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94화 (94/432)

94화 - 제19장. 피로 물드는 시라무렌(潢水) 강 (3)

길게 장사진처럼 늘어선 2만의 몽골족 군사들.

시라무렌 강을 중심으로 진도건과 팽무양의 각 2천 기병대가 끊임없이 순환하듯 번갈아 가며 몽골족 군사들의 선봉과 후군, 중군 등을 공격한다. 진도건이 난입한 곳에선 어김없이 장군, 부장급 등의 지휘관들 목이 떨어졌고 팽무양이 돌격한 곳에선 치열한 난전이 벌어졌다.

아바카 등 몽골족 기마대는 특유의 기동력과 전투력으로 기병대를 쫓아다니며 예봉을 끊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초반 기선을 진도건과 팽무양의 기병대가 잡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깨달은 몽골군도 신속하게 대응하면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하나 막을 수 없는 건 바로 이들의 돌파력이었으니 진도건과 팽무양의 무력은 행렬의 폭이 얇은 장사진을 뚫어버리기에는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다.

시체는 점점 쌓여 가고 붉은 피는 강변 유역의 내리막을 따라 흘러내렸다. 혼탁하게 소용돌이치는 강물은 이들의 피가 계속 유입되고 있었으니 그 거친 물살에도 불구하고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사람과 말 사체들로 인해 다른 물길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몽골 군사들의 처음 거친 저항은 시간이 갈수록 무뎌졌다.

귀신같이 지휘권을 가진 장수들을 찾아 죽이는 진도건의 칼 때문이었다. 몽골 군사들은 점점 대형을 잃어버리고 난립하여 생존을 위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고 두 기병대가 유유히 전장을 돌파하였다가 다시 빙 돌아 돌격하길 반복하면서 수월하게 피해를 증대시켜 가고 있었다.

‘퇴각하여야 하는가?’

기마대를 지휘하여 두 기병대의 꽁무니를 쫓는 아바카는 심각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도 목이 달아날 판인 데다가 점점 지휘체계가 무너지면서 조금만 더 지나면 학살의 시간이 올지도 몰랐다.

진도건군 등이 전술적 움직임을 가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도 길어지고 있었다.

콰지직!

날카로운 검기가 쏟아지며 진도건의 전방이 다시 한번 뚫렸다. 천오백여 기병대가 뚫고 나왔다. 저항할 의지조차 몽골 군사들에게서 사라졌는지 진도건이 이끄는 기병대의 움직임엔 거침없었다. 난전으로 천이백여 기만 남은 팽무양의 기병대보다 더 사기가 높았다.

그들이 마침내 방향을 틀어 줄지은 몽골 보병대가 아니라 아바카의 기마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제, 제길!’

아바카는 속으로 낭패라고 생각했으나 내색할 수 없었다.

“우리도 돌격한다!”

명령과 함께 움직이는 아바카와 기마대.

점점 거리가 좁혀지는 가운데 진도건이 적성창을 번쩍 들어 당겼다.

슈욱!

아바카는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진도건을 보며 섬뜩한 기분이 온몸을 지배함을 느꼈다. 진도건의 적성창의 창날이 흔들리는 순간, 이미 굳건하게 다지고 있던 오기와 결기를 가지고 만곡도를 휘둘렀다.

카앙!

“끄윽……!”

평범하게 휘두른 창의 날이 만곡도에 부딪히는 순간 엄청난 경력이 쏟아지며 밀어붙였다. 부러지지 않은 만곡도의 칼날이 힘에 밀려 바짝 몸에 닿을 정도였다.

진도건의 창대가 반대편으로까지 휙 돌아가자 아바카의 몸이 말에서부터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그는 튕겨 나간 그대로 혼절해 버린 채 땅을 굴렀다.

진도건은 그런 그를 힐끔 한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돌파해 나갔다. 아바카가 나가떨어지자 몽골 기마대는 금방 전열이 흐트러지면서 전의가 꺾여 버렸다. 진도건의 기병대는 그들을 굳이 공격하지 않으면서 지나치고 있었다.

기마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그렇게 지나쳐 가고 있을 때였다.

“진, 도, 건-!”

전장 일대 전체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호통이 터져 나왔다.

시야가 흔들릴 정도였다. 숲의 나무들이 흔들리고 새들이 놀라 부리나케 하늘로 도망쳤다. 칼을 부딪치고 있는 모든 군사가 그 호통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깐 싸움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진도건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이 사자후와 같은 엄청난 호통에 그는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직감했다.

‘야율재!’

본능적으로 전장의 동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칠흑의 갑주를 군마부터 본인까지 중후하게 두른 채 거대한 현철대도의 칼날을 번쩍 들고 달려오는 중년의 장수가 있었다. 비슷한 중장을 한 수백의 흑풍대 기마들이 그 뒤를 따르며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진도건의 눈은 빠르게 전장의 상황을 살폈다.

2만이었던 적군은 절반 정도로 줄었고 자신과 팽무양의 병력도 삼분지 일 이상 사상자가 발생했다.

야율재와 흑풍대 500기의 소대는 동쪽의 언덕을 돌아 튀어나오고 있었으며 그들과 가장 가까운 아군은 바로 난전을 치르고 있는 팽무양의 기병대였다.

진도건은 잠깐 눈을 감았다.

이 전장의 어떤 누구보다 짙고 새까만 호흡의 끈이 하늘을 덮으며 진도건의 감각에 연결되고 있었다. 야율신보다 더욱 강대한 기운을 몸속에 품은 이무기가 흑갑의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틀림없는 야율재였다.

달리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가 없었다.

야율재가 500기의 흑풍대를 편성하여 먼저 떠났을 시점은 진도건이 정찰병들을 처리하려고 떠났을 때와 같았다. 야율재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여 밤낮으로 달려왔고 이 전투가 종결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진도건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팽무양!”

그가 내공을 담아 소리쳤다.

난전 속에 있던 팽무양도 야율재와 흑풍대를 발견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때에 진도건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진도건이 다시 한번 아랫배에 힘을 실었다.

“제가 마지막으로 당부한 지시를 떠올리십시오!”

그의 말에 팽무양은 금방 머릿속에 그가 어제 했던 말을 떠올렸다.

‘흑풍대가 등장하는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산맥에 숨어 유군(遊軍)이 되어라.’

떠올리는 속도는 빨랐지만, 혼란은 가중되었다.

“퇴각한다!”

일단 명령을 내리면서 큰 칼을 휘두르며 길을 열기 시작했다. 그가 혼란스러웠던 것은 야율재가 다가오는 속도를 조금만 헤아려 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어서 결코 떨쳐 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난전 속에서 어쨌든 천 호대를 비롯한 기병들이 팽무양의 주변으로 모이기 시작할 때.

진도건도 결단을 내리고 있었다.

“영은성, 최현걸! 우리가 흑풍대에 돌격한다!”

“형님! 야율재는 피하기로 했잖소?”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우리가 여기서 퇴각하면 팽 가주의 부대는 전멸이다! 내가 직접 야율재를 막겠다! 너희 둘은 뒤를 따르되 내가 앞으로 뛰쳐나가면 휩쓸리지 않게 거리를 유지해라! 일합을 교환한 후, 우리는 산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알겠습니다!”

최현걸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할 때, 영은성이 결의를 다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최현걸과 눈이 마주치자 영은성이 짧게 입을 열었다.

“형님을 믿어라.”

“너……! 알았다.”

빠르게 수용하는 두 사람의 반응을 들은 진도건이 적성창을 번쩍 들었다.

“돌격하라!”

우와아아아!

가장 기세가 높은 진도건의 기병대가 몽골 군사들의 밀집이 약한 곳을 골라 뚫고 지나갔다.

붉은 피가 굽이쳐 흐르는 시라무렌 강을 건너 달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난전 속을 팽무양의 기병대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진도건군을 마주 보며 달리기 시작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수 시간의 전투 끝에 말들도 체력이 소진되어 속도가 전처럼 붙지 않았다.

팽무양은 흑풍대에 붙잡힐 것 같은 그 불안한 감정을 품은 채 달리고 있었는데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진도건과 그 기병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진도건이 자신들을 쫓는 야율재를 막아 세우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어코 그런 무리한 선택을……!’

그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진도건의 결정을 내심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안타까운 심정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저 군사에 합류하여 야율재를 상대해야 하는가!’

그렇게까지 생각이 이어질 때, 내리막을 달리며 여전히 빠른 속도를 유지하고 있는 진도건군이 그새 팽무양과 거리를 눈에 띄게 좁혀 오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표정까지 확인할 정도의 거리에 이르렀을 때, 진도건은 명확한 눈빛을 팽무양에게 쏘아 보냈다.

“결착은 이곳이 아닌 대회전에서! 팽 가주! 내 명령을 따르시오!”

힘을 실은 그 외침에 팽무양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야율재와의 싸움을 피하겠다는 말뜻인지,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는 묘수가 있다는 것인지, 바람을 부리는 신묘한 선술도 부릴 수 있으니 혹시 둔갑술이라도 펼칠 수 있을런지.

명확하진 않았으나 한 가지 분명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있었다.

지근거리로 두 병력의 선봉이 스쳐 지나가는 찰나, 팽무양이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진도건의 검으로 대회전에서 승리를!”

팽무양은 반드시 대회전까지 살아 돌아오라는 말을 대신하여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두 병력이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빠르게 교차하며 그 선봉이 멀어져 갔다.

진도건은 팽무양군의 후미와 점점 가까워지는 것과 동시에 야율재의 흑풍대도 명확하게 두 눈에 담기고 있음을 인지하였다.

“나와 야율재가 맞부딪침과 동시에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라!”

영은성과 최현걸에게 명령하는 외침.

동시에 진도건은 적성창에 경력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선술의 바람 또한 붉은 창대를 타고 맹렬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야율재는 선두에서 흑풍대를 이끌고 달리면서 팽무양과 진도건군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팽무양은 그들을 피해 강을 따라 서쪽으로 달리고 있었고, 진도건은 강을 따라 정면으로 마주 달려오고 있었다.

“크하핫!”

그 의도를 한눈에 파악한 야율재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 초원의 전장에서 흑풍대의 검은 갑옷을 마주 보고 정면으로 돌격해오는 부대가 언제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떤 부족, 어떤 군사들이든지 한번 쓴맛을 보면 누구도 야율재와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았다.

점점 가까워지면서 선봉에 선 자가 상당한 기운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좋아! 좋고말고! 기마대의 선봉이란 당연히 그래야 하니라!”

야율재는 거칠 것 없이 흑풍명천마공의 기운을 현철대도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검은 기운의 바람이 그의 온몸을 타고 뿜어져 흐르기 시작했다. 바로 뒤에서 달리던 야율균은이나 한굴렬은 그 모습에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두 사람은 손을 들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야율재나 야율신이 이런 힘을 발휘할 때, 그 풍파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때였다.

“야율재-! 내가 바로 조강선의 제자, 진도건이다!”

적 선봉에서 쏟아지는 외침의 파도가 야율재와 흑풍대를 덮쳤다.

야율재가 그 목소리를 듣고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씩 웃음 지었다.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진도건과 야율재의 군마가 동시에 앞으로 뛰쳐나갔다. 야율재의 군마는 그 어떤 흑풍대의 군마보다 우수한 초원의 한혈보마(汗血寶馬)였으며, 진도건의 군마는 선풍의 바람을 등에 업고 앞으로 무서운 속도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두 단기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지고 두 사람이 동시에 창과 대도를 휘둘렀다.

흑풍명천마공 흑사풍파.

풍운칠기창 풍신광주(風神洸走).

폭발하듯 휘몰아치는 흑풍의 파도 앞을 거대한 경력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콰콰콰콰콰!

일대를 휩쓸어 버리는 엄청난 폭풍이 그들 사이에서 불어닥쳤다. 검은 마공의 기운이 하늘을 덮고 짙은 모래바람이 눈 앞을 가렸다.

“선회하라!”

그와 함께 영은성과 최현걸이 동시에 외쳤다. 오른쪽으로 말머리를 트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기병대들이 일제히 선회기동을 하기 시작했다. 흑풍대가 그들의 기동을 발견한 것은 경력의 바람이 어느 정도 걷히고 난 뒤였다.

진도건과 야율재는 서로 상승의 경력을 쏟아붓는 절초를 주고받으면서 그로 인해 발생한 폭풍 속으로 말을 끌고 뛰어들었다. 강건한 호신지기로 말과 사람 모두를 보호하면서 뚫고 나아갔다.

마침내 거리가 가까워져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야율재는 진도건의 얼굴이 생각보다 어린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날아드는 적성창을 보고 현철대도를 휘둘러 막아내었다.

카앙-!

또다시 두 강대한 경력이 담긴 두 칼날이 충돌하자 벼락이 치듯 혼돈된 기운이 둘 사이에서 솟구쳤다. 경력의 폭풍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갈라질 정도였다.

그 순간 진도건이 고삐를 당기며 폭풍 속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바람처럼 달려나가 자신의 기병대 꼬리를 쫓아 달아났다.

야율재는 처음엔 자신을 상대로 기꺼이 힘 대결을 하는 진도건을 보며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조강선의 제자든 아니든 관계없이 전장에서 제대로 칼을 부딪칠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은 장수로서 큰 기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도건이 그를 피해 달아나자 그는 잠깐 그 자리에서 멍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 이노옴-! 감히 내 앞에서 등을 보이느냐!”

다시금 말에 박차를 가하며 진도건의 뒤를 쫓아갔다. 그리고 그 뒤를 흑풍대가 재차 바짝 붙어 따라갔다.

기병대의 최후미에서 함께 달아나던 진도건이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야율재의 성난 얼굴과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운 기세로써 쫓아오는 흑풍대를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야율재와 충돌하면서 적성창을 쥐고 있는 두 손과 창대 사이로 핏물이 새어 나왔다. 손바닥이 터져 나간 것이었다.

진도건은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알고 있었다.

‘바람이여……!’

야율재를 향해 피로 물든 손바닥을 활짝 펼치며 손을 뻗었다. 그의 의지를 따라 등을 받치던 바람이 돌연 방향을 바꾸더니 돌풍이 되어 흑풍대를 향해 몰아쳤다.

세찬 돌풍이 갑자기 눈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불어닥치자 흑풍대의 추격 속도도 조금 주춤했다. 그러나 야율재가 거대한 현철대도를 허공을 향해 휘두르자 돌풍도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진도건이 부린 술수임을 눈치채고 도풍으로써 흩어낸 것이었다.

“놓치지 않겠다!”

잠깐의 주춤거림으로 두 부대의 거리는 다소 멀어졌지만, 그렇다고 떨쳐 버릴 수 있는 거리로는 부족했다. 상황을 모르는 영은성과 최현걸은 등골이 오싹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말에 박차를 가하며 산자락의 숲길에 진입했다.

혼란 속에 선두와 다소 멀어진 채 주변 기병들의 퇴각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말에 박차를 가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던 보르테는 문득 주변 지형지물이 시선에 잡혔다. 좌우 머지않은 지점부터 가파른 지형들과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머릿속이 빠르게 직전 상황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선두가 산자락에 진입해 들어간 위치와 눈에 보이는 지형들이 머릿속에서 조합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그의 표정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여, 여긴 막다른 길입니다!”

보르테가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귓불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대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로 인해 묻혀 버렸다.

보르테는 지금 들어서는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길이 넓어 도주하기 용이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점점 높아지는 좌우의 지형이 절벽으로 변하면서 종국에는 거대한 호리병처럼 주변을 둘러싸 앞을 가로막을 것이었다.

지형지물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영은성과 최현걸은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빠져나가는 순간에 마침내 눈에 보이는 거대한 절벽에 절망했다. 급히 눈을 돌려 보르테를 찾았을 때, 다소 떨어진 행렬 속에서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보르테의 모습이 보였다.

선두의 속도가 늦춰지며 천오백의 기마가 마침내 막다른 길의 구석에 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던 진도건도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음을 깨달았다.

산림의 구불구불하고 넓은 길의 끝은 절벽 지대에 가로막힌 개활지였다. 좌우 산림이 경사져 우거져 있었고, 지나온 길 주변의 경사는 다소 완만해서 그곳을 통해 도주할 수는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 파악했을 때는 이미 그들이 지나왔던 길에서부터 야율재와 흑풍대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크하하하핫!”

야율재는 눈앞에 솟은 절벽과 갈 곳을 잃은 진도건의 기병대를 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진군 속도를 늦춰 천천히 그 앞을 막아 세웠다.

최후미에서 다시 선봉이 되어버린 채 위기를 맞은 진도건은 누구보다 차갑게 전황을 살핌과 동시에 득의양양하게 웃음 짓고 있는 야율재를 노려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