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 제21장. 혈마검귀(血魔劍鬼) (5)
야율재는 적발적안으로 변해 버린 모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곧 알게 될 거다, 라는 답변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 확실하게 인식한 진도건이 곧 혈마라는 진실이 있었다.
검선과 겨루었다고 느꼈던 그 조강선의 제자 진도건이 자신과 같은 마인이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야율재가 전신과 월륜대도에 광풍의 흑체를 두른 채 뛰어올라 덮쳤다.
쾅!
강력한 경력이 지면을 때리며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속을 뚫고 나오며 흑체로 보호받는 야율재의 옆구리를 노려보는 진도건의 적안이 더욱 짙게 빛났다.
슈악!
일순 바람결 사이가 미세하게 벌어지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광이 훑고 지나갔다. 이번엔 검 끝에 핏방울이 맺히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한 줌의 핏물이 흑체의 바람에 흩어지면서 옅은 혈무(血霧)를 뿜어냈다.
“큭!”
야율재가 침음성을 삼켰다. 곧장 뒤돌며 칼을 휘두르는 그의 눈앞에 재차 진도건의 검광이 터져 나왔다.
다섯 줄기의 검광이 야율재의 동작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흑체를 베고 지나갔다.
“크으…….”
속도와 방향, 각도 그리고 절묘한 순간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하면 어김없이 흑체의 광풍에 튕겨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베고 지나가는 것은 진도건이 두 눈으로 정확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대로 가면 진다…….’
두려운 마음이 야율재의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진도건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때, 전세는 이미 확연하게 기울고 있었다.
공포의 존재였던 흑풍대는 새롭게 합류한 500인의 무림고수들의 칼에 대부분이 죽어 나갔으며 우군에서 활약하던 흑풍대도 야율균은이 조태번에게 발목을 잡힘으로 인해서 이제는 300여 기를 밑도는 상황까지 오고야 말았다. 야율균은은 조태번뿐만 아니라 영은성, 최현걸에게까지 합공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허벅지를 영은성의 검에 찔리고 낙마하면서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전장의 열기는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 군사들은 군중이 되어서 후폭풍을 피해서 중앙을 넓게 비워 둔 채 둘러서서 침묵으로 진도건과 야율재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세가 기울었듯 태양도 어느덧 서쪽으로 기울어 점점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노을의 변화에 따라 휘날리는 진도건의 적발도 따뜻한 분위기로 느껴지게 했다.
진도건을 쫓아 미친 듯이 월륜대도를 휘두르고 있었지만, 피를 머금은 검광은 야율재의 흑체 전신을 베어내고 있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검격.
그 솜씨를 지켜보는 군사들이나 무림인들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두 눈에 힘을 가득 주고 지켜보던 청명은 감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칼 다루는 경지가 귀신들린 듯합니다.”
함께 지켜보던 주유현이 무거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쫓아갈 수 없을 정도의 검속이었다. 그저 황혼에 물든 하늘에 그려지는 검광을 통하여 ‘저렇게 베었구나’라고 인지할 뿐이었다.
특히 청명은 태극신공(太極神功)으로 정순한 내공을 쌓았기 때문에 마기를 감지하는 기감이 매우 뛰어났다. 진도건의 검을 다루는 모습과 더불어 그에게서 은근하게 흘러나오고 있는, 마치 피비린내 같은 마기의 냄새까지 합쳐져 더욱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진도건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천서은을 염려스럽게 보고 있었다.
점점 흑체를 뚫고 베이는 횟수가 많아지고 상처도 깊어지면서 야율재의 칼도 느려지기 시작했다.
동작이 눈에 띄게 느려지면서 진도건의 두 눈은 더욱 명료하게 빛났다.
슈슈슈슉!
뿜어져 나가듯 몰아치는 검광이 순식간에 흑체를 쓸고 지나가면서 다시 한번 짙은 혈무가 뿜어져 나왔다.
“크아아악!”
야율재가 괴성을 휘두르면서 칼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급작스럽게 진도건을 덮쳤다. 벨 거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마치 끌어안으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순순히 잡혀 줄 진도건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진도건은 가뿐하게 옆으로 선회하듯 돌아서 피했다. 그리고 의미 없이 움직이는 야율재의 오른팔을 노리고 검광이 뱀처럼 팔을 휘감듯 파고들었다.
“큭!”
검광이 야율재의 손등을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가면서 손아귀에 힘이 빠져나갔다. 칼날을 감싸던 흑풍이 사라지면서 월륜대도가 쿵! 하고 땅에 떨어졌다.
그 순간을 본 모두가 드디어 승부가 결정되었다고 생각했다.
야율재가 주춤하며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진도건이 야율재에게 가까이 거리를 좁히면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슈아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내공으로써 검풍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검광이 바람처럼 셀 수도 없이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측면으로 파고들다가 공중제비를 돌기도 하면서 뿌려낸 수십 개의 검광이 야율재의 흑체를 파고들며 온몸을 베어 내었다. 그렇게 뒤에서 다시 앞으로 옆구리를 베어 내는 마지막 검광이 끝으로 사라졌다.
“후우…….”
진도건은 아래로 검을 늘어뜨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섯 걸음에서 멈췄을 때 들고 있던 검 끝이 쨍! 하고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끝을 내기 위해 무리하게 베었기에 광풍의 압력에 짓이겨져 한계에 이른 것이었다.
푸확!
마침내 흑체마경의 상태가 터져 나가며 사방에 검은 바람을 흩뿌렸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혈무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면서 피투성이가 된 야율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투둑! 툭, 툭!
너덜너덜해진 흑갑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야율재의 몸에서 떨어졌다. 온몸엔 셀 수도 없이 많은 자상이 생겼고 거기서 피가 계속 흐르고 있으니 야율재도 부들거리면서 간신히 서 있는 형국이었다.
그런 야율재를 비스듬히 바라보던 천서은의 눈에 특이한 모습이 발견되었다. 너덜너덜한 옷가지 사이로 드러난 등의 척추 부분이 검었기 때문이었다. 물든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기가 짙게 흘러나오는 것이 기감으로 느끼기에 소름 끼치는 부분이 있었다.
“크크크…….”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는 그 소리마저도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부릅뜬 눈으로 진도건을 바라보는 야율재의 얼굴엔 분함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네놈의 목을 그때 베었어야 했는데…. 오늘 전투 처음에 만났기만 했어도 질 수가 없었는데……. 네 실력으로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맞아, 운이 좋았다.”
진도건은 순순히 인정했다.
혈마의 마성이 살아 있지 않았다면, 그것이 목숨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설 수도 없었을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3년 전에는 폭주하는 혈마가 되어 천무경에게 죽을 뻔했다. 조강선이 개입하고 제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살리는 헌신이 없었다면 이 전쟁에 참여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천운(天運).
모든 결과엔 원인이 뒤따른다지만, 하늘의 관심이 어찌 느껴지지 않겠는가?
야율재는 자신의 비아냥에도 인정하는 진도건을 보면서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제는 어디서도 칼이 부딪치거나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사위의 소란이 무겁게 가라앉아 그의 최후를 기다리는 듯했다.
“이 전장의 최강자는 바로 이 야율재이건만, 최후를 장식하는 것도 나란 말인가!”
야율재가 하늘을 보며 크게 한탄했다.
부들부들 떨면서 천천히 팔을 활짝 펼쳤다. 그리고 진도건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죽여라!”
야율재의 외침이 장내를 쩌렁쩌렁 울리며 메아리쳤다.
초원을 공포에 떨게 했던 맹장의 기개를 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다.
진도건은 손의 검을 들고 잠시 바라보았다. 검 끝이 한 뼘만큼 부러지긴 했지만, 뾰족하게 예기가 살아 있었다. 일부 검날에도 야율재의 피가 묻어 검게 굳어 있었다.
투명하게 빛나는 검신에 얼굴이 비쳤다.
붉은 머리카락, 붉은 눈썹, 붉은 눈동자 그리고 얼굴에 묻은 피.
자신의 것임에도 익숙한 듯 이질적이다.
죽이라는 말에 살의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데 검신에 비친 이 얼굴이 자신의 것인지 혈마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하게 정신의 중심을 붙잡고 있으니 자신을 믿을 뿐이었다.
다시 야율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눈을 감고 모든 것을 열어 둔 모습에서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음을 느꼈다.
저벅저벅…….
진도건은 천천히 야율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검을 들어 칼날을 그의 목에 데었다.
차가운 칼날의 느낌 때문인지 야율재의 감겼던 눈꺼풀이 천천히 뜨여졌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야율재의 등에서 검은 기운이 솟구치더니 진도건이 반응할 새도 없이 그의 머리를 감쌌다.
쨍!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손에서 검을 놓친 채 발버둥 쳤지만, 이내 야율재의 두 손에 붙잡혀 버렸다. 어느새 야율재의 머리도 검은 기운에 감싸져 있었으니, 마치 두 사람을 이어 놓은 듯했다.
“크으으윽-!”
고통스럽게 신음을 흘리는 진도건과 다르게 야율재의 입은 섬뜩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이 두 사람을 감싸고 도는데 그 광경이 몹시 기이하고 섬뜩했다.
“진도건!”
천서은이 놀라 소리쳤다. 그리고 서둘러 달려가는 그때.
키야아아악-!
마치 접근을 거부하는 듯한 기괴한 비명 같은 것이 야율재와 진도건을 중심으로 터져 나왔다.
악마후(惡魔吼).
그 울부짖음이 뇌리를 관통하면서 주변에 있던 모두 머리를 감싸며 고통스러워했다.
“끄아악-!”
여기저기서 터지는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자들도 속출했다. 무림인들도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 천서은도 예외는 아니었다. 간신히 진도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정도였지 그녀도 이 기괴한 현상을 버텨낼 수 없었다.
‘아, 안돼……! 또다시 잃을 수 없어!’
머릿속을 칼로 베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녀의 간절함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다른 한 손은 진도건을 향해 힘들게 뻗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3년 만에 다시 만날 사랑하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영영 떼어 놓으려는 하늘의 무정함에 원통했다.
어떻게 하면 그를 구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답이 나올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을 때였다.
십여 초간 지속하던 악마후가 일순 사라지며 고통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천서은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가운데 진도건과 야율재를 살피는 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커헉!”
거칠게 토해내는 신음.
그것은 비웃음을 머금던 야율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젠 고통스러운 듯 이를 악물면서 연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진도건도 표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제압당했던 두 팔이 덜덜 떨리는가 싶더니 야율재의 힘을 이겨내고 내리누른 끝에 오히려 역으로 팔을 붙잡았다.
꽈악!
강하게 움켜쥐는 악력에 야율재의 손이 풀렸다. 진도건의 손가락이 야율재의 두꺼운 근육까지 뚫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끄악!”
야율재가 그 고통 때문인지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두 사람의 머리를 감싸는 검은 기운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천서은의 시야에선 훤히 드러난 야율재의 검게 변해 있는 척추선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그것이 마기의 원천(原泉)인 듯 느껴졌다.
악다문 진도건의 머릿속에 자신의 음성이, 정확히는 혈마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마정을 삼켜라”
혈마의 음성을 듣자마자 진도건의 오른손이 움찔거렸다.
퍽!
진도건의 오른손이 야율재의 명치를 뚫어 버리며 그의 손가락이 야율재의 등마저 뚫고 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척추를 움켜쥐었다.
“끄어어……!”
새어 나오는 비명.
진도건의 오른손에 파천진기가 모이며 붉은 전류가 파직! 하고 튀어 올랐다.
콰득!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게 변한 등골이 진도건의 손에 부서지며 두 사람을 감싸던 검은 마기가 증발하듯 피어올랐다. 그러더니 갑자기 진도건의 머리 주변을 한 바퀴 맴돌고는 그의 콧속으로, 입속으로 그리고 눈으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마침내 절명한 야율재의 몸통이 무너지며 관통했던 진도건의 팔도 그의 피를 흠뻑 묻힌 채 빠져나왔다.
땅에 두 발을 딛고 선 채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진도건의 두 눈은 붉은 흉광(凶光)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들리는 음성.
“크크큭! 바로 이 맛이지!”
아주 작지만, 메아리치듯 울리는 혈마의 음성은 이내 사라졌다. 그러나 온몸에 섬뜩하고 끈적끈적한 마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과 함께 피의 갈증과 강력한 살의가 꿈틀거렸다.
명마의 마정을 집어삼킨 혈마가 내부에서 폭주한 것이었다.
다행인지 폭주하는 기운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천천히 두 손을 주먹 쥐어 보면서 정신이 육체에 제대로 머물고 있는지 확인까지 했다. 또다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잠깐의 불안감에 입술이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진도건은 반쯤 벌린 입을 꾹 다물고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천천히 호흡하면서 몸 상태를 점검하는 그의 눈앞에 쓰러진 야율재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구멍이 뚫린 듯한 야율재의 명치를 보면서 현실 인식을 다시 잡고 있었다.
“후우……!”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기를 맞이한 덕분에 승리에 취할 기분은 아니었다. 그저 그의 몸을 더럽히고 있는 이 피를 어서 깨끗하게 씻고 싶은 기분이었다.
저벅.
진도건은 한 걸음 걸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앞을 보았을 때 마침내 천서은과 마주 보게 되었다.
진도건은 멈칫하며 더 걷지 못했다.
천서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지난 참사의 잔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도건……!”
천서은의 청아한 음성으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땅에 늘어뜨린 손은 이미 파르르 떨고 있었다.
사랑, 그리움, 고통 그리고 원죄의 고통까지 일거에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휙!
진도건의 신형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군사들 머리 위를 날아 넘어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를 쫓아 몸을 돌리는 천서은의 얼굴엔 당혹스러움이 떠올라 있었다.
“……거기서.”
입술을 잘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퉁!
그녀의 신형이 백의를 휘날리며 진도건을 쫓아 날아올랐다. 염력으로 몸을 띄우며 암향표를 펼쳐 날아가는 진도건과 강력한 내공으로 경신술을 펼쳐 쫓아가는 천서은의 모습을 군사들이 멍하니 쳐다봤다. 두 사람은 이내 동쪽 숲속으로 사라졌으니 이 광경을 바라본 모두가 영문을 알 수 없어 했다.
연인의 복잡한 마음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 * * *
마침내 흑풍신마를 상대로 한 전쟁이 끝이 났다.
하늘을 붉게 물들인 황혼 아래에서 남양군이 마침내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전장의 초점이 야율재와 대결하였던 천서은과 진도건에게 맞춰진 시점에서 3천여 몽골족만이 간신히 살아남아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였다.
수장을 모두 잃은 흑풍대는 철저한 견제 속에서 모두 전장에 뼈를 묻었다.
수년간 초원의 유목민족들을 공포로 지배해왔던 흑풍대의 이름은 역사 속에도 기록되지 않은 채 철저히 함구 되어 잊힐 터였다.
야율균은은 생포되었다.
이 전장에서 그녀의 무용은 가히 대단했지만, 야율재가 그녀를 전장의 선봉에 세우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 첫 활약이나 마찬가지였다.
패배로 빛이 바랬을 뿐.
대장군 남양은 제장들에게 그녀의 처우를 물었다. 절반 정도는 침묵하고 절반 정도는 처형해야 한다고 했다.
침묵하는 쪽은 그녀가 야율재의 사촌 동생이자 야율신의 친동생이긴 했지만, 그동안 그들에게 전투에서 괴롭힌 주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절반은 당연히 야율가는 모두 척살해야 한다며 분개하는 쪽이었다.
결과적으로 야율균은은 생포된 상태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녀를 직접 생포한 조태번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영은성, 최현걸까지 가담한 3 대 1의 위태로운 싸움을 멈춘 것은 악마후가 터져 나왔을 때였다. 유일하게 야율균은만 약간의 고통만 느꼈을 뿐 멀쩡했는데 그녀는 그때를 노려 세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야율재를 지켜보는 걸 택했다. 그리고 야율재가 진도건의 손에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녀는 스스로 두 자루 만곡도를 손에서 놓았다.
조태번은 그녀가 더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조태상도 그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이 종결된 전장의 유일한 포로가 되었다.
그녀의 활약 덕에 300여 명 동료의 죽음을 안게 된 팽무양을 비롯한 천호대 사이에서 크게 불만이 일었다. 그러나 남양은 그녀의 처분을 조태상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대신 팽무양과 천호대에게 전사자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며 마음을 달랬다.
보르테는 승전의 기쁨보다 동족들의 죽음을 더욱 슬퍼했다. 그러나 남양군에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자신의 선택이었고 그 결과를 똑바로 봐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태번의 휘하에 등용되었다. 동족들에게 죄를 지었다는 생각과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겹치면서 결국엔 초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가를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야율재와 야율균은 그리고 흑풍대로 인한 피해는 막심했다. 3만여 군사가 다시 전사했고, 1만여 군사들이 부상에 신음했다. 남양과 조태상도 사흘간 이런 상황을 수습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포양진으로 1차 회군하기 시작했다.
전장의 구세주가 되었던 창천맹 500명의 무림인 중에 사망자는 34명이었다. 절정고수들로 이뤄진 집단임에도 전장에서 발휘되는 흑풍대의 무력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청명과 주유현은 사흘간 천서은과 진도건의 귀환을 기다렸으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팽무양과 향후 계획을 의논한 끝에 군에 남아서 부상자들의 수습을 최대한 돕고 난 이후에 회맹(回盟)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