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92화 (92/432)

92화 - 제19장. 피로 물드는 시라무렌(潢水) 강 (1)

연산산맥에 도는 바람은 살아 있는 바람이었다. 그 바람을 타고 움직이던 진도건의 검에 긴장 속에서 숨죽인 채 두 눈에 불을 켜던 정찰병들은 제대로 반항도 하지 못하고 모두 쓰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황수의 흐르는 물결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운 언덕에 오르고 나서야 진도건은 두 발을 땅에 제대로 디딜 수 있었다.

보름달과 무수히 많은 별이 검은 융단에 수놓은 듯 찬란하게 빛나는 밤하늘이었다.

“흐읍, 하아!”

청량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호흡을 골랐다.

남쪽의 연산산맥과 산림이 끝나는 지점에 고르지 않은 평지의 길이 황수를 따라 횡으로 가로지르고 그 너머엔 다시 작은 산림이 있었다. 황수 너머의 북쪽 산림에도 정찰병이 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일단 별동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계획을 점검하기로 했다.

아직 원군이 도착하기에는 이틀 정도 시간이 더 필요했으니 충분히 계획을 세우고 움직여도 늦지 않아 보였다.

별동대는 이미 연산산맥의 동부 능선들을 가로질러 넘고 있었다. 일부 산세가 험하여 말을 타고 지나갈 수 없는 곳이 있었지만, 정상 부근의 능선을 따라 이동하면 산길이 잘 뚫려 있어서 이동이 쉬웠다.

진도건은 다시 움직였다.

별동대로부터 이어진 호흡의 끈은 이미 선명하게 감지되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따라 계곡을 넘어 바람처럼 숲 사이사이를 날아가듯 달리길 일각 정도 흐르자 그는 별동대의 선봉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진 대형!”

나뭇가지를 타고 날아오는 진도건을 제일 먼저 알아본 최현걸이 그를 반겼다. 진도건은 새처럼 날아와 보르테 옆에 있던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역시 잘 끌고 와 줬구나. 고맙다.”

“아, 아닙니다.”

진도건의 칭찬에 보르테가 쑥스러워하며 말고삐를 넘겨주었다.

“잠시 모이시죠.”

팽무양은 잠시 행군 정지와 함께 휴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곧 진도건 중심으로 무인들과 장수들이 모두 모였다.

“산맥 안의 정찰병들은 거의 다 처리했습니다. 남은 곳들은 우리의 움직임과 동떨어진 곳들이니 매복하기에 충분할 겁니다.”

“하루도 넘게 떨어져 있었는데 고생이 많았네. 적군의 병력 이동은 확인했는가?”

“대략 2만 정도 됩니다. 아무래도 흑풍대는 없는 원군인 것 같습니다.”

“그럼 야율재는 어디 있는 거지?”

팽무양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원효가 자신의 군사적 식견에 따라 가능성을 짚었다.

“아마 추가적인 원군을 추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초원의 몽골족 등 다른 유목민족들을 핍박해서 병력 지원을 받아내고 있었으니까요. 야율신의 머리가 닿았다면 그럴 수도 있겠죠.”

“일리가 있군.”

“적들은 전력에서 우위를 점한 순간부터 우리의 병력 소모를 목적으로 전쟁해 왔습니다. 야율신은 야율재의 신임이 두터운 자고 사촌지간이니 분노가 클 겁니다. 조태상 절도사께서 예상한 대로 회전을 치르기 위해 가능한 병력을 모두 끌어오려 할 수도 있습니다.”

“산등성이 두 개를 넘으면 산자락은 끝나고 누런 강이 나옵니다. 그곳 너머에도 작은 산과 숲이 있어 매복하기에 용이합니다. 우리는 병력을 둘로 나눠 그 일대에 숨을 것입니다.”

“강? 도하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시라무렌(潢水) 강이군요.”

보르테가 툭 끼어들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다. 네가 이 지역의 지형을 잘 아니 설명해 봐. 도하가 어렵지 않은지.”

진도건이 웃으며 그를 격려했다.

보르테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지점의 시라무렌 강은 동서로 뻗는 강의 상류이기 때문에 물살이 매우 빠릅니다. 그러나 강폭이 좁은 일부 구간들은 말을 타고 건너기에도 무리가 없습니다. 남북의 숲을 점거할 수 있으면 확실히 강을 따라 진군하는 군사들을 기습하기에 좋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오늘 밤 여기서 야영하고 나면 내일 아침엔 제가 봐둔 지점까지 이동해서 매복을 준비하겠습니다.”

“병력은 어떻게 나누실 것입니까?”

“팽 가주께서 원 부장과 함께 천호대 300인을 포함한 기병 2천을 맡아 내일 갈 위치의 서쪽 숲에 매복해 주십시오. 임무의 목적은 적 진형의 와해입니다.”

“자네는?”

“저는 천호대 100인을 포함하여 2천을 데리고 도하하여 반대편 산림에 숨고 적의 후열을 노릴 생각입니다. 대신 저는 병력보다는 지휘권을 가진 장수들 위주로 노릴 생각입니다. 그렇게 몇 번 휘젓는다면 적 군사들은 흩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흑풍대가 없다면 시간을 두고 충분히 공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원효의 물음에 보르테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의 말을 따른다면 동족의 죽음을 더 많이 봐야 한다는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병력을 흩어 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강제로 징집된 병사들이기 때문에 부족으로 복귀한다면 강력한 저항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우리와의 적대관계가 사라지진 않겠지만, 적어도 당장 심해지는 일은 막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너무 오래 끌면 우리의 병력 손실도 심해질 것이고 앞뒤로 포위될 형국도 나올 수 있습니다.”

“야율신 군영과 야율재의 흑풍대가 포위하면…… 답 없군.”

“목표를 빨리 처리하고 숲에 숨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이후 회전에서 적들의 배후를 칠 수 있는 요건이 될 것입니다. 절도사가 적들을 압박함으로써 필연적으로 회전을 유도할 것이니 활약할 조건이 나올 것입니다.”

“전…… 누구를 따라갑니까?”

“보르테, 자네는 나와 함께 가지.”

진도건의 대답에 보르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도건의 말을 들은 원효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관건은 흑풍대가 오기 전에 습격을 마칠 수 있느냐겠군요.”

역시 적군의 규모보다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흑풍대의 출몰이었다. 만약 전술 수행 중에 그들이 나타난다면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도건이 아직 힘을 되찾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정면으로 맞붙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르테, 몽골족을 약탈하던 부족이 타타르족이라고 했나? 그들 주 근거지부터 여기까지 얼마나 걸리지?”

“기마대라면 2, 3일 안에 도달할 겁니다.”

“오래 끌 필요 없이 적장의 목만 노릴 것입니다.”

흑풍대가 도달할만한 거리가 아니라는 얘기는 확실히 장수들과 무인들 모두 안심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세부 전술을 마저 의논한 후, 군사들과 함께 야영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기병들은 이동을 시작하였고 진도건만 먼저 강 건너 산림 속에 숨은 정찰병들을 처리하기 위해 다시 떠나갔다.

* * * *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아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았지만, 야율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군영 내를 걸어 다니고 있었다. 이 초원에서 감히 자신들을 거스를 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젯밤의 일로 그 관점이 깨졌다.

야율신의 죽음은 가까운 혈족의 죽음이라는 설명으로 부족할 만큼 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만들었다.

‘네놈이냐? 군사들과 함께 온 것이냐? 그 노인처럼 홀로 찾아올 줄 알았거늘…… 우습구나!’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을 거듭한 결과 그는 이런 도발을 할 자는 단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진도건.

야율재는 마침내 그 세 글자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림잡아 조강선의 나이가 100여 세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는데 그 제자는 어떤 연배의 고수일일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일월신마 그 노괴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겠지. 중원 무림은 천하오절이 가장 강하다고 했는데,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면 감히 나와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해 주마.’

야율재는 천마신교와는 중요한 지시사항 정도만을 공유받으므로 중원에서 벌어진 일은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오로지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천하오절의 이름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기에 진도건이 일월신마와 싸웠다는 사실이나 그의 나이대 같은 어떤 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가 속으로 분노를 삭이고 있을 무렵, 그의 발걸음은 어느새 야율균은의 파오와 가까워져 있었다. 때마침 잠들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야율균은도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오다 야율재와 눈이 마주쳤다.

야율균은은 깊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런 그녀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던 야율재는 어젯밤 자신이 그녀를 윽박지르듯 대한 걸 떠올렸다.

“어제는 미안했다.”

“……아니에요.”

야율재는 본래 사과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야율신의 죽음이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만큼 친혈육인 야율균은의 슬픔을 이해하는 바가 있었다. 그는 더 말을 잇지 않고 그녀를 지나쳐 걸었지만, 야율균은은 그걸로 만족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 이상의 위로를 바라는 건 사치였다. 그런데 야율재가 갑자기 걸음을 멈춰 그녀를 돌아보았다.

야율균은은 흠칫 놀랐는데 야율재가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균은아, 한굴렬이 아직 파오 안에 있다면 내게 오라 전해라. 그리고 너는 흑풍대 500을 추려 출발준비를 시키고 너도 준비하거라.”

“오늘 출발하시려고요?”

“내가 직접 지휘해서 적군의 기를 한번 꺾을 필요가 있겠다. 아마 남양은 간만의 승전과 원군이 있으니 어쩌면 공격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으니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 전쟁에 돌입하면 네가 복수할 자리를 열어주마.”

“……알겠습니다.”

야율균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즉시 움직였다. 야율재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전장에서 자리를 준다는 것은 그나마 동생으로서 야율신에게 도리를 할 기회를 의미함이니 그것으로 작은 위로는 되었다.

한굴렬은 마침 파오에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야율균은은 야율재의 부름을 그에게 전달한 후, 곧장 흑풍대 병사를 편성하러 갔다. 한굴렬은 서둘러 파오에서 나와 야율재에게 달려갔다.

“소장을 부르셨습니까?”

“나는 야율균은과 흑풍대 500명을 끌고 먼저 출발하겠다. 너는 지금 남은 4천 이상의 흑풍대 모두 끌고 메구진 족장의 진영지 옆에 바로 숙영지를 세워 감시해라. 그리고 처자식을 인질로 잡고 타타르족 2만 병력을 일주일 내 모아라. 모이는 데로 바로 시라무렌강을 따라 달려오도록.”

“갑자기 날짜를 당기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놈들이 승전하였으니 전격적인 움직임을 가져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전까지 치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찾아온다면 남양의 목을 쳐야겠다. 야율신의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물론입니다. 다만 본교에서 전쟁을 오래 끌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야율재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한굴렬은 야율재의 강렬한 눈빛 속에서 어젯밤 가졌던 복수심의 그곳과는 또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언제까지 야인(野人) 마냥 이 부대를 이끌고 떠돌까? 남양군과 그 원군까지 격멸하면 금의 북방전선은 무너지는 셈이 될 것이다. 차라리 장성을 넘어 화북지방 일대를 점령하는 것이 어떠냐? 그렇게 해도 우리의 역할은 충분히 유지가 될 것이다.”

“그렇긴 합니다만….”

“또 우리 요는 이미 금에 복속되어 사실상 황실의 적통은 나뿐이다. 그럼 요황실을 어디에 두어야 하겠느냐? 갈 곳 없는 요국 백성들을 화북지방에 수용하고 나의 인장을 옥새로 삼으면 그것이 새로운 요국을 부활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

야율재의 말에 한굴렬은 크게 놀랐다.

야율재의 부친 야율강은 요국 황실의 서자였고 버려진 탕아였다. 야율강은 강력한 무공을 갖고 있었음에도 요황실에 자신의 위치를 요구하지 않고 신분의 한계를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황실에 대한 배신 대신 조용히 자신의 사병인 흑풍대를 끌고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야율재는 요국에 대한 미련은 단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고, 오히려 흑풍대를 끌고 자유롭게 전투하는 삶을 즐겼기 때문에 그를 권력욕이 없는 사람으로 보았다.

무엇이 그를 황위에 대한 욕심을 갖게 했을까?

흑풍대라는 강력한 부대를 통솔하면서도 요국의 전쟁을 돕지 않는 것은 아비를 버린 황실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굴렬에게 있어서 야율재의 이런 야심은 그를 무장으로서의 존경 그 이상의 가치를 품을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신 한굴렬, 대장께서 황위에 오르실 날까지 목숨을 다하여 가장 선봉에서 싸울 것입니다.”

“크하하하하!”

한굴렬이 무릎을 꿇으며 충성을 맹세하자 야율재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문득 파오 사이로 부장들과 함께 분주하게 흑풍대 병사들을 준비시키는 야율균은의 모습이 보였다.

야율신의 비호 아래 성장해 온 야율균은은 그 신분과 무공으로 인해 함부로 접근하는 남자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혼기가 가득 찬 스물일곱 살이었고 거란 전사들만의 풍파를 덜 겪어서 미모가 물이 올라 있었다.

야율균은은 병력 편성을 마치고 야율재에게 돌아왔다.

“부장들에게 지시를 마쳤습니다. 곧 500기가 준비될 것입니다.”

“균은아.”

야율재가 부드러운 어투로 그녀를 불렀다.

야율균은은 대답하기에 앞서 잠깐 야율재의 눈빛을 보았다. 그 어투와 눈빛에서 그녀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예, 큰 오라버니.”

“네 나이가 올해 스물일곱이지?”

“……그렇습니다.”

“네 오라비의 복수를 마치고 남양과 원수의 목을 베고 나면 여기 한굴렬과 혼인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망극하옵니다.”

“큰 오라버니!”

두 사람의 반응이 격렬하게 엇갈렸다. 무릎을 꿇고 깊이 고개 숙인 한굴렬의 만면엔 미소가 가득했지만, 야율균은은 기겁하며 야율재의 팔을 붙들었다.

“신 오라버니께 제 낭군은 제가 찾을 거라 얘기했고 전 당장 혼인 생각이 없어요!”

야율재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대답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야율신이 죽었고 나는 유일하게 남은 우리 야율가의 큰 어른이다. 너를 걱정해서 한 말인데 내 성의를 무시하느냐?”

“전…….”

야율균은은 반박하지 못했다. 순간 어젯밤의 일이 스쳐 지나가며 야율재가 잡아챘던 왼쪽 팔뚝이 시큰거렸기 때문이었다. 그건 야율재도 마찬가지였기에 이내 표정을 풀고 그녀를 다독였다.

“머지않아 넌 야율가 황실의 공주가 될 것인데, 한씨 가문은 거란의 귀족 가문이니 네 짝으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소적문이 홀몸이지만 나이가 많아 나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한굴렬은 아직 삼십 대 후반의 나이니 적당하지 않으냐? 잘 생각해 보아라.”

“공주마마께 소장이 부족한 사내가 되지 않도록 전장에서 증명해 보이겠사옵니다.”

“자네는 이만 가서 메구진에게 군사들을 징집할 준비를 하도록 하게. 우리는 출병 준비를 해야겠다.”

“적들이 다시 한번 누가 전장의 신인지 깨닫게 될 것이옵니다.”

한굴렬은 다시 야율재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는 돌아갔다.

야율재는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갑주와 무기를 챙기러 파오로 돌아갔다. 그러나 야율균은은 잠깐 자리에 망부석처럼 선 채로 깊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갑자기 혼인은 또 뭐고, 공주는 또 뭐란 말인가? 대체 큰 오라비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한굴렬이라니. 난 저런 추남이랑은 혼인하기 싫단 말이야! 끔찍해!’

한굴렬은 그녀에게 흑풍대 장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야율재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혼약 명령에 냉큼 대답하는 한굴렬의 모습에서 그녀는 강한 혐오감을 느꼈다.

출병 소식으로 작게나마 위로를 받았던 그녀의 마음이 이내 큰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남편감을 스스로 결정하는 건 황족이면서 동시에 강한 여전사인 그녀의 자존심 문제였는데 그 권리를 짓밟힌 것이었다.

파오로 돌아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그녀가 전장에 서고자 하는 것은 복수해야만 한다는 책임이라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무겁기만 한 짐덩이처럼 느껴졌다. 초원 위 달리는 말처럼 자유로웠어야 할 그녀의 영혼이 족쇄에 묶여버린 기분이었다.

‘신 오라버니, 절 지켜 주지 않고 대체 왜 먼저 떠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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