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 제20장. 대회전(大會戰)의 전신(戰神)들 (4)
야율재, 야율신에 비교할 것은 아니었지만, 야율균은도 선봉장으로서 능력이 있었다. 그들이 다루는 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병기인 두 자루의 만곡도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칼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흑풍명천마공의 도기는 범인이 막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야율재라는 절대적인 존재 앞에 같은 마공을 익혔으면서도 그 힘에 미치지 못하는 야율신과 야율균은으로서는 같은 전장 속에서 자연히 다른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야율재가 전장 한복판에 뛰어들어 마음껏 힘을 발산하는 만인지적의 장수라면 야율신과 야율균은은 자신의 힘에 대한 한계선을 명확하게 하는 대신 통솔력으로서 전장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형이었다. 그리고 야율균은은 야율신의 친동생으로서 그 재능을 빼닮아 있었다.
촤라락-!
현란한 칼부림과 휘몰아치는 칼바람에 기병들은 손쓸 새도 없이 쓸려 나갔다. 그녀의 돌격이 멈출 새도 없이 그대로 기병대의 허리를 반으로 갈랐다.
“한 장군은 흑풍대 500기를 이끌고 공손숙의 발을 묶으세요!”
“뭐요?”
한굴렬이 놀라 소리쳤지만, 야율균은은 손짓으로 우측 열의 부대를 한굴렬에 딸려 보내면서 자신은 좌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칫! 지아비 될 사람한테 명령이라니…….’
한굴렬은 속으로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녀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열의 흑풍대는 나를 따르라!”
한굴렬의 몸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천호대가 포함된 기병대가 아니라 공손숙을 상대하도록 한 것은 나름 야율균은이 배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녀는 한굴렬이 공손숙을 이길 수 있을 거라 보지 않았다. 독은 몸을 더 격렬하게 움직일수록 빨리 퍼지기 때문에 싸우다 자멸하길 바랬을 뿐이었다.
“이럇!”
야율균은과 1500기의 흑풍대가 방향을 선회하며 달렸다. 공손숙 기병대의 꼬리마저 돌파하여 방향을 튼 끝에는 팽무양과 영은성, 최현걸의 별동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속도를 줄이고 추행진을 갖춰라! 밀집하고 또 밀집하여 적군의 예봉을 꺾을 것이다!”
달리는 속도를 다소간 줄이자 흑풍대 사이의 간격이 매우 좁아지면서 좌우 동료 간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수준까지 가까워졌다. 각각의 돌파력은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야율균은을 극점으로 한 화살촉과 같은 밀집대형이 흑풍대의 돌파력을 극도로 끌어올려 진다.
거기에 더해 야율균은이 하늘을 향해 세운 두 자루 만곡도에서 흑풍이 일어났다. 둥그렇게 모인 칼끝을 타고 두 줄기 바람이 만나며 더욱 격렬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뒤따르는 흑풍대 병사들 또한 자신들의 칼과 창에 마공의 기운을 담아 내고 있었다.
‘저 섬뜩한 기운은 마주할 때마다 치가 떨리는군.’
가장 선봉에서 말을 달리던 팽무양도 야율균은의 쌍도로 집중되는 기운의 흐름을 보았다.
야율재를 비롯한 야율신, 야율균은과 이미 몇 번이고 맞붙어본 팽무양은 이를 꽉 물었다. 좌우로 영은성과 최현걸의 말이 그의 옆에 섰다.
“영은성! 최현걸! 내 말을 기억하게!”
“옛!”
“알겠습니다!”
“천호대! 결집하라!”
두 사람의 대답을 듣자마자 팽무양이 크게 외쳤다. 가장 선두에서 달리던 천호대가 팽무양의 뒤로 바짝 붙었다. 두텁게 모이는 그들을 뒤에 두고 팽무양은 자신의 내공을 끌어 올려 패도에 집중했다.
두두두두!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
이젠 피할 수 없다 여겨지는 순간에 최현걸과 영은성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와 함께 기병대도 좌우로 그들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야율균은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적이 좌우로 기병대가 갈라지고 중앙에 달리는 적들은 익히 알고 있는 천호대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직접 맞붙어 본 적은 없었지만, 야율신이 돌격할 때면 천호대가 결집하여 그 기세를 죽이곤 했다고 들었었다.
‘기병들을 피신시키고 일단 흑풍대의 돌격을 멈추겠다? 고작 400명 정도 따위로는 어림없다!’
전쟁이 승리로 끝난다면 그녀는 흑풍대의 새로운 선봉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녀 개인으로서는 목표가 흐려진 이번 전쟁에서 실력의 입증만 고려하였다.
“돌격하라!”
마침내 야율균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치며 속도를 높였다.
흑풍명천마공 흑사풍파.
쌍도를 휘두르며 흑풍의 도기를 분출시켰다. 그리고 반대편 선봉에서 달리는 팽무양은 으레 그렇듯 대응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백호도간(白虎跳澗).
이미 검은 바람을 대면하는 데 익숙해져 버린 군마가 앞발을 번쩍 들어 올리며 뛰어올랐다. 거침없이 하천을 뛰어넘는 백호의 위압 앞에 아무리 세찬 바람이라 한들 막을 수 있으랴.
콰쾅!
묵직한 도기와 칼바람이 충돌하며 경력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큿!”
사방으로 퍼지는 바람에 놀란 말들로 인해 추행진의 결집력이 다소 느슨해졌다. 휘몰아치는 후폭풍을 뚫고 야율균은과 팽무양의 칼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캉!
콰콰콱!
군마와 군마끼리 부딪치고 뒤엉켰다. 사방이 적과 아군으로 혼재된 상황 속에서 칼부림이 벌어졌다. 일반 병사들이었다면 흑풍대의 칼에 학살당하는 수준으로 이어졌겠지만, 천호대 모두 무림인들이었기에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들의 판단과 공방의 수준은 훨씬 뛰어났다.
채채채채챙-!
사방에서 칼날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야율균은도 팽무양과 칼을 겨루고 있었다.
‘이렇게 막힌다고?’
그녀는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팽무양의 무공을 간과한 것도 있었지만, 더는 흑풍대가 밀고 들어가지 못하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영은성과 최현걸은 흑풍대를 피해 도망친 것이 아니라 곧장 선회하여 그 허리를 자른 것이었다. 그게 가능한 것은 영은성과 최현걸이 팽무양 못지않은 높은 무공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은성의 자하신공은 화산파의 가장 패도적인 무공이었고, 최현걸은 짧은 강철 단봉에 항룡십팔장의 강공요체를 구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힘은 돌진하는 흑풍대 병사들의 대형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일찍이 전투를 시작한 전장의 측면은 그렇게 치열했다.
야율균은에 맞선 팽무양과 영은성, 최현걸이 그러했고 중독 증세가 있는 한굴렬이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공손속을 상대로 쩔쩔매는 것도 그러했다. 조태번은 일신의 무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며 소적문을 상대로 언월도를 마음껏 휘둘렀다. 평범한 기병대가 타고난 신력과 착실히 무예를 닦아온 조태번의 존재로 인해 흑풍대의 발목을 제대로 잡고 있었다.
흑풍대의 참전으로 뒤집힐 줄 알았던 전세는 그렇게 각지에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다. 오히려 수적 우위로 인해 전황을 살펴보면 확실히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할 수 있었다.
“야율재가 옵니다!”
하지만, 그런 유리한 전황조차 야율재와 불과 천 기에 불과한 흑풍대의 돌격이 시작되면서 조태상과 남양은 그 어느 때보다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선봉의 야율재가 맹렬하게 달려와 어느덧 타타르족 군사들이 파묻힌 함정에 이르렀다. 저렇게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서야 그대로 시체 속에 빠지면서 앞으로 고꾸라질 게 뻔했다. 그리고 그런 상식에 근거한 상상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육중한 야율재와 흑갑의 무게를 생각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투앙!
야율재의 군마가 함정 앞에서 지면을 강하게 박차더니 그대로 하늘 높이 날아오른 것이었다. 그야말로 어둠에 물든 천마(天馬)가 뛰어오른 것만 같았다.
그 기세 그대로 함정의 그 넓은 폭을 단숨에 뛰어넘은 야율재가 전방을 향해 현철대도를 휘둘렀다.
콰콰쾅!
마치 흑룡이 먹잇감을 노리고 달려든 것처럼 야율재의 참격을 따라 검은 칼날 폭풍이 휘몰아치며 일대를 휩쓸었다. 그 일격에 수십 명이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으아악-! 야율재다!”
그 비명을 지른 병사의 얼굴은 마치 재앙(災殃)을 바로 앞에서 직접 목도한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야율재는 마음껏 공력을 발산하면서 사방팔방을 뛰어다녔다. 거대한 현철대도의 칼날엔 흑풍의 경력이 멈추지 않았고 그가 지나가는 곳에 죽음이 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가 일대를 휩쓸면서 흑풍대는 안전하게 시체의 강을 건넜다. 흑풍대에 의해 강제로 끌고 온 타타르족의 시체들이 흑풍대 군마의 말발굽에 무참하게 짓이겨졌지만, 누구 하나 동요하는 자가 없다. 그들이 마침내 난전에 돌입하면서 진형이 무너져 허둥대던 가까운 보병들을 적극적으로 노려 피해를 키워갔다.
“거리를 벌려라! 귀갑진을 펼쳐라!”
심규봉이 목에 핏발을 세우며 소리쳤다.
야율재와 가까운 자들은 이미 공포에 휩싸여 이성이 마비된 채 허둥대다가 칼바람에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다소 거리가 있던 병사들은 서둘러 방패를 세우며 완전 밀집대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방패를 겹겹이 두르고 병사들은 서로의 등을 받쳐 주면서 단단하게 고정했다.
그렇게 형성된 귀갑진이 빠르게 전개되어 야율재의 사방 모든 보병이 진형을 갖추었다.
“호오!”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야율재가 감탄 어린 조소를 내뱉었다.
그의 비웃음을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심규봉은 이리저리 재고 따질 여유도 없었다.
“투창(投槍)!”
그가 외치자마자 귀갑진을 구축한 보병들 머리 위로 창들이 날아갔다. 수십 개의 장창이 야율재를 노리고 쏟아졌지만, 야율재는 코웃음과 함께 도풍을 일으키며 튕겨냈다.
“2진!”
야율재를 지켜보던 심규봉이 바람이 그치는 순간에 다시 외쳤다. 재차 수십 대의 장창이 날아가 야율재를 노렸으나 역시나 그의 도풍에 막혀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심규봉이 외치지 않아도 투창은 정돈된 규칙 속에서 이뤄지며 야율재를 노렸다. 심지어 귀갑진을 이루며 방벽을 형성한 병사들도 갖고 있던 투창을 차례로 던졌다. 부단히 훈련한 성과 덕분이었는지 짜임새 있는 투창 견제로 야율재도 더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이 난전으로 치달으면서 사실상 궁병들이 공격할 자리를 잃었는데 보병들이 귀갑진으로 머리 위까지 방어하자 마음 놓고 야율재를 향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 위는 화살로 인해 하늘이 대부분 가려질 정도로 수백, 수천 개의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좌우군이 흑풍대와 몽골군의 공격에 버티고 있는 사이에 중군 보병대와 궁병대가 일제히 야율재 한 사람만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우드득!
푸히히힝-!
야율재의 격렬한 움직임에 타고 있던 군마도 그와 함께 수년간 전장을 누벼 온 명마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리가 부러지며 주저앉았다. 그러나 야율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장에서 뛰어내리며 연신 도풍을 일으켜 방어했다.
전쟁사(戰爭史)에 이런 적은 없었다.
아무리 만인지적이라 불리는 역사 속의 전설적인 무장들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창이 날아다니고 화살 비가 쏟아지는데 어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었다.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검은 바람과 일대를 쉬지 않고 쓸어내는 현철대도의 풍압, 초중병기를 다루면서도 보통의 병사들 눈에 말도 안 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은 정말 경악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제는 창을 던지는 보병들도, 화살통을 모두 비울 기세로 쉬지 않고 화살을 쏘아내는 궁병들도, 그리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심규봉 등의 부장들과 남양, 조태상 등 장군들의 외침은 그야말로 거대한 바위를 목소리로 밀어내겠다고 악을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제발 무너지길 바라며 미친 듯이 외치고, 던지고, 쏘고 있었다.
그 절박한 몸짓이 일분일초 길어질수록 남양이나 조태성의 악에 받쳐 빨갛게 달아오른 표정들이 점차 절망을 예감하는 듯 경직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조태상의 고개가 뒤로 휙 돌아갔다. 뒤에서부터 달려오는 일단의 기마대를 발견한 그의 표정이 일순 사색이 되었다.
그를 포함한 병사들까지도 악을 쓰면서 고함을 지르느라 말발굽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릴 정도로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대체 적이 언제 이렇게까지…….’
순간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적군의 동태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고 여기면서 적군도 별동대를 운영할 가능성을 일축한 결정의 대가를 치르게 되는 건지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는 급히 본대를 지키고 있던 3천 군사들을 뒤로 돌리려는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기마대가 다가오면서 그들의 행색이 전보다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자 사색이 되었던 그의 표정이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조태상은 가까운 전령들에게 달려가 한 사람을 와락 붙잡았다.
“궁병대에게 쏘기를 멈추라 하라!”
“하찮기 짝이 없구나!”
야율재도 전장을 누비면서 이런 견제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끊임없이 흑풍을 일으키며 창과 화살들을 쳐 내고 있는데 한참 동안 지속하다 보니 이대로는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공마저도 소실되고 있음을 체감할 정도로 느껴지자 이만한 힘을 사용함에도 방어만 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내공을 계속 쓰는 거라면!’
부아앙-!
왼발을 축으로 돌면서 휘두른 현철대도를 따라 격풍이 휘몰아치며 쏟아지는 화살들을 퉁겨냈다. 그리고 귀갑진을 친 보병들 위로 날아드는 장창들을 노려보며 내공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검은 기운이 그의 등골을 타고 올라가 발산되더니 온몸을 휘감았다. 칼바람과 같았고 모든 바람 줄기가 강기와 같은 경도를 가졌다.
흑풍명천마공 흑체마경.
타타타타탕-!
흑체를 이룬 순간 날아든 창들이 칼바람에 뒤틀려 박살이 나버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온몸을 그렇게 검은 바람으로 물들이며 그 사이로 두 안광만이 섬뜩하게 빛났다.
야율재를 바라보던 모든 사람은 그 모습에 일순간 행동을 멈춘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것은 흡사 전장에 강림한 저승의 사자(使者)이자, 죽은 사람과 죽을 사람마저 점지하려는 사신(死神)과 같았다.
퉁!
흑체를 이룬 야율재가 진각과 함께 앞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방패벽을 쌓은 일단의 보병무리들 전면으로 몸을 던지며 현철대도를 휘둘렀다. 그 현철대도의 칼날을 따라 이미 거대한 도강이 형성된 뒤였다.
콰자자작!
일격이 수십 명이 쓸려 나갔다.
강철의 방패도, 인간이 겹겹이 이룬 피골의 저항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의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드는 창들도, 화살들도 무용지물로 변해 버렸다.
범접할 수 없는 천하무쌍의 무장 야율재.
흑체마경으로 군사들의 공격에 무적이 되어버렸으니, 남은 건 사방팔방 몸을 날리면서 현철대도의 칼날 아래 죽음을 쓸어 담는 일뿐이었다.
쾅! 콰쾅! 쾅!
“끄아아악-!”
“아아악-!”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삽시간에 수백 명이 그의 칼날 아래 몰살을 당했다.
“크하하하하-! 다 죽어라! 죽어!”
살육의 광기에 지배당한 야율재를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대로면 수백이 아니라 수천, 수만이 그대로 학살을 당할 것만 같았다. 참상을 몰고 다니는 야율재의 모습에 심지어 뒤따라왔던 흑풍대조차 접근하기 두려워할 정도였다.
심규봉은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벌벌 떨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야율재는 그야말로 전신 그 자체였고, 마신(魔神) 그 자체였다. 그는 두 발을 떼고 도망칠 일말의 의욕조차 잃어버렸다. 빛을 잃은 두 눈동자는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병든 노인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군사들을 뒤로 물리세요.]
그 순간 청아한 여성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꽂혔다.
그것은 전음이었다.
무림의 신비한 능력을 몰랐던 심규봉은 뇌리를 강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둥대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뒤에서 달려오는 일단의 기마대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가 쳐다보자마자 가장 선두에서 말을 타고 달리던 한 여인이 푸른 장포를 펄럭이며 뛰어올랐다.
말의 머리를 가볍게 딛으며 뛰어오르자 푸른 그림자가 수 장을 뻗어 나갔다.
뒤따르던 기마대 사이에서 웬 막대기가 화살처럼 날아가더니 그녀의 발밑에 정확하게 이르렀다. 여인의 작은 발이 그 막대기를 밀어내며 다시 수 장을 나아갔다.
퉁!
지면을 밟은 시점에서 이미 심규봉과 매우 가까웠다. 그리고 그는 여인의 아름다운 용모를 보자마자 이 죽음만이 가득한 공포의 전장 한복판에서 잠깐이나마 넋을 잃고 바라봤다. 50여 년 인생 속에서 마주친 모든 여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그대로 뛰어올라 보병들이 머리 위로 세운 방패를 밟았다. 그렇게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을 때, 그녀의 온몸이 푸르른 광휘와 타는 듯한 벼락으로 휩싸였다.
파천신공 창천벽뢰.
날갯짓하듯이 휘두른 쌍장의 끝에 천서은이 일으킨 겁화멸마의 푸른 벼락이 야율재를 노리고 쏟아졌다.
꽈르르릉!
지축을 뒤흔드는 천둥소리와 함께 푸른 벼락의 기운이 야율재의 흑체를 찢어발기며 그의 전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갑작스레 나타난 강적의 등장에 야율재도 현철대도를 방패로써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 도신 위로 어느새 접근한 천서은의 벽력장이 다시 한번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