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제20장. 대회전(大會戰)의 전신(戰神)들 (3)
* * * *
한굴렬과 4500기의 흑풍대, 1만의 타타르족 군사는 사흘 뒤 야율재의 군영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소식은 첩보를 통해 신속하게 남양군에 전달되었다.
그 시기 남양군은 본래 전진 배치했던 진영을 철수하고 뒤로 후퇴한 뒤였다. 야율재가 소적문군에 도착한 다음 날 새벽 아침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야율재도 군 정비가 필요했고 흑풍대 숫자도 부족했기 때문에 곧장 추격하진 않았었다. 그리고 그들은 남양, 조태상이 야율재의 등장에 근거리에서 기습받을까 두려워 진영을 뒤로 옮겼다고 생각했다.
첩보를 받은 조태상은 그 타타르족 군사가 마지막 집결부대임을 직감했다. 시간을 더 보낸다면 추가 병력이 집결할 수도 있었지만, 두 차례에 걸쳐 수급된 2만의 병력은 적들이 단시간에 징집할 수 있는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남양군에서 출발한 전령이 야율재군 방책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 중간에는 전서를 담았다. 적군은 그것을 수거하여 돌아갔고 잠시 뒤에 화살을 쏘아 답신을 주었다. 그 답신은 진영으로 돌아와 남양과 조태상의 손에 들어갔다.
‘회전 수락.’
다음날 남양군은 이른 시간에 전군을 출격시켰다. 위치는 그들의 숙영지가 앞서 위치했던 장소였다. 그들이 도착하고 나서야 야율재군도 전군이 방책을 나섰다. 결전을 치르기 위한 몽골족, 타타르족, 거란족 병사들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마침내 야율재가 이끄는 군사들까지 결전의 장소에 도착했다.
드넓은 초원이었지만, 결코 평탄하지 못한 지형이었다.
양군이 대치 중인 위치는 각자가 다소간 높았지만, 그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어 만나게 될 지점은 보다 저지대였다. 전투가 길어지고 체력이 다하는 순간이 오면 쉽게 도망칠 수도 없는 그런 오목한 지형이었다. 또 군데군데 울퉁불퉁한 지형도 많으니 보병들의 기동이 여간 까다롭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이유로라도 승패가 결정 나지 않는 한, 죽어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지대였다.
양군을 모두 합쳐 10만이 넘는 대군의 격돌이었다.
횡으로 길게 늘어선 진형들, 보병을 전열에 궁병들을 후열에 배치하며 기병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돌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대회전을 치르기 위한 각오가 전군에 잔잔하게 퍼져 있었다.
남양과 조태상군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용기를 불어넣고 있었고, 야율재군은 흑풍대와 야율재가 적군을 쓸어버리며 승리의 길을 열길 바라고 있었다.
“전진하라!”
조태상의 외침에 마침내 군사들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무겁고 신중하게 초지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뒤따라 야율재도 전진을 명령했다. 그의 군 가장 최전선에 선 부족은 다름 아닌 타타르족이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전력으로 질주했다. 어차피 이렇게 전열에 배치가 된 이상, 죽을 각오로 싸워 살아남는 수밖에 없었다.
우와와와-!
타타르족과 몽골족들이 뒤를 받치며 맹렬하게 달렸다.
최선봉에 서서 전진하던 심규봉의 눈빛이 빛났다. 초지의 풀잎들 사이로 횡으로 가로지르는 하얀 선을 보았다. 며칠간 길게 뽑아 만든 하얀 천을 막대기에 묶어 표시해둔 것이었다. 천을 두 겹으로 하여 반대편은 풀잎을 빻아 물들여놓았으니 가까이 이르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려운 그런 표식이었다.
“멈추어라! 귀갑진을 펼쳐라!”
전진을 멈추고 방패를 앞세웠다. 그리고 멈추자마자 머리 위로 화살들이 날아갔다. 가까워지는 타타르족 군사들을 향해 쏜 화살들이었다. 조태상군의 합류로 늘어난 궁병들의 화살비는 빼곡하게 하늘을 메웠다.
타타르족은 방패를 들고 필사적으로 몸을 낮추었다.
퍼버버버벅!
타타르족 군사들은 요란하게 쏟아지는 화살들로 인해 쓰러지는 수백 명의 동족을 뒤로하고 다시 내달렸다.
그들에게 하달된 명령은 적 보병의 발을 묶을 것.
진형을 넓게 펼치며 일제히 달려가 난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수루이치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한굴렬의 독촉으로 이뤄진 사흘간의 필사적인 행군과 불과 하루밖에 쉬지 못한 탓에 온몸이 피로감으로 무겁게 짓눌린 느낌이었다. 그래도 다행인지 내리막 경사지의 도움으로 맹렬하게 돌격하긴 용이했다.
‘살아만 남으면! 살아만 남으면 돌아갈 수 있어!’
생환의 의지. 어떻게든 살아만 남는다면 야율재가 개입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부족으로 생환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앞에서 달리는 동료의 뒷모습, 좌우와 뒤를 따라오는 동료들 모두 수루이치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적군은 그 자리에 말뚝 박은 것처럼 방패를 내밀고 창을 세운 채 대기하고 있었다. 숫자가 그렇게 많음에도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회전이라면 응당 돌격하여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하거늘.
“돌격하라-!”
누군가의 외침을 따라 수루이치도 맹렬하게 외치며 내달렸다. 등골을 따라 정수리까지 치고 올라온 흥분의 열기에 온몸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전의를 불태웠다.
우지끈-!
나무의 균열 소리가 순간 타타르족 군사들의 귀에 스쳤다. 수루이치 앞을 달리던 군사들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수루이치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순간 2, 3장 정도의 폭으로 긴 땅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수풀과 진흙으로 촘촘하고 두텁게 다져 놓은 나뭇가지의 발판이 군사들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박살이 나버린 것이었다.
“아, 안돼-!”
수루이치의 발밑도 푹 꺼졌다. 허우적거리며 떨어지는 그 순간 아래를 바라보게 된 그의 눈앞에 구덩이 속 칼날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푸푸푹-!
내리막을 따라 달리는 병사들의 기세가 엄청났기에 무너진 발판 위에 있던 군사들뿐만 아니라 바짝 붙어 달리던 군사들도 잇달아 구덩이에 빠졌다. 그 밑바닥엔 세워진 칼과 창대들에 제일 먼저 떨어진 군사들은 모두 꿰뚫려 죽어 버렸다.
그 칼과 창대들은 야율신과의 전쟁이 끝나고 전장에 흩어진 못 쓰는 병장기들을 공손숙이 수레에 모아다 조심스럽게 옮겨온 것들이었다.
병영 내 길게 이어진 천막을 쳤던 건 바로 이 함정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부지불식간에 수천 명이 매몰되었다. 밑에 깔린 병사들은 자신의 위로 떨어진 병사들 때문에 압사당하였으며 다행히 다소간 위에 떨어진 병사들도 저들의 무게와 움직임들로 인해 허둥대었다.
매몰지의 앞뒤로 불과 2천여 명의 군사들만이 남아 있었으니 그 상황을 지켜보던 심규봉이 그 어느 때보다 큰 목소리로 외쳤다.
“돌격하라! 적들을 모두 파묻어 버려라!”
목에 핏발이 불거질 정도로 악을 쓰며 외쳤다. 전장에서 적의 예봉을 꺾어버릴 함정이 성공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본 병사들의 사기도 최고조에 달하였다.
우와아아아-!
마침내 보병대가 진군을 시작하니 구덩이에 매몰된 동료들 시체 위에 서 있던 타타르족 군사들의 눈에는 마치 잿빛 파도가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들의 거리는 멀지 않았고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간신히 호흡을 몇 번이었을 무렵에는 그들의 장창이 코앞에 이르고 있었다.
퍼퍼퍼퍽!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구덩이가 무너지기 전에 빠져나간 군사들은 불과 천여 명에 불과했고 동료들의 떼죽음으로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대부분이 칼 한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창끝에 찔려 죽었다.
구덩이 위에서 몸부림치며 빠져나가려는 군사들의 등이 심규봉 보병대의 창에 어김없이 꿰뚫렸다. 구덩이는 어느새 시체들로 가득 차 군사들이 건너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심규봉은 다시 구덩이 앞에서 멈춰 섰다. 시체들이 함정을 가득 매워도 고깃덩이의 물컹거림과 지면의 단단함과 비할 바는 아니기에 그 위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함을 자처하는 짓이었다. 그리고 심규봉군의 전진이 멈추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화살들이 날아가며 도망치는 타타르족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크크크……!”
야율재가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웃음과는 다르게 그의 얼굴엔 노기로 물들어 있었다.
조태상이 파 놓은 함정에 순식간에 타타르족 1만 군사 가운데 7할에 이르는 병사가 그야말로 증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뭐하냐?”
“예?”
싸늘한 목소리에 소적문이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계속 전진하라고 해. 저놈들이 오라고 손짓하고 있지 않으냐?”
살기등등한 목소리에 소적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흑풍대의 힘이 강하고 야율재가 만인지적 이상의 무공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치를 수 있는 전쟁은 아니었다. 또 살아남은 병사가 가능한 한 많아야지 승리를 공유할 수 있는 법이었다. 전쟁터에서 홀로 살아남은 것은 결코 승리라고 부를 수 없는 법이었다.
“소장이 몽골 군사들의 뒤를 받쳐 지휘하겠습니다. 놈들은 구덩이를 강물처럼 삼아 건너오는 우리를 상대로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려 하는 것입니다. 몽골 군사들을 좌우로 나누어 포위하듯 바깥으로 건너고 기마대가 외곽을 돌며 화살을 쏘면 효과적으로 적을 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면 적의 중앙은 방심할 것이니 대장께서 언제든지 노리기 좋을 것입니다.”
“……좋다. 흑풍대 2천 기도 같이 끌고 나가 언제든 전장에 합류하도록 해라.”
“예!”
소적문은 즉각 몽골군 1만을 전진시키고 적군의 추격을 받지 않는 타타르족 군사들을 후퇴시켜 몽골족 군사들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장수들을 시켜 군사를 둘로 쪼개면서 날개를 펼치듯 적군의 좌우를 감싸면서 진군하도록 했다. 대기하고 있던 1만 5천의 거란족과 몽골족, 타타르족으로 혼합된 기마대를 네 개의 부대로 재편한 후, 양쪽으로 나누어 출발시켰다. 자신과 흑풍대 2천 기는 기마대 우군에 섞여 같이 이동했다.
심규봉군은 양 측면으로 다가오는 군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면서도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함정은 제대로 먹혀들었고 그에 따른 적군의 후속 움직임도 예상대로였다.
보병대의 선봉을 심규봉이 이끌었다면 후군은 안호필이 지휘하고 있었다.
안호필은 선봉에서 신호가 오자마자 후군을 후퇴시켰다. 그리고 궁병들을 보호하기 위해 원형 방진을 쳤다. 선봉과 다르게 후군은 대방패를 들었으니 지면에 단단하게 박아넣고 창대를 세워 기병들의 돌진에 대비하는 한편 일부는 궁병들 사이로 들어가 적 기마대가 쏘는 화살에 대비했다.
“정말 예상했던 대로 움직이는군……!”
남양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조태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긴장을 잃지 않은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장군께서 적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착실히 정보를 수집해주신 덕분입니다.”
조태상은 남양의 공을 띄워 줬지만, 사실 남양이 가진 적군의 군사 지휘 방식 같은 정보는 별로 필요가 없었다. 이미 조강선을 비롯한 북방 전선에서 활약한 조씨 가문의 선조들이 정리해놓은 기록들로 적들의 움직임을 충분히 꿰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필요했던 것은 적군이 실제적인 움직임을 가져갈 때의 시의성(時宜性)이었다. 남양이 채워 준 것은 딱 그 정도였다.
일찍이 조가장 앞에서 미리 준비해 둔 함정으로 흑응대를 궤멸시켰던 것처럼 조태상은 전장을 미리 선점하고 함정을 준비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했다.
조태상은 야율신과의 전쟁이 끝나고서 며칠 쉬지도 않고 곧바로 진군시켰다. 그리고 회전을 치를 전장 위에 진을 치고 백여 장에 이르는 길이의 구덩이를 파고 그 위를 은폐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적군이 정면에서 돌격할 때의 돌파력을 죽이고 또 일거에 대군을 섬멸할 수 있다면 시작부터 전세를 아군으로 기울게 만들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그 계책이 성공한 것이었다.
“기마대가 움직입니다.”
마량이 적군의 움직임을 보고했다.
“흑풍대의 위치가 확인됩니까?”
“적의 우군 기마대에 흑풍대로 보이는 기마대가 보입니다.”
“조태번에게 좌측으로, 공손 장군께 우측 전장으로 출진하라고 하십시오. 목표는 적 기마대입니다.”
깃발이 펄럭이면서 본군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태번의 기병 4천이 움직였다. 공손숙의 기병 4천도 우군을 향해 움직였다.
조태상의 눈이 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기병의 숫자가 우리가 부족하니 안 장군의 보병들이 기민하게 움직여서 적의 기동 범위를 제어해야 합니다.”
“안호필 장군에게도 신호를 보내라.”
둥! 둥! 둥!
북소리와 함께 다시 깃발이 펄럭였다. 궁병대를 보호하던 안호필이 보병대 후군을 움직여 적 기병대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잡아먹기 위해 진형을 펼치면서 좌우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양측 병력의 진형이 빠르게 전개하니 마침내 점차 총력전의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야율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전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굴렬.”
“……예.”
“목소리가 왜 그러냐?”
야율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돌아보았다. 한굴렬이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는데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표정이 살짝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이 몸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출진할 때는 안 그랬잖아?”
“갑자기 오한이 조금 드는 것 같습니다. 싸우는 데는 문제 없습니다.”
“균은아, 네가 지휘를 맡아야겠다.”
“예, 오라버니.”
야율재는 신경질적으로 손바닥을 까닥거렸다. 야율균은과 한굴렬은 흑풍대 2천 기를 끌고 좌군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큭, 갑자기 왜 이러지.’
한굴렬은 출진할 때만 해도 몸 상태가 최상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어려움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행군하는 과정에서 햇빛을 계속 받자 급격히 상태가 나빠졌다. 야율재에겐 싸울 수 있다고 보고하긴 했으나 확신하진 못했다. 만약 그 자리에서 못 싸우겠다고 했다면 야율재의 월륜대도에 목이 잘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야율균은, 네가 수고 좀 해 줘야겠다.”
한굴렬의 목소리를 들은 야율균은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그녀가 가장 선봉에 섰기에 누구도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마치 극도로 혐오스러운 것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저건 틀림없이 중독 증세다.’
야율균은은 한굴렬이 어제까지 타타르족 대족장 메구진 세울투가 줬다는 호피 가죽 물통에 담긴 마유주를 계속 마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지난날 야율재가 메구진에게 협박조로 병력을 뜯어내던 걸 떠올렸다. 그때 메구진이 예수게이의 음독(飮毒)을 꾀했다는 걸 들어 알고 있었다. 만약 한굴렬이 호가호위하여 메구진을 핍박했다면 마유주에 독을 탔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죽어 버리라지.’
그녀에게 한굴렬을 걱정하는 마음은 먼지 한 톨만큼도 없었다.
그녀는 전장의 판도가 패색이 짙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물론 아직은 어렴풋이 보일 정도였다. 이 전장의 신적인 존재가 아직 때를 가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아아아아!
기세를 유도하지도 않았는데 그녀를 따르는 흑풍대가 갑자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야율균은이 우측을 돌아보니 야율재와 남은 천 기의 흑풍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풍대의 신, 흑풍신마 야율재가 마침내 전장의 판도를 바꾸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야율재는 정확히 전장의 중앙을 달렸다. 타타르족 수천이 파묻힌 구덩이를 뛰어넘어 적군 한 가운데로 뛰어들 작정이었다. 고작 천 기로 2만 보병의 방진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지만, 그 선봉에 야율재가 선다면 얘기는 달랐다.
야율신이라면 방진을 관통하여 난전을 피하는 것을 선택했겠지만, 야율재는 기꺼이 난전을 선택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전장의 한복판을 휩쓸고 다닐 것이며 흑풍대는 결집하여 자유롭게 싸울 것이었다.
그야말로 천하무쌍(天下無雙)이리라.
과연 누가 야율재를 막을 수 있을까?
야율균은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공손숙의 기병대와 안호필의 보병대가 이끄는 전장에서 몽골족 기마대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야율균은은 흑풍대를 이끌어 산자락 가장자리까지 크게 선회하였다. 그렇게 고지를 점유하였다가 내리막길을 이용해서 맹렬한 기세로 공손숙의 기병대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두두두두!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을 크게 돌아가던 야율균은이 좌측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본능에 따른 것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른 산자락 너머에서 일단의 기병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매복인가? 아니…… 그 유군이 된 별동대구나.’
영은성과 최현걸은 산속을 맴돌다가 팽무양의 유군과 합류하여 다시 별동대를 구성하였다. 그런 그들이 숨어 있다가 야율균은의 흑풍대 2천 기가 돌진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옆구리를 치기 위해 튀어나온 것이었다.
“무시하고 돌격한다! 그대로 적군을 뚫어라!”
야율균은이 호기롭게 외치며 두 자루 만곡도를 뽑았다. 그녀를 선봉으로 한 흑풍대가 공손숙의 기병대로 가 충돌했다.
콰콰콰콱!
흑풍대는 중갑 기마대였다. 그 무거운 돌파력과 흑풍대의 무공이 합쳐진 그 기세는 기병의 말과 병사의 도합 무게가 상당함에도 공중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충돌에 찢겨서 사방으로 흩날리는 피륙의 파편들 사이에서 야율균은의 만곡도가 검은 바람을 일으키며 춤을 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