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 제19장. 피로 물드는 시라무렌(潢水) 강 (5)
야율균은은 오들오들 떨리는 몸을 이끌고 숲 쪽까지 터덜터덜 걸어갔다.
직전에 있었던 경력의 폭풍에 의해 나무들의 마른 가지들은 부러지고 쌓인 눈도 흩어져 흙바닥이 곳곳에 드러날 정도로 눈앞의 경관은 엉망이었다. 그러나 온갖 굉음과 칼날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는 등 뒤의 소음에 비해 눈앞의 자연은 그래도 고요해 보였다.
야율균은은 사람 몸집만 한 돌부리에 이르러 털썩 주저앉고 나서야 비로소 야율재와 진도건의 대결을 바라보았다.
야율균은의 야율재와 호각으로 맞설 수 있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그녀는 한때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야율재의 폭정은 부담스러울 지경이어서 오라버니 야율신이 그 대신 흑풍대장이 되어 준다면 정말 즐거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야율신이 흑풍대 모두를 이끌고 야율재를 상대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은 오늘에 이르러 산산이 깨어졌다. 단 몇 수에 불과했으나 전력을 드러낸 야율재의 무공은 흑풍대 전체, 어쩌면 과장 조금 보태어 몽골 초원 전체와 맞설 수 있다 해도 의심할 수 없는 그런 경이적인 수준이었다.
야율재가 마치 검게 물들어 버린 땅의 신 에제라고 한다면 진도건은 공중을 유영하며 비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마치 하늘의 신 텡그리를 떠올리게 했다.
두 신의 격돌.
그 격돌의 승기는 아무래도 에제에게 기울어져 있는 것 같았다.
진도건의 검은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야율재가 현철대도에서 월륜대도로 바꾸면서 그의 도속도 빨라졌지만, 진도건에 비교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도건의 검은 야율재의 몸에 닿지 못했다.
‘크으……, 이거! 늙은 스승보다 더한 놈이로구나.’
야율재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전장의 치열함 속에서 단련되지 않았다면 반응하기 힘들 정도로 진도건의 쾌검은 압도적이었다. 그가 살아온 환경은 실상 전장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고수라고 한다면 부친이자 스승인 야율강 밖에 없었다.
야율강과 대결로 실력을 키워 왔기 때문에 상대적인 강자에 대한 적응이 몸에 배어 있었다. 만약 일생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왔다면, 또 조강선을 미리 만나 보지 못했다면 진도건의 검격에 반응도 하지 못하고 목이 잘려 나갔을 것이 분명했다.
조강선의 쾌검도 압도적이었는데 진도건은 그보다 반 치는 더 앞서는 느낌이었다. 검력의 무게가 다소 부족한 데다 야율재가 조강선과의 대결 이후로 준비한 것이 있지 않다면 분명 금방 치명상을 입었을 것 같았다.
흑풍명왕마공 흑체마경(黑體魔竟).
흑풍신마의 자리를 이어받고 기꺼이 천마신교 구종(九宗)의 한 사람임을 인정받았음에도 내공의 크기나 무공의 상성이 아닌 육신의 한계 이상의 속도를 체험할 줄이야.
그 빛살처럼 날아드는 검격을 막기 위해선 일으킨 흑풍으로 온몸을 두르고 강기로써 순환시키는 것.
고정된 강기의 벽이 아닌 바람으로써 존재하게 하여 매우 강력한 반발력을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반응속도를 뛰어넘고 파고드는 쾌검을 막아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것을 완성하기 위한 고민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두 사람의 표정에서 드러났다.
자신감이 넘치는 야율재와 당혹스러워하는 진도건.
‘일월신마의 호신강기보다 반발력이 비교도 안 되게 강하다……!’
카카카캉!
두 사람의 도검이 엇갈릴 때마다 불꽃이 거칠게 튀었다. 월륜대도만이 아니라 야율재의 흑체(黑體)에 부딪힐 때마다 홍무검이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키앙-!
다시금 거칠게 울부짖는 검명.
월륜대도와 홍무검 사이의 충격파와 더불어 진도건의 신형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일부러 한 박자 늦추어 강검을 휘두르면서 그 반발력으로 거리를 벌리려 한 것이었다.
“어딜!”
야율재가 둘 사이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 들어갔다. 그러나 틈이 벌어진 것은 분명했고 진도건은 그것을 잘 활용했다.
한층 더 증가하는 파천신공의 기운을 정교하게 분출시키며 홍무검의 검신을 둘렀다. 무공을 익힌 이후 처음으로 검기성강을 이룬 것이었다.
콰쾅!
흑색 도강을 뽑아 낸 것은 야율재도 마찬가지였다. 두 강기의 연속된 추돌로 엄청난 충격이 두 사람에게 전해졌다.
‘검강의 유지에 소모되는 내공이 크구나……!’
야율재의 도강과 부딪칠 때마다 하마터면 검강이 깨어질 뻔했을 정도로 진도건은 하단전에서부터 내공이 검에 빨려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야율재도 비슷한 기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흑체마경에 도강까지…… 이거 잘못하면 한계를 시험하겠구나.’
흑체마경이 아무리 발산된 기를 다시 수용하여 순환한다고는 하지만, 그 유지력은 평범한 도강 하나 뽑아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공이 많이 들었다.
재차 도격과 검격을 주고받는 사이 진도건의 한 박자 빠르게 전개되는 검강의 참격이 흑체에 꽂혔다. 굉음과 함께 충격이 전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몸에 닿지 않자 야율재는 다른 수를 내기로 했다.
챙!
크게 한 달음 전진하며 휘두른 월륜대도가 진도건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순식간에 그 사이로 나타난 홍무검에 막히며 불꽃을 튀겼다. 그리고 월륜대도는 팽그르르 회전하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뭣……?’
월륜대도가 날아가 버린 사이, 휘몰아치는 흑체 속에서 안광을 번뜩이며 달려드는 야율재를 피해 물러나던 진도건은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검속에서 압도하나 검강은 아직 흑체를 뚫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경공은 어떠할까?
물러서는 진도건에게 야율재는 바짝 붙었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검의 거리가 아닌 권각의 거리였다.
월륜대도로는 일초에 일격을 가한다면 쌍수를 활용하면 그 두 배의 효과를 노릴 수 있다. 게다가 검강이 흑체를 뚫어내지 못하는 이상 진도건의 쾌검도 결국 무용지물이다. 오직 하나의 불리한 점은 흑체 유지를 위한 내공 소모가 크다는 것인데 진도건에 비하면 살아온 시간이 훨씬 길기에 고작 그것으로 쓰러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카카캉! 카캉!
휘몰아치는 흑체는 닿는 것으로도 살점이 뜯겨 나갈 수 있었다. 이를 이용하려던 야율재는 때리고 차기보다 붙잡기 위한 금나수 위주로 공세를 펼쳤다. 타격은 오히려 거리를 벌리는 수단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좁아진 거리 속에서 진도건의 검도 빛살같이 움직였다. 마치 다가오는 어둠을 물리치려는 듯 검광이 연이어 번쩍거리면서 야율재의 출수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대단한 놈이구나!’
야율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적수공권으로 변환하면서 같은 시간 내 퍼붓는 공수의 수가 훨씬 늘어났음에도 진도건의 쾌검은 그 좁은 거리 속에서 그의 공수를 막아내고 있었다.
‘잘못 생각했구나…….’
반면 진도건은 궁지에 몰려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쾌검의 검속은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검강마저 날카롭게 유지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검격 하나 몸에 닿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 홍무검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흑체에 충돌할 때마다 그 충격이 강기의 장벽을 뚫고 검신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데, 홍무검의 신음이 쥐고 있는 오른손을 통해 전해지는 듯 했다.
이미 온몸은 땀에 가득 젖었고, 얼굴은 퀭해져 극한의 한계를 다투고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 상황이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카앙-!
가슴으로 파고드는 야율재의 손을 예측하고 검을 휘둘러 다시금 한 걸음만큼의 거리를 확보했다. 또다시 좁혀들려고 하지만, 반복된 수법이었기에 예측하고 검을 내질렀다.
카앙-!
강한 충격과 함께 이번엔 두 걸음 거리만큼 확보한다. 찰나 발생한 틈 속에서 최대치로 파천신공의 힘을 끌어냈다.
크게 몸을 펼치며 득달같이 달려드는 야율재를 향해 진도건은 마지막 수를 펼쳐 냈다.
천뢰삼검식 뇌광추(雷光錐).
파천신공 그 벽력의 기운이 홍무검에 모였다. 일점을 노린 찌르기가 좌우로 날아드는 손아귀보다 먼저 빛살을 그리며 명치를 찔렀다.
카카칵!
소용돌이치는 흑체로 검극이 박히는 순간 격렬한 반발에 검신이 요동쳤다.
‘통하지 않…….’
야율재의 생각이 멈췄다.
갑자기 푸른 섬광들이 시야를 가린다는 착각이 드는 순간, 거대한 경력이 연달아 흑체를 때렸다.
콰콰콰콰쾅!
검신에 박히자마자 한 박자 늦게 쏟아지는 강기가 야율재의 전면을 때렸다. 파천신공과 결합한 뇌광추의 검강이 느닷없이 쏟아지며 진도건을 붙잡으려는 두 팔마저 튕겨냈다. 짧은 순간 격렬하게 몰아치는 벽력의 강기에 흑체의 돌풍이 벗겨질 정도였다.
“크윽!”
비산하는 핏방울들은 야율재의 것이었다.
검극이 마침내 흑체를 뚫고 흑갑에 닿은 순간, 진도건이 온 힘을 다하여 검을 휘둘렀다.
슈슈슈슉-!
퍼버버벅-!
전신을 가로 새기는 검광, 연이어 북 터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얼굴을 가린 두 팔의 완갑, 몸과 다리를 가린 갑주들이 잘려 나가며 핏줄기가 솟구쳤다.
“베었나……?”
무의식적인 중얼거림이 진도건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퉁!
짧은 거리, 진각음과 함께 야율재의 신형이 진도건에게 바짝 좁혀졌다.
“큿!”
침음성을 삼키며 검광이 번쩍였지만, 순식간에 다시 팔을 휘감아 버리는 흑체마경에 가로막혔다. 전신에까지 흑체마경이 이르진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더 빨랐던 야율재의 반응 아래 마침내 두 손으로 홍무검의 검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콰드득!
흑체의 경력이 집중되며 홍무검의 검신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보호할 수 있는 검강은 없었고, 이미 반발력에 의한 충격이 누적되어 있어 여지가 없었다.
야율재의 두 주먹이 번갈아 치고 들어갔다.
진도건은 본능적으로 한 뼘 남짓 남은 홍무검을 들고 휘둘러 보았지만, 역부족임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쾅!
“크헉!”
야율재의 우권이 토막 난 칼날에 막혔지만, 좌권은 그대로 명치에 꽂혀 버렸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과 함께 진도건이 입으로 피를 토해 냈다.
“크하하하!”
완전히 승기를 잡은 야율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두 손이 무섭게 다시 들이닥쳤고 결국 홍무검을 놓은 진도건도 두 손으로 맞상대했다. 익숙하지 않은 권각임에도 압도적인 쾌검을 구사하던 신체 능력은 어디 가지 않았다.
파파팍-!
엄청난 속도로 공수가 오고 갔다.
박투의 영역에서 두 사람의 격돌이 팽팽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겉보기에 그런 것일 뿐 어디까지나 위태로운 것은 진도건이었다.
퐈아아!
야율재의 뒤에서부터 갑자기 검은 마기가 장막처럼 펼쳐졌다. 어떤 예견 징후도 찾아볼 수 없었던 탓에 그것을 포착한 진도건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어지럽게 얽히는 적수공권의 공방 속에서 섬뜩한 마기가 순식간에 두 사람을 에워쌌다.
“끝이다.”
야율재의 싸늘한 목소리가 닫힌 공간 속에서 울려 퍼지자 진도건이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전방위 어디에서 어떤 기운의 침습이 이어질지 모르는 경계심 가득한 상황 속에서 그 불안정을 파고든 야율재의 손바닥이 마침내 진도건의 가슴에 닿았다.
흑풍명천마공 명공흑풍장(冥孔黑風掌).
흑체가 발현하듯 소용돌이치는 파괴적인 경력이 우장의 장심에서부터 터져 나갔다. 검은 피를 뿜으며 충격에 떨어져 나가는 진도건의 신형이 장막에 닿자 순식간에 돌풍처럼 변하며 그의 온몸을 할퀴었다.
꽈앙!
육중한 일격이 꽂힘에 튕겨나간 진도건의 육신이 그대로 절벽에 쳐박혔다. 거기에 더해 다시 한번 야율재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공중에서 내리깔아 보며 양손을 넓게 펼치니 검은 바람이 양측에 휘몰아치며 밀집했다.
흑풍명천마공 명왕천환(冥王天環).
쌍수가 교차하며 뿜어져 나간 흑풍의 줄기가 진도건 앞에 맞닿았다. 두 줄기 돌풍이 마주쳐 더 큰 바람의 고리를 만들어 내더니 일대에 강력한 풍압을 형성했다.
콰아앙-!
경력의 폭발이 일어나며 진도건의 신형이 마치 압사시킬 듯이 바위 절벽 속으로 파묻혔다. 그리고 절벽의 다른 곳곳마저 균열이 발생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쏟아지는 바위 더미를 피해 야율재가 뒤로 몸을 날렸다. 절벽의 한쪽이 박살이 나며 쏟아지니 그대로 파묻힌 진도건의 주변에 그대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매몰되어 버린 것이었다.
“하아, 하아……. ……크하하, 아하하하핫!”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야율재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승리의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전에 다시 겪어 보지 못한 기쁨의 환희가 온몸을 찌릿찌릿 타오르게 했다.
야율재가 웃음을 흘리며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굳이 죽음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무공은 완벽하게 적중했고 그 내상으로 이런 거대한 바위 무덤 속을 견딜 수는 없었다. 이미 떨어지는 때의 충격으로 죽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멀리서 지켜보던 야율균은도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터덜터덜 걸어갔다. 멍한 표정으로 무너진 절벽에 묻혀있을 진도건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허무한 감정이 그녀 마음속에 맴돌고 있었다.
‘복수는 끝이 난 것인가……?’
누가 보더라도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싸움의 결과였다.
한쪽으로 피해 있었던 흑풍대는 부상자들과 말들을 돌보면서 대오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부장 한 사람이 야율재에게 다가왔다.
“도망친 놈들을 쫓을까요?”
“그 꼴로 쫓아다닐 수 있겠느냐? 정비부터 해라. 그리고 멀쩡한 놈들은 나와 함께 시라무렌 강으로 돌아가 군사들을 수습한다. 너희는 균은이와 함께 천천히 오거라.”
야율재가 부장에게 핀잔과 함께 명령을 내리고는 시선을 돌려 야율균은을 보았다.
“복수가 기쁘지 않으냐?”
“……기쁩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괜찮다마다. 크크, 그래도 오랜만에 재밌는 싸움이었다. 가자, 군사들을 수습해야지.”
두 사람은 곧장 흑풍대원들이 끌고 온 말에 각자 올라탔다. 그리고 흑풍대는 얼마 되지 않은 사망자를 바닥에 버려둔 채 장내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시라무렌 강 유역으로 돌아가 사방에 흩어져 도망치려는 몽골군 군사들까지 수습하기 시작했다. 아바카와 함께 남아 있던 소수의 장수가 그나마 군사들을 수습해 놓고 있었기에 수고를 덜 수 있었다.
2만 명으로 출발한 군사는 만여 명이 조금 넘는 수준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야율재의 분노를 다시 한번 일으켰다.
군사들을 다시 추리는 동안 흩어졌던 흑풍대원들은 탈주한 몽골 병사들을 잡아 왔으니 백여 명이 넘었다. 그리고 야율재의 분노 아래 모두 동족이 지켜보는 앞에서 단칼에 처형되었다. 흑풍대원들이 현장에서 쫓다가 죽인 탈주병만 해도 수십 명에 달했을 것이 분명했다.
태양이 서산으로 기우는 가운데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피로 물든 시라무렌 강을 따라 야율재와 군사들이 행군을 이어갔다. 아바카를 포함한 몽골 군사들은 큰 패전으로 지쳐 있었는데 탈주병들의 처형이 그들 마음 한구석에 있던 무언가를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반란이나 꿈꿀 수 있을까? 진도건과의 싸움으로 피 칠갑을 한 야율재의 모습은 사신과 같았으니 감히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엄청난 싸움이었어…….”
호리병 지대의 무너진 절벽 부근의 숲 사이로 복면의 한 사내가 중얼거리며 걸어 내려왔다.
흑풍대가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린 장내엔 무너진 바위 더미와 스무 구의 흑풍대 시체들만이 썰렁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상(桑)은 아직도 야율재와 진도건의 치열했던 싸움을 눈앞에서 그려내고 있었다.
천마신교 구주마종의 서열 5위 흑풍신마 야율재.
무영각의 감시자로서 그를 먼발치에서 감시해 왔던 상은 야율재가 조강선과 싸울 때도 물론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는 조강선의 일방적인 운영으로 야율재가 크게 밀린 채 싸움이 끝나버려 속으로 비웃기도 했었다.
야율강이 죽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야율재였기 때문에 과연 제 부친이자 스승만 한 실력이 있을까 하는 의심이 있었다.
그것이 오늘 진도건과 싸움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구주마종의 신마들 가운데 그가 제대로 실력을 본 사람은 셋.
성혈신마(聖血神魔), 일월신마, 적룡신마(赤龍神魔).
그 가운데 같은 유목민족인 적룡신마와 비교했을 때 오히려 더 섬뜩한 무언가가 느껴질 정도로 흑풍신마의 마공은 고강하게 느껴졌다.
성혈신마는 서장 포달랍궁(布達拉宮)에서 떨어져나온 분파 성혈교의 교주로 가장 괴이하고 강력한 마공을 다루는 고수였으며, 적룡신마는 바로 청해에서 거병하여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노괴물이었다.
이 세 사람은 일찍이 천마신교 단씨 혈통계보와 함께 해 왔던 이들이었기에 실력을 볼 기회가 있어 비교할 수 있었다.
상은 흑풍대 시체들 쪽엔 관심을 두지 않고 바위 더미로 다가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여전히 절벽은 높게 솟아 있었으나 한쪽이 움푹 파여 있었다. 그 부분에서 떨어져 나온 바위 더미들이 바로 눈앞에 쌓여 있는 것이다.
흑풍신마도 일월신마처럼 무영각의 두 그림자가 감시하고 있었지만, 일월신마와 같은 왕래는 없었다. 그래서 상은 진도건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야율재에게 정보를 전달하진 않았었다.
홍천환을 쫓다가 종남산 어귀에서 일월신마와 싸우고, 그에게 사로잡혀 화산 연화봉에서 혈마로 다시 태어났다는 남자.
“그 뒤 소식이 끊어져 생사를 알 수가 없었는데 흑풍신마와의 전장에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소문대로 놀라운 쾌검이었고 무공도 정보보다는 뛰어났는데…….”
상이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혈마화의 여부였다.
과거 혈마 원건 사태 때 붉은 기운이 피처럼 솟구쳤다 하였었고, 연화봉에서 탈출한 일월신마 측의 이야기에서도 진도건이 피처럼 붉은 검기를 마구 쏟아냈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흑풍신마와의 싸움에선 그런 모습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우르르…… 쿵!
힘껏 밀어내자 바위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무덤처럼 쌓인 바위 더미를 위에서부터 천천히 하나씩 밀어내 떨어뜨렸다.
진도건이 홍천환을 복용하고 혈마화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천마신교 무영각 소속으로서 상은 그 시신을 확보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번거롭더라도 바위들을 하나하나 치우면서 그 시체를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이었다.
“찾았군.”
큰 바위 더미들을 치우고 자잘한 돌 더미들도 치우면서 마침내 일그러진 바위 속에 파묻힌 진도건의 모습이 드러났다. 상당한 피를 가슴에 토한 채로 토석에 여기저기 더럽혀져 있었다. 가까이 떨어진 바위들이 대들보처럼 다른 바위들을 떠받치고 있어서 생각보다 시체 상태가 멀쩡했다.
‘흐음…….’
상은 잠시 망설였다.
어디 하나 바위에 뭉개져 피떡이 되어 있으면 모르겠지만, 사지가 멀쩡해 보이니 갑자기 야율재와 다투던 진도건의 검격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설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상은 잠시 서서 귀를 기울였다. 호흡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주변에 부는 바람 소리 외에는 느껴지는 바가 없었다. 살아 있고 내상이 심각하다면 호흡이 가늘게라도 끊어질 듯 흘러나와야 하는데 별로 들려오는 것이 없었다.
상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코 아래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리고 호흡을 느끼기 위해 집중했다.
그때였다.
손가락에서 가느다란 호흡을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알 수 없는 꺼림칙한 느낌에 코에 머물던 시선을 조금 위로 드는 순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진도건과 두 눈이 마주쳤다.
‘……헉!’
그 어느 때보다 핏빛으로 물들어 붉게 빛나는 눈동자 속으로 복면에 덮인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텁!
“컥, 컥!”
순식간에 목줄을 틀어쥐는 손아귀.
상은 두 손으로 풀어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숨통이 조여오며 얼굴이 금방 새빨개졌고 두 눈이 공포로 물들어갔다.
죽음의 공포를 떠올리는 가운데 진도건의 몸이 공중부양을 하듯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부터 그의 몸을 떠받들 듯 은은하게 바람이 불었다.
상의 눈빛이 두려움에 가득 찼다.
그의 손을 타고 섬뜩한 죽음의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진도건의 산발한 머리카락과 눈썹까지 짙은 붉은색으로 변해 가고 피부 아래로 혈관과 신경을 따라 붉은 실선이 꿈틀대며 흘러 다니는 것이 보였다.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쳐다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지 붉은 안개가 진도건의 주변을 맴도는 듯했다.
‘아, 안 돼……!’
자신의 목줄을 틀어쥐고 운명을 결정 내려는 눈앞의 이 자는 진도건인가, 아니면 부활한 혈마인가.
적어도 그가 보기엔 명확했다.
뚜둑!
꺾이는 목.
새빨갛게 질려 버린 얼굴과 초점 잃은 눈빛, 풀리는 손아귀 아래로 무너지는 상의 육신.
동시에 진도건의 눈을 감기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은 채 뒤로 쓰러졌다.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