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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107화 (107/432)

107화 - 제22장. 군자숙녀(君子淑女) (1)

홍조를 띤 하늘 아래 날카롭게 뻗어 낸 가지들에 황혼이 부서지며 눈을 쨍하고 때렸다. 평소라면 물리칠 나뭇가지들이 볼이나 목을 할퀴고 지나갔다. 차갑게 얼어붙은 나뭇가지는 날카롭고 거칠어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붉게 상처가 났다.

이렇게 다급하게 도망쳤어야 할 일인가?

얼어붙은 눈들이 떨어지면서 얼굴에 부딪혀 부서졌다.

얼음처럼 굳어 버린 눈은 피부에 묻고 입김에 닿으면서 조금씩 바스러졌다. 그렇게 녹아 목을 타고 넘어가거나 옷 틈 사이로 스며든 눈들은 뜨겁게 뛰고 있는 가슴에서 녹아 진정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멈춰!”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그가 가장 그리워하던 여인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다리는 반대로 달리는 걸까?

문득 시야를 돌려보니 어디인지도 모를 숲속에 들어왔음을 느꼈다.

왜 도망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어딘지도 모르는 숲을 뚫고 도망치듯 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니 한심한 것이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귓가와 머리카락을 스치던 바람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질주하던 다리로 흘러가던 진기의 흐름이 줄어들고 두 발도 좀 더 깊이 하얀 눈길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한달음에 지나치는 나무들의 숫자도 줄어들고 보폭도 좁아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터벅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을 때, 멀리서 감지되었던 푸른 호흡의 끈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따라잡아 걸음을 멈춘 천서은이 진도건을 떨리는 호흡으로 바라보았다.

“하아, 하아…….”

왜인지 호흡이 가빴다.

목소리를 듣고 멈춘 것일까?

천서은도 막상 멈춰 세우고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등이 일었다.

얼마만의 만남인가?

무엇으로 갈라졌고 어떻게 고통의 시간을 보냈으며 그것들이 이 만남에 대해 어떤 가치로 설명할 수 있는지 몰랐다.

얼마나 기다렸던 만남인가?

전장에서의 혼잡함은 없었다. 수만의 시체, 수만의 군사들도 없었고 땀과 피에 절은 축축한 냄새도 없었다. 하얀 눈과 말라붙은 풀잎,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만이 조용하게 침묵을 지켜주고 있었다.

매정한 찬바람만이 둘 사이의 감정이 얼어붙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왜 날…… 보지 않아요?”

천서은의 물음에 진도건이 고개를 숙인 채 조금씩 돌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마침내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천서은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여전히 두 사람의 거리는 다소간 떨어져 있었지만, 야율재의 시체를 사이에 두고 보았을 때보다는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렇기에 천서은의 눈에 진도건의 외형은 그녀가 기억하던 모습과 같으면서도 또 매우 달랐다.

붉게 변해 버린 머리카락도 물론이지만, 눈동자는 막 살갗을 베어 뽑아낸 피처럼 영롱하면서도 짙은 적안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막 야율재와 치열하게 사투를 벌인 다음이라 그의 눈가에 섰던 핏발도 희미하게 남아 있어서 보기에 섬뜩한 데가 있었다.

그것들만 뺀다면, 몸과 얼굴의 흉터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녀가 막 사랑을 시작했던 그때 그 모습과 같았다.

“……미안합니다.”

진도건이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아!’

자신의 호위무사였을 때처럼 존대로 사과하는 말투, 시선을 내릴 때 비로소 드러나는 감정의 온기가 느껴졌다.

비로소 그녀의 마음속에 불안하게 남았던 믿음이라는 것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뭐가 미안해요?”

진도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입에 꺼내는 것이 두려웠다. 자의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칼로 찌른 기억이 아직도 눈앞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뭐가 미안한데요?”

“……미안합니다.”

채근하는 천서은의 말에 그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날 찌른 게 미안한가요? 그래서 그래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말에 진도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감정의 무게에 짓눌려 들지 못했던 고개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니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눈가의 핏발도, 적안의 섬뜩함도 사라지고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있는 눈빛에 천서은의 눈망울도 따라 젖어 들어갔다. 그 감정의 전이에 이번엔 천서은의 시선을 돌렸다. 두 손은 꾹 주먹을 쥐는데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파르르 떨기도 했다.

“미안하다는 말 말고 설명해 봐요. 날 왜 찔렀는지.”

다시 바라보며 말하는데 목소리까지 떨려 나왔다.

그녀도 그때의 사고가 그의 진심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사고의 후유증은 뼈저리게 남았고 이를 해소할 새도 없이 긴 시간을 단절되어 살아왔었다. 이것을 풀어내려면 최소한 그의 목소리로,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었다.

“그땐… 내가, 내가 아니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거뿐이에요?”

“……천 방주님과 싸워 상처를 주었습니다.”

“아버지와 싸운 건 진도건, 당신 자신이었나요?”

“그렇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제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었던 건 저의 나약함 때문이니 ……제 불찰입니다.”

“죽을 위기는 당신이 겪었잖아요.”

“……차라리.”

진도건은 답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천서은은 진도건에게 적극적으로 해명할 기회를 줌으로써 마음의 짐을 덜길 바랐다.

자신도 그리고 그도.

그녀의 본래 시원스러운 성격과 당당한 태도가 이 사내의 눈빛에 남은 작은 감정 잔상을 느낌으로써 스스로 아픔도 감수하고 침착하게 물어볼 수 있던 것이었다.

반면 진도건은 자신이 가해자나 마찬가지였고 너무 괴로웠기에 그런 그녀의 의도를 가늠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추궁당하는 느낌이 들었고 대답을 하면 할수록 괴로움이 너무 커지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녀를 찌르고 그녀의 아버지와 사투를 벌인 자신의 행위를 무엇으로 해명할 수 있단 말인가? 신체의 지배권을 뺏겼다 한들 그것의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 것인데 어찌 자신을 죽이려 했던 천무경을 탓할 수 있단 말인가?

진도건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입을 떼는데 그 무거운 심정의 떨림의 입술과 목소리에 고스란히 실렸다.

“차라리… 천 방주님의 손에 죽고 싶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용서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방주님께도… 당신에게도…….”

붉게 충혈된 천서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진도건은 눈을 감은 채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제 칼이 본분을 잊고 방주와 공녀를 상하게 하였으니…… 설령 죽음이라 한들 모든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무겁게 읊조리듯 회한을 풀어놓는 진도건의 목소리에 천서은이 살짝 휘청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공녀와 호위무사의 관계.

호의에 기대어서 의지했다가 마침내 감정을 열어 짧은 시간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였다.

사랑의 시간은 짧았지만, 거기까지 이르게 된 지난 시간이 전혀 가볍지 않았기에 인연의 고리는 더욱 단단하게 연결되었다. 그러나 헤어짐과 고난의 시간 그리고 최악으로 상황으로 갈라진 인연의 아픔을 바라보는 서로의 시각은 이렇게나 달랐다.

우월한 신분과 위치에서 격려하며 감정을 주도했던 여자.

호위무사의 책임과 신분의 차이로 인해 소극적이었던 남자.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 재회에 대한 간절함의 끝에서 사랑하는 남자의 칼에 찔린 여자.

정신적 공황과 벗어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의지와 반하게 사랑하는 여자를 칼로 찌른 남자.

감정의 맺음은 짧았고 떨어진 시간은 길었다.

각자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아픔에 몸부림치는 사이, 서로의 고통을 헤아릴 상황이 되지 않으니 대화 속에서도 서로 바라는 것이 다른 것이었다.

스르릉.

천서은은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송문고검을 뽑았다.

떨리는 눈빛과 걸음으로 다가갔다. 검을 진도건의 목 바로 옆 어깨에 가져가는데 손에 힘도 들어가지 않아 검 끝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천천히 검날을 목에 가져가는데 진도건은 고개를 더욱 숙인 채 목을 내밀며 처우를 기다렸다.

해명을 원하는데 죽음을 기다린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기다림의 대가가 이런 것인가?

검날을 더욱 목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런데 그 움직임에 밀린 긴 머리카락이 검신에 말려가는데 마치 그녀의 행동을 말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힘없이 손안에서 놀던 검이 손에 힘이 완전히 빠지면서 땅에 떨어졌다.

푹!

검은 진도건의 어깨를 타고 굴러가 눈 속으로 쏙 파묻혔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진도건의 눈빛도 흔들렸다.

“……당신은 누구죠?”

어떤 의미의 물음인가?

“당신은 진도건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날 찌른 진도건은 당신이 맞나요?”

“…그렇습….”

“아니잖아요!”

눈가에 맺힌 작은 눈물이 더 모이면서 마침내 하얀 볼을 타고 또르르 떨어졌다.

“지금 당신은 누구죠? 날 찌른 사람이에요? 아니면 화산에서 날 지켜 준 사람이에요? 내게 검을 가르쳐 준 그 사람은 당신이 아닌가요? 위험한 놈들에게서 내 앞을 막아 주던 그때 그 사람은 어디 있죠? 숲에서 날 바라보며 입술을 맞춰 주던 그 진도건은 당신이 아니냐고요!”

가늘게 떨리면서 힘겹게 나오던 목소리가 종반에 가서는 속사포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애달픈 마음에 답답함이 더해져 감정이 울컥 폭발한 것이었다.

어느새 천서은의 두 볼은 눈물로 가득 젖어 있었다.

볼을 타고 턱에서 만나 떨어지는 눈물은 그녀의 발 앞에 떨어져 하얀 눈을 적셔 녹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발 앞을 멍하니 바라보던 진도건의 눈에도 들어와 감정의 파고를 일으켰다. 그리고 천서은은 마지막으로 마음을 쥐어짜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진도건은… 내게 입술을 맞춰 주던 그 사람밖에 없어요. ……돌아와요.”

“…하아……!”

아주 작게, 그러나 깊은 한숨이 진도건의 반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고통의 갈등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그리고 흐느끼는 울음소리와 떨어뜨린 눈물이 그의 머리카락을 적시기 시작하자 그 차가움에 정신을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을 후회하였고 무엇을 걱정하였는가?

오래된 인연은 길어지는 갈등과 반목에 결국 서로를 외면하는 길을 택하기도 하지만, 이제 막 불이 붙기 시작한 인연은 오해라는 것도 눈을 가린 한낱 장막일 뿐.

치워 버리면 그만인 일을 무엇이 두려워 손도 뻗지 못했는가?

용서도, 해명도 필요 없이 눈만 마주 보고 대화만 나누면 될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을 주고 조심스럽게 일어나는 그를 이끄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 천서은은 그가 좋아하고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던 여인으로 여기에 있었다. 다른 어떤 장벽도 그와 그녀 앞에 존재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녀린 어깨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부드럽게 허리와 목을 감싸 안으며 조심스럽게 당겼다.

“……고맙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잠긴 채로 가늘게 떨렸다.

그 목소리만으로 그녀는 진도건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서 있음을 깨달았다. 크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얼굴을 묻었다. 두 팔로 그의 넓은 등을 꼭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 위로 입술을 맞추었다. 그의 흘러내린 눈물은 머리카락을 적셔 서로의 감정을 교환했다.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이제 왔어요?”

서로 감싸 안은 채로 조심스럽게 떨어져 서로의 눈물 젖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도건의 눈동자에는 이전의 죄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진정 그녀를 사랑하던 사내의 그때 그 감정이 붉게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천서은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던 손을 풀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따스함은 그녀가 간절히 기다리던 것이었다. 그리고 화답하듯 진도건도 따뜻한 한 손으로 그녀의 볼을 감쌌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 조심스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끌리듯이 입술을 포개며 다시 헤어지기 싫은 사람처럼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긴 기다림 끝에서야 지펴진 사랑이 불길이 되어 강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차가운 겨울바람만이 그 열기를 간신히 달랠 뿐, 서로의 살결을 쓸어내리며 탐닉하는 애정의 향연을 멈출 수는 없었다.

하얗게 펼쳐진 눈밭에서 오직 두 사람의 주변만이 녹아내려 풀잎과 낙엽이 폭신함을 수줍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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