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제22장. 군자숙녀(君子淑女) (2)
바람이 쌀쌀맞아 물기가 있다면 여전히 얼어붙게 할 만했지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남녀의 땀에 젖은 몸에선 완연한 열기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단하고 거친 근육의 육체는 부드럽고 탄력 있는 육체를 끌어안으며 몇 번이고 불길을 지폈다.
그간의 갈증 때문에 목말라 있던 두 사람의 정사(情事)는 몇 번이나 쉬지 않고 반복되고 나서야 간신히 끝이 났다.
다시는 떨어지기 싫은 듯 꼭 끌어안은 두 사람이 함께 구름을 타고 둥둥 떠다니는 기분에 취하여 하늘을 바라보았다. 흑요석(黑曜石)같이 별빛을 담은 밤하늘에 무엇보다 밝게 빛나는 달빛을 보던 천서은은 우연히 그 아래 비친 서로의 나신을 보게 되었다. 희열에 달궈져 붉게 달아오른 자신과 진도건의 몸을 보고는 다시 그의 품에 새빨개진 얼굴을 파묻었다.
“도건, 부탁 하나 할게요.”
“무슨 부탁입니까?”
“경어는 쓰지 말아요. 이제 우리 그런 사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됩니까?”
“명령이라도 할까요?”
“그래 주시죠.”
“칫. 하기 싫으면 말아요. 정 없게.”
“안 할게.”
“반말하라고는 안 했는데요?”
“나이는 내가 한 살 더 많은데?”
“생일도 얼마 차이 안 나거든요?”
“그럼 완전히 놓지는 않을게요. 이 정도면 괜찮나요?”
천서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훗! 그냥 당신 마음대로 불러요.”
그녀는 다시 진도건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맞추었다. 진도건도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가져가는데 엄지손가락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배 왼쪽에 남아 있는 관통상의 흉터를 만지작거리니 천서은이 몸을 움츠렸다.
“아!”
마치 통증을 느낀다는 듯 신음을 흘리며 앉자 진도건도 덩달아 걱정스러운 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으려는 찰나 그녀가 벌떡 일어나며 옆에 놓인 옷가지를 어깨에 둘렀다.
“일어나요.”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짐짓 조금은 냉담하게 느껴지는 대답에 진도건도 일어나며 주섬주섬 옷가지를 들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옷을 모두 입었다.
왠지 모르게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뒤돌아선 천서은의 얼굴엔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옷매무새를 다듬으면서도 흉터가 있는 자리를 가만히 만지던 그녀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진도건이 불편한 감정으로 눈치를 보고 있는데 그녀가 슬그머니 다가가더니 주먹을 꾹 쥐었다.
퍽!
“헉!”
그녀의 주먹이 진도건의 배에 꽂혔다. 갑작스럽기도 했고 제법 세게 때렸기 때문에 진도건도 놀라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후후! 이걸로 봐줄게요.”
가만히 흉터 자리를 쓰다듬으면서 웃음 짓는 그녀를 보며 진도건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으며 입술을 맞추었다.
천서은은 진도건을 살짝 밀쳤다.
“이만 돌아갈까요?”
“꼭 그럴 필요 있을까? 전쟁은 끝났고…… 방해받고 싶지 않아요.”
“후후후! 나도 그래요.”
“우리끼리 천천히 돌아갑시다.”
천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진도건과 천서은은 함께 손을 맞잡고 빠르게 산을 달렸다. 그들이 지나가는 산은 연산산맥이었는데 진도건이 이 지역의 정찰병들을 처리하면서 돌아다닌 바람에 어느 정도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전쟁과 정사라는 아이러니한 서로 다른 활동 속에서 몸이 많이 더러워져 있었다. 특히 진도건은 몸에 묻은 피를 눈에 대충 씻긴 했어도 아직 부족했다.
그들은 작은 폭포가 떨어지는 연못을 찾아 그곳에서 다시 헤엄치며 놀았다. 옷은 물에 빨고 몸은 연못 물에 깨끗이 씻었다. 서로 물장난을 치며 웃음꽃이 피어나기도 했다. 젖은 옷을 다시 입고 내공으로 한 번에 말리기도 했다. 짙은 아지랑이가 두 사람에게서 피어나는데 문득 진도건을 본 천서은이 까르르 웃었다.
“당신은 옷이 다 터져서 입은 것 같지 않네요.”
곳곳이 찢어지고 혈흔으로 얼룩져 있었다. 너덜너덜하여 맨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녀가 손으로 그 너덜너덜한 부분을 붙잡아 올려 드러난 피부를 가렸지만, 손을 놓으니 다시 스르륵 떨어졌다.
“빨리 옷 한 벌 사야겠는데요? 춥겠어요.”
“내공이 높아지면서 추위를 크게 타지 않게 됐어요. 괜찮아요.”
“괜찮기는요? 세상에 천무방 천서은의 남자가 이런 상태로 돌아다니면…… 제 체면도 생각해 주시죠, 낭군님?”
“하하하하하!”
천서은의 ‘낭군님’ 소리에 진도건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오랜만의 큰 웃음이었고 행복한 웃음이었다. 천서은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바람을 피할 작은 동굴을 찾아 거기에 들어가고 마른 낙엽들을 모아 바닥에 깔았다.
진도건이 그 위에 눕고 천서은은 그의 팔을 베고 누우며 두 손을 꼭 잡았다.
“잘 자요.”
먼저 얘기해 주는 진도건에게 천서은은 따스한 눈빛으로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깊어진 밤, 행복에 들뜬 마음은 내일을 위해 내려놓고 서로의 호흡 소리를 들으면서 조금씩 잠이 들어갔다.
* * * *
두 사람은 연산산맥의 능선을 따라 천천히 남하했다.
빈손으로 단둘이 여행하는 것이었기에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 다행히 연초 겨울의 끝자락이었기에 동면에서 깨어난 동물들이 깨어났기에 그것으로 사냥을 대체했다. 계곡물을 찾아 마시고 씻으면서 자연 속에 자리를 만들어 잠이 들길 반복했다.
평이하고 즐길 것도 없었지만, 그만큼 방해를 받을만한 일도 전혀 없었다. 그랬기에 두 사람은 원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당연히 지난 3년 동안 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답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특히 천서은은 대부분 폐관 수련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오직 진도건을 다시 만나고자 하는 생각만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진도건이 주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종남산 기슭에서 일월신마와 어떤 싸움을 치르고 어떻게 홍천환을 복용하였는지, 그리고 화산에서 그가 어떤 상태였는지 모두 설명했다. 화산에서 그를 구해간 사람이 조강선이며 자신의 스승이었다는 점. 그가 과거 혈마 원건과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그를 제자로 거두며 마지막까지 목숨을 살리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은 이유에 대해 모두 설명했다.
가장 조심스럽게 설명한 부분은 진도건 본인의 몸 상태였다.
“내 안에 혈마의 마성이 아직 잠들어 있으니 만약 내가 다시 죽을 지경에 이르러 약해진다면 놈은 나를 다시 집어삼키려 할 거야.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난 이제 누구에게도 질 수 없어. 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폭주한다면…… 당신이 날 죽여줘.”
두 사람은 산 정상 기형적으로 솟은 바위를 올라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넓게 펼쳐진 산자락들과 더 멀리 남쪽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하북 평원이 눈에 들어왔다.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하는 말치고는 무겁고 또 불길한 얘기라 불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천서은은 크게 개의치 않으며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제가 지켜줄게요.”
“후후! 그래. 고마워. 나도 다른 놈이 당신에게 접근하지 않도록 지켜줄 거야.”
“뭐예요, 그게!”
“하하하하!”
한 달여 시간을 그렇게 보낸 진도건은 이젠 정말 그녀에 대해 굳었던 마음을 풀어놓으며 편하게 웃고 답하고 얘기하고 있었다. 천서은도 그를 알게 된 이후 가장 편안하고 사랑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어떤 주종의 거리감도, 신분의 벽도, 오해의 늪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 폭의 그림이구만.”
멀지 않는 능선 위에서 한 노인이 서서 손으로 햇빛을 가린 채 기암 위의 연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바로 북부 남양 대장군부와 무림 사이를 연결해 주었던 광개였다. 전쟁이 끝나고 군사들은 오랜 전투의 피로를 피해 부상자들과 전사자들을 수습하자마자 빠르게 철군했다.
진도건과 천서은이 한 주간 나타나지 않자 천호대를 포함한 700여 명의 무림인 모두 창천맹과 자신의 사문으로 귀환하였다. 군사들도 보름 넘게 행군하며 고향으로의 귀환을 위해 부지런히 이동해 일부는 소속 지역으로 회군하고 절반 넘는 군사들은 금 황실로의 복귀를 위해 계속 이동 중이었다.
광개가 이곳에 나타난 것은 바로 두 사람에게 전달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돌아올 만한 길을 살피고 있었고 능선을 따라 걷는 행적을 파악하여 이리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좀 더 걸어가 바위 쪽으로 가까이 이동했다.
“천 낭자!”
그의 부름을 듣고 천서은이 바위 끝으로 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광개 어르신!”
두 사람은 남양의 명령을 받은 광개가 500명의 무림인들을 이끌고 오는 그녀를 인도하기 위해 찾아가면서 만나 이미 구면이었다.
“오붓한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한데 올라가도 되겠소?”
“물론이죠.”
광개는 훌쩍 몸을 날려 세 번의 도약 끝에 바위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는 처음으로 진도건이란 인물의 실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노구는 광개라고 하오. 진 공자를 뵙소이다.”
바람에 적발을 찰랑거리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적안은 묘한 느낌이 있었다. 눈빛 자체는 온정이 느껴지면서도 그 색이 가져다주는 묘한 섬뜩함이 은근하게 남아 있어서 친분을 위해 접근하고자 하는 생각이 꺼림칙한 느낌도 있었다.
물론 그것이 외향적인 면에서 오는 편견임을 잘 알았다.
그의 시선에서 천서은과 진도건은 이미 깊은 연인 관계가 되어 있었고 또 용두방주의 후계를 이을 소개 최현걸이 그를 잘 따르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멀리서 야율재와 천서은의 대결부터 진도건의 대결까지 모두 지켜보았다.
‘후기지수들을 통틀어 최고의 실력을 갖췄으니 어쩌면 무림의 희망이 이들에게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개방이라는 조직이 창천맹을 등에 업고 하오문과 협력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내지와 외지로 갈라졌던 정보력의 분단이 마침내 통합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내지 담당으로서 숨어있던 광개도 천마신교의 정체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위험성을 매우 경계하는 중이었다.
천하오절만으로도 전력이 부족한 지금에서 그 뒤를 이을만한 고수가 하나라도 더 확보하는 것이 창천맹과 무림에 당면한 어떤 과제들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진도건입니다. 개방의 선배께선 말씀 편히 하십시오.”
진도건도 그를 향해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최현걸 때문이라도 개방의 인물들에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광개가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편히 하긴…… 장차 천무방주이자 창천맹주의 사위 되실 분인데 예의는 지켜야지요.”
“아하…… 하하하!”
진도건도 그를 따라 멋쩍게 웃으며 천서은과 따스한 눈빛을 나눴다.
“참! 어르신,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두 사람에게 전할 말이 있어 왔소.”
“말씀하셔요.”
“두 사람의 활약 덕분에 흑풍신마 야율재가 죽고 전장은 모두 정리가 되었소. 사나흘 정도 부상자들을 수습한 후에 군사들은 모두 복귀하거나 중원을 지나 개봉으로 향하는 중이요. 천호대 등도 모두 창천맹과 각 문파로 돌아갔소.”
“저희만 쏙 빠져서 죄송하네요.”
“두 영웅을 보지 못해 아쉬워하는 사람은 있어도 불평할 사람은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오. 그것보다 실은 군 상황을 확인하고 떠날 때, 조태상 장군이 내게 부탁을 했소. 두 사람을 만나면 꼭 조가장에 잠시 들러 달라고 말이오.”
“조가장에요?”
천서은이 되물으면서 진도건을 돌아보았다.
진도건은 광개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그도 조가장에는 한 번쯤 방문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도 거기에 볼일이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영 소협과 소개도 거기에 함께 있다 하외다.”
“그래요? 녀석들…… 눈치도 없네.”
“껄껄껄!”
진도건의 말을 알아들은 광개가 웃음을 터뜨렸다. 옆의 천서은을 보고 있으니 그의 말이 바로 이해가 되었다.
광개는 문득 시선을 진도건의 옷에 닿았다. 바람에 맞아 상체를 모두 드러낸 채 너덜너덜하게 펄럭이고 있었고 하의도 여기저기 터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단련된 육체가 보기에 좋긴 하지만, 산에서 내려가면 천 낭자의 체면은 살려 주어야 하지 않겠소. 이거라도 입으시구려.”
광개가 주섬주섬 외투를 벗기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괜찮긴. 다른 여자들이 혹하고 덤벼들게 생겼구만.”
그렇게 얘기하자 진도건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천서은이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내 장군들도 뵙고 하다 보니 거적때기만 입기 뭐해서 구색을 갖추기 위해 장터에서 산 헌 장포라오. 구멍 뚫린 데는 없으니 대충 입고 산에 내려갔다가 맞는 옷을 사 입으시구려.”
광개는 일부러 진도건이 다시 거절할까 봐 장포를 돌돌 말아서 그의 팔을 붙잡고 직접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팔을 툭 치며 입을 열었다.
“거렁뱅이 냄새가 좀 날 테니 물에 빨아서 입으시오. 그런 거에 섭섭해할 나이는 아니니.”
“하하, 알겠습니다. 잘 입겠습니다.”
진도건은 웃으며 광개에게 감사를 표했다.
광개도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돌아가려는 듯 뒤돌아서서 걷던 그는 바위 끄트머리에서 잠시 멈추고 고개만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오.”
광개는 흰 눈썹 아래 처진 눈 한쪽을 찡긋거리고는 바위 아래로 훌쩍 뛰어 내려갔다. 빠르게 경공을 펼치며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진도건은 피식 웃었다. 그는 광개가 준 장포를 내려다보았다. 그걸 슬쩍 들어 냄새를 맡아보곤 천서은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으……, 이거 바로 빨아야겠는걸?”
“하하하! 우리도 내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