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86화 (86/432)

86화 - 제17장. 역전(逆轉)의 칼 (5)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그의 얼굴로 번졌다. 기적을 마주한 두 눈이 눈물로 촉촉해졌다.

산자락 너머에서 일단의 병력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잠깐 헤아려 봐도 기병이 수천에 달했다. 군장의 복색이 황군의 그것이었고 우뚝 솟은 대장기에는 조(趙)의 깃발이 맞바람에 펄럭였다.

“사흘 거리에 있다던 군이 어떻게……!”

마량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미 안색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혼란스러웠던 남양은 머릿속이 점점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일말의 여유를 자양분 삼아 회전하기 시작한 그의 머리가 빠르게 판단하기 시작했다.

“원군이 도착했다는 북을 울려라!”

두둥! 두둥! 두둥!

남양의 명령으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서히 전군의 사기가 뛰어오르면서 군사들의 함성이 전장 전체에 선명하게 퍼져나갔다.

‘조태상, 조태번 형제. 그중 형이 머리 회전이 빠르다고 들었는데, 설마 이 상황을 예견했단 말인가?’

이 병력의 이동은 무척 빨랐는데 전력 질주를 하는 듯한데도 진형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산자락 중간지점부터는 세 갈래로 나누어졌다. 첫 번째는 왼쪽 언덕을 올라타기 시작했고, 두 번째는 몽골기마 4천5백을 맞이한 좌군의 격전지로 향했으며 마지막 부대는 중군으로 향하고 있었다. 특히 세 번째 기병대는 명백하게 야율신의 기마대를 노리고 있는 듯했다.

“저, 저 부대는 야율신에게 가는 것 아닙니까? 과연 막을 수 있을까요?”

“조태번의 무공이 매우 뛰어나다고는 알고 있지만, 야율 형제들은 무림의 고수들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과연……!”

남양은 조태번이 세 번째 부대를 이끌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전장에 돌입하기 시작하는 부대의 선봉을 보고 있는데 선봉장의 복색이 이상했다. 황군의 갑주가 아니라 팽무양과 천호대를 처음 봤을 때의 모습과 겹쳐져 보였다.

선봉장이 무림인일지 모른다는 생각과 동시에 팽무양 정도의 절정고수조차 어찌 할 수 없었다는 생각에 불안감도 동시에 들었다.

콰직!

“크악!”

중심이 흐트러진 틈을 타 대부가 뚝 떨어졌다. 공손숙은 급히 언월도를 들어서 막았지만, 그 기세를 막지 못하여 갑주를 뚫고 어깨가 찍혀버렸다. 고통에 악다문 이 사이로 핏물이 울컥 흘러나왔다.

“지긋지긋했다! 이대로 갈라버려 주마!”

소적문의 두 팔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공손숙은 낑낑대며 밀어내려 했지만, 이미 구도상으로도 불리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점점 몸을 웅크리게 되다가 결국 낙마하고 말았다.

“크윽!”

“장군을 지켜라!”

심규봉이 외치며 병사들과 함께 일제히 소적문에게 달려들며 창을 찔렀다. 적절하게 개입한 탓에 소적문도 바로 반격하진 못하고 급히 말고삐를 당겨 뒤로 물러나며 대부를 휘둘렀다.

소적문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이것들이 감히 내 먹이를 빼돌리려 하느냐?”

그때였다.

두두두!

어느새 언덕을 올라온 일단의 기병들.

그 선두에 선 조태번이 언월도의 구부러진 칼끝을 바닥으로 기울여 널브러진 창대에 걸었다. 툭! 하고 쳐올려 머리 높이로 솟구친 창대를 왼손으로 움켜쥐어 뒤로 당겼다. 그리고 심규봉을 덮치려는 소적문을 향해 창을 던졌다.

후욱!

대부를 번쩍 들었던 소적문도 조태번을 발견했다. 그리고 찰나 무서운 기세로 날아드는 투창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뒤로 벌러덩 누웠다.

찌익!

“큿!”

말 등에 드러누운 소적문의 흉갑을 찢어 버리며 날아간 투창은 뒤에 있던 몽골 기병 둘의 머리를 퍼벅! 하는 소리와 함께 꿰뚫어 버렸다.

공손숙을 맞이했을 때처럼 적절한 심규봉의 지시가 떨어졌고 보병대가 길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병사들 사이로 조태번이 말을 달려왔다. 심상치 않은 위협을 느낀 소적문도 이미 대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카앙!

언월도와 대부가 강하게 충돌했다.

같은 언월도였어도 조태번의 공세는 공손숙보다 훨씬 빠르고 강했다. 게다가 이미 공손숙과 싸우면서 어느 정도 기력이 소진된 소적문으로서도 승기를 기대하기 쉽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휘익!

주고받던 공수보다 순간 더 빠르게 언월도가 파고들어 소적문의 머리를 노렸다. 급하게 머리를 숙여 피해냈지만, 칼날에 투구가 걸리며 머리가 휙 넘어갔다.

투구는 날아가며 변발의 대머리가 드러났다. 옆머리와 뒷머리만 남긴 거란족 특유의 모습이었다.

“큭!”

소적문은 금방 수세에 몰리면서 이 상황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조태번 뒤로 합류하는 병력이 눈에 들어오자 더는 이 전장에서 싸우기 어렵다고 느꼈다.

“이럇! 후퇴하라!”

소적문은 서둘러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이미 난전이 길어지면서 남양군의 병력도 많이 줄어 공간이 난 상황이기에 어렵지 않았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몽골기병들도 일제히 뒤를 따라 물러나기 시작했다.

조태번은 서둘러 말에 박차를 가하며 쫓아갔지만, 적들의 달리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몽골 군마의 능력이 더욱 우수한 것도 있었지만,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오는 바람에 그의 군마가 꽤 지쳤던 이유도 있었다.

“진도건의 힘을 받지 않으면 속도를 내기 어렵구나.”

조태번은 새삼 느껴지는 현실감에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뒤를 돌아보니 함께 온 기병들의 말이 지쳐 있는 모습이 보였기에 추격을 명령하긴 어려웠다. 그는 빠르게 진형이 무너진 병력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기력이 금방 떨어지던 것은 2번째 기병대의 선봉에서 달리던 영은성과 최현걸도 느끼고 있었다. 점점 속도가 떨어지면서 말이 힘겨워하고 있음을 느꼈다. 다행히 전장에 제때 합류하여 달리는 것을 멈추고 적병들을 처치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예상되었던 사흘 거리를 주파할 수 있었던 것은 진도건의 능력 덕분이 컸다.

한 달에 가까운 행군 동안 진도건은 한 가지 일에만 신경 썼다. 다른 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면 오로지 내공 회복에만 집중한 것이다.

보름 정도 행군을 지속하였을 때, 그들은 남양이 원군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파견한 전령을 만났고 조태상은 전령으로부터 남양군의 상황과 날씨 등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추위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폭설이 그치며 맑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적군의 기습 가능성을 점쳤다.

의견 교환은 빠르게 이뤄졌고 행군 속도를 높이기로 했다. 그리고 조태번과 진도건 일행에게 3천의 기병을 주어 먼저 진군하게끔 했다.

조태상의 결정에 대한 논거는 이러했다.

눈이 그치고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는 것은 쌓인 눈이 먼저 말라가면서 가벼워질 거로 예상할 수 있었다. 게다가 폭설과 혹한기가 길어 남양군이 날씨에 보호받는 느낌과 더불어 추위로 많이 위축되어 있을 것이었다. 여기에 몽골군이 연전연승한 이유에 군략이 좋은 자가 있다면 기습의 감행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다음은 속도전이었다. 적의 기습이 없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있다면 지금 이 결정조차도 원군으로서 제 역할을 못 할 가능성도 있었다. 남양이 전령을 보낸 것은 날씨가 풀린 이유도 있었기에 같은 시점에서 몽골군이 기습을 결정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었다.

여기서 진도건의 능력이 발휘되었다.

그는 바람을 통제했다. 가장 선봉에 서서 맞바람을 흘려버렸다. 공기의 저항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 선두의 군마는 빠르게 질주했다. 뒤따르는 병력이 느끼는 저항도 크게 줄었다.

사흘 정도 시간이 흐르자 진도건이 더 큰 변화를 만들어 냈다.

달리는 지면을 따라 상승기류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 절묘한 기류는 군마가 버텨내야 하는 무게감을 일부 해소해 주는 효과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전력 질주를 해도 평소보다 사분지 일 정도의 체력소모만 있었다.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고 그 긴 거리를 달려온 것은 몽골 초원의 군마들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즉, 현시점에서 오로지 진도건이 선봉으로 질주하고 있는 천 기의 기병들만이 그 기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재밌는 부대로구나!”

야율신과 그의 기마대가 남양군의 후열을 돌파하고 튀어나왔다.

적의 원군이 도착했다는 사실이 정말 의외이긴 했지만,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다만 중군을 휘젓고 있는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저 기병대는 진군 방향으로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야율신의 기마대도 마주 질주하기 시작하자 두 부대가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흑사풍파 초식의 기운을 명륜대도에 담았다. 일격에 기세를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진도건도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두 손으로 든 붉은 적성창에 파천신공의 힘을 담았다. 창대를 휘감는 푸른 기운과 바람이 뒤섞여 응축하고 있었다.

야율신은 그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흐아압!”

야율신의 기합성이 터지자마자 두 사람이 동시에 출수했다.

꽈르릉!

흑풍의 파도가 먼저 솟구치며 진도건을 덮쳤지만, 진도건이 쏘아낸 풍룡포의 회오리는 야율신의 기운을 모두 박살을 내버렸다. 그리고 그 기운은 놀라 벌떡 일어선 야율신의 군마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며 그 뒤를 달리던 몽골 기병들까지 휩쓸어 버렸다.

야율신은 그대로 말에서 떨어져 나가 땅을 데구루루 굴렀다. 만신창이가 된 몰골로 벌떡 일어났을 때는 대열이 엉망이 된 자신의 기마대를 적장의 기병대가 덮치고 있었고 엄청난 무공을 보여 준 적장이 말을 타고 그의 주변을 맴돌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넌 누구냐!”

진도건은 야율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말에서 내렸다. 그는 적성창을 땅에 박은 채 허리춤에 찬 두 자루의 검 중에 한 자루의 검을 뽑았다.

조가장의 대장장이 모웅이 백련정강으로 제작해 준 푸르스름한 검신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등잔 모양의 호수를 사용한 검으로 하얀 손잡이가 특징적이었다. 군용검보다는 검신 폭이 다소 얇았다.

모웅의 말에 따르면 조가의 옛 조상 가운데 유명한 장군이 사용했다던 청강검(靑釭劍)을 본 땀으로써 그 이름도 똑같이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넌 조강선을 아느냐?”

“조강선?”

야율신은 흠칫 놀랐다.

“그걸 묻는 넌 누구냐?”

“조강선은 나의 스승님이시다.”

“……네 이름이 진도건인가?”

“그렇다. 네가 흑풍신마인가?”

“크크큭!”

야율신은 대답 대신 웃음을 먼저 터뜨렸다.

야율재가 조강선과 겨루고 나서 들려줬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 싸움의 결과와 조강선이 사라지면서 얘기했다던 ‘진도건’이라는 이름까지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야율신은 두 손은 월륜대도를 들고 가슴을 당당히 폈다.

“내가 바로 흑풍신마 야율신이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크크크! 언제까지 입을 놀릴 수 있을지 보자꾸나.”

야율신의 신형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거대한 월륜대도를 휘두르는 속도는 정말 빠르고 무거웠다. 검은 기운이 돌풍처럼 휘몰아치는데 검은 갑옷 때문에 마치 바람과 동화되어 보였다. 일대에 들어오는 그 무엇도 부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진도건은 그 돌풍 속에서 자유로웠다.

거대한 월륜대도를 휘두르는 속도는 야율신의 신력과 내력이 어우러져 제아무리 내력이 고강한 팽무양도 쉬이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극한의 쾌검을 다루고 또 상대해온 진도건의 눈에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보일 뿐이었다.

“넌 흑풍신마가 아니군.”

진도건이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율신의 눈빛이 흔들린 찰나 진도건이 출검했다.

천뢰삼검식 십점타뢰(十占打雷).

키앙!

찰나 거의 동시에 열 개의 검광이 분출되었다. 야율신이 반응할 새도 없이 그의 전신을 꿰뚫었다. 양어깨와 허벅지, 무릎 등이 관통당했다.

월륜대도를 땅에 떨어뜨리고 사지를 늘어뜨리며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이럴 수가…….’

생각이 멈춰 말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빠른 검속에 눈빛은 이미 초점이 풀린 상황이었다.

진도건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살의를 담은 검에 망설임은 없었다.

핏!

한줄기 검광에 야율신의 목이 분리되어 땅에 떨어졌다.

이 싸움을 남양은 지휘대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가슴 졸이며 지켜봤던 진도건과 야율신의 충돌이 너무나 쉽게 진도건의 승리로 끝이 나는 것을 보자 전율이 느껴졌다.

“승리! 승리의 북을 울려라! 당장!”

전장은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야율신이 죽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나가 몽골병들의 사기가 바닥을 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나마 조태번으로부터 살아남은 소적문이 패잔병들을 지휘하여 후퇴하였다.

적들을 추격하는 군사들은 없었다. 수적 우위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을 뿐 이미 야율신과 몽골병의 전투력으로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던 병사들이었기에 그저 싸움이 끝난 것만으로도, 승전으로 끝난 것으로도 기뻐 환호하고 있었다. 조태번, 진도건과 함께 온 기병들도 이미 군마들이 지쳤기 때문에 추격할 여력까지는 없었다.

환호의 함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진도건은 야율신의 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감정은 눈도 감지 못한 머리통을 보고 일말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흑풍신마가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전쟁을 길게 끌어서도 안 된다. 그때까지 힘을 되찾을 수 있을까?’

내공의 회복은 빨랐지만, 혈마의 힘을 뿜어내던 것을 기억하면 아직도 까마득했다. 이제는 파천신공으로 그만한 힘을 다룰 수 있게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 지경에 이르면 바람을 다루는 능력은 다른 차원의 길로 그를 인도해 줄 것이다.

그것을 보여 준 스승 조강선의 모습을 잠시 기억하며 진도건은 말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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