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제19장. 피로 물드는 시라무렌(潢水) 강 (4)
기병대 사이에서 최현걸과 영은성이 말을 타고 부대의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들이 나오자 진도건이 돌아보며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진도건의 생각은 그대로 따르기엔 너무 고통스러운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날 믿어라.”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얘기한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진도건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현걸과 영은성은 무거운 침묵으로 그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인제 와서 떠든다 한들 죽음을 피해갈 수 있겠느냐, 진도건?”
500명 대 1500명.
일견 후자인 진도건 군이 수적으로 압도할 수 있는 구도로 보이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
진도건은 이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위치.
그에 반해 야율재, 야율균은의 눈에는 1500여 마리의 양 떼가 부들부들 떨며 몰려 있는 형국이었다. 흑풍대의 눈은 이미 먹잇감을 노리는 늑대의 그것처럼 변해 있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진도건을 바라보는 야율균은은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본래라면 복수심에 타오르고 있어야 할 그녀의 눈은 갈등에 휩싸여 있었다.
드디어 진도건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평범한 듯 깔끔한 외모에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검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인상적인 사내. 야율신의 목을 베어 몸통은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도 없이 그 머리만 혈육들에게 보낸 사내.
응당 분노로 뜨겁게 들끓어야 할 그녀의 마음속엔 뜨거운지 차가운지 알 수 없는 혼돈된 감정의 물결이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은 다름 아닌 혼인 문제였다.
야율신의 죽음은 과거였고, 혼인은 미래의 문제였다. 이 복수를 지금 이 자리에서 이뤄낸다면 원하지 않는 미래가 앞당겨짐을 이야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놈의 실력이 상당하니 균은이 너의 복수는 내가 대신해 주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얼거리듯 얘기하는 야율재의 목소리. 뜻밖에도 복수조차 갈등하는 그녀의 마음을 그는 알기나 할까.
진도건은 말에서 내려왔다. 적성창은 땅에 박았다. 허리춤의 두 자루 검들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야율재의 현철대도와 등에 찬 큰 칼날을 보고는 홍무검을 뽑았다.
‘두껍고 강한 무기, 일월신마에 버금가는 파괴적인 공력……. 이 검이 맞겠지.’
가볍게 휘둘러 보면서 그 무게감을 가늠해본다. 검의 달인인 자신에게 이 정도는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진도건을 보며 야율재가 피식 웃었다.
“나와 붙어 보겠다는 것이냐?”
그는 진도건과 한 차례 힘을 부딪쳐 봤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 대결을 순순히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아서라. 여긴 전장이다. 네 스승이 날 노렸을 때처럼 한가한 상황이 아니란 말이다. 흑풍대!”
야율재가 손을 번쩍 들자 흑풍대 모두가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잡아당겼다. 그 의도가 명확하기에 진도건 등 뒤의 기병들도 놀라 소란이 일어났다.
야율재가 높이 든 손을 아래로 내리는 순간, 진도건의 검이 좌에서 우로 지면을 쓸었다. 그리고 일대를 모두 휘감을 만큼 거대한 바람이 솟구쳐 올랐다. 흑풍대가 쏘아낸 화살들이 일제히 날아들었으나 진도건이 일으킨 거대한 돌풍에 휘말려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야율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만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내공을 이용해 분출시키는 검풍, 권풍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것.
그런 경력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은데 돌연 바람이 부는 것은 경지에 오른 자신조차 모르는 신묘한 술수가 진도건에게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돌풍이 이어지는 가운데 진도건이 홍무검을 두 손으로 다잡았다.
“흡!”
짧은 호흡, 검신에 모이는 공력.
이번엔 분명한 흐름에 야율재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협을 직감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말머리를 당기면서 현철대도를 휘둘렀다. 흑사풍파의 일초같이 단숨에 끌어낼 수 있는 모든 마기를 쏟아냈다.
슈우-확!
꽝!
횡격, 그 검광일섬(劍光一閃)이 부채처럼 펼쳐지며 부지불식간에 흑풍대를 덮쳤다. 야율재의 반응으로 선두의 일부는 살 수 있었지만, 미처 보호받지 못한 흑풍대 병사들의 신체와 말들이 흑갑과 함께 잘려나가며 무너졌다.
스물에 가까운 자들이 순식간에 죽어 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영은성과 최현걸이 좌우로 각각 뛰쳐나가며 그 뒤를 기병들이 우르르 쫓아가기 시작했다.
흑풍대의 선두는 진도건의 검기에 무너지고 다른 자들은 돌풍에 갇혀 혼란에 휩싸였다.
“막아라!”
야율균은이 도망치는 듯한 적군의 움직임에 소리치자 흑풍대 좌우에 있던 자들이 즉시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진도건이 놔주지 않았다.
흑풍대가 쏘아 낸 500발의 화살은 여전히 하늘에서 어지러이 흩어지며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화살들에 진도건의 시선이 닿는 순간, 어지러이 방향을 잃고 휘돌던 화살들이 일제히 그 화살촉을 아래로 하여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다시 흑풍대로 시선을 내린 순간, 하늘에서 화살비가 쏟아져 내렸다.
푸푸푸푸푹!
“크악!”
“컥!”
“윽!”
막 기병대를 쫓아 뛰쳐나가려고 했던 흑풍대 병사들이 돌연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전진을 멈추었다. 여기저기선 고통에 찬 비명들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허공섭물이든 이기어검이든 중요한 것은 정과 신을 다루는 중단전과 상단전이 얼마나 열려 있고 그것을 내공과 조화를 이루어 그 물건과의 연결을 지속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하지만, 진도건이 일으킨 돌풍에 대해 야율재가 어떤 내공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듯 이 낙시(落矢) 또한 그러했다.
그것은 허공섭물, 이기어검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중단전과 상단전이 거의 완전한 조화를 이룸으로 인해서 발현되는 ‘염력(念力)’에 속하는 것이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떨어졌지만, 진도건의 내공이 담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흑갑을 뚫진 못했다. 그러나 흑갑이 미처 덮지 못한 부분들은 어김없이 파고들었으니 백여 명의 사상자들이 순식간에 발생했다. 군마들마저 화살에 맞아 비명과 함께 몸부림치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던져라!”
막 숲으로 진입하려던 영은성과 최현걸이 동시에 외쳤다. 그리고 두 사람을 포함하여 뒤따르던 기병들 모두 일제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흑풍대의 머리 위로 던졌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 외침에 경계하며 쳐다보던 야율재는 자신들의 머리 위로 떠 오른 것들을 보았다.
작은 단검들이었다. 포양진에서 출발하기 전날 밤에 진도건이 한두 개 정도는 갖고 있으라며 준비했던 것이었다. 그때는 영문을 몰랐으나 흑풍대가 자신들이 쏜 화살에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본 기병대들이 그야말로 호기롭게 던졌다.
탓!
야율재도 바보가 아니었다.
진도건이 역시나 단검들을 염력으로 붙잡아 쏘아내는 순간, 말안장 위를 박차고 뛰어올라 흑풍대 중심으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현철대도를 휘두르자 광범위한 도풍이 일어나며 쏟아지는 단검들을 절반 정도는 날려 버렸다. 그러나 미처 그 범위에 닿지 못한 단검들은 어김없이 흑풍대에 쏟아져 부상자들을 더 만들어 내었다.
“칫!”
뜻밖의 낭패스러운 상황 속에서 야율재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흑풍대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그의 눈에 부상에 신음하는 수많은 흑풍대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아직 병사들이 숲으로 다 흩어지지 않았기에 진도건은 거기서 더 멈추지 않았다.
왼손으로 적성창을 뽑아서 몸에 바짝 붙였다. 내공을 끌어모으며 앞으로 달렸다.
이번엔 야율균은이 반응하여 앞으로 말을 달렸다. 야율재가 흑풍대 한가운데로 떨어졌기 때문에 당장 진도건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그녀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두 자루 곡도를 교차하도록 모으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슈슛!
먼저 출수한 것은 야율균은이었다. 쌍곡도가 교차하며 검은 도기가 뿜어져 나갔다. 경쾌하게 휘두르는 연속된 휘두름 끝에 도기의 난사가 있었다.
눈앞을 빼곡하게 메울 정도였지만, 진도건의 두 눈동자엔 천천히 다가오는 것처럼 비쳤다.
뒤로 길게 늘어뜨린 적성창,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처럼 신형이 흔들거리는 듯하더니 그를 덮쳐 오는 도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압도적인 쾌검과 이전보다 성장한 내공으로 거칠 것 없이 모두 분쇄했다.
‘너무 빨라……!’
도기 속을 뛰어들어 쳐 내는 속도나, 거리를 좁혀 오는 속도나 그녀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달리던 기세 그대로 비스듬히 지면을 미끄러지도록 몸을 날린 진도건이 홍무검을 쳐올리자 기다란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슈캉!
“아악!”
채찍처럼 휘감는 것 같더니 진도건의 검광이 군마의 두꺼운 몸통을 가르며 솟구쳤다. 흑갑을 두른 군마가 두 동강이 나며 나동그라졌다. 야율균은은 말 안장에서부터 튕겨 나가며 그대로 멀리 나가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그녀가 두 자루 곡도를 모두 말 등에 박아넣어서 솟구치는 검광을 막아내지 않았다면 그대로 반 토막이 났을지도 몰랐다.
“끄으으……!”
야율균은은 엉망진창으로 바닥을 구르다가 가까스로 멈추자 격심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혹시 모를 추가 공격을 대비해야 했지만, 온몸을 뒤흔드는 충격과 고통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고개만을 들어 상황을 살피는데 다행히 진도건은 그녀를 등지고 있었다.
진도건도 흑풍대 무리 사이에서 높이 뛰어오르며 나타난 야율재 때문에 그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었다.
풍운칠기창 참절쇄(斬截灑).
콰콰쾅!
한 바퀴 몸이 선회하며 홍무검은 땅에 던져 꽂아 놓고는 사선으로 교차하는 적성창의 궤적을 따라 날카로운 경력의 바람이 전방의 병사들을 덮쳤다. 그것은 이미 준비된 흑풍대를 목표로 둔 초식이었다.
공력을 한 차례 쏟아내는 진도건을 내려다보며 야율재의 눈이 먹잇감을 노리는 탐욕스러운 매의 눈빛으로 번들거렸다.
“진도거언-!”
그 위를 날아오른 야율재의 중심으로 검은 바람이 휘몰아치며 넓게 펼쳤다. 그를 향해 집중하며 좁아진 시야를 모두 덮을 정도였다. 거대한 현철대도로 큰 원을 그리자 거대하게 펼쳐졌던 기운이 마치 진도건을 집어삼킬 것처럼 덮쳤다.
흑풍명천마공 명왕팔경(冥王叭景).
퀘에에에엑!
창을 회전시키며 뛰어드는 진도건.
떠오르는 태양을 집어삼키듯 벌려진 명왕의 아가리가 그를 집어삼켰다.
하단전에서 파천신공의 내력이 전신세맥에 폭발적으로 뻗어 나갔다. 좌우로 회전하는 창대의 흐름을 따라 침습하는 검은 마기를 강제로 수용하며 가두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마기의 흐름 가운데서 적성창이 진도건의 두 손에서 격발(激發)하였다.
풍운칠기창 청룡나해(靑龍挪海).
발톱으로 물길을 쥐어 함께 솟구쳐오르는 청룡처럼 명왕팔경의 마기까지 이화접목(移花接木)으로 끌어당겨 자신의 내공과 함께 출수하는 절초.
선경(仙境)의 비기가 녹아 있는 풍운칠기창의 오의(奧義)였다.
야율재가 두 눈을 부릅떴다.
명왕의 입을 벌려 삼키려 했더니 되레 청룡이 이빨을 드러내며 날아드는 격에 야율재가 재차 기운을 한데 집중시킨다.
그의 온몸을 타고 흘러나오는 검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강기가 되어 현철대도까지 휘감았다.
“흐랴앗!”
꽈과광!
거대한 경력의 충돌과 굉음, 이어지는 충격의 파도가 호리병 지형의 대지 전체로 터져 나갔다.
영은성과 최현걸이 끌고 도주한 후미가 사라지자마자 경력의 폭풍이 숲에까지 닿았다. 흑풍대마저 덮치니 말들이 놀라 날뛰었고, 다친 말들은 고꾸라지며 그 위에 타고 있던 흑풍대원들은 낙마하기도 했다.
호리병 지형의 최심부를 가로막은 절벽까지 파고가 몰아치며 곳곳에 균열을 만들고 표면 일부는 우수수 부서지며 바윗덩이들이 떨어졌다.
파아아아-!
찢어 발겨지는 검은 바람 줄기들이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그 중심에 있던 야율재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고 진도건도 뒤로 날아가고 있었다.
“크으……!”
신음을 내뱉는 진도건의 입가로 피가 배어 나고 있었다.
급하게 끌어올린 내공은 아무리 파천신공의 힘이 작용한다고 하더라도 총량의 한계가 있었다. 청룡나해의 이화접목이 아니었다면 야율재의 힘에 꺾여 버렸을 것이었다.
치이익…….
두 발로 지면을 딛자마자 잠깐 더 밀려났다. 그만큼 야율재의 힘의 크기는 대단했다.
두 사람은 쉬지 않았다. 야율재는 이미 진도건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현철대도와 적성창에 동시에 바람이 휘감겼다. 검은 바람과 푸른 바람이 몰아치며 막대한 경력이 담겼다. 동시에 출수하는 흑사풍파와 풍룡포의 일격이 충돌했다.
콰쾅!
야율신과의 격돌이 생각날 만큼 흡사한 그러나 더욱 거대하고 밀도 높은 흑풍의 파도를 소용돌이치는 풍룡의 오름은 이겨내지 못했다.
검은 바람은 푸른 바람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하지만, 눈앞을 덮어 버리는 공간의 틈바구니에서 진도건의 붉게 빛나는 눈이 야율재 바로 옆 땅에 박혀 있는 홍무검에 닿았다.
염력의 발동.
슈악!
그의 눈이 홍무검에 닿은 순간 파르르 떨리더니 그대로 솟구침과 동시에 회전하며 앞으로 돌진할 듯 몸을 크게 기울였던 야율재의 얼굴을 덮쳤다. 햇빛을 받아 번뜩이는 검광 속에서 붉은 핏방울이 함께 하늘로 떠올랐다.
그와 함께 발밑에서 시작된 상승의 바람과 함께 뛰어오른 진도건의 발밑으로 흑풍의 경력이 아슬아슬하게 휩쓸고 지나갔다.
팽그르르 회전하는 홍무검은 그대로 지면에 착지하는 진도건의 손에 빨려 들어갔다. 두 눈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여전히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야율재는 경직된 모습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크크크……!”
서서히 고개를 원위치시키는 그의 얼굴에 사선으로 가로지른 검상이 새겨진 채로 피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불의의 일격이에 놀랄 법 했으나 그의 얼굴은 오히려 광기의 웃음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크하하하! 과연…… 생각보다 어려서 놀라긴 했다만, 조강선 그 늙은이가 네 이름을 떠들고 사라질 만했구나.”
“후우…….”
야율재가 말하는 동안 진도건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역시 아직 부족해…….’
소모되면서 또한 충만해지는 기운을 단전으로 느끼고 있었으나 야율재를 상대하기엔 불충분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야율재가 혀를 내밀며 입맛을 다셨다.
이 드넓은 초원에 수십만의 유목민족들이 살고 있었지만, 적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초원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불길한 상황을 직감하고 시라무렌 강을 따라 밤낮을 달려온 지금은 보람을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얼마만의 호적수일까?
조강선과의 대결의 결과가 허무로 남았다면 진도건과의 대결은 그의 승부욕을 채워 주고도 남을 것 같았다.
‘물론 나의 승리로!’
쿵!
야율재가 현철대도를 던지듯 땅에 박았다. 그 묵직함에 요란한 굉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어깨 뒤로 넘어갔다가 돌아온 오른손에는 월륜대도가 쥐어져 칼등에 달린 고리들이 부딪치며 차랑! 하는 소리를 내었다. 유목민족들이 애용하는 만곡도에 중원의 언월도 형상을 적용하여 더 거대한 도신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현철대도에 비하면 절반에 불과한 크기였다.
“조강선은 검을 썼었지. 창을 이용한 네 무공이 놀랍다만, 너의 전부는 검에 담겨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야율재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푹!
진도건은 적성창을 땅에 꽂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로로 홍무검을 들며 왼손으론 폭이 넓은 검신을 쓸어내렸다.
그의 모습에 야율재는 만족스러워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결국, 네놈이 원하는 대로 일대일 싸움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젠 날 만족시켜야 할 차례다. 과연 날 상대할 자격이 있는지 직접 시험해 주마.”
“크큭! ……지랄. 네 목을 거둬 주마.”
살의에 욕지거리도 절로 나온다. 진도건의 검붉었던 눈동자가 더욱 붉게 타올랐다. 그 핏빛 안광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야율재의 심장은 머릿속이 쿵쾅거릴 정도로 고동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