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 제20장. 대회전(大會戰)의 전신(戰神)들 (2)
* * * *
복귀하자마자 말에서 내려 서둘러 야율재를 찾은 소적문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몸엔 부서진 갑주가 너덜너덜하게 매달리듯 입고 있었고 몸에는 여기저기 작지만 검상과 혈흔이 있었다. 대부분의 혈흔이 얼마 되지 않은 상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지만, 소적문은 그가 어떤 격전을 치르고 온 것인지 감히 상상하기 힘들었다.
야율강에게 대련할 때는 종종 있던 일이지만, 그가 죽고 야율재가 흑풍대장을 맡은 뒤로는 부상이라는 것을 더는 떠올릴 수 없던 일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십니까?”
“아아, 별거 아니야. 오랜만에 재밌게 싸웠어. 크하하!”
야율재가 대수롭지 않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군영의 군사들은 그의 모습에 적잖이 놀라웠다.
그뿐만 아니라 함께 온 흑풍대 가운데 상당수의 병사와 군마가 부상들을 안고 돌아왔고, 500명 가운데 스무 명 남짓한 숫자가 사망했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그들은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고 아무리 큰 전투라 할지라도 사망자는 언제나 손에 꼽을 정도였다. 초기 야율강이 거병할 때 출발했던 5천 기의 숫자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9할 이상이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모습은 야율재와 흑풍대라는 존재가 짧은 몇 년간 무적의 장수, 무적의 부대로서 휘날린 공포의 명성에 균열이 생겼음을 의미했다. 군영 대부분이 몽골족을 위시한 기타 유목민족들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은 병사들 사이에 조용하게 일파만파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너는 몰골이 왜 그러하냐?”
야율재가 소적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임에도 얼굴과 머리카락 등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고 흑갑의 겉면이 여기저기 찢어져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등에 멘 대부도 칼날에 이가 빠진 것이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단기로 싸우고 왔는데 적군에 새로 합류한 적장 조태번이란 놈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났습니다.”
“뭐야, 설마 진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 하하!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
소적문이 진땀을 흘리면서도 손사래를 치며 웃어넘겼다. 야율재는 미심쩍은 눈으로 보았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소적문은 야율균은과도 인사를 했다. 세 사람은 이내 파오로 들어가 현재 전황을 공유하였다.
“군사 규모로만 보면 적군은 7만이 훌쩍 넘고, 저희는 수습하신 지원군을 합쳐도 3만을 조금 넘는 숫자입니다. 적군엔 조태상과 조태번이라는 두 형제 장수가 합류했는데 각각 지장, 맹장 과인 것 같습니다.”
“흥, 지장은 무슨.”
야율재가 코웃음을 쳤다. 야율신이 있었다면 언제나 옆에서 다소간의 신중함을 보탰겠지만, 그가 죽은 이상 아무도 그런 목소리를 낼 사람은 없었다. 그동안 야율신의 의견이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야율재와 흑풍대의 무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크게 중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이었다.
야율균은만이 회의 속에서 그 빈자리를 느끼고 있었다.
“천호대는? 녀석들이 조금 귀찮은 부대인데.”
“첩보 활동이 여의치 않아 정확한 정보가 부족합니다만, 놈들이 군영을 코앞까지 전진 배치한 후에 계속 도발을 해 왔는데 천호대는 없었습니다.”
“흐음, 그럼 그놈들 속에 있었다는 건가?”
야율재는 시라무렌 강에서 도망친 부대들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흉갑도 걸치지 않은 평복 병사들의 모습이 기억나는 것 같았다.
“천호대는 지원군을 급습했던 부대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망친 그놈들이 본진에 합류할 수도 있지만, 유군으로 움직이다가 우리 뒤를 노릴 수도 있다.”
“군을 이끌고 수색을 해 볼까요?”
“산속에 숨어들었는데 무림고수들이 섞여 있는 부대니 흑풍대를 데려가도 돌격할 수 없어서 불리한 싸움이 될 수 있다. 차라리 남양이 대군을 모두 이끌고 나왔으니 회전에서 모두 끌어들여 쓸어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천호대장인 팽무양의 무공이 그럭저럭 뛰어나니 균은이와 한굴렬이 기다렸다가 맞이해 싸우면 될 것이다. 조태번이란 놈은 네가 맡고.”
“알겠습니다.”
소적문이 대답하고 야율균은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굴렬의 이름과 같이 엮이자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타타르족 쪽으로 전령을 보내 혹시 한굴렬의 징집이 늦어지지 않았는지 확인하도록 해라. 내가 직접 강제 명령을 내렸으니 지금쯤이면 군사를 모아 출발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닷새 내에 출진할 수 있으니.”
“나가면 바로 보내겠습니다.”
“아까 얘기한 조태번과 팽무양을 맡기 위해 너희는 각각 흑풍대 2천 명씩 담당하도록 해라. 원군으로 추가 2만이 합류하면 흑풍대 천 기와 함께 내가 직접 적군 모두를 싹 쓸어버리겠다. 그 이후 남벌(南伐)을 시작할 것이다.”
“남벌이요?”
소적문이 놀라 물었다. 그는 그들의 군이 초원에서 계속 장성 주둔군을 건드려 견제하는 역할만 할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율재는 그를 향해 씩 웃었다.
“화북지방을 정벌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황제, 균은이는 공주가 되고 자네와 한굴렬은 내 좌장과 우장이 되는 것이지. 어떤가?”
“아하, 하하하하! 명쾌한 복안이십니다!”
소적문이 웃음을 터뜨려 야율재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나 그의 속내는 달랐다.
소적문은 야율재의 무공에 경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정치와 군사의 영역을 구분할 눈은 있었다. 전장에서 맹장으로 백전백승을 한다고 하더라도 국가를 운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초원에서 유목민족들이 쉽게 부족 간 통일이나 단일지도체제를 갖추지 못하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유목 생활을 하는 환경 탓도 있지만, 부족장들이 싸움만 할 줄 알았지 모두를 아우를만한 정치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국이나 금국조차도 거란과 여진이라는 자기들 부족의 이익만 대변한 채로 나라를 세운 마당에 중원의 한족들 위에 거란족인 야율재가 몽골족 군사를 이용하여 점령하고 다스린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황제라고? 정치를 모르는 야율재가?’
소적문은 감히 그의 의견을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에 동조하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도 일말의 불안감이 싹트고 있었다.
* * * *
“메구진 세울투! 나랑 지금 장난하자는 거냐? 아앙!?”
한굴렬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치는 소리에 파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타타르족 부족민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숙영지 밖에서는 흑풍대가 서슬 퍼런 칼날을 벼르고 있으니 불안감이 초마다 증폭하는 중이었다.
이 병영에 모인 군사가 1만을 조금 넘는 수준이라고 하나 그들 정도로는 학살당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파오 안에서는 한굴렬과 메구진 단 두 사람만이 있었고 메구진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벌벌 떨고 있었다.
“한 장군님, 부디 고정하십시오.”
“약속과 다르지 않으냐? 대장께서는 분명 타타르족의 2만 정병을 요청했다. 그런데 고작 절반 모아 놓고 이 정도로 만족하고 떠나라?”
메구진은 공포심 때문에 가슴이 턱턱 막힐 정도였지만, 최대한 숨을 고르면서 입을 열었다.
“저도 그렇게 해드리려고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동쪽에 있는 사이만 족장에게서 금국의 병사들이 저희의 부족민들을 약탈하고 있다는 서신이 왔습니다. 그들을 막기 위해서 최소 한 달 정도는 차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 여기 서신을 좀 봐주십시오.”
메구진은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어 손에 쥐었다. 그리고 엉금엉금 한굴렬의 발 앞까지 기어가 양피지 든 두 손을 벌벌 떨면서 머리 위로 올렸다.
탁!
한굴렬은 성난 얼굴로 양피지를 낚아챘다. 위로 흘끔 쳐다보는 메구진의 눈에는 그의 못생긴 얼굴이 더욱 무섭게 비쳤다.
한굴렬은 양피지를 펼쳐 내용을 읽어 보았다. 그도 몽골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에 적힌 내용에 거짓이 없음을 확인했다.
“이, 이것들이 나를 단체로 농락하려 하는구나!”
한굴렬은 양피지를 메구진의 뒤통수로 집어 던지고는 그의 어깨를 걷어차 버렸다.
“억!”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메구진이 뒤로 나뒹굴었다. 그는 다시 바로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장군. 저희가 하루빨리 금국의 침략을 저지하고 서둘러 지원군을 마련하겠습니다. 수일간 시간을 좀 더 들이면 3, 4천 명은 추가로 조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부디 통촉하십시오.”
한굴렬은 매우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협박을 계속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때 파오 안으로 병사 한 명이 들어왔다. 한굴렬은 그가 거란족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대장께서 보내셨느냐?”
메구진이 그 말에 놀라 흠칫 어깨를 떨고는 고개를 들었다.
병사는 바로 야율재가 보낸 전령이었다.
“예, 그런데 아직 출발 안 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전령이 말을 하면서 메구진을 힐끔 보자 한굴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메구진도 전령, 한굴렬과 차례로 눈이 마주치며 당혹스러운 빛이 표정에 떠올랐다.
“이 못난 놈 같으니라고!”
퍽!
한굴렬이 다시 한번 메구진을 걷어찼다. 벌러덩 나자빠지고는 다시 헐레벌떡 엎드리는 그의 모습은 보기에 꽤 습관적이기도 했다.
그만큼 연기를 잘했기 때문에 야율재의 폭정에서 무사히 타타르족의 대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무리한 요구를 받는 마당에 전령이 보는 앞에서 걷어차이자 감내할 수 있는 치욕이 슬슬 한계선에 이르고 있었다.
“이놈아! 당장 군사들 행군 준비부터 시키거라! 물자들도 서둘러 준비하고! 네놈이 굼뜨게 굴었으니 이리 늦어진 것이 아니냐!”
“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메구진은 또 걷어차일까 두려워 허리를 깊이 숙인 채 서둘러 파오 밖으로 나왔다. 부족 사람들이 모두 대족장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은 노기로 붉으락푸르락했다.
“군사들에게 출정 준비를 하라 일러라! 그리고 준비한 말짐, 말짐들은 어딨느냐? 점검해야겠다.”
메구진은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숙영지 한쪽에 정리된 말에 실을 짐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잠시 살펴보더니 함께 따라온 하인을 돌아보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호피로 장식한 내 가죽 물통에 가장 좋은 마유주를 가득 담아오너라. 한굴렬 장군께 직접 바칠 것이다.”
하인은 서둘러 나갔다가 몇 분 후에 다시 돌아왔다. 불룩 배가 부른 가죽 물통의 무게가 상당했다. 겉면엔 호피가 덧대어져 있는데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넌 나가 보거라.”
하인은 인사를 하고는 멀리 떨어지자 메구진은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아기던 가죽 물통을 잠시 빤히 바라보다가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숙영지 밖으로 1만 군사가 정렬하였고 흑풍대가 절반으로 나뉘어 군사들의 선봉과 후군에 배치되었다. 그 모습을 잠깐 쓱 훑어본 메구진은 저들의 배치가 군사들의 탈주를 감시하기 위한 것임에 눈에 뻔히 보였다.
사실 이러한 모습을 한두 번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눈에 확 띄는 것이 잡쳐 버린 기분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도 알 수가 없었다.
흑풍대의 숙영지는 모두 정리가 되어 자신들의 말에 실었고, 메구진 측에서 준비한 말짐들은 그의 타타르족 군사들 말에 모두 실어 놓은 상황이었다.
“그건 뭐냐?”
한굴렬의 목소리에 메구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한굴렬의 시선이 자신의 가죽 물통에 꽂혀 있음을 눈치챘다.
“장군께서 저희 부족을 배려해 주신 데에 대한 간소한 답례입니다. 원래 제가 애지중지하던 물건인데 특별히 가장 질 좋은 마유주를 담아 장군께 바치고자 합니다.”
“흥! 내놔 봐라.”
한굴렬은 냉큼 메구진으로부터 가죽 물통을 넘겨받았다. 호피가 정교하게 덧대어져 있었고 마개에 달린 작은 이빨 장식엔 빛나는 돌이 박혀 있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개를 열자 진하고 자극적인 주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최상품의 마유주라는 것이 향기에서 절로 느껴졌다.
한굴렬은 메구진을 흘겨보고는 입맛을 다시며 가죽 물통을 허리띠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군사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행군을 준비하라!”
한굴렬이 외치자 쉬고 있던 병사들이 바로 서서 떠날 준비를 하고, 말에서 내려서 있던 흑풍대 병사들도 일어났다.
메구진은 조금 조마조마해졌다. 한굴렬의 뒤로 흑풍대 병사들이 자신의 부인과 네 명의 자식들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겐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 맏이도 나이가 열다섯이 넘지 않아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였다.
“자, 장군. 제 가족들은…….”
한굴렬은 그의 말을 대충 듣고는 병사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이내 메구진의 자식들이 뛰어가 부친에게 달려갔다.
메구진이 크게 기뻐하며 자식들을 얼싸 끌어안았다.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으니 그간의 그의 걱정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표정에 불안한 감정이 떠올랐다.
“장군, 제 부인도… 풀어주셔야…….”
메구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한굴렬이 왼손으로 부인의 턱을 움켜쥐는 모습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한굴렬이 피식 웃었다.
“2만 군사를 요구했는데 그 절반만 주었다면 나도 절반만 돌려주는 게 서로 타산이 맞지 않겠느냐? 이 몸이 널 위해 얼마나 기다려 주었더냐, 응?”
“그, 그, 그…… 닷새 안에 어떻게든 5천 명을 만들어 지원하겠습니다!”
“늙을 대로 늙어 뼈가 삭은 노인네들까지 보내려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어린 애들로 보내려고? 어디 병사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더냐?”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서든…….”
“네 부인 살리겠다고 남의 자식 사지로 보내겠다는데 원래 부족 전사가 아니라면 그것 말고는 달리 수가 없지 않으냐?”
“저, 저는……!”
메구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1만의 타타르족 군사들, 숙영지에서 출진을 배웅하려는 부족민들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더는 뭔가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고 느껴지면서 메구진의 얼굴엔 절망감이 떠올랐다. 그리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부군을 바라보는 부인은 그만 눈을 감고 체념했다.
메구진은 자식들이 돌아서지 못하게 한 채 얼굴을 가슴에 파묻도록 팔로 감싸 안았다.
스걱!
오른손의 단도가 무정하게 메구진 부인의 목을 그었다. 메구진의 부인이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지만, 울컥울컥 쏟아지는 핏물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눈물과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메구진을 보면서 쓰러졌다.
한굴렬은 메구진이 선물로 준 가죽 물통을 들고 마개를 열었다. 그리고는 시체 위로 안에 든 술을 뿌렸다. 그 순간 메구진의 눈빛이 강하게 떨렸다.
한굴렬은 모든 술을 제주(祭酒)로써 다 뿌리지 않았다. 2할 정도만 부었을 뿐 금방 거두더니 입에 대고 꿀떡꿀떡 마셨다.
“크으, 자네 부인의 제사주로 괜찮은 술인 것 같군. 자네가 준 술이니 자네 부인도 기뻐할 게야.”
한굴렬은 피 묻은 단도도 부인 시체 옆에 던졌다.
“불만이라면 내 등을 찌를 기회를 주마. 최소한 여기 있는 누구도 네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원망 어린 메구진의 눈빛을 조소로 받아내면서 거리낌 없이 뒤돌았다. 그리고 흑풍대 병사와 함께 자신의 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메구진은 그 단도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충분히 달려가 단도를 들고 등에 칼을 꽂을 거리와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을 시행할 수 있겠는가? 한굴렬이 자신의 말을 지킬 리 만무하거니와 야율재의 보복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크하하하!”
메구진이 단두를 들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 한굴렬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 안장 위에 올랐다. 그제야 메구진은 간신히 아이들을 하인들에게 맡기고는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며 부인의 시체에 다가가고 있었다.
한굴렬과 군사들은 출발했다. 그는 출발 직전에 다시 한번 메구진의 가슴에 쐐기를 박고 떠나갔다. 타타르족 전체가 두려움에 휩싸였다.
“네가 말한 군사 5천을 닷새 안으로 만들어 오지 않는다면 피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