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제21장. 혈마검귀(血魔劍鬼) (1)
뚜둑!
움켜쥔 손아귀 안에서 목이 단번에 꺾이며 눈빛에서 생기가 사라지는 것이 두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적이잖아, 그냥 죽여.”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혼탁한 목소리.
사라진 줄만 알았던 혈마의 흔적.
천무경의 파괴적인 진기를 버티지 못하고 소멸단계에 이르자 ‘마성(魔性)’을 죽이고 전신세맥으로 흩어져 잠들어 있던 혈마가 죽음의 위기에서 다시 깨어났다.
공교로운 것은 그것을 깨운 것이 바로 야율재의 흑풍명천마공의 마기였다.
홍천환은 수십 년간의 자연기와 사념이 응축되었다가 일월신마의 조작으로 폭주하였다. 그것은 하나의 마성을 갖추게 된 것이었고 그것이 진도건의 육신에 지배력을 행사하게 된 이유였다.
그 마성이 야율재의 마기에 영향을 받아 깨어나고 침투된 마기까지 잡아먹으면서 생명력이 꺼지는 것을 막은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진도건의 육신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때에 진도건도 무의식 속에서 깨어났다.
3년 전의 일로 익숙한, 그러나 끈적끈적한 이질적인 존재감을 향하여.
‘썩 물러나라!’
공허 속에서의 조용한 일갈.
목뼈마저 으스러뜨릴 정도로 가득 움켜쥐었던 손이 부르르 떨리면서 그 손아귀를 벌려 갔다.
절명한 상이 무너지듯 쓰러지는 그때, 육신의 감각을 되찾아가던 진도건의 눈앞이 별안간 완전한 어둠으로 휩싸였다. 감각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그렇게 무의식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다.
현실이라는 감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빛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서 있었다.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지만, 진도건은 침착하게 자신을 돌아보았다.
빛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이 명확하게 보이고 느껴졌다. 육신의 감각과는 또 다른 영혼의 감각이 칼날처럼 벼려져 있었다. 폭주하는 마기에 의해 정신이 무너졌던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질 정도로 살아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오감에 영감(靈感)까지 더하여 어둠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무의식의 공간에서 두 발로 서 있다는 느낌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 자신의 존재감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기에 진도건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오감 중 다른 어떤 감각으로도 느껴지지 않는 허무의 공간 속에서 진도건의 영감은 자신 외의 또 다른 영성(靈性)을 느끼고 있었다.
“넌 누구냐?”
침착하게 물었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 공허한 울림.
혼돈에 빠져 몸부림치던 때가 아니었다.
영혼의 입에서 흘러나오자마자 소멸할 것만 같았던 목소리는 사위를 아우르는 어둠에 명확한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큭큭!”
귀가 아닌 머릿속에서 울리는 그 비웃음.
진도건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검은 눈동자로 또렷하게 정면을 바라보았다.
오른손을 펼쳐 앞으로 내밀었다.
눈앞을 어설프게 가리는 자신의 손등을 잠시 보았다가 손가락 사이로 드러나는 그 너머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모습을 보여라.”
목소리에 힘을 싣고 확언(確言)을 내뱉는다.
“3년 전과 똑같은데 혼란을 위장해 봐야 소용없다. 킥킥킥!”
머릿속에 꽂히는 그 비웃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모습을 보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 진도건은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 그날.
무의식 속에서 마주했던 붉은 눈동자를 한 자신의 모습을.
공간 전체에서부터 느껴지던 그 영성이 마침내 그의 눈앞에 또렷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진도건의 투영체였다.
같은 신체와 같은 옷 그리고 같은 얼굴.
다른 점이라고는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
진도건은 착 가라앉은 머리카락과 자신의 눈동자가 검은색임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반면에 눈앞에 드러난 투영체는 핏빛 눈동자와 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눈썹마저 붉었다.
“……이런.”
곤란한 표정을 하는 투영체.
진도건은 그를 무심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넌 뭐지?”
“날 모르나?”
“알려 준 적이 없잖아.”
“나, 혈마다. 네가 그렇게 불렀잖아.”
“아니, 난 그렇게 부른 적 없어.”
투영체.
진도건의 모습을 한 혈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생각을 되짚어 보는 모양이었다.
“……아, 혼마(混魔)가 그렇게 불렀지. 네 몸뚱어리를 차지했던 때를 떠올리니까 기억나네. 일장춘몽(一場春夢) 같은 허무한 시간이었어. 킥킥!”
진도건의 육신을 차지한 혈마가 폭주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들 때, 천무경에 의해서 광기의 자유를 박탈당한 것을 이름이었다.
그 말에 진도건도 그때를 똑똑히 기억했다.
끔찍한 기억 속에서 그는 혈마의 말에서 오류를 찾았다.
“혼마? 그런 자는 만난 적 없었는데.”
혈마가 피식 웃었다.
“일월신마가 가진 마성을 일컫는 말이다. 분열과 융합, 증폭. 그 예상할 수 없는 혼돈의 마성. 이해되나?”
“액면(額面) 수준에서는? 하지만, 진의(眞意)는 따로 있는 것 같군.”
“큭큭! 야, 근데 너 너무 침착하게 물어보는 거 아냐?”
“왜? 침착하면 안 되나?”
“내게 다시 몸을 뺏길 건데. 나도 자존심이 있지, 육신이 내 것이 되면 넌 도망칠 수 없어. 지랄 맞은 파천(破天)에 도망쳐 세맥 속으로 숨었지만, 덕분에 잠들기 직전 네놈이 어떻게 내게 삼켜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어디에 숨었는지 알 수 있었거든. 일월교리에 따라 수행한 혼마의 진원(眞原)도 그리 강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좋은 스승을 두었어?”
“후후후!”
진도건의 웃음에 혈마가 표정을 찌푸렸다.
자신의 얼굴이었기에 그 표정 변화가 새삼 우습게 느껴졌다.
“후후후후!”
“왜 웃지?”
“원래 이렇게 말이 많나?”
혈마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이 3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진데 침착함은 진도건의 몫이었고 조급함은 혈마의 몫이었다. 투영체에 불과한 자신의 얼굴에서 그런 감정이 느껴지고 있다는 것에 진도건의 감정 안에는 혼란이라는 티끌 한 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판단을 흐릴 수 있는 감각의 현혹이란 것이 존재하는 이 무의식 속 공허의 공간 한가운데서 그의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차피 둘 중 하나 죽어야 끝나는 거라면 그만 떠들고 끝내지.”
아무것도 없던 오른손에 한 자루 검을 쥔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칼날이 서슬 퍼렇게 벼려져 있음을 느꼈다.
“대충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긴 내 영역이다.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혈마의 손에도 피처럼 붉은 검이 나타났다.
마성을 형성한 사념, 원념들은 모두 생명에 근원한 것들.
그들 각각의 붉은 핏방울 하나하나가 모여 검신을 모두 덮다 못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혈마가 검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자신의 투영체답게 정말 눈부신 속도였고 궤적의 예리함을 갖고 있었다.
촤악!
검을 휘두른 손끝에 전달되는 섬뜩한 느낌.
골육을 갈라냈던 감각과는 다르지만, 이질적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느낌이었다.
옆구리부터 어깨까지 자신의 모습을 한 혈마의 몸통을 양단했다. 두 동강이 나버린 육신이 눈앞에서 흩어졌다.
“소용없어.”
목소리와 함께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처음 둘 사이의 거리.
딱 그만큼 앞에 나타났다.
혈마가 비릿하게 웃었다.
“난 죽지 않아. 지는 건 너야. 죽는 것도 너고. 포기하…….”
촤악!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횡으로 베어 내자 혈마의 허리가 둘로 잘리며 다시 흩어졌다.
처음 둘 사이의 딱 그만큼 거리에서, 혈마는 나타났다.
그 비릿한 웃음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킥킥킥! 포기하라니까.”
진도건이 진지한 눈빛으로 혈마의 붉은 눈을 직시했다.
베고 또 베었다.
혈마의 검은 그처럼 빨랐지만, 한 끗 차이로 항상 진도건이 앞섰다.
수십 번을 벤 것 같았다.
그 수십 번 만큼 혈마는 둘로 잘리며 사라졌다가 딱 그만큼 거리에서 다시 나타났다.
“너 근성이 대단하구나?”
표정 하나 변함없던 진도건이 피식 웃었다.
“그럼 네가 날 베어 보던가.”
“저게…….”
말을 끊고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혈마.
촤악!
다시 한번 혈마의 몸이 두 동강이 나버렸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 아주 조금은 짜증 섞인 눈으로 진도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도건의 태도는 명확했다.
촤악!
어둠 속 검을 따라 반월을 그리는 검광은 어디에서 반사되어 빛이 나는가?
혈마인가?
아니면 나로부터인가?
* * * *
단(檀)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혈마 전승자의 시체를 찾아오겠다던 상이 사흘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하루가 지났을 때는, 야율재와 진도건의 싸움이 끝났을 시각이 오후 어느 때였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이틀째가 되고 해가 서산에 기울어 하늘이 붉게 물들었을 때, 조금 신경이 쓰였다.
시체에 무슨 처리를 하기 위해 늦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연구할 거리를 찾은 것일까?
그의 관점에서 타당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결국 덮어 버리고 그렇게 밤을 보냈다. 야율재도 출전할 기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으니 숲속에 참호를 파 놓고 바람을 피해 오래간만에 깊은 잠을 잤다.
셋째 날이 되어 중천에 태양이 걸렸을 때, 단은 어쩌면 상에게 변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변수가 생겼어도 오늘이면 돌아와서 정보를 공유하고 다시 일정 거리를 두어 야율재를 감시하던, 혹은 본교로 정보 전달을 준비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지 이렇게 깜깜무소식일 수 없는 일이었다.
환상무영술로 자연환경 속에 스며든 채 멀찌감치 떨어져 야율재를 잠시 지켜보던 단은 상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야율재의 일신상에 변고가 있을 리 만무했고 대략 어떤 움직임을 가져갈지 알고 있었기에 자리를 비워도 아무 문제 없을 것이었다.
초원을 건너고, 언덕을 넘어서 연산산맥 산자락에 이르렀다. 하얀 눈밭, 가지에 잎사귀 하나 찾아볼 수 없이 건조하게 늘어서 있는 나무들 사이를 달렸다.
야율재와 진도건이 싸웠던 곳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빠르게 이동했다.
그렇게 출발부터 한 시진을 넘게 쉬지 않고 이동하여 마침내 절벽의 끄트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점차 가까워지면서 일부가 부서져 파여 있는 지형도 눈에 들어왔다.
뽀드득뽀드득.
조심스럽게 옮기는 걸음 뒤로 눈이 뭉치며 내는 비명이 조용히 귓바퀴를 맴돌았다. 고요한 산속에서 차분히 이동하며 마침내 벼랑 끝에 앉아 아래를 내려 살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흑풍대 시체들.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 기억과 겹쳐졌다. 다음은 크게 군집한 벼랑 바로 아래의 바위 무덤을 살폈다. 눈을 돌리던 그 잠깐 사이에 이질적인 차이가 신경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위 무덤의 달라진 형상과 주변에 흩어진 크고 작은 바위들이었다.
단의 시선이 빠르게 이질적인 차이를 쫓아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차이를 찾아내었다.
‘상……!’
단은 흑풍대 쪽에 누워 있는 한 사내를 발견했고 자신과 같은 행색으로 미루어 그 사내가 바로 상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 바로 맞은 편에 누워 있는 사내가 있었다.
옷가지는 갈가리 찢겨 육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검게 굳은 피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으니 진도건이 틀림없었다.
꿀꺽!
마른 침이 절로 삼켜졌다.
아무래도 상이 바위 무덤을 치우고 진도건을 끄집어낸 것은 틀림없는데 어째서 저러고 누워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흐릿한 불안감이 가슴 속에 맴돌기도 했다.
단은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눈 아래 보이는 튀어나온 나뭇가지와 돌부리를 한 차례씩 밟으며 가볍게 돌무덤 위로 착지했다. 울퉁불퉁한 표면들을 가볍게 밟아가며 내려온 그의 바로 옆에 진도건이 대자로 뻗어 있었다.
처참하게 당한 꼴 그대로인 진도건을 잠깐 흘겨보고는 반대편에 누워 있는 상을 바라보던 단의 걸음이 멈칫했다.
상의 머리가 왼쪽으로 비스듬히 꺾여있었는데 반쯤 벌어진 입이 이상하게 보였다.
아직 겨울이 지나지 않은 쌀쌀한 추위 속에서 호흡하고 있다면 입김이 보여야 하는데 그의 눈에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이 상에게 빠르게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 불신의 빛이 떠올랐다.
목에 선명하게 남은 붉은 손아귀 자국과 이미 절명하여 복면 위로 게슴츠레 뜬 눈의 눈동자는 초점도,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상의 목과 얼굴을 더듬는 손길엔 체온의 따스함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바닥의 눈보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잠시 동지의 죽음에 정신이 팔려있던 단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파헤쳐진 무덤.
바위 무덤 밖으로 나와 있는 진도건의 시신과 맞은 편에서 목이 꺾여 죽어 버린 상의 모습.
공교롭게도 상의 목에 남은 손아귀의 흔적은 얼굴 앞에서 목줄을 틀어쥔 자국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자국을 따라 목을 살짝 감싸 쥔 단의 손으로 정확하게 그 흔적이 가려져 있었다.
팟!
단이 본능적으로 상 머리 위로 움직이며 뒤돌아섰다.
“헉…, 헉……!”
일순 치솟은 극도의 긴장이 가쁜 호흡과 함께 피부를 따라 오싹한 기분으로 이어졌다. 두 눈만큼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진도건을 살피고 있었다.
진도건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그대로 누워 있었다.
무엇을 느꼈기 때문에 경계하는 게 아니었다.
저 누워 있는 시체가, 실은 시체가 아니라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현실 인식에 대한 반응의 몸부림이었다.
긴장감이 살아나자 미세한 변화들을 감지해 냈다.
아주 작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흉골의 움직임과 상에게서 먼저 찾았던 코 위로 피어오르는 희미한 아지랑이가 너무나 또렷하게 두 눈에 들어왔다.
단은 목석처럼 굳어 꼼짝도 하지 않고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두 눈은 깜박임도 거의 없이 진도건에게 고정하여 한눈팔지도 않았다. 그렇게 엉거주춤한 자세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허리를 펴며 일어났다.
깨어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야율재와 맞서 싸운 자가 환상무영술로 은신하지 않은 내 기척쯤은 바로 느꼈을 텐데……. 잠이 든 것이 아니란 말인가?’
단은 조심스럽게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뽀득!
발에 밟혀서 눈이 눌리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시끄럽게 흘러나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미 바위 무덤에서 내려오면서 난 소음이었다는 걸 극도의 긴장감 때문에 망각한 채 일부러 낸 소리였다.
여전히 미동도 없는 모습에 단이 다시 한 걸음 나아갔다.
작은 보폭을 끌어가며 천천히 바로 옆에 도달하여 내려다볼 때까지 진도건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다.
‘……도대체 왜 깨어나지 않는 거지?’
이상했다.
마치 잠든 것처럼 평온한 기색으로 눈을 감고 호흡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척을 온전히 드러나고 있음에도 깨어나지 않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무인이 운기조식에 들어갔다가 무의식에 깊이 관조하게 되면 어떤 기척에도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몰입하게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도건에게선 그에 따라 발생하는 기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기회일지도……!’
조심스럽게 허리 뒤편에 걸린 단검을 뽑았다.
단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조심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단검을 역수로 하여 두 손으로 꼭 쥐고 그 칼끝을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쿵, 쿵, 쿵, 쿵……!
어느 때보다 심장 소리가 이렇게 귀에 크게 들린 적이 없었다.
진도건의 귀에 들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잠깐 들었지만, 여전히 평온한 기색을 내려다보면서 단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죽어!’
이제는 반응해 봐야 막을 수 없는 거리에서 단의 완력이 실린 단검이 뚝 떨어져 내렸다.
칼끝엔 바위조차 부술 수 있는 기세가 실려 있음인데,
‘……이게 대체!’
분명 두 팔엔 제대로 힘이 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칼끝은 진도건의 가슴에 닿기 직전에서 무언가 강한 힘에 붙잡힌 것처럼 멈추었다. 아무리 눌러도, 누른다고 생각을 해도 그의 두 팔과 단검은 요지부동이었다.
떨리는 눈동자가 단검에서 벗어나 요동을 칠 때였다.
“헉!”
복면으로 가려진 단의 입이 쩍 벌어진 채 육성으로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어느새 눈을 뜬 진도건이 물끄러미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도건은 어째선지 익숙한 단의 복면 얼굴을 보다가 잠깐 고개를 들어 가슴에 닿을락 말락 떠 있는 단의 단검을 바라보았다.
“후우……!”
진도건은 들었던 머리를 다시 뉘고는 눈을 감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눈을 떠 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넌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냐? 아니면 같은 동족이냐?”
단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단검을 쥔 두 손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풀어졌다. 몸도 어째선지 일어서기 시작하더니 두 팔까지 바로 내려졌다. 손목에 일순 엄청난 압박이 가해지더니 손아귀에 힘이 풀리며 단검을 떨어뜨렸다.
눈동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진도건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맞은 편에 누워있는 목 꺾인 상의 시체를 한 번 보고는 돌아서서 단을 바라보았다.
단의 떨리는 검은 눈동자에 비친 진도건의 모습에 변화가 투영되었다.
멀리서 보았기 때문에 검다 여겼던 눈동자는 끈적한 핏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머리카락도 붉은색으로 변색하여갔다. 그와 동시에 소름 끼치는 살기가 그의 피부를 따갑게 찌르고 있었다.
“혈마……!”
단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두려움에 가득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