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제17장. 역전(逆轉)의 칼 (4)
“대열을 갖추어라! 밀집대형을 유지하고 창을 들어라!”
심규봉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병사들 사이에서 함께 장창을 들었다.
기마대의 돌격으로 수십 명이 순식간에 쓸려나가고 짓뭉개져 그로 인한 공포감이 삽시간에 보병대 전체에 감돌았다. 그러나 심규봉은 쉬지 않고 목청을 높였다. 동고동락하며 전장을 누볐던 고참 동료의 목소리는 공포로 깜깜해진 시야 속에서 정신을 깨워 주는 효과가 있었다.
푸푸푹!
보병대 전열로 파고들었던 몽골 기병들을 향해 장창의 날카로운 촉이 솟구쳤다. 정리된 대열을 갖추고 기합과 함께 찌르는 창 공격에 몽골 병사와 군마들도 푹푹 찔리며 쓰러졌다.
몽골 기마대의 전투력은 분명 뛰어났지만, 심규봉이 지휘하는 보병대의 단합력이 좋아 소적문의 생각과 다르게 반격의 물결이 거칠었다.
“무지렁이들이 발악을 해 봤자지!”
소적문이 휘두르는 대부의 공세는 무시무시했다. 한번 휘두를 때마다 두셋이 나가떨어졌고 철 투구째로 머리를 쪼개 버리기도 했다.
심규봉은 전장에서의 경험이 풍부하여 언제나 전황을 살피는 데 능숙했다. 대전략을 구사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시점에 어떻게 움직여야 좋을지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몽골 기병들보다 소적문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대열 사이를 이동하고 있었다. 그의 귀는 뒤쪽을 향해 열어두고 있었으니 멀리서 들려오던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짐을 감지하고 있었다.
두두두두!
때마침 공손숙의 기병들도 언덕에 거의 다 올라온 상황이었다.
심규봉은 어느새 가장 후열에 와 있었고 그는 언덕 아래로 공손숙의 투구가 보이자마자 바로 앞에 있던 병사들의 등을 치며 소리쳤다.
“좌우로 벌려라! 길을 열어라!”
마치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는 듯이 보병대의 후열이 차례대로 사이를 벌리기 시작했다. 점점 앞쪽 열로 확장되면서 어느 순간 공손숙과 소적문 사이로 일자 길이 형성되었다.
“좌우는 그대로 둘러싸라!”
보병대가 좌우로 갈라져 공손숙 대(隊)와 소적문 대 사이의 길을 열고 이렇게 갈라진 병력이 중앙을 비운 학익진처럼 소적문 대를 감싸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손숙과 기병대는 어느새 보병대 사이를 질주하여 전면에 소적문과 그 몽골기병들을 노리고 있었다.
“공손숙이 왔다!”
우렁찬 외침을 터뜨리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언월도를 번쩍 들어 소적문을 노리고 내리쳤다.
카앙!
이히히힝-!
언월도와 대부가 충돌했다. 군마끼리도 서로 앞발을 번쩍 들었다가 머리끼리 부딪친다. 삽시간에 기병대들이 중앙을 파고들기 시작하니 깊이 파고들었던 몽골기병들도 진형이 무너지고 갈래갈래 찢어졌다.
“칫!”
소적문은 어금니를 깨물며 주변을 살폈다. 맹장 공손숙은 당해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황이 난전으로 흘러가 버렸다. 생각보다 보병대의 지휘가 튼튼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니 오히려 그의 기마대가 불리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딜 보느냐?”
챙!
언월도에 실린 힘이 대단했지만, 소적문에게 닿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부를 크게 휘둘러 좌우로 가까이 접근한 기병 둘을 갑옷까지 부숴버리며 쓰러뜨렸다.
“바깥 열은 적을 상대하고 후열의 병사들은 길을 돌파하라!”
“포위망을 쌓아라! 적들이 진입한 위치를 막아라!”
소적문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이어 외치는 심규봉.
아무리 몽골병들의 전투력이 강해도 난전 속에서 기병들은 창병들에게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소적문을 공손숙이 묶어 둘 수 있다면 큰 피해를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저놈이 보병대 지휘관인가!’
소적문은 심규봉을 발견했지만, 공손숙 때문에 접근이 어려웠다.
“너부터 쓰러뜨려야겠구나.”
“꿈도 야무지군!”
챙! 챙! 챙!
두 맹장이 격렬하게 맞붙으며 언덕 위 전장이 혼잡스럽게 되었다.
한편 야율신이 전진시킨 궁병대는 어느새 2진으로서 보병대와 합류하여 난전에 돌입하고 있었다. 처음 편성 기준으로 만오천 대 2만의 싸움이 되자 판세가 점점 몽골병에게로 기울기 시작했다. 몽골족의 궁병대가 그저 편제만 그럴 뿐 실상 칼과 활 모두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병사였고 그 호전성은 황군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남양군의 보병대는 전선을 넓게 펴서 방진을 형성하고 있는 반면에 야율군의 보병대는 다소 중앙에 몰려 있기 때문에 남양군 보병대 가장 바깥의 좌우군은 말 그대로 노는 칼이 되고 있었다.
“대장군! 이대로면 뚫립니다. 궁병대를 합류시켜 중군을 보조하고 좌우군이 적들의 측면을 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니, 궁병대만 전진시켜 중군을 보조한다. 좌우군을 움직이면 야율신을 막을 방패가 사라지게 된다. 야율신, 저놈…… 우리 군에 최대한 피해를 줄 참이다.”
연승과 함께 추격하다 연전연패를 하며 포양진까지 쫓겨온 남양이었지만, 대장군 직을 맡을 만큼 전장에서의 잔뼈가 굵은 무장이었다.
그의 지시로 다시 전령이 말을 타고 출발했다.
잠시 후, 궁병대가 활을 등 뒤로 매고 칼을 뽑아 전진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절정으로 가고 있구나.’
꼴깍!
남양은 마른 침을 삼키며 전장을 바라보았다.
좌측 언덕은 공손숙대의 투입으로 격전이 이뤄지고 있는 반면에 오른쪽 언덕의 숲 사이로 병력의 이동이 보이는 게 심상치 않았다. 언덕 위의 병력은 대부분 전멸했다고 보는 것이 맞는 판단일 것 같았으나 그래도 4천 명을 이동시켜 두었으니 쉬이 뚫리지 않을 것이었다.
얇아진 중군은 궁병대의 합류로 다시 방진을 두껍게 쌓을 것이었다. 좌우군의 배치를 유지하는 것은 야율신의 돌격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는데 그가 가는 쪽으로 팽무양의 부대를 보낼 생각이었다.
긴장된 상태로 전장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우측 언덕을 점령한 야율군의 기마대가 보병대와 부딪치기 시작할 때, 마량이 손으로 먼 쪽을 가리켰다.
“야, 야율신이 움직입니다!”
“……남은 기마대 전부인가!”
5천 기마 전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선봉의 방향을 유심히 지켜보던 남양이 마량의 어깨를 탁 쳤다.
“팽 부장과 천호대, 기병 일천 기 모두 좌군으로 보내라!”
마량이 뛰어가 전령 하나를 붙잡고 명령을 전달했다. 전령이 말을 타고 출발하자 마량은 다시 남양에게 돌아와 함께 전장을 살폈다.
야율신의 5천 기마대는 진형을 갖추며 천천히 좌군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기마 두셋 정도만이 좌우로 붙어서 긴 대열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대형 유지 때문인지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사진(長蛇陣) 같지는 않은데…….’
육지전에서 장사진은 병력을 길게 늘어뜨려 모여 있는 적들을 포위하는 데 용이한 진형이었다. 지금처럼 둘러쌀 수 있는 틈이 없는 상황에서는 궁기병이 되어 활을 쏘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한 방법인데 이미 난전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군도 쏴 죽이는 방법이었다.
길게 늘어선 기마대가 좌군 보병대와의 거리를 삼분지 이 정도 줄였을 무렵 선봉이 속도를 눈에 띄게 줄이면서 뒤따르는 기마대가 점점 두텁게 진형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넓게 행열을 구축하면서 점점 추행진을 구축해 가고 있었다.
“잠깐…… 뭔가 이상한데?”
“왜 그러십니까?”
야율신의 기마대를 바라보던 남양은 본능적으로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마량은 그 기분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 더 지켜보고 나서야 남양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제길! 팽무양보고 반대로 가라고 해!”
“늦, 늦었…….”
남양이 다급하게 외치자 마량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전해!”
남양이 다시 재촉하자 어쩔 수 없이 대기하고 있는 전령에게 달려갔지만, 마량은 이미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야율신의 5천 기마는 장사진처럼 이동하기 시작하여 추행진으로 다시 결집하고 있었는데, 대략 500여 기 정도의 일단의 기마가 반대로 방향을 틀어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딱 보기에도 거의 두세 배는 빠른 속도로 남양군의 우군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는데 그 수가 본진 기마대보다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최선봉에 선 무장의 검은 갑옷과 검은 창이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야율신이 바로 5백 기의 선봉에서 남양군의 우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달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추행진을 이룬 4천5백 기의 기마는 그대로 좌군에 돌격하기 시작했고 이미 팽무양의 천호대는 좌군과 언덕 사이를 돌아나가기 시작했다. 전령이 쫓아가는 모습이 보였는데 이미 격전이 벌어진 이후에야 명령이 전달될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젠장! 대체 어느 쪽으로…….”
남양의 고민은 병력 지원을 어디로 보낼 것이냐 하는 부분이었다.
4천5백 기마의 돌격은 강력할 것이었다. 팽무양의 천호대가 합류하여 격전을 벌이겠지만, 몽골 기병 개개인의 전투력을 고려하면 절대 만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반대쪽에서 야율신의 5백 기의 기마는 수적으로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야율신 한 사람이었다. 그의 강력한 무공은 가히 일당백의 전력을 자랑하며 전선을 뒤흔들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언덕에서 내려오며 우군을 공격하는 기마대의 기세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고민이 길어지는 동안에 야율신은 어느덧 선봉에 서서 남양군 우군 4천 보병대와 불과 10여 장 거리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칠흑 같은 중갑과 현철로 제작한 월륜대도(月輪大刀).
그 수가 5백 기에 불과했지만, 선봉에 선 야율신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보병대는 공포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대오를 유지하고 창대를 단단히 쥐어라!”
동요하는 병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장수들이 소리치고 있었지만, 그 외침을 들은 병사들은 얼마나 될까?
두두두두!
“나약한 중원인들에게 절망을 선사하라!”
다른 위치의 병사들조차 반사적으로 한 번쯤 고개를 돌릴 정도로 전장에 울려 퍼지는 야율신의 외침.
장창으로 세운 방진을 앞에 두고 번쩍 든 월륜대도에 검은 기운이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그리곤 뒤에서부터 크게 원을 그려 지면을 쓸면서 전방으로 휘둘렀다. 만세를 부르듯 번쩍 쳐 올린 월륜대도를 따라 거대한 경력의 파도가 보병대를 덮쳤다.
콰콰콰쾅!
수수깡처럼 부러지는 창대들, 피떡이 되어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병사들의 시체들. 경력의 파도에 휩쓸려 우군 중앙의 대오가 산산이 부서지고 그사이를 야율신의 기마대가 파고들었다.
야율신은 선봉을 유지하며 계속 돌격했다. 월륜대도를 휘두르며 전진하는 그의 기세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중갑을 두른 군마의 기세는 무거웠고 두 손으로 휘두르는 그의 칼은 병사들을 낙엽 쓸 듯 몰아쳤다.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던 야율신의 군마가 어느새 후열까지 진입했다. 야율신은 다시 한번 월륜대도에 기운을 실어 크게 휘둘렀다.
흑풍명천마공(黑風冥天魔功) 흑사풍파(黑沙風波).
바람의 충격파를 쏟아내어 방진을 깨부수는 최고의 일격이 다시금 퍼부어지며 후열을 뚫어 버렸다.
두두두두!
우군을 관통해 버린 야율신과 고작 십여 기 정도만의 희생만 입고 쫓아온 5백여 기의 기마가 이번엔 언덕을 내려온 기마대와 다투고 있는 보병대의 후방을 향해 돌진했다.
“오, 온다!”
그들이라고 바로 옆에서 아군을 휩쓸고 있는 야율신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검은 군마, 검은 갑옷, 검은 월륜도의 주인이 이번엔 그들을 향해 떨어졌다.
꽈앙!
대열조차 갖추지 못한 보병대를 향해 야율신은 그대로 들이받았다. 월륜대도로 적병들을 휩쓸어내자 교착 상태에 빠진 채 난전을 거듭하던 몽골 기마대와 만났다.
“내 뒤를 따라라!”
절대적 신뢰를 보낼 수 있는 그 한 마디와 함께 야율신이 방향을 틀었다. 고전을 면치 못하던 기마대가 크게 사기를 얻으며 검은 갑옷의 뒤를 따랐다. 열리지 않던 길이 열리며 어느새 천여 기의 기마가 야율신의 뒤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흑풍이 하늘을 덮으리라!”
그것은 흑풍대의 구호였다. 그 외침과 함께 군세를 이루어 돌격할 때의 흑풍대는 말 그대로 무적이었다.
야율신 뒤의 기병들은 흑풍대가 아닌 몽골족 기병들이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흑풍대는 공포와 경외 두 가지 면이 공존했다. 흑풍대를 이끄는 장수들 가운데 손꼽히는 장수인 야율신이 선봉에 서서 그 외침을 내지른 순간, 몽골 기병들은 흡사 자신이 흑풍대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빠질 수밖에 없다.
“흑풍이 하늘을 덮으리라!”
야율신의 외침에 뒤이어 천오백여 기의 기마대가 일제히 외쳤다. 쩌렁쩌렁 울리는 함성의 메아리 속에서 무자비한 칼바람이 몰아치며 적들을 짓밟았다.
야율신과 기마대는 곧장 우군의 후열을 다시 돌파하며 빠져나왔다. 그 시점에서 이미 우군 8천 보병대는 4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전열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상태였다.
두두두두!
기마대를 회수하는 데 성공한 야율신의 부대가 어느새 남양군의 전선을 뚫고 넘어온 상황이었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더욱 가까워진 대장군 남양의 지휘부를 훑었다. 파악하기로 6천여 명의 군세가 있었으나 그의 눈에는 그저 오합지졸로만 보였다.
남양의 두려움에 찬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크크! 도망치지 않는 것이냐, 남양? 아니면 거기서 네 병력의 궤멸을 지켜볼 것이냐?’
처음엔 몽골족 병력을 희생시켜 1, 2만 정도 궤멸시킬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게 이제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대장군 남양이 이대로 도망쳐도 관계없었다. 그의 지휘력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게 된 이상 야율신은 적 병력을 철저하게 갉아먹을 작정이었다.
야율신은 대장군 지휘부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난전이 이뤄지고 있는 보병과 궁병의 혼합 전선이었다.
“두 줄로 곤자진(丨字陣)을 펼친다! 적진의 후열을 부숴버릴 것이다! 내 뒤를 따라라!”
접근을 허용한 이상 장창도 들지 않은 궁병대가 기마대를 견제할 방법은 없었다. 눈먼 칼에 한두 기가 쓰러질 순 있어도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궁병대를 휘젓는 야율신의 기마대는 그야말로 무적의 부대였다. 우군에서 좌군까지 마치 실로 천을 꿰매듯 전장 속을 뚫고 들어갔다 나왔다 반복하면서 지나가기 시작하자 보병대가 구축하던 전선 모두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으아아……!”
남양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정수리를 뚫고 오르는 화를 버티지 못하고 투구까지 벗은 채 머리를 쥐어뜯었다.
5만 군대가 무너지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혼란한 정신을 부여잡고 두 발로 서 있는 것조차 용한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후퇴해야 합니다! 농성해야 합니다!”
마량이 옆에서 다급하게 외쳤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은 바 아니었지만, 저렇게 전선의 후방을 야율신이 휘젓고 있는 마당에 후퇴 명령을 내리면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펼쳐질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팽무양의 천호대를 불러 야율신의 돌진을 봉쇄하는 길밖에 없었지만, 이렇게 될 걸 알았는지 그들과 충돌했던 4천5백의 몽골 기마대가 그들의 발목을 철저하게 붙잡고 있었다. 이미 전령을 보낸 상황이었음에도 뚜렷한 움직임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 분명했다.
‘두 배의 군세로 방진을 단단하게 구축하면 버틸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것 자체가 오만이었단 말인가? 어찌 장수 하나로 전황이 이렇게 순식간에 뒤집힌단 말인가?’
그의 판단은 사실 완전히 틀렸다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 혹한기를 보낼 동안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몽골군의 궁기전(弓騎戰)에 대비하기 위한 대방패 제작에 대부분 시간을 쏟았던 것이 훈련 부족으로 이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포양진을 둘러싼 전방 지형은 험지라 볼 수 없었기에 전선이 넓어지는 것도 약점이었다. 무엇보다 야율신이 예상과 다르게 전격적으로 진군한 건 어쩌면 이런 참사를 예고했을지도 몰랐다. 이런 군사력이라면 농성도 위험했을 것 같았다.
“후퇴해야 합니다!”
마량이 옆에서 버럭 외쳤다.
‘마량의 말이 옳다. 후퇴해야 한다. 그러나 원군이 있다면…, 원군이 있다면…….’
조태상이 이끄는 2군이 사흘 거리에 있다던 보고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버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옆에서 계속 재촉하고 있으나 그 이후 벌어질 참사까지 눈앞에 아른거리면서 결정을 주저하게 했다. 지금 후퇴하는 것은 포양진으로의 후퇴가 아니라 더 후방에 세워둔 청자진(靑磁陳)까지 물러나야 했다.
그다음 뒤는 장성이었다.
“후우……. 큭!”
후퇴 명령. 차마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다.
두려움에 휩싸인 마량은 군사라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책략도 없이 재촉만 해댔다.
다시 명령을 내리기 위해 흩어진 용기를 한 줌 한 줌 끌어모았다. 그리고 그 말을 입 밖에 꺼내려 할 때였다.
“대, 대장군! 저, 저길 보십시오!”
마량의 외침이 아니었다.
근처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전령의 외침이었다. 그가 지위의 고하도 망각한 채 다급히 남양의 팔을 잡아채면서 왼쪽의 산자락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엄함에 화를 낼 새도 없이 엉겁결에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던 남양의 입이 놀라 쩍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