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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109화 (109/432)

109화 - 제22장. 군자숙녀(君子淑女) (3)

* * * *

치이익-!

구레나룻을 타고 흘러내려 턱에 맺혀있다가 떨어진 땀방울이 새빨갛게 달궈진 쇠막대를 적시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땅-! 땅-! 땅-!

힘을 주고 신중하게 내려치는 망치질에 새빨갛게 달궈진 현철 주괴가 조금씩 납작해져 갔다.

때릴 때마다 불꽃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팔과 얼굴에 튀면서 따끔할 뻔도 한데 이미 구릿빛으로 그을려 살가죽이 단단해졌는지 별 느낌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저 망치를 때릴 때만 얼굴을 뒤로 물리며 눈을 보호하고 있었다.

모웅은 납작해진 현철주괴를 접어 다시 화로에 넣어 달구기 시작했다.

푸후-! 푸후-!

장치 손잡이를 당겨 풀무질을 시작하니 화로에 바람이 들어가며 불길이 더욱 강렬하게 일어났다.

여태까지 대장장이를 하면서 가장 높은 온도로 쇠를 달구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합금 강철보다 단단하다는 귀한 현철을 다루는 일이었기에 모웅은 어느 때보다 집중하고 있었다.

속으로 시간을 셈하면서 적당한 때가 되자 다시 현철주괴를 꺼내어 단조작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땅, 땅-!

두드려 펴고 이를 접어 다시 두드리고, 또 펴지면 다시 접어 두드리면서 온도가 식어가는 듯하면 다시 화로에 넣고.

이 고된 작업은 벌써 사흘째 지속하고 있었으니 백련정강이란 말이 우습게 천 번 이상을 두드리고 있는 듯했다.

“할아버지! 물과 요깃거리를 가져왔어요!”

한 소녀가 대장간 입구에서 쟁반을 든 채 서 있었다.

“고맙다. 거기 옆 탁자에 놓고 가거라.”

“넵!”

밝게 외치며 탁자에 쟁반을 올려놓은 소녀는 대장간을 떠나 조가장 부엌으로 다시 돌아갔다.

부엌에선 전을 부치면서 요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세 여인이 요리하고 있었는데 귀부인 느낌의 중년의 여인이 소녀가 돌아온 걸 바로 보고 입을 열었다.

“혜아(慧兒)야, 모 장인께 갖다 드렸니?”

“예, 마님.”

송 부인의 물음에 서혜가 공손히 대답했다.

그녀는 조태상의 처로 조가장의 안주인이었다. 식사 때가 좀 지나긴 했지만, 지난번 금 황실의 상선과 군사들이 찾아왔을 때 이후는 처음 조가장이 북적거리는 때였고 식간의 요깃거리가 필요했기에 부엌에서 지휘할 수밖에 없었다.

“혜아는 명아(明兒)와 같이 광주리 하나씩 가지고 연무장에 가려무나.”

“네!”

“응, 엄마!”

조명은 조태상의 막내딸로 서혜와 13살 동갑이어서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가자!”

“응!”

두 소녀가 총총걸음으로 광주리를 들고 가는 모습을 보며 송 부인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좀 더 만들까요, 어머니?”

“그러자꾸나. 미리 해두고 저녁 찬으로 먹으면 되지.”

송 부인의 대답에 조영(趙英)과 조현(趙晛)은 남은 재료들을 모두 손질하기 시작했다. 조영은 22세의 장녀였고 조현은 18세의 차녀였다. 조가장 주인의 딸이었지만, 하인들을 거의 두지 않았기 때문에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송 부인을 돕고 있었다.

서혜와 조명이 광주리를 함께 들고 간 연무장에는 네 명의 사내들이 있었다. 조태번과 영은성이 연무장 한가운데서 비무를 하고 있었고, 조태상과 최현걸이 연무장 입구 근처에 앉아 구경하고 있었다.

“아버지, 이것 좀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오! 명아, 혜아. 고맙다. 너희도 먹고 가려무나.”

“헤헤!”

“최 소협도 드시구려.”

“예, 예.”

최현걸이 엉금엉금 기어오면서 두 소녀에게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다 못생긴 표정을 지으면서 손을 번쩍 들었다.

“쿠아아아!”

“꺄하!”

조명이 꺄륵 웃으면서 도망쳤다. 최현걸이 연방 장난을 치는데 즉각 반응하는 모습만 봐도 성격이 참 밝은 걸 알 수 있었다.

서혜도 장난치는 걸 좋아했지만, 할아버지를 흑응대 몽골군에게 잃어버리고 나서는 조금 차분해진 느낌이었다. 소녀도 최현걸의 장난에 베시시 웃었지만, 조명처럼 같이 장난을 치진 않았다.

조태상이 그런 서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내기에 좀 어떻더냐?”

“부인께서 잘 대해 주셔서 편했습니다, 어르신.”

“곧 진 대협이 오신다니까 좋지?”

“네.”

서혜가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진도건이 서혜를 데리고 조가장에 와서는 전장으로 떠나기 전에 서혜를 이곳에 맡겼다. 마침 조태상에게 세 딸이 있었기 때문에 그도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딸들에게 서혜를 하인처럼 대하지 말고 친구, 동생처럼 생각하라고 했기 때문에 다행히 적응에 어려움이 없었다.

서혜는 전쟁에 나간 진도건을 다시 보고 싶어 했다. 생명의 은인인 데다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이니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쫓아다니고 싶었지만, 위험한 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걸 송 부인을 통해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 부분은 체념하고 있었다.

“네가 씩씩하게 있는 걸 보면 진 대협도 안심할 거다.”

“그럴까요?”

최현걸이 얘기를 듣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너, 형님 모습 보면 깜짝 놀랄걸?”

“왜요?”

“말해 주면 재미없지?”

“칫!”

“저도 궁금해요!”

서혜가 토라진 듯 굴자 조명이 한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너도 안 가르쳐 줄 건데?”

“으! 나쁜 거지 아저씨!”

“하하하!”

네 사람이 웃음을 터뜨리며 화기애애할 때, 연무장 중앙에서는 영은성과 조태번이 치열하게 검술을 겨루고 있었다.

조태번은 이번 전쟁으로 무림인들의 무공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오는 길에 팽무양과도 진지하게 무학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조언을 구했고, 조가장에 도착한 이후 오늘까지 일주일간은 영은성에게 화산파의 검술을 배우고 있었다.

육합검법(六合劍法)은 도가검문의 기본 검법이었지만, 군부의 무예와 또 달랐으니 배우는 재미가 있었다. 조태번의 습득력도 매우 뛰어나며 감각도 있어서 영은성도 새로운 경험에 비무를 꽤 즐기고 있었다.

조태상이나 조태번도 자신들의 이 평화가 오래 가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북부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남양은 계속 장성의 수비를 담당할 것이고, 이 전쟁에서 활약한 형제를 다시 서부군으로 파견할 거라는 전망이 회군 중에 논의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태번도 기주부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조가장에 남아 개인 휴가를 즐기면서, 곧 이곳을 방문할 진도건, 천서은을 한 번 더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조가장은 그렇게 조용한 활력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진도건과 천서은이 조가장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진도건도 평범하게 흰색 바탕의 의복을 갖춘 상태로 두 사람이 같은 색을 하고 있으니 그 용모나 적발이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허름하네요.”

조가장은 여전히 담벼락엔 정리되지 않은 넝쿨들이 가득했고 주변 청소도 잘 안 되었다. 현판에도 먼지가 좀 쌓여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폐장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만하게 했으니 천서은의 눈에도 다르지 않았다.

땅, 땅, 땅…….

하지만, 작게 들려오는 쇠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느껴지는 몇 사람의 인기척들은 다행히 늦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진도건에게는 익숙한 호흡의 끈들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들어가자.”

진도건은 익숙하게 문을 열고 조가장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들어서서 얼마간 걸음을 옮기자 마침 내원 입구를 나오던 하인이 진도건을 발견하며 놀랐다. 그리고 천서은을 보고 잠깐 멍하니 서 있다가 급히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내원 안으로 들어설 때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나오고 있었다.

“대형!”

가장 먼저 손을 번쩍 들며 최현걸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천서은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붉힌 채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쭈뼛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천서은이에요.”

“개방의 소개 최현걸입니다.”

“풋!”

최현걸이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본 진도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런 그를 최현걸이 다소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최현걸 옆에 선 영은성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입니다, 천 공녀님.”

“오랜만이에요, 영 소협.”

천서은과 영은성은 화산에서의 아픈 기억을 공유했던 사이였다. 그렇기에 영은성은 진도건과 천서은이 친밀한 듯 가까이 붙은 채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반겼다.

“두 분 보기 좋습니다.”

“고마워요.”

그런 기억을 인지하고 있는 천서은이기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조태상과 그의 가족들, 조태번까지 모두 뒤따라 나와 인사를 하였다. 송 부인과 세 딸에게도 한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진도건도 그들에게 모두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송 부인의 뒤에서 익숙한 얼굴의 소녀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진도건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 나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잘 지냈느냐?”

서혜는 놀란 눈과 어색함을 동시에 드러내며 앞으로 천천히 나왔다.

“머리카락이랑 눈이…….”

“너무 빨갛게 변해 버렸지? 무서우냐?”

“그, 그건 아니에요.”

“그럼 어서 와서 한 번 안아주지 않고 왜 그리 서 있느냐?”

서혜는 주춤거리면서 조금씩 다가갔다. 그리고 좀 더 자세하게 진도건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면서 다소 굳었던 표정도 풀어졌다.

처음 만났을 때도 진도건은 검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참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두 달 넘는 시간 동안 무슨 천변(天變)이라도 있었는지 이젠 흔하디흔한 검은색은 눈과 머리카락 등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척 어색하고 두려운 느낌도 들었는데 가까이 가면서 진도건의 따뜻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이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따뜻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탁탁탁!

서혜가 달려가 진도건의 품에 와락 안겼다.

진도건은 자그마한 서혜를 힘껏 끌어안은 채로 일어났다. 훌쩍거리면서 흘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면서 다독였다.

“잘 지냈느냐?”

“예. 부인께서 너무 잘 대해 주시고, 명이랑도 매우 친해졌어요.”

“고맙습니다. 명아도 고맙다.”

“별말씀을요.”

“서혜야, 여기 누나와도 인사하겠느냐?”

서혜는 천서은을 어색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이의 시선에서도 천서은의 미모는 너무 아름다워 절로 얼굴을 붉히게 했다. 그런 그녀에게 천서은이 친근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 네가 서혜구나. 난 천서은이라고 해. 반가워.”

“서혜라고 합니다.”

천서은이 서혜의 머리와 볼을 쓰다듬었다.

“참 예쁜 아이구나. 이렇게 도건이 안아주고 있으니까 샘이 좀 나는걸?”

“후후후!”

진도건이 웃으면서 천서은과 같이 서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이를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조태상과 조태번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복귀하지 않아 송구했습니다.”

조태상과 조태번도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갖추며 답례하였다.

“두 분이 군사들을 모두 구한 셈이니 진 대협과 천 낭자는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광개에게 조가장을 들러 달라는 전언을 받아 왔습니다. 안 그래도 서혜 때문에 한 번은 들를 생각이었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상의할 일도 있고, 두 분께 선물을 드릴 것도 있어서 말이지요. 일단 들어가서 식사부터 하시지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곧 식사 때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흰 식사 준비를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부인.”

조태상과 조태번이 앞장서 빈청으로 돌아가고 송 부인과 두 딸도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영은성과 최현걸은 진도건과 악수하면서 갑작스레 헤어진 아쉬움을 풀었다. 천서은은 자신 앞에서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서혜와 조명의 손을 양손에 잡고 걸으며 인사를 더 깊이 나누며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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