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 제18장. 종전계략(終戰計略) (4)
야율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야율균은의 옆으로 걸어가 내려다보았다. 엎드리고 웅크린 채 울고 있는 여동생을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초점 없는 눈으로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오라비의 얼굴이 야율재의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하아…….”
야율재는 눈을 감고 탁한 호흡을 내뱉었다. 고개를 천천히 돌리면서 경직되려는 목 근육을 풀어냈다. 근육과 인대가 부딪치면서 나는 뚝뚝거리는 소리가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화를 자극했다.
야율재는 눈을 뜨자마자 성큼성큼 걸어가 전령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야율신을 이렇게 만든 놈이 누구냐? 공손숙? 팽무양? 남양의 군에는 그만한 장수가 없을 텐데?”
“그, 그게…….”
“말해!”
야율재가 일갈하자 엄청난 충격파가 터져나갔다. 일대를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라 잠에서 깬 병사들이 헐레벌떡 파오에서 뛰쳐나오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 살펴보는 흑풍대 병사들은 야율재의 손에 멱살을 잡힌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전령의 모습을 보았다.
“전재, 쟁 중에… 저, 적 우, 원군이 도착했습니다. 그놈들이…….”
“적장 이름은 뭐냐?”
“자, 잘 모릅니다.”
“이 쓸모없는 놈이……!”
“무, 무림인이었습니다! 갑옷을 입지 않은!”
야율재는 이를 까득 깨물었다. 그는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메구진을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메구진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메구진 세울투. 2만 군사를 준비해라. 내가 직접 끌고 갈 것이다.”
야율신의 죽음은 석 달의 유예기간을 없는 일로 만들었다.
‘거절하면…… 죽는다.’
메구진은 덜덜 떨면서 엎드렸다.
“부, 부족마다 흩어져 있으니 2주만 기다려 주십시오.”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큰 오라버니!”
야율균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야율재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눈 주위에 그린 검은 화장조차 번져 흘렀다. 복수심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이 번져 버린 화장으로 인해 더욱 살기등등했다.
“이번 전쟁에 날 선봉에 세워 준다고 약속해요.”
“안 돼.”
“왜요? 언제까지 날 애 취급하면서 감싸고 돌 거죠? 이번에도 적당히 싸워 주고 말 건가요?”
아율균은은 언성을 높이면서 야율재를 다그쳤다. 평소라면 불만조차 내비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운 사촌이었지만, 지금은 복수심과 그간의 답답함이 한 데 섞여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야율재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동정심보다 더 차갑고 잔인한 성정의 사내였다. 그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야율균은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아악……!”
무자비한 악력에 야율균은은 팔이 뜯겨 나갈 것만 같은 고통을 느꼈다. 복수심에 불이 지펴졌던 표정에 두려움이 다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야율재는 다른 손으로 야율균은의 입까지 틀어쥐며 가까이 당겼다.
“선 넘지 마라. 복수가 하고 싶다면 잠자코 내 말을 들어야 할 거야. 알겠니?”
야율균은은 눈물 글썽이는 눈으로 끄덕거렸다. 그제야 야율재는 그녀를 붙잡았던 손아귀를 풀었다.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팔을 쓰다듬는 야율균은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메구진을 번쩍 들어 일으켜 세우고는 다시 한번 노려보았다.
“2주 뒤다. 어기지 마라.”
“예, 옙!”
“가라.”
야율재는 메구진을 강제로 돌려세우고는 등을 떠밀었다. 메구진은 다시 돌아서서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서둘러 말을 타고 숙영지를 빠져나왔다.
메구진이 숙영지 바깥 숲에 도달할 때쯤, 야율재가 좌측을 돌아보았다.
“한굴렬(韓屈冽)!”
“예!”
한굴렬은 흑풍대 서열 3위의 좌장이었다.
“메구진이 자기 진영에 도착하거든 바로 들어가 처자식을 데려오라. 병력을 제때 준비하지 못하면 하루가 지날 때마다 손가락 하나씩 잘라낼 것이다.”
“알겠습니다.”
한굴렬은 곧장 말을 타고 자리를 떴다.
야율재는 남방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감히 내 사촌 동생을 죽인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 주마. ……가만, 설마?’
야율신의 원수를 그리며 분노를 삼키던 야율재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그는 무심코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흉터에 의식이 닿자 통증이 올라왔다.
‘이름이 뭐였지……?’
조강선이 사라지며 남긴 이름이 있었는데 바로 떠오르지 않아 웅앵거리는 소리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야율신을 살해한 자가 그가 맞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하필 이 시점에 떠오른 것이 어쩐지 불길한 느낌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 * * *
야율신을 참살했던 전투가 벌어진 날부터 나흘 뒤.
정비를 모두 끝낸 포양진의 군사들은 다시금 장수들의 인솔하에 집결하고 있었다. 보궁기 병종별로 그리고 남양과 조태상의 1, 2군으로 나누었고 행군을 위한 진형도 갖추었다. 장수들 모두 나서서 지휘하고 있었고 필요한 물자의 수송부대들도 소규모로 편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양이나 조태상 모두 본진에 있지 않았다. 우측 언덕길을 따라 모인 4천의 기병대에 모여 있었다. 천호대가 거기에 있었고, 노획한 몽골 군마들을 최대한 배치한 기병들도 함께 편성하였다.
남양은 옆에 있던 조태상을 돌아보며 물었나.
“별동대(別動隊) 지휘관으로 이 자가 맞나?”
“그렇습니다.”
조태상이 차분히 대답하며 진도건을 보았다.
진도건과 최현걸, 영은성이 모였고 팽무양이 뒤를 받치는 편성이었다. 조태상은 진도건이 가진 무력과 신기에 가까운 능력, 무엇보다 전장을 바라보는 직감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남양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아직도 크게 신뢰하지 못하는 눈빛을 보였다.
“천호대를 별동대로 편성하는 건 상관없는데 사천호(四千戶)로 무림인을 임명하는 게 맞나 싶군. 차라리 자네 동생을 보내는 게 낫지 않나?”
“혹시 모를 조우전(遭遇戰)이 벌어질 때를 위함입니다. 공손숙 장군께서 회복하시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하니 본군에선 제 동생으로 칼을 휘둘러야지요.”
“그렇긴 하지.”
남양이 금방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나흘간 휴식 기간에 조태번과 팽무양의 비무가 있었는데 대등한 실력을 보여 감탄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르테.”
“예, 장군.”
장수들 사이에서 병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르테라는 이름의 젊은 무사가 갑주가 조금 불편한 듯한 행동과 함께 조태상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그런 그를 조태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남양은 최근 패전이 많아 포로가 많진 않았지만, 소수로 잡아두는 자들이 있었다. 보르테는 그런 백여 명 남짓한 포로 중 한 사람이었다.
보르테 마라루는 카마크 몽골 출신이었다. 그는 이미 스무 살 때, 3년 전 타타르족의 약탈에 붙잡혀와 타타르족을 위해 싸우다가 야율재에게도 징집되어 남양과의 전투에서도 싸웠다.
그는 몽골족으로서 이제 스물셋의 나이였지만, 전투에 자신감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분열된 몽골의 상황과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전장에서 소모되는 동족의 현실에도 큰 분노를 갖고 있었다.
조태상은 별동대 계획을 구상하면서 초원의 지형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감옥들을 돌아다니며 몽골족들의 생각을 떠보았고 그중 몇 사람에게서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리고 단단한 체격과 더불어 포로 신세에서도 눈빛이 여전히 날카롭게 빛나는 보르테를 발견했다.
그는 어떤 말에도 넘어가지 않았지만, 싸움에는 자신 있는 눈치를 보였다. 그래서 조태상은 진도건과 영은성을 불러 달밤에 감옥 앞에서 비무를 선보이도록 했다. 그 시도는 보르테의 눈을 현혹하기에 충분했고 결국 조태상의 말에 귀를 열도록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잘 부탁하네. 자네의 도움이 몽골족들의 희생을 줄일 것이야.”
“알겠습니다.”
보르테는 똑똑한 청년이었다. 글까진 몰랐지만, 한족의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리고 야율재 아래에서 네 번의 전투를 경험한 끝에 사로잡힌 터라 그의 군 운용 방식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조태상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조태상이 이번엔 진도건을 보았다.
“진도건.”
“얘기하시오.”
“시간이 필요하다 한 건 자네였네. 절대 야율재에게 먼저 돌격하지 말게.”
“물론이오.”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팽무양이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혹시 돌격하려 한다면 제가 말리겠소. 천호대는 내 소관이니.”
“팽 가주께서 저에 대한 염려가 많으시군요.”
“자네의 실력, 잠재력을 난 믿을 수밖에 없네. 그러나 내가 전쟁터에서 본 야율재는 그야말로 신장(神將)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네. 우리의 행동지침에 있어서 야율재에 대한 접근은 확실히 선을 긋는 게 좋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태상은 진도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스승의 원수임에도 자네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면 그다음은 자네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만이 남겠지. 명심하고 임무를 완수해 주게.”
“어떻게든 될 겁니다.”
“쯧, 장수로서 할 말이 아니네.”
남양이 확실하게 얘기하지 않는 진도건의 어투에 못마땅하다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조태상은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칠 뿐이었다.
“그럼 출발하게. 건승을 빌지.”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다른 장수, 동료들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곧장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보르테가 안내하는 방향에 따라 동쪽 언덕을 넘기 시작했다.
휘이잉-!
4천의 기병대가 언덕을 따라 오르는데 일대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적절하게도 동쪽 언덕을 타 넘듯 불면서 병사와 말의 등을 밀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조태상은 어깨를 붕대로 감은 채 두꺼운 옷을 입고 있는 공손숙을 향해 돌아보았다.
“공손 장군, 그럼 수송부대 지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후군은 안호필 장군이 맡을 것이니 긴밀하게 전령을 유지하여 혹시 모를 상황에 대처하시면 됩니다.”
“수송부대야 염려 마시오. 그래도 두 달 후면 나도 준비가 될 테니 전장에서의 역할을 안 주면 아니 되오.”
“물론입니다.”
조태상이 이번엔 남양을 돌아보았다.
“그럼 소장과 제 동생이 선봉에 서서 진군하겠으니, 대장군께서 중군을 맡아 행군을 인솔해 주십시오. 이후는 어제 고지해 드린 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남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네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했네만, 나는 밤잠을 설쳤을 정도로 여전히 결정을 철회해야 하나 싶기도 하네. 절도사.”
“예, 대장군.”
남양이 더욱 진지한 표정으로 조태상을 보았다.
“정말 우리가 흑풍대와 몽골군을 상대로 대회전(大會戰)에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진도건, 저자가 정말 우리가 이기는 길을 열어 줄 것이며, 우리가 세운 계획들이 먹혀들까?”
회전(會戰)은 양측의 군이 한 장소에 모두 모여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고 치열하게 싸우는 결사(決死)의 항전(抗戰)을 의미했다. 남양이 대회전이라 부른 것은 정말 하찮은 수단까지도 포함한 모든 걸 강구해서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에 한 말이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조태상도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화답했다.
몽골 초원은 중원의 영토만큼 드넓었지만, 남양군과 야율군이 맞붙는 주 전장은 초원 동부에 해당했다. 이 동부 초원은 북쪽으로 비스듬히 뻗어있는 연산산맥(燕山山脈)을 기점으로 우측에는 광활한 목초지와 수풀림이, 좌측에는 다소 건조하고 메마른 초지가 낮은 언덕과 산지로 펼쳐져 있었다.
타타르족이나 몽골족은 상당수가 이 연산산맥 동쪽에 있었고, 케레이트족은 산맥 서쪽, 초원 중부에서 주로 활동했다. 야율신의 부대는 이 연산산맥 서쪽 부근의 산자락에 군영을 치고 있었었고 현재 야율재와 흑풍대는 동쪽 너머에 있었다. 남양군의 포양진은 야율신의 군영보다 더 남쪽의 연산산맥이 서쪽으로 꺾여 이어지는 구간의 길목에 있었다.
그 뒤는 중원에 가까운 연산산맥 능선 위 장성의 병력만이 국경선으로써 남아 있을 뿐이었다.
조태상이 세운 군략은 바로 이런 지형과 전장의 군 배치 상황을 이용하는데 첫 번째에 있었다.
현재 야율신이 맡고 있었던 군영은 나흘 전의 패잔병들이 진을 치며 사기가 많이 꺾여 있었다. 틀림없이 야율재가 보내는 원군의 움직임이나, 흑풍대의 직접적인 움직임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조태상은 자신이 이끄는 2군을 빠르게 전진시켜서 야율신의 군영에서 조금만 빠져나오면 보일 만한 위치에서 회전을 치를 작정이었다. 현재 야율신이 죽은 상황인 데다가 조태상군이 수적으로도 두 배 가까이 많았기 때문에 적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 계획 속에서 조태상은 진도건에게 4천 기병을 주어 별동대를 이끌고 연산산맥으로 숨어들게 하였다. 연산산맥은 숲이 무성하면서도 산세가 험준한 편은 아니었기에 말을 이끌고 넘기에 무리가 없었다. 진도건군이 해야 할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이 연산산맥의 넓은 산세를 이용해서 적들의 행군을 급습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진도건군은 보르테의 길 안내에 따라 빠르게 산림 속을 이동하고 있었다.
보르테는 사실 이 작전에 다소 회의적이었다. 기습한다고 하더라도 흑풍대나 몽골 기마대에 포착하면 과연 그들의 추격을 피할 수 있겠냐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행군을 거듭하면서 그의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수 시간 동안 말을 타면서 보르테는 전에 없던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맞바람이 느껴지지 않는 거지?”
보르테가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영은성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기색을 느끼고 보르테가 쳐다보자 영은성이 이해한다는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어디 맞바람뿐이니? 바람이 등도 받쳐 주고 밑에서도 올라오는데. 네 표정을 보니 나도 새삼 놀랐던 때를 떠올리게 되는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아, 알고 있습니까?”
영은성은 턱을 들어 앞쪽을 보라는 눈치를 주었다.
그가 가리킨 방향에 그들 바로 앞줄에서 말을 타고 있는 진도건이 있었다.
진도건은 안장 위에서 두 손으로 고삐를 말아쥔 채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를 힐끔 보던 보르테는 문득 그가 행군을 시작할 때쯤부터 줄곧 눈을 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긴 시간 동안 행군 방향을 몇 번 틀었으니 말이 엇나갈 법도 한데 한 번도 눈을 뜨지 않고 행군의 방향대로 잘 가고 있었다.
“저분이 바람을 조종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글쎄. 나도 대답을 제대로 들어본 적은 없어서 말이야.”
“텝 텡그리도 못하는 것을…….”
보르테가 놀라 중얼거렸다.
텝 텡그리는 몽골족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박수무당을 일컫는 자로 여러 주술을 담당하긴 하지만, 그가 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린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보르테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다시 영은성을 바라보았다.
“야율신을 저분이 처치하셨다고요?”
“상대도 안 됐지.”
“그럼 야율재도 처치할 수 있겠군요.”
“우리도 그걸 기대한다.”
“그놈은…… 전신(戰神)입니다.”
보르테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영은성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는데 목소리에서도,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에서도 두려움이 역력히 느껴지고 있었다.
꿀꺽!
“하지만, 그놈은 군신(軍神)은 아닙니다.”
“같은 말 아냐?”
가까이 있던 팽무양이 얘기를 듣고 있다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전장에서의 전투력은 압도적일 정도로 뛰어나지만, 군략을 잘 다루는 건 아니라는 소리네. 물론 그 전투력이 군략까지 잡아먹을 정도로 지나치게 압도적이라는 게 문제지만.”
“팽 가주께서는 그와 겨뤄 보셨지요? 어떠셨습니까?”
“나는 그의 연습 상대에 불과했네.”
팽무양은 얘기하면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도 다시 말을 잇기 전에 절로 느껴지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500의 천호대를 상대한다고 고작 200의 흑풍대를 끌고 상대하러 왔는데 오히려 우리가 열세였네. 그는 날 보며 정말 오랜만에 상대할만한 실력자라면서 전장에 참전하지 말고 자신이랑 놀자고 하더군. 대장군은 우리가 야율재의 발목을 잡았다고 평가했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지. 우리의 활약이 그것뿐이었기 때문에 대장군의 군사가 계속 질 수밖에 없던 것이고. 야율신도 400의 흑풍대를 끌고 우리와 상대했을 정도이니 흑풍대와 천호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달랐지. 놈들은 무공도, 군율도 모두 갖추고 있었으니까.”
“야율신도 가주보다 강했습니까?”
“날 포함한 세 사람의 합공도 거뜬하더군. 마상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자존심이 그동안 많이 상했네. 그래서 저 젊은 친구가 야율신을 처치했다는 말을 듣고 내 자존심이 얼마나 더 상처를 받았는지 자네는 모르네. 만약 저 친구의 이름을 내가 알지 못했다면 나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전장을 탈주하는 것까지 고려했을지도 모르네.”
“가주께서는 진 대협의 소문을 신뢰하셨나 보군요.”
“여기 소개 최현걸이도 있지만, 개방을 통해 무림의 소식들을 전달받으면서 우리 무림세가들이나 육대문파들 모두 한결같이 세운 가치가 있네. ‘옛 영광의 역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라는 말, 자네들도 들어봤겠지.”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주백자 어르신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한 이상.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하늘 밖에 하늘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지. 천마신교의 발호가 중원을 뒤흔드는 이 상황 속에서 진도건이라는 청년이 두 절대 고수와 싸운 이야기에 모두 겸손할 수밖에 없었다네. 게다가 주백자 어르신과 같은 시대를 보낸 조강선의 제자라 하지 않았더냐? 믿어야지. 믿을 수밖에. 마교엔 교주 외에도 아홉 명의 마두들이 있다는데 중원 무림에 그에 대적할만한 절대 고수는 대여섯 명밖에 없네. 출중한 젊은 고수들 가운데서도 하루빨리 경지를 깨는 자가 나오길 바랄 뿐이네. 나 같은 놈들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머리도 굳었어. 더 성장할 여지가 없지.”
“팽가의 도법은 전설적인데 너무 기대를 빨리 접으시는 것이 아닙니까? 가주께서도 경지를 이루실 것입니다.”
“아니야. 난 내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네. 특히나 선대의 명맥이 끊어진 나 같은 정파의 어른들은 후대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어. 자네나, 현걸이 모두 재능이 있고 길이 열려 있으니 절대 정진을 멈추지 말게나. 자네들 곁에 좋은 선도자도 있지 않은가?”
팽무양의 어조는 부드럽고 힘이 있었다. 봉문을 깨고 활약할 길이 열린 정파의 후기지수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창천맹에 있을 자기 아들을 바라보는 그것과 같았다. 그는 말 마지막에는 영은성이 했던 것처럼 턱으로 진도건을 가리켰다.
선도자.
적어도 팽무양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천하제일의 쾌검을 다루고, 숱한 생사결을 다퉜으며, 혈마의 폭주로 마공의 본성을 몸에 새겼으며, 파천신공이라는 상승의 기로가 여전히 체내에 흐르고 있었다. 이제는 죽음에서 살아나 조강선의 도움으로 반선의 선술(仙術)에 눈을 떠 화경에 이른 고수 이상으로 자연기와 감응하고 있으니 팽무양이 보기엔 그야말로 탄탄대로가 열려 있었다.
그의 곁에서 함께 호흡하며 무공을 논검하고 경험을 훔칠 수 있는 영은성과 최현걸의 위치가 팽무양으로서는 부러울 따름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 전장에 제 아들도 참전하라 할 걸 하는 후회가 있었다.
혹시 모를 아들을 잃는 참변을 피하고자 가주라는 지위임에도 파견에 자청한 것이 이리 아쉬울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