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제21장. 혈마검귀(血魔劍鬼) (4)
잊을 수 없는 진도건의 얼굴을 3년 만에 다시 본 천서은은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리움을 뒤덮는 반가움이 물 밀려오듯 막을 수 없이 다가왔다. 다음엔 아직도 흉터로 남아 있는 복부의 관통상이 욱신거리며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더 아팠던 것은 칼로 찌른 것이 아니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던 붉은 눈빛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본 것만 같은 그때의 그 얼굴과 눈빛은 그녀의 뇌리에 각인되어 지금도 아픔으로 남아 있었다.
인고의 시간을 보내면서 잘 버텼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애틋함이 남아 있다면 그녀의 마음이 가볍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런 그녀의 마음을 그는 알까?
분명 오면서 그녀를 보았을 텐데도 어째선지 시선 한번 던지지 않았다. 그리움과 섭섭함이 공존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때, 야율재는 반대편에서 그를 적개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미치겠군.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스릉!
진도건이 허리에서 청강검을 뽑았다.
“네겐 아쉽게 됐군.”
“크크……, 그 머리 꼴은 뭐냐? 눈은 또 뭐고.”
“곧 알게 될 거야.”
저벅저벅.
앞으로 걷는 진도건의 주위로 푸르스름한 기운이 다시금 일렁였다.
그런 그를 잔뜩 경계하던 야율재는 문득 드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개자식, 일부러 내가 힘이 빠지길 기다렸구나.’
진도건의 검속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강기의 칼바람으로 온몸을 덮거나 사위를 압박하는 기공술이 아니라면 그로서는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의미에서 최대 적수라고 할 수 있었다.
우와와와!
문득 귀로 함성이 들려옴을 인지했다.
진도건을 경계하면서 빠르게 눈을 돌려 전장을 살펴보았다. 남양군의 사기가 매우 높아 보였다. 가까이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흑풍대도 어느덧 기세가 꺾이며 수가 많이 줄어 있었다. 이제는 사방이 그야말로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오로지 홀로 전장 한가운데 서 있는 형국처럼 느껴졌다.
어릴 적 한족의 옛 고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당송(唐宋)이 건국되기 더 이전, 중원에 세워진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의 최대 적수였던 초(楚)나라의 항우(項羽) 이야기였다.
사면초가(四面楚歌).
적군에 포위되어 생사의 기로에 놓인 항우의 심정처럼 들려오는 함성들이 그의 귀엔 흑풍대의 구호처럼 들렸다.
흑풍이 하늘을 덮으리라!
흑풍이 하늘을 덮으리라!
“큭큭큭!”
야율재가 웃음을 터뜨렸다.
천서은을 상대하기 위해 엄청난 내공을 사용했다. 이제 마지막 일격만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상황이 되어버렸으니 그것을 수행하여 소비해 버린 기력이 아깝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로 최대의 난적이 나타났다. 기력이 충분했다면 이전 싸움의 결과를 만들어 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도의 여력이 남지 않았다.
휘이이잉-!
급작스럽게 불어닥치는 바람에 마주 보는 두 사람과 지켜보는 천서은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마치 그 바람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야율재는 내공을 끌어올리며 마기를 연신 뿜어냈다. 온몸을 감아 휘도는 흑체마경을 다시 한번 꺼내며 거기에 쓴맛을 본 진도건을 상대로 위세를 올렸다.
야율재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핫! 이제 하늘이 나의 운을 시험하려 드는구나!”
“저승문이 안 보이더냐?”
“크핫! 건방지긴!”
퉁!
야율재와 지면을 박차며 진도건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 호흡도 이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광풍처럼 월륜대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카카카캉!
진도건이 검강을 형성하여 다시 맞서기 시작하면서 쇳소리가 귀가 찢어지도록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야율재의 칼도 만만치 않게 빨랐기 때문에 순식간에 십여 합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진도건의 표정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이건 강력하군……!’
나선으로 맹렬하게 휘도는 흑풍도강의 회전력도 문제지만, 그것에는 미세한 결을 갖고 있어 자칫 칼날이 말려들게 되면 더 큰 충격을 주는 구조였다.
야율재가 아무리 기력을 소비하였다고 한들 진도건도 그에게 입은 내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끝까지 버텨서는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를 대적하는 처지에서 야율재는 첫 합부터 몰아쳐서 승부를 볼 작정이었다.
공력을 더욱 끌어올리며 진도건의 주변에 칼바람을 형성하여 덮쳤다.
스스스스…….
광무(光霧). 야율재와 도검을 맞부딪침과 동시에 더 빠른 속도로 검광을 뿌려내며 칼바람들을 쳐 냈다. 범인보다 더 빠른 시공간을 감지하는 초절정고수들의 시선에서도 잔상만 남기는 신체의 움직임과 팔, 검의 흔들림이었다. 마치 사방에 검광을 펼쳐 내니 안개를 낀 것처럼 시야마저 흐릿하게 만들었다.
‘더 빠르다……!’
‘빨라!’
직접 맞상대하는 야율재의 눈에서도, 호흡을 고르며 지켜보는 천서은의 눈에서도 진도건의 검은 빛살마저 쫓아갈 것처럼 빨랐다.
지금의 천서은에게 3년 전의 진도건의 검을 받아 보라고 한다면 이젠 자신감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검을 받아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 이미 쾌검의 극한에 이르렀고 자신도 비로소 거기에 거의 근접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더 위의 길을 보여 주고 있는 셈이었다.
진도건의 검은 언제나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천무방의 다양한 무공을 섭렵하면서도 검을 놓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진도건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3년의 이별이라는 시간과 겹치면서 싱숭생숭한 복잡한 마음을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천서은의 마음과는 반대로 야율재는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실력을 숨긴 것인가? 그럴 여유가 없었을 텐데!’
당장 이 쾌검이 흑체마경을 뚫을 수 있으리라 보진 않았지만, 만약 내공이 다하여 다 내려놓고 칼만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면 이길 자신이 없었다.
‘……내가… 자신이 없어?’
천마신교의 교세조차 크게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권위와 무력을 이용해 얼마 전 황제의 자리에 올라보겠다는 야심을 품은 그였다.
자신의 패배를 머릿속에 그렸다는 사실 자체로 큰 충격이었다.
카카캉!
교차하는 도검과 거기에 담긴 기운들.
야율재의 심리가 흔들리면서 사방을 압박하던 칼바람들이 일순 사라졌다. 그 잠깐의 틈바구니에서 진도건은 판단과 결심을 모두 마칠 만큼의 여유를 얻었다.
검은 바람의 장막 속에 숨은 야율재의 시선에서 진도건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진도건과 야율재 두 사람 사이의 공간.
월륜대도와 청강검이 교차하는 잔상에 허공에 무수히 수놓아지고 푸르고 검은 강기와 충돌 때마다 터져 나오는 충격파는 시선을 난잡하게 흐린다.
훈련과 경험이 녹아들어 발달한 동체 시력이 그 움직임들을 쫓을 수 있다.
야수와 같은 심장으로 본능을 발휘해야 하며, 벼랑 끝에서 활로를 뚫어낼 판단력을 매 순간 유지해야 한다.
그런 칼날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난류 속에서 야율재의 시선에 번뜩이는 섬광이 잡힌다.
핏!
어깨를 타고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
강기의 충격으로 느껴지는 통증이 아닌 자상에 의한 통증이었다.
다시 눈앞에서 섬광이 느껴졌고 허벅지와 허리를 타고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자상에 의한 통증.
야율재는 믿을 수가 없었다.
흑풍명천마공의 흑체마경은 공방일체 무적의 강기공이었다. 그런데 몸에 상처가 새겨지고 있었다. 상처가 얕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흑체마경이 뚫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핏!
다시 한번 섬광이 번뜩였다. 이번엔 그 광휘가 좀 더 분명하다고 느꼈을 때 귀가 무척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목과 어깨를 타고 축축함이 느껴졌다.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귀가 반으로 갈라져 아랫부분이 간신히 붙어 있는 채로 불편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이 들어오고 있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지만, 어김없이 빛살같이 날아든 검광은 바람의 결을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다.
점점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땀보다 더 끈적한 느낌이 점점 더 늘어나 신체 어느 곳을 특정하기 힘들 정도가 되고 있었다.
야율재의 칼이 다소 느려지면서 진도건에게 여유가 생겼다. 청강검이 빛 꼬리를 남기며 흑체의 광풍 사이로 스며들었다가 붉은 핏물을 머금고 빠져나오길 반복했다.
핏!
다시금 스치고 지나가는 검광.
등골이 서늘케 하는 것은 스치고 지나간 검광이 다름 아닌 목이었기 때문.
‘귀신에 홀린 것인가……!’
야율재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씹었는지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통증과 함께 뜨거운 핏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진도건의 검이 점점 깊이 들어오면서 상처가 커짐에도 불구하고 야율재는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마치 흑체의 폭풍 같은 칼바람의 뒤에 숨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신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신세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크아아아!”
갑자기 야율재가 칼을 휘두르는 것도 멈추고 울부짖었다. 그 틈을 타 진도건의 손에서 시작된 검광 수십 개가 흑체를 둘러싸는 순간.
콰아아아아!
흑체의 칼바람이 더욱 광폭하게 몰아치더니 폭주하여 하늘로 솟구쳤다. 그와 함께 흑체에 막 스며들었던 검광이 모조리 튕겨 나갔다. 검을 회수한 진도건의 손을 타고 엄청난 충격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 충격과 별개로 진도건은 진지한 눈으로 검은 광풍의 기세를 보고 있었다. 이제 더는 흑체 상태가 아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폭풍으로 돌변해 있었다.
‘저만한 마기를 뿜어낼 만큼의 내공이 남아 있었던가?’
정면에서 마주한 진도건도, 직접 상대하며 그 기력을 소모하게 했던 천서은도 같은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진도건은 그 생각에 이어 직감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혈마로서의 폭주.
같은 일이 야율재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명마(冥魔)’
이른바 마성의 폭주.
하지만, 진도건과 다르게 야율재는 이미 완성된 마인. 마성이 곧 그의 인성이었으니 육신의 지배력 따위 논할 필요 없이 그 폭주하는 힘을 기꺼이 수용하면 그만이었다.
그 뒤를 생각할 이유를 이 자리에서 찾을 여유는 없었다.
흑풍명천마공 흑풍명왕수(黑風冥王手).
휘몰아치던 광풍이 일순 야율재에게 뭉쳐졌다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퍼져 나간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진도건을 움켜쥐듯 휘감아 돌면서 파고들었다.
콰콰콰콱!
혼돈의 광풍.
제멋대로 휘몰아쳐 서로 거칠게 교차하니 빈틈조차 없고 압력과 파괴력은 증폭시켰다.
칼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흑풍명왕의 칼바람 속에서 찢어발기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 응축되어가는 광풍에 붙잡혀 버렸으니 끔찍한 참상을 예고하는 듯했다.
“진도건!”
천서은이 놀라 소리쳤다.
두 사람이 싸우는 동안 호흡을 골라 진기를 회복시킨 그녀가 다시금 벽력의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내었다. 저 파괴적이고 패도적인 마기의 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은 있었으나 개입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곧 닥칠 것만 같이 불안했다.
그때였다.
응축하던 검은빛 광풍이 갑자기 불쑥 확장되었다. 끊임없이 중심으로 수렴하려는 흑풍의 결이 점점 벌어지면서 그 틈바구니로 붉은 광휘가 뿜어져 나왔다.
키기기긱-!
고막을 찌르는 듯한 마찰음 끝에 섬뜩함을 느끼는 순간, 흑풍명왕수의 기운들이 산산이 찢어지며 사방으로 몰아쳤다.
파아아아앙-!
“크읏-!”
천서은이 신음과 함께 갑작스러운 후폭풍에 인상을 찌푸리며 시야를 닫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녀의 시야 속에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리는 야율재의 모습과 함께 아지랑이 가라앉듯 넘실거리는 붉은 기운과 그 속을 타고 흐르는 붉은 전류를 뿜어내고 있는 진도건의 모습이 보였다.
파천혈마진체(破天血魔眞體).
파천신공의 진기가 온전히 혈마의 색을 두른 채 진도건의 몸속 세포 하나하나까지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야율재는 진도건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붉은 눈동자도 섬뜩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의 눈 주변으로 붉게 선 핏발들이 심상치 않았다.
‘혀, 혈마…….’
명마의 마성을 수용하면서 단번에 진도건의 마성을 읽어 낸다. 그리고 구주마종의 첫 번째 비어 있는 자리, 혈마종의 권좌에 앉은 진도건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붉은 기운은 이내 진도건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그도 순간적으로 내공을 폭발시켜서 힘을 발휘한 것이었기에 내공에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 섬뜩하고 끈적한 기분은 여전히 남아서 야율재로 하여금 심장을 옥죄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무엇보다 저 붉은 눈과 주변의 핏대는 쳐다보는 야율재의 시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크아아아! 난 널 인정할 수 없다!”
야율재의 분노하며 소리쳤다.
‘진원’의 마기까지 건드려 끌어올리니 다시금 그의 온몸을 검은 바람으로 뒤덮었다.
자신에겐 아직도 이만한 강기를 구사할 수 있을 만큼의 여력이 있다고 토로하는 듯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진도건은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청강검의 칼날을 타고 흘렀다.
피를 갈구하는 듯한 그의 적안에서 마침내 이 싸움을 끝내야 하겠다는 결의가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