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제21장. 혈마검귀(血魔劍鬼) (2)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베고 또 베고…… 그 반복이 무한하게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어쩌면 의미 없을지도 모르는 시간 속에서 진도건도 정신적으로 지쳐갔지만, 똑같은 얼굴을 한 혈마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고 눈동자의 붉은색은 흰자위마저 덮어 섬뜩한 느낌마저 자아냈다.
촤악!
같은 상황의 반복.
베자마자 바로 전진하여 다시 나타나는 혈마의 목을 쳐 버렸다.
촥!
자기 자신을 베는 것이나 다르지 않았을 텐데 오히려 진도건의 검엔 더는 망설임이라는 게 남지 않았고 오히려 혈마가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며 소멸하고 있었다.
진도건도 어느 정도 체력의 부침을 느꼈다. 다만 정확히 이야기하면 무의식의 공간 속이다 보니 정신적인 피로감이 높아지며 그것이 체력의 부침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침착함을 유지하고 생각의 환기를 거듭하면 빠르게 회복하기도 했다.
또 정신적 피로감이 높아지면서 영감도 따라 높아져 점점 혈마의 위치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혈마 스스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진도건의 존재 인식으로 인해 마치 강제로 소환당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진도건이 검을 휘두르기 좋은 위치에 강제로 나타나게 된 혈마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그것이었다.
촤악!
수직으로 일도양단.
말 한마디 꺼내지도 못하고 둘로 쪼개지며 흩어지는 얼굴에는 답답함이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진도건은 결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의식을 집중하며 그의 앞에 혈마를 불러냈다.
다시금 나타나는 혈마가 검을 엉거주춤 내밀면서 나타났다. 그것을 피하며 진도건의 휘두른 검광이 어깨부터 허리까지 가르고 지나갔다.
눈앞에 있던 인형은 사라졌지만, 이번엔 진도건은 다시 혈마를 불러내지 않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지쳐 있는 얼굴로 검과 손바닥을 같이 내밀고 있는 모습에서 정말 그 광폭한 혈마가 맞는지 전의를 잃어버려 보였다.
“큭…… 미치겠군. 어떻게 자기 자신을 망설이지도 않고 벨 수가 있는 거냐?”
“네가 내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나는 이렇게 오롯이 서 있는데 어떻게 네가 나라고 볼 수 있는 거지? 할 말이 그런 것들뿐이라면 더 들어줄 생각 없다.”
한 발자국 전진하며 검을 당겨들 때, 혈마가 두 걸음 더 물러나며 손사래를 쳤다.
“그만!”
혈마의 외침에 진도건이 나가다 말고 멈추었다.
수백 번의 칼부림은 오로지 진도건의 일방적인 처단이었다. 진도건의 인식이 혈마의 마성을 명확하게 감지하고 있는 한 역전되는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큭큭! ……입장이 이렇게 바뀔 줄이야. 너의 기분도 이 정도였나?”
“그때의 내 기분은 고작 지금 너의 기분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런가? 킥!”
혈마의 손에서 검이 사라졌다.
다툴 의도가 없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었다.
혈마가 진도건을 향해서 손을 펼쳤다.
“말해라. 날 수용(受容)하겠다고. 내 힘을 주겠다.”
“네 힘은 필요 없다.”
진도건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혈마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안하지만, 너의 말은 틀렸다. 네가 나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여길 벗어날 수 없다.”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네가 수용하지 않고 나를 벗어날 방법은 죽음밖에 없다.”
“이해할 수 없군.”
“이해할 필요 없다. 여기가 너의 무의식이라고 해도 내가 끌어들인 공간이고,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나를 죽일 수는 없다. 네가 나를 수용해도 내 의식이 살아나 널 공격할 수는 없다. 나라는 마성은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네 말을 어찌 믿지?”
“믿으라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라는 거다. 큭큭! 그리고 지금 새로운 놈이 널 죽이려고 하는데 이젠 눈을 떠야 하지 않겠느냐?”
“악질적이군.”
혈마가 손을 내민 채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내 손을 잡고 수용하겠다고 말해라. 너에게 이 이상의 선택권은 없다.”
진도건은 가만히 혈마의 눈을 바라보았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에서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얼굴의 표정도 이전의 조소하는 기색이나 답답함을 표출하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혈마를 믿을 수 있는가?
그렇게 반문했을 때, 혈마의 말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환기한다.
그저 자기 자신을 믿을 뿐이었다.
부동심(不動心).
진도건이 혈마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손에 있던 장검도 사라졌다. 혈마의 손이 명치 앞에 이를 때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때 혈마가 손을 살짝 빼었다.
진도건이 의문스러운 눈으로 혈마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의 입이 열렸다.
“내가 떠들 수 있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니 네게 충고 하나 하지. 너의 적은 천마신교다. 그렇지?”
“그렇겠지.”
“킥킥! 그렇다면 이번 명마(冥魔), ……흑풍신마와의 대결처럼 또 패배한다면, 이렇게 나의 힘으로 구사일생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라. 특히 마인들과 싸우다 진다면 너는 죽어도 죽지 못하는 신세가 될 것이야.”
혈마는 그 말을 끝으로 진도건의 팔을 맞잡았다.
진도건은 그런 혈마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뗐다.
“나는 혈마, 너를 수용한다.”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은 몽롱한 기분과 두통을 함께 가져왔다. 한 손으로 머리를 만지며 인상을 찌푸리는 진도건의 뇌리에는 혈마가 남긴 마지막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마기에 인성(人性) 같은 것이 발현되어 생긴 자아(自我)로써 혈마라는 존재를 받아들여 본다 해도 그의 말에 대해 진실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마도 온전히 하나의 영혼으로 남게 되었으니 기억하고 다스려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월신마와의 개인적인 악연과 스승의 죽음으로 연결된 흑풍신마와의 악연까지.
물론 후자는 이제 악연의 끈을 잘라내야 할 일만 남았지만, 적어도 마교를 대적해야 하는 일이 단순한 악연을 넘어 숙명처럼 느껴지는 부분은 있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진정한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고민이 머릿속에 차츰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진도건의 눈이 단을 바라보았다.
그의 염력은 한층 더 강해져서 단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공중에 붕 뜬 채 속박되어 있었다.
“너흰 뭐지?”
“큭……, 뭐?”
진도건이 상의 시체를 흘겨보며 다시 단을 보았다. 단의 시선도 진도건의 눈길을 따라갔다.
“나와 야율재의 싸움을 모두 지켜봤잖아. 숨어서 말이야.”
단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진도건이 자신을 심문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목숨이 아까운 것은 아니었다. 무영각에서 구주마종의 수장들에게 그림자를 둘이나 붙인 이유는 한 사람이 화를 피하지 못했을 때, 다른 한 사람이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생환하여 다음 단계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생존을 위해 적당히 진도건의 질문에 대답하여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가 주저하고 있는 이유는 상이 어떤 경위에서 죽었는지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보통 심문이라면 고문도 동반되기 마련인데 이렇게 알 수 없는 힘으로 붙잡혀 버렸다면 상의 저런 허무한 죽음도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단이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진도건도 지난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일월신마에게도 너희 같은 자가 붙어 있었지.”
일월신마에게 패배하고 혼절했을 때, 진도건은 지하에서 사지를 묶인 채로 처음 깨어났다. 그러나 혈마와 두 차례 무의식의 공간에서 싸워온 탓에 혼절한 상황에서 자신을 거기까지 옮긴 것이 일월신마 근처를 맴도는 자들임을 알게 된 것이다.
“국이라고 했던가?”
일월신마와 국의 대화가 혼절한 진도건의 옆에서 이뤄진 탓에 마침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단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어떻게 그걸 알고…….”
“너도 외자 이름인가? 저놈도?”
“……나는 단, 내 동료는 상이다.”
“흐음.”
진도건은 뒤돌아 걸어가 흩어진 바위들 가운데 무릎 높이의 바위 위에 앉았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단을 바라보았다.
“은잠에 특화되어 있고 일월신마와 흑풍신마를 감시한다. 지시도 주고받고.”
“지시는…… 주고받지 않는다. 일월신마와 그들의 관계가 특이할 뿐이다.”
“재밌군. 동료를 감시한다니. 교주의 뜻인가 보지?”
“모두가 일파의 수장들이었으니 아무리 마도로 뜻이 모여 있다고 한들 그들의 동력이 힘에 근거한다면 반란에 대비한 감시가 필요한 것이다.”
진도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술술 말해 주는군.”
“최소한 거짓은 없다. 너에게 알려 주고 이간계를 써도 그들이 정말 반란할 이유는 없으니까.”
“얘기하지 않은 진의가 있는 것 같군.”
단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진도건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뭐, 좋아. 그렇다면 다른 질문을 하지. 여길 찾아온 이유는? 내 생사를 확인하기 위함인가?”
“……그렇다.”
“흐음.”
진도건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는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언가 고민하는 눈치를 보여주고 있으니 되려 지켜보는 단의 마음만 더 불안해졌다.
머리를 쓰다듬던 팔을 내리고 다시 단을 올려다보았다.
“진도건을 찾은 것이 아니라 혈마를 찾은 것이로군.”
“……무슨 소리냐?”
“넌 날 보자마자 혈마라고 불렀다. 아직 내 몰골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 붉은 머리카락에 아마 눈동자 색도 붉게 변했겠지. 원래는 검은색이 더 짙었는데 말이야. 이렇지 않았다면 네가 날 그렇게 부를 리가 없지.”
“흥.”
“또 하나. 넌 내게서 뭔가를 찾으려고 했어. 내가 일월신마의 손에 의해 화산에서 이미 한 번 혈마에게 지배당했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나?”
“그럴듯한 추측이군.”
단은 내심 진도건의 추측에 놀라워하면서도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런 그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도건은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위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마성. 너희는 그것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수단이 있구나.”
이번엔 단의 눈빛이 좀 더 크게 흔들렸다. 그의 입술이 찌부러질 정도로 꽉 다물어졌다. 대답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었으니 진도건은 그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난 궁금한 게 많아. 지금의 모습도 내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네가 더 할 말이 없다면 내가 널 살려 보내 줄 이유가 없지.”
“……살려 보내 준다고?”
“좀 더 얘기해 봐. 너흰 어떤 역할을 하고 있고, 왜 신마들을 감시하고 있으며, 나에게서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단은 잠시 고민했다.
생환으로써 진도건에 대한 정보로 천마신교에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정보의 유출은 배반 행위나 다를 바 없었기에 역시 척결 대상이 될 게 뻔했다. 하지만, 발상을 전환해 본다면 치명적인 작용을 할 수 있는 정보를 제외하고 유출한다면 참작의 여지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
진도건의 추측이 예리함을 고려했을 때, 그에게 전할 정보 속에서 중요한 핵심을 구조적으로 어떻게 교묘히 가릴 수 있는지였다.
“나는…… 교주 직속의 무영각 소속이다.”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신마들에 대한 건은 아까 말한 감시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그다음이 그들에게 벌어지는 정보를 취합하여 교주께 전달하는 것이다. 마도대의를 위한 역할 수행을 잘하고 있는지 말이다. ……이게 끝이다.”
“날 왜 확인하러 왔지?”
“홍천환은 단순한 영약이 아니라 천혼제정대진을 펼쳐서 그 안팎의 온갖 사념과 원념을 끌어모아 정제할 수 있는 비방이 깃든 영약이다. 그것을 복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일월신마의 마기에 의해 폭주하였다면 우리가 마공으로 마인들을 만든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 시체라면 당연히 연구할 가치가 있지.”
“흐음……. 이상하게 핵심을 벗어나는군. 내가 조금 전에 얘기한 ‘마성’에 대해서 아는 걸 얘기해 봐라. 일월신마나 흑풍신마에게도 있는 그것 말이야.”
단은 적잖이 당황했다.
진도건은 그를 향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무영각이 여덟 신마를 감시하는 이유의 핵심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달리 핵심이 있을까? …변화를 관찰하고 부작용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야말로 마인들이 주화입마 없이 강해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여덟 신마나 혈마가 되었던 너야말로 선구자가 될 수 있는 존재들이니 관찰하는 것이다.”
단은 천천히 설명하면서 진도건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듣기에 논리적인 말이었지만, 진도건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의 무의식 공간 속에서 혈마라는 이질적인 자아와 마주하는 경험은 결단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주화입마 같은 것들도 결국엔 자기 본성에 일어나는 문제를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 어떠한 자성체를 무의식 속에서 마주하여 대화하는 상황을 떠올려 본다면 단의 설명은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내게 일부러 설명하지 않거나, 아니면 깊이 있게 알지 못하고 있거나.’
더 물어봐야 나올 것이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더 묻지. 혈마도 너희 신마들 중 하나로 만들려고 했었나?”
“……혈마에겐 신마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독보적인 호칭으로서 그저 혈마라고 부를 뿐. 대마의께서 연단에 성공하신 홍천환의 가치와 그분 손에 만들어졌던 전대 혈마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다. 네가 본교에 귀의한다면 교주이신 천마(天魔)의 옆에 설 영광을 얻을 수 있다.”
“천마라. 교주를 그렇게 부르나 보지?”
“이 땅의 모든 마도가 교주님의 선대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혈마도 마찬가지. 그러니 당연히 본교의 교주라면 천마라고 존칭하여 불러야 마땅하다.”
“이름이 궁금하군.”
“……천마의 존함은 단지운이다.”
“그는 일월신마보다 강한가?”
“당연한 소릴!”
진도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바위 위에서 엉덩이를 떼며 일어났다. 그리고 단에게 걸어갔다.
잠시 눈을 마주치며 단의 얼굴을 바라보던 진도건은 허리를 숙이더니 단이 떨어뜨린 단검을 들고 다시 일어났다. 그것을 본 단의 두 눈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살려 보내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고민해 보겠다는 말이었지 확답하진 않았다.”
푹!
“끄윽……!”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진도건은 단의 단검으로 심장에 박아넣었다. 단이 진도건을 죽이려 했던 방법 그대로 돌려준 것이었다. 그를 속박하던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쓰러졌다. 두 손이 더듬더듬 가슴의 단검에 닿았으나 이내 힘없이 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후우…….”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더욱 예민해진 감각은 바람을 통해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소간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야율재의 목숨을 반드시 끝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진도건은 충분한 확신이 있었다.
피부로 전해져 오는 마기의 감각이 있었다.
그것은 피를 갈구하고 마(魔)를 갈구하는 힘이었다.
혈마라는 자아가 힘을 거의 잃어버린 상황이다 보니 그 굶주림과 갈증이 진도건에게 전달된 것만 같았다.
‘이것이라면…….’
진도건은 단과 상의 시체를 뒤로 한 채 자신을 가둬 두고 있었던 바위 더미들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그가 손을 뻗자 그 바위들이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바닥을 하늘로 하여 천천히 올리자 잔뜩 쌓여 있던 바위들이 모두 공중에 떠올랐다.
터벅터벅…….
진도건은 그 아래 한가운데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쿵! 쿵! 쿵……!
허공에 떠오른 바위들 가운데 가장 큰 것들이 진도건의 주변을 감싸며 내려왔다. 그리고 긴 바위들 몇 개가 겹치면서 위를 덮기 시작하니, 마치 진도건을 중심으로 단단한 공간을 만들어졌다.
쿠구구궁!
이윽고 나머지 다른 바위들이 일제히 떨어지며 그 위를 덮었다. 그런데도 진도건이 머무는 공간은 안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진도건은 눈을 감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혈마를 수용하면서 진기의 성질이 바뀌고 있었다. 본래는 살의와 같은 공격성 등의 성격에만 끼쳤던 영향이 진기에까지 미치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파천신공에 따라 운기를 하여도 겁화멸마하여 자멸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부작용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는 정말로 혈마가 곧 진도건이요, 홍천환의 잔존한 옅은 마기는 온전히 그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파천신공으로 운기하여 발현되는 기운은 극의에 가까워질수록 푸른 벽력의 기운을 닮아간다. 그런데 하단전에서 용솟음치고 있는 그 거대한 호수에 붉은 핏방울 하나가 똑! 하고 떨어졌다.
진도건은 어쩐지 그 푸른 호수가 점점 붉게 변해 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