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 제20장. 대회전(大會戰)의 전신(戰神)들 (5)
콰쾅!
엄청난 충격이 현철대도를 통해 야율재의 두 팔로 전해졌다. 충격파와 함께 그의 신형이 뒤로 밀려나자 그 당사자도, 지켜보는 군사들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심규봉은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끝없이 쏟아질 거 같던 화살은 멈추었다. 달려오던 기마대는 면면이 새로운 인물들이었지만, 갑주 하나 없는 행색은 그들이 천호대와 같은 무림인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 갑옷을 입은 자들이 우리의 적이오!”
심규봉이 온 힘을 다해 외쳤다.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선두에서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말을 타던 도사가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앞서 날아오른 여인처럼 일제히 말에서 뛰어내리며 군사들이 머리 위로 든 방패로 뛰어올랐다.
“병사들을 물리고 말들을 관리해 주시오.”
500명이 경공술을 펼치며 방패 위를 달리는 모습에 심규봉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구경하다가, 그들 중 누군가가 얘기하는 소리를 듣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규봉의 지휘 아래 보병들은 천서은과 야율재를 중심으로 빠르게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흑풍대도 새롭게 등장한 무림인들로 인해 시선이 돌아가자 그들에게 공격받던 군사들도 빠르게 현장을 이탈했다.
500명 중 가장 선두에서 경공 제운종(梯雲縱)을 펼치며 가벼운 몸짓으로 달려가는 청명도 천서은과 야율재를 지나치면서 두 사람의 직전 충돌을 떠올리고 있었다.
‘천무방에서 내게 보인 검술조차 그녀의 일부만 본 것이었구나. 저자가 뿜어내는 마기도 섬뜩하던데…… 스승님이 아니고서야 무당파에서 저자를 상대할 분이 더 있을까? 나도 아직 멀었다.’
창천맹이 창설된 해에 천무경과 소요자가 면담한 일이 있었는데 그들은 가볍게 합을 나눠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천무경은 정파가 창천맹의 중심을 함께 이루기 위해서는 현재 사파일색인 천하오절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상징적인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광혈신마와 싸워 격퇴한 소요자와 만난 것이었다.
그 만남 이후 소요자는 제자 청명에게 이르길, ‘천무경의 강함은 완전무결(完全無缺)하며 파천신공은 당대에 가장 파괴적인 기공이다.’라고 평가한 바가 있었다.
야율재는 현철대도를 거두면서 천서은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놀라운 미모는 시선을 현혹할 만했으나 흑체마경을 찢을 정도로 놀라운 위력을 맛본 탓에 그 위험성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저 놀이터가 될 것이라 여겼던 전쟁터였다. 진도건과 싸움조차 조용한 숲속에서 치러졌기에 이렇게 전쟁터에서 자신을 막아 세운 강적을 만나니 새삼 전쟁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넌 뭐냐?”
“천무방의 천서은. 당신이 흑풍신마인가요?”
“천무방? 천씨면…… 방주의 딸인가?”
“그래요.”
“하하하…… .”
야율재는 웃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합만으로도 그는 천서은이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임을 알았다.
무공을 익히고 경지에 오를 수 있는 환경을 구성하는 가장 필수적인 환경적 요건인 혈통, 그리고 주어진 모든 것을 흡수할 수 있는 타고난 재능. 그렇지 않고서야 이만한 공력에 더불어 여인의 몸으로 가지기 어려운 당당한 태도는 설명할 수 없었다.
여자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는 추상적인 한계가 더는 한계가 아니게 되는 경지를 넘어선 것이 분명했다.
“그놈도 그렇고 말이야. 어린 것들이 발칙하게 벌써부터 목에 칼을 들이대려고 하면…….”
중얼거리는 야율재의 말을 들은 천서은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그놈?”
천서은은 눈앞의 남자가 흑풍신마 야율재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가 얘기한 ‘그놈’이라는 사람이 어쩌면 자신이 찾는 남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도건……!’
말을 달려오는 중에도 이미 살폈었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광경 속에서 그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푹!
묵직한 소리에 천서은이 앞을 바라보았다. 이미 기감은 야율재에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틈을 내준 건 아니었다.
야율재는 현철대도를 땅에 박았다. 그리고 등의 월륜대도를 꺼내 들었다. 무림인들과 싸울 때면 아무래도 운용의 폭이 넓은 월륜대도가 더 적합했다. 진도건에게 쓴맛을 본 이후이긴 했지만, 야율강과 직접 실전 대련을 즐겼을 정도로 칼솜씨에 자신이 있었다.
“젊은 만큼 겸손해야 한다, 아가야. 그 잘난 재능 믿고 까불다가 요절한 놈들 수도 없이 많으니까.”
후우우웅-!
등 뒤에서부터 검은 기류가 허리를 감싸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온몸에 그 흑풍의 기류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직전의 흑체 수준은 아니었지만, 언제든 마공을 시전하고 도강을 펼칠 수 있는 사전 준비 상태나 다를 바 없었다.
스릉!
천서은도 검을 뽑았다. 그녀의 수중에 있던 무극신검은 천무방에서 출발하기 전에 청명에게 돌려주었다. 명검에 집착할 이유도 없었고 창천맹으로 정사가 협력하는 마당에 무당파와의 분란을 초래할 만한 일은 피하는 게 좋았다.
무극신검 대신 손에 쥔 것은 본래 청명이 들고 있던 송문고검이었다.
“당신이 그놈이라고 말한 사람. 혹시 진도건인가요?”
막 움직이려고 했던 야율재가 진도건이란 이름에 멈칫했다. 그는 잠시 천서은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 기둥서방이라도 되느냐?”
천서은의 얼굴에 불쾌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야율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크크! 안타까운 일이야. 계집아이가 잠자리를 못 잊어 위험한 전장까지 따라왔건만, 기둥서방이라는 놈은 무너진 절벽에 파묻혀 저승을 헤매고 있으니 말이야.”
천서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차가운 눈빛은 살기로 돌변하였다.
바로 그때 야율재가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쐐액!
천서은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월륜대도. 검은 칼바람을 거대한 칼날에 휘감은 채 참격의 궤적을 쫓는다.
흑체마경이 해체 수준으로 무너진 심적 충격은 자신의 칼바람으로 저 하얀 옷과 그 속의 하얀 살결까지 갈가리 찢어 놓는 상상으로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 붉은 선혈을 얼굴로 뒤집어쓰고 싶었다.
부웅!
월륜대도가 허공을 갈랐다.
어느새 눈앞에서 사라진 천서은을 야율재가 굳어진 표정을 한 채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쫓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뒤돌면서 다시 월륜대도를 휘둘렀다.
콰릉!
월륜대도와 송문고검의 칼날이 맞부딪치며 요란한 굉음을 토해냈다. 동시에 월륜대도가 반 치만큼 튕겨 나갔다.
‘힘에 밀려?’
푸른 전류를 동반한 검강과 부딪치면서 월륜대도를 휘감던 검은 칼바람이 벗겨지는 것이 시야에 들어오자 야율재의 두 눈이 놀라 부릅떴다.
그가 놀란 것은 천서은의 움직임이었다.
칼날을 쳐 냄과 동시에 더욱 가까이 낮게 파고들면서 좌장을 내질렀다. 힘에서 이겨 낼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동시에 가져갈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미처 돌아서지 못했던 야율재는 급한 대로 몸을 틀며 좌장을 내질렀다. 그러나 자세가 불안정한 데다가 오른쪽 옆구리에 가까운 지점에서 두 사람의 장력이 맞부딪치게 된 상황은 뼈아팠다.
파천신공 벽력장.
무엇보다 준비된 장력과 급하게 방어하기 위한 장력에는 엄연히 차이가 나는 법.
꽝!
“큿!”
야율재의 몸이 옆으로 급격하게 꺾이며 밀려났다. 꽉 깨문 이빨 사이로 핏물이 새어 나올 정도로 직격을 얻어맞았는데 좌장을 뻗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갈빗대가 부러졌을지도 몰랐다.
‘이 썅년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야율재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나이로, 여자로 얕잡아볼 수 없는 한 마리 맹수가 그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저기에 서 있음을.
천서은은 더 몰아치지 않고 몸을 추스르는 야율재를 지켜봤다. 뜻밖의 여유에 야율재는 호흡을 고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해 보세요. 진도건, 그가 어떻게 됐다고 했나요?”
“큭큭! 조곤조곤 말하면서 명령조라니, 쳐죽일 년 같으니라고. 나를 제대로 얕잡아 보는구나.”
“걱정 말아요.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당신의 목은 어깨에 잘 붙어 있을 테니까요.”
맑고 투명한 목소리로 목을 붙여 놓느니 마느니 하고 있으니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야율재는 화가 제대로 뻗치는 기분이었다.
“건방진 년. 그 주둥이 반드시 이 칼로 째어주마.”
퉁!
야율재의 신형이 쏘아져 나가며 월륜대도로 참격을 그렸다. 거침없이 몰아치는 연격에 천서은의 송문고검도 검광을 번뜩이며 얽혀 갔다.
카카카캉!
도검이 각각 흑청(黑靑)의 강기의 막으로 둘러싸인 채 무서운 기세로 부딪쳤다.
야율재는 따로 도법을 수련하지 않았기에 초식이라 할만한 규칙성이 없었다. 그러나 매우 본능적인 반응과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파고드는 칼날은 하나하나 살초나 다름없었다.
그깟 초식의 춤사위 따위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야율재는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진도건이 죽었다고 확신했기에 더는 이런 적을 만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 자리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면서 육신의 한계를 벗어난 검속을 구사하는 상대가 진도건 외에 또 있음을 깨달았다.
카득!
피피핏!
흑갑이 갈라지고 드러난 일부 신체를 노리고 들어왔다. 벌써 옷과 갑주가 피에 조금씩 물들기 시작했다.
얼마 전 치렀던 혈전에서의 생각하기 싫은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질풍같이 휘두르는 월륜대도의 속도 속에서 천서은의 송문고검이 이따금 그의 감각을 앞질렀다. 진도건처럼 칼로 대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인 수준은 아니었지만, 분명 경계를 넘나드는 검속이었다.
만약 진도건을 검속을 먼저 경험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방심만으로도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었다.
“흐압!”
기합 일성과 함께 위협적인 반격을 가했다. 올려치는 참격에 천서은이 뒤로 몸을 훌쩍 날려 피해냈다.
키이이잉-!
야율재가 전신을 다시 한번 검은 칼바람으로 감쌌다. 순식간에 온몸과 월륜대도까지 뒤덮으니 사방으로 마기의 섬뜩함이 퍼져 나갔다.
단숨에 다시 끄집어낸 흑체마경을 보면서 천서은도 파천신공을 끌어올렸다. 그런 그녀의 주변에 푸른 기류와 전류가 파직! 거리면서 보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그걸로 될까요?”
“아까와는 다를 것이다.”
파팟!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단 한걸음에 거리를 좁혔다. 천서은의 검속을 고려해 야율재가 먼저 출수하였다. 그러나 요란하게 몰아치는 검은 돌풍의 칼날은 또다시 허공을 갈라 버렸다.
마기가 사방으로 그 영향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옆을 돌아간 천서은을 잡아냈다.
북천검법 북문뢰정.
파천신공의 푸른 벽력강기(霹靂罡氣)를 휘감은 송문고검으로 가할 수 있는 최고의 강공이었다.
꽈광!
기민한 움직임이었음에도 도검이 제대로 부딪치면서 엄청난 경력의 파장이 터졌다. 흑풍의 도강이 이번엔 무너지지 않았다.
‘그 기류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지 보자!’
천서은이 온몸으로 파천신공의 기류를 뿜어내며 강검으로 몰아쳤다. 파천신공 구성의 정순한 진기의 파도가 송문고검을 통해 쉴새 없이 뿜어져 나갔다.
콰르릉! 콰쾅!
멀리 좌우로 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끔찍한 비명들이 혼재되어 조용한 소란으로 들려왔다. 그에 반해 중군은 중심부를 멀찌감치 거리를 벌려놓은 채 시끄러운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한구석에서 청명을 필두로 한 500명의 무림인이 흑풍대와 치열하게 다투고 있을 뿐, 만여 명의 군사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야율재와 천서은의 격돌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 폭풍이 휘몰아치자 마치 그 진로를 막기 위해 하늘에서 벼락을 떨어뜨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들의 움직임을 두 눈으로 모두 쫓을 수 없는 일반 군사들의 눈에는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야율재가 흥분하며 천서은과의 대결에 몰두하는 사이, 그의 그런 생각과는 달리 남양과 조태상은 드디어 야율재의 발목을 묶어 놓았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특히 조태상은 멍하니 감상할 여유 따위 사치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냉철한 눈으로 전장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중군까지 움직이면서 좌우의 몽골군과 흑풍대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좌군의 조태번은 소적문을 제대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의 발이 묶이면서 같이 따라온 흑풍대 2천 기도 동시에 발을 묶이며 난전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들이야 일당십에서 백까지도 상대할 수 있는 전사들이었지만, 사방팔방이 순식간에 적군으로 둘러싸이자 그 위세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 정도의 맹장이라니!’
소적문도 즉시 이 난전 속을 빠져나와 다시 돌격할 거리를 확보해야 함을 알고 있었지만, 조태번의 신력은 정말로 예상 밖이었다.
흑풍명천마공의 힘을 대부에 싣고 싸우면서도 외공이 경지에 이르면 내가고수를 이길 수 있다는 말처럼 조태번의 언월도는 휘몰아치는 검은 바람 속에서도 끊임없이 그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다.
‘놓치지 않는다!’
카앙-!
칼바람에 갑주가 갈라지고 옷가지가 찢어지며 살가죽에 혈선이 그려짐에도 조태번의 위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상승했다.
좌군에서 조태번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반면에 우군에선 야율균은과 흑풍대가 천호대와 기병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소적문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른 야율균은의 칼바람은 질적으로 차이가 달랐다. 마공으로 발휘하는 검기의 위력은 파괴적이어서 마교 고수와 직접 싸워 본 경험이 없는 영은성과 최현걸은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다.
팽무양은 이미 상처를 입고 낙마한 뒤였다. 천호대가 달려들어 그를 보호하면서 급히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여자의 몸으로 보여주는 야율균은의 무용은 흑풍대와 함께 천호대를 위협했다. 영은성과 최현걸이 그녀를 합공하지 않았다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지도 몰랐다. 아무리 나름 무림의 고수들이라는 천호대라도 기마 위에서 발휘하는 무공의 한계는 명확했고 야율균은만큼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밀어붙이고 있지만, 전장은 이미…….’
야율균은은 천서은의 존재를 이미 감지한 상태였다.
야율재가 중군을 돌파했을 때, 당연히 이대로라면 승기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그 전진이 틀어막혔을 때, 야율균은은 승리의 빛이 그들을 비추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적의 중군 상당수가 자리를 이탈한 채 좌우군을 포위하고 있으니 만약 야율재가 이겨 내지 못한다면 전멸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콰콰콰쾅!
요란한 굉음이 야율균은이 있는 곳까지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의 격돌이 절정에 치닫고 있음을 굳이 보지 않아도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지?’
흑풍대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숫자가 줄어들고는 있었지만, 아직까진 이쪽 전장에서는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만약 도주한다면 지금이라도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흑풍대를 지휘하며 돌파를 하기엔 눈앞의 두 사람이 빈틈을 허용할 것 같지 않았다.
야율균은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나 두 사람의 매화검법과 타구봉법은 매우 날카롭게 파고들고 있었다.
야율균은이 군마를 자유롭게 다루면서 세 사람이 바라보는 방향이 수시로 바뀌었다. 언뜻 두 사람 사이로 잡히는 시야 속에 한굴렬이 흑풍대 사이에 숨으면서 싸움을 회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 인간이……!’
저렇게 몸을 사리고서야 중독으로 자멸할 시간은 점점 늦춰질 뿐이었다. 만약 그가 여기서 죽지 않는다면 단단한 내공 덕에 돌아가서는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채챙!
그녀에게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라고 경고하듯이 영은성과 최현걸이 매섭게 위협했다.
야율균은은 무리를 해서라도 전황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야앗!”
기합과 함께 거대한 마기가 두 자루 만곡도를 통해 방출되면서 사방을 휩쓸었다. 영은성과 최현걸의 말이 놀라며 연방 뒷걸음질 쳤고 두 사람도 흔들리는 말 안장 위에서 도기를 방어하는 데 급급했다.
“흑풍대 돌파하라!”
야율균은이 두 사람을 지나치면서 눈앞의 천호대와 기병들을 물리쳤다. 가장 밀집한 흑풍대들을 막고 있는 인마의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함께 빠져나왔다. 그 뒤를 어느새 700여 기가 따라붙으며 자리를 이탈했다.
야율균은을 선봉으로 빠르게 산자락의 언덕을 타고 올랐다가 신속하게 선회기동했다.
적 기병대는 여전히 이에 대응하지 못하고 제각각 방향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돌격-!”
야율균은이 적 기병대가 주로 뭉쳐져 있는 부분을 노리고 명령을 내렸다.
두두두두!
무서운 기세로 내리막을 따라 흑풍대가 돌진하기 시작했다. 검은 바람을 두 자루 만곡도에 담으며 다시 일격을 준비하던 야율균은의 시선이 왜인지 무의식적으로 우측을 향했다.
‘어……?’
야율균은의 시선 끝에 한 필의 흑마가 한 사내를 태우고 산비탈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갈가리 찢긴 의복이 바람에 휘날렸는데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기울어진 햇빛에 빛나는 진홍의 머리카락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그 사내의 머리가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핏빛의 그것처럼 붉은 눈동자와 붉은 머리카락 때문에 일순 헷갈렸으나 그녀는 그 얼굴을 분명하게 알아보았다.
‘대체 어떻게……!’
분명 죽었어야 할 진도건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