히 신경 쓸만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이런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여자가 왜 여기에 있습니까? 제 판단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군요.”

“군사회의에서 살려 줄지 처형할지를 놓고 논의했었는데 해방하기로 했습니다. 흑풍대는 전멸하였고 다른 몽골족이 그녀를 돕지 않을 거라 봤기 때문이죠. 야율가 중에서는 개인적인 원한이 적었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 여자가 해방을 거부하고 진 대협을 만나길 원했습니다. 그 이유로 여기까지 따라오게 된 것이고 마냥 풀어두기엔 불안한 부분이 있으니 이리 포박해 놓은 것입니다.”

“왜 만나려고 하는 거죠?”

천서은이 진도건에 앞서서 먼저 물어보았다. 그녀의 눈에 야율균은의 미모는 꽤 빼어났기에 자신도 모르게 상황을 의심한 것이었다. 물론 둔감한 진도건은 그녀의 반응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야율균은의 이어진 반응은 천서은의 우려를 불식시켜 주었다.

“일족의 원수!”

앙칼진 억양으로 쏘아붙이는 말에는 듣기 불편한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조태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이럴 거 같았지만…, 그녀는 진 대협을 만나겠다는 말만 했을 뿐 다른 얘기를 하지 않고 침묵만 지켜와서……. 송구합니다.”

“괜찮습니다.”

진도건이 조태상 앞으로 걸어 나와 야율균은을 바라보았다.

“나와 싸우고 싶은가?”

야율재와 야율신의 죽음이 떠오른 야율균은의 눈은 조금 충혈된 채로 진도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돌발행동을 할까 봐 조태상, 조태번 등은 조마조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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