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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91화 (91/432)

91화 - 제18장. 종전계략(終戰計略) (5)

보르테는 신기한 눈으로 그들의 대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민족과 다른 국가, 다른 문화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그들이 얘기하는 무림이라는 세상 속의 일들은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달빛 아래에서 차갑게 빛나던 두 자루의 검이 진도건과 영은성의 손에서 신묘한 변화를 일으키던 모습들. 그것이 그저 춤사위에 지나지 않고 예기와 살기의 경계를 외줄 타듯 노는 모습들. 검광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분홍의 꽃들과 그 사이를 헤집는 푸른 바람결이 마치 땅의 신 에제와 하늘의 신 텡그리가 어우러져 노는 것만 같았다.

팽무양이 진도건을 일컬어 영은성과 최현걸 같은 후기지수들의 선도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처럼 보르테의 눈에는 진도건의 평범한 뒷모습이 선지자의 그것처럼 후광이 비추고 있었다.

“갈림길인데 어디로 가야 하느냐?”

가장 선두에서 인솔하고 있던 부장 원효(遠孝)가 고개를 돌려 보르테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오른쪽으로 가야 합니다. 산등성이를 타는 것이 야율군이 주로를 어떻게 타는지 보기 좋습니다.”

“그럼 오른쪽 길로 가지.”

여전히 지면을 타고 아래에서 위로, 뒤에서 앞으로 선선하게 바람이 불고 있었다. 4천 기의 병마가 산길을 따라 연산산맥 정상 방향을 향해 올라갔다.

진도건은 말 위에서 운기조식을 하면서 축기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것은 조가장에서 출발할 때부터 그러했으며 내공의 성장은 분명하고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아직 힘을 완전히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현재로서는 일월신마와 싸웠을 때 이상의 몸 상태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력을 쏟아내어도 체력까지 소진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진도건은 일월신마와의 대결이 패배로 끝났기 때문에 더 높은 지점을 바라봐야 했다. 그리고 과연 혈마 상태에서 발휘했던 힘에 도달할 수 있을지가 그가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었다.

진도건은 생각했다.

‘그때 혈마의 힘은 나의 것이라 할 수 있었는가?’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떨어져 통제력을 잃고 경계의 그림자에 숨어 그 힘을 지켜봤을 뿐, 그것은 인위적으로 조작되어 폭주한 힘에 불과했다.

다만 분명한 건 홍천환을 흡수했다는 사실과 그 힘을 사용한 발원체가 그의 육신이었다는 것이었다.

거대하고 파괴적인 힘.

실질적으로 손에 쥐었다 할 수 없는 그 힘은 허깨비처럼 왔다 사라졌다.

그 대가로 단전과 기경팔맥이 무너지고 정과 신이 붕괴하였으니 실질적으로 손에 남은 건 불타고 남은 잿가루뿐이나 마찬가지다.

절대로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던 고통의 심연 속에서 조강선이 그를 끄집어내지 못했다면 헛되이 이어가던 목숨의 불씨마저 바스러져 사라졌을 것이었다.

이젠 무너진 단전과 기경팔맥이 되살아나고 정과 신은 다시 체에 온전히 깃들었다.

유한의 극치까지 팽창했던 기운이 휩쓸고 지나가 버린 태허(太虛)는 새로이 파천신공의 색을 입은 기운을 물을 빨아들이는 목화솜처럼 풍성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나의 호흡이 자연의 호흡이고 나의 의지는 세상의 흐름을 몰래 잡아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기혈엔 혈마가 남긴 상흔이 흉터처럼 잔존해 있었다.

‘머지않았다. 혈마 때의 기억은 내 속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 전쟁에서 그때의 지경에 도달하여 나는 다시 나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새근새근 이어지던 호흡 사이로 의식의 각성이 꽃 피운다.

“후우……!”

무거운 날숨과 함께 진도건이 마침내 눈을 떴다. 그가 뒤돌아 쳐다보는데 눈이 마주친 보르테가 움찔 놀랐다.

“보르테.”

“예, 옛!”

“내 말 좀 같이 끌고 갈 수 있지?”

“왜……?”

“적군 정찰병 좀 처리하고 오마.”

최현걸이 그 말을 듣고 놀랐다.

“정찰병을 봤습니까?”

“아직 그들 시야에 들려면 멀었는데 미리 움직이면서 처리해 두려고. 계속 가고 있어. 늦지 않게 쫓아갈 테니.”

진도건은 말을 보르테 옆으로 붙였다. 그리고 고삐를 보르테의 손에 쥐여 주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부탁한다.”

진도건은 말 안장 위로 뛰어올라 앉더니 곧장 가까운 나무 위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이내 바람처럼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기척이 느껴지는 게 있느냐?”

진도건이 사라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팽무양이 영은성과 최현걸을 돌아보며 물었다.

두 사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천호대는 이 4천 명의 별동대의 행렬 전후방에 모두 골고루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무림인들이기 때문에 일반 병사들보다 기척을 잡아내는 데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병력 안에서도 가장 손에 꼽는 고수들인 세 사람조차도 아직 아무것도 감지한 것이 없었다.

“허허, 이거 참.”

어처구니가 없던 팽무양이 헛웃음을 흘렸다.

진도건은 빠르게 나무들의 가지를 밟으며 나는 듯 나아갔다.

그의 감각은 산 하나를 대부분 아우를 정도로 열려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든 생물이든 무엇이든 간에 존재를 명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그런 신적인 능력 같은 건 아니었다.

세상 만물 가운데 호흡하지 않는 것은 없는데, 사람의 호흡은 하나의 기척처럼 대기의 순환 속에 녹아들어 그 길을 안내하듯 그 존재의 위치와 연결되어 느껴지는 것이었다.

휘이잉-!

일대에 바람이 불었다. 그것은 진도건을 감싼 채로 일대를 휘돌고 숨은 적의 주변으로 휘돌았다. 그리고 진도건은 그 바람을 타고 나뭇가지를 가볍게 딛으며 하강했다.

눈으로 보기엔 그저 낙엽과 눈더미들이 뒤섞여 덮여 있었지만, 호흡의 기척은 분명 그 속에서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푸악!

청강검이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호를 그리면서 검기가 방출되었다. 나뭇잎과 눈더미가 터지듯 솟구치고 그 사이로 한줄기 핏물도 같이 튀어 올랐다. 검기가 정확히 목을 관통해 버렸다.

‘다섯.’

기척은 연이어 존재했다.

가까이에 1명, 그리고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세 명이 비슷한 지점에서 경계하고 있었고 산 정상 부근에 2명이 더 있었다.

휘리릭!

바람이 순간적으로 발밑으로 모이는 순간, 그 응축된 공기를 박차고 진도건의 신형이 다시 날아올랐다.

톡, 톡, 톡…….

응축된 공기와 나뭇가지들을 번갈아 딛으며 날아갔다. 영은성에게 전수받은 암향표의 경공과 그를 구하려 낙안봉에서 연화봉으로 날아가기 위해 조강선이 펼쳤던 경공이 동시에 그의 발아래 펼쳐졌다.

나는 듯 공간을 가로질러 도착한 나뭇가지 위에서 나무 뒤에 숨은 정찰병과 눈이 마주쳤다.

“헉!”

느닷없이 뒤에서 나타난 진도건을 본 정찰병이 놀라 그만 바람을 집어삼켰다. 그 단말마의 헛바람 소리는 그가 생 마감하기 직전에 낸 작은 소음이었다.

서걱!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그대로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인지 낙엽과 눈더미가 쌓여 있는 산속이었기 때문에 풀썩하는 작은 소음만 이어졌다.

진도건은 빠르게 산등성이를 타고 움직였다. 기척의 끈만 붙잡고 쫓아가던 그의 움직임이 각각의 위치들을 명확하게 감지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자 다시 한번 바람을 타고 빙글 돌아갔다.

그들의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를 이용해 뒤편으로 이동하였다.

팔부능선쯤에서 비탈 아래를 내려다보는 병력들.

무공을 익혔는지 호흡이 얕고 긴 주기로 이어지니 기척을 숨길 줄 아는 자들이었으나 진도건의 감각은 실낱같은 호흡마저 잡아내는 수준이었기에 피할 겨를이 없었다.

셋 중 목표는 중앙.

나무들과 그 가지들의 위치 등 지형들은 보는 기준마다 다른 길을 제시하지만, 날아들기 직전의 진도건은 이미 목표물에 도달했을 때 공간이 어떤 길을 열어 줄 것인지 인지하고 있었다.

팟! 슈우우우-!

딛고 있던 나뭇가지를 박차고 바람으로 몸을 두르며 나무 사이사이를 뚫고 나아갔다.

정찰병은 등 뒤에서 불어오는 심상치 않은 바람결에 본능적으로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매우 빠르게 반응했음에도 이미 진도건의 접근을 허용한 상황이었다.

푹!

“적……!”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청강검이 목과 경추를 뚫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작은 소음과 기척들로 멀리 있지 않았던 다른 두 명의 조원들은 낌새를 느낀 뒤였다.

하지만, 진도건은 이번에도 역시 그들이 자리를 뜰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청강검은 그대로 목을 가르고 빠져나와 오른손을 떠나갔다. 동시에 왼손으로도 허리춤에 있던 홍무검을 뽑아 좌측으로 던졌다.

그를 중심으로 목표들까지 직선거리에 장애물들이 있었음에도 마치 두 자루의 검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두 정찰병의 목을 꿰뚫어 버렸다.

두 자루의 검은 검신에 피를 묻힌 채 다시 날아와 진도건의 두 손으로 돌아왔다.

그의 감각에 잡혔던 호흡의 끈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이 셋이 풍기던 생명의 기운이 흩어지듯 꺼져가는 게 느껴질 뿐이었다.

“좋은 느낌이군.”

중단전와 상단전이 이어지면서 일정한 공간 안에서는 의식을 사물과 연결하여 조종할 수 있었는데, 내공을 회복하면서 더욱 정교하고 신속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저 가능할 거라고 생각만 했던 수법이 손쉽게 실전에서 펼쳐졌으니 진도건 자신도 만족스러웠다.

이런 이기어검을 이렇듯 의지대로 자유롭게 펼쳐 낼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진도건은 또 다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소문으로 들었던 이야기.

화산 창룡령에서 천무경이 연화봉 중턱에 있던 일월신마 상대로 던졌던 파천염룡검의 한 수.

진도건과 천무경의 무공 수준이 창룡령과 연화봉 사이의 거리만큼 벌어져 있다고 치환하여 생각해본다면 역시나 안주해선 안 될 일이었다.

“다음.”

진도건은 다소 무거운 홍무검을 다시 허리춤의 검집에 꽂아 넣고 오른손에 청강검을 든 채 높이 뛰어올랐다. 그의 신형은 다시 정상을 향해 나는 듯 바람을 타고 내달렸다. 정상의 능선을 타고 올라가던 진도건은 두 개의 호흡의 위치를 포착했다. 그리고 그들이 서둘러 자리를 뜨고 있는 기척을 느꼈다.

진도건은 잠시 나무 위로 올라가 서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별동대를 발견했군.’

산림 속 가운데 숲의 밀도가 낮아지면서 병력이 이동하는 게 밖으로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숲속이 아니라 정상에서 지켜본 자들이라면 충분히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나무 꼭대기가 흔들리며 그 자리에 있던 진도건의 신형이 어느새 기척들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중간에 숲이 잠시 끊어지면서 공중에서 발 디딜 사물이 없었으나 진도건의 의지로 응축된 공기들이 발바닥을 받쳐 올려 주고 있었다.

정찰병들이 서둘러 하산하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진도건이 그들을 감지하고 시야에 둘 정도로 쫓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진도건으로서는 노리기 아주 좋게도 둘이 함께 줄지어 비탈을 미끄러지고 있었다.

슈우욱!

다시 한번 청강검이 그의 손을 떠나갔다. 거리는 이전보다 멀었지만, 그렇다고 부담될 수준도 아니었다.

강력한 의지의 발현은 이기어검의 속도를 화살만큼 끌어 올렸다.

퍼퍽!

다소 먼 거리, 정확도를 고려하여 상체를 노렸으니 심장과 명치를 차례대로 관통당하며 두 사람이 그대로 절명하였다. 한순간 시체가 되어버린 두 육신이 데굴데굴 굴러가다 나무와 바위에 막혀 멈추었다.

날아간 방향 그대로 다시 돌아온 청강검을 받아 검집에 꽂아 넣은 진도건은 당장 느껴지는 정찰병은 가까이엔 없음을 깨닫고 연산산맥의 가까운 높은 산봉우리에 올랐다.

그곳은 연산산맥의 백운산이라 불리는 일대였다. 진도건은 그 산봉우리 가운데서도 암석이 융기되어 돌출된 바위산 위로 올라갔다. 그곳이라면 일대의 전경이 한눈에 보일 것이 분명했다.

예상대로 정상에 오르자 연산산맥의 팔방과 그 너머의 동서 초원들이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진도건은 바위산 꼭대기에서 몸을 수그린 채 남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일단의 대규모 병력이 진군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 규모로 볼 때 대장군 남양과 조태상 절도사가 이끄는 군사들로 보였다. 북서로 눈을 돌리자 수풀 사이로 군영으로 보이는 둥근 천막 같은 것이 숲과 언덕 사이로 조금씩 보였다.

‘야율신의 군영이었나?’

문득 포양진 앞 전투가 떠올랐다.

그의 칼에 떨어진 머리는 그대로 상자에 담아 몽골 포로 한 명에게 말을 태워 야율신의 군영으로 보냈다. 조태상이 도착하자마자 즉석에서 내린 결정이었는데 그것으로 야율재의 분노를 일으켜서 이성적인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자 함이었다.

전해 들은 정보에 따르면 야율재의 성정이 매우 거칠고 성급한 면이 많다고 하였다. 흑풍대부터 몽골 군사들까지 명령체계가 야율재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존한다는 걸 파악한 것에 따른 선택이었다.

‘잘 전해졌겠지.’

야율신의 군영이 그 자리를 굳건하고 지키고 있는 거로 보아선 원군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북쪽으로 시선을 던지자 멀지 않은 지점에서 산맥의 줄기가 끝나고 그 바로 앞을 물길이 지나고 있었다. 한어로 황수(潢水)라 불렀는데 습지의 흙 웅덩이들이 마치 강처럼 이어진 모양이었다. 황수는 물이 누렇고 탁한 게 특징이었는데 이 강이 연산산맥 서쪽 부근부터 동쪽으로 길게 초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진도건은 황수를 따라 다시 북동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마침내 적의 군세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아주 먼 초원에서 일단의 군세가 초원을 넘어 황수 유역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거리상으론 사나흘 뒤면 연산산맥의 산자락과 황수가 인접한 지역에 다다를 것으로 보였다.

별동대의 전투는 그들이 연산산맥 경계 안으로 들어올 때를 기점으로 시작할 계획이었다.

‘야율재…….’

그 이름을 떠올린 순간 살의가 은연중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올랐다. 그러자 눈동자에 붉은 광채가 아주 잠깐 흐르듯 지나갔다. 진도건은 그 감정을 빠르게 감지하고는 머릿속을 비우며 뜨겁게 달궈지는 감정을 식히기 시작했다.

‘감정을 앞세우면 안 된다. 아직 내 힘이 부족하니 자제해야 한다.’

진도건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두세 달 시간 만큼의 기다림을 이야기했지만, 다행히 기대보다 빠르게 힘을 회복하고 또 증가하고 있었다. 그래도 야율재와의 싸움만큼은 만전을 기해야 하리라.

호흡을 가다듬는 가운데 기척의 끈이 다시 그의 감각에 잡혔다.

진도건은 다시 올라온 방향으로 돌아가 바위산에서 뛰어내렸다. 응축된 상승기류가 그의 낙하 속도를 소폭 늦춰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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