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제17장. 역전(逆轉)의 칼 (2)
“확신은 어렵지만, 그런 이야기가 있다. 이리 와서 앉거라.”
“아아…….”
천서은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섰다. 갈 데 없는 시선은 손에 잡히지 않을 환영을 쫓는 듯 초점이 흔들리고 있었다.
“흐음.”
천준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조카의 반응을 보니 화산에서 돌아온 그 날이 떠올랐다.
천서은이 입은 복부의 관통상은 분명 중상이었지만, 다행히 응급조치가 잘 되어서 위험한 순간은 넘길 수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호소하는 정신적 고통이었다.
며칠간은 그녀가 기거하던 별채에선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때때로 발작 증세도 일으키는 바람에 그녀를 보살피던 영란의 목숨이 위험한 순간까지도 발생할 정도였다. 따라서 한동안은 천무경이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또 어느 순간부터는 폐인이 된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실어증(失語症)에 걸린 것처럼 한 달 가까이 말을 하지 않아 많은 사람의 걱정을 사기도 했었다.
그 뒤로 다행히 두 달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신체의 상처가 아물자 그녀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는데 그때 폐관 수련을 천명하고 무화동에 스스로 가두었다가 오늘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천준으로서도 그녀의 얼굴을 본 것이 거의 3년 만이었다. 햇빛을 못 받아 피부가 눈처럼 하얗게 된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오히려 한껏 살아난 듯한 미모는 눈앞이 아찔할 지경이기도 했다.
사촌지간에 강보로 업고 다니던 시절까지 보았음에도 아름답다는 평에 스스럼없었다.
“크흠! 거기 서서 망부석이 될 참이냐? 이젠 외숙부께 인사도 드리고 해야지.”
잠시 기다리던 천준이 그녀를 타일렀다. 천서은도 정신이 번쩍 들어 앞을 살펴보았다.
천준이 상석에 앉아 있었고 주유현이 그녀를 보고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그 옆의 젊은 도사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왠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외숙.”
천서은은 주유현에게 걸어갔다. 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았고 주유현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네 소식을 듣고 이 외숙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고마워요. 오시는 길은 힘들지 않으셨어요?”
“타고 온 말들이 고생했지. 아, 여기 소개를 해 주마. 이 사람은…….”
“소, 소도는 무당파의 처, 청명이라고 합니다!”
포권을 내밀며 그 뒤로 고개를 푹 숙이는데 머리에 쓴 도관이 팔에 걸려 뒤통수로 넘어갔다. 거기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잠깐 천서은과 눈이 마주쳤는데 1초도 쳐다보지 못하고 급히 시선을 피하며 도관을 다시 쓰느라 허우적댔다.
“천서은이에요.”
천서은은 가볍게 화답하고 맞은편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주유현도 이어서 앉았고 청명도 의자를 당기는데 버벅대며 힘들게 자리에 앉았다.
청명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천서은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패소룡비무제에서 얻은 백봉천녀라는 별호와 그 아름다운 미모에 대한 소문 가운데 최소한 후자에 한해서는 소문이 과장이 아님을 너무나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그녀를 보고 싶었던 이유는 사실 무공 때문이었는데 설마하니 그녀의 미모에 넋이 빠질 줄은 그 자신조차 꿈에도 몰랐다.
도가를 수행하는 도사는 여자를 밝히면 안 된다는 스승의 가르침은 언제나 있어왔지만, 그 가르침이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색(色)이 아닌 호의(好義)에 기인한 것임에도 아직 두 가지를 스스로 구분할 수 있는 연배는 아니었다.
반면 천서은은 딱히 청명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미 진도건이라는 석 자 이름을 들은 이상 그녀의 모든 관심은 천준의 입에만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부, 더 얘기해 주세요.”
“나도 얘기만 들었을 뿐이라…… 화산에서 있었던 일은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그때 맹주님이 녀석의 단전을 파괴할 때, 그것을 중간에 막아서고는 녀석을 안고 낭떠러지로 뛰어내린 노인을 말이다.”
“기억…… 나요.”
“연화봉 아래야 만장절애이긴 했으나 연화봉까지 날아온 경공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 노인은 충분히 살아나갔을 거로 모두 얘기했지. 하지만, 맹주께선 진도건 만큼은 살아남기 어려울 거라고 말씀하셨다. 내력으로 공격하여 전신의 기혈과 단전을 깨뜨렸으니까. 그 말에 믿을 수 없다고 했던 너도 그게 현실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었으니 근 두 달 동안 눈물로 밤을 지새우지 않았더냐?”
천서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때의 영향으로 폐관 수련하는 동안에도 정신적 공황을 힘들게 다스려야만 했다. 천무경이 했던 말이 던진 의미의 파문은 그녀의 마음에 격랑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작년쯤에 창천맹에서 회동할 일이 있었을 때, 홍두형 부맹주께서 진도건이 살아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 노인은 조강선이라는 이름으로 진 위사의 스승이었고, 그때 화산 사과애(思過崖)라는 절벽 근처의 비처에 숨은 채 진 위사와 같이 지냈다는 사실도 알려주더구나.”
“왜…… 제게 얘기해 주지 않으셨어요? 설마 도건 그 사람이 피한 건…….”
“글쎄다. 전해 들은 이야기로만 확신하기에는……. 다만 부맹주가 당부했던 말이 있었는데 진도건의 스승 조강선이 알리질 말아 달라고 했다더라. 듣기로는 망가진 몸을 회복한 것도 천운이 따랐는데 1, 2년을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 모양이더라. 맹주님은 그런 부분도 고려하면서 차라리 네가 폐관을 스스로 끝낼 때 알려 주자 얘기하셨기에 나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도 처음 듣습니다.”
“셋만 공유한 내용이니 다른 사람에게 얘기한들 결국 소문으로 퍼질 수 있는 일 아니겠소?”
주유현의 말에 천준이 대꾸했다. 그리고 천서은을 바라보는데 그녀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며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옷소매로 눈물을 슬쩍 훔쳤다.
“……무공까지 회복했다던가요?”
“그것도 글쎄. 그때 듣기론 간신히 검만 드는 수준이라고 해서 회복 불능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장성 밖으로 출정하는 군에 있다는 정보가 맞다면 어느 정도 회복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구나. 전쟁에 왜 참여하려는 지도 의문이지만, 어쨌든 어느 정도 무공을 회복했으니 가능한 일이겠지.”
“……정보가 잘못됐을 가능성은요?”
“흐음……. 아, 그렇지! 그래, 내가 그 사람이 진도건이라고 생각한 게 바로 영은성과 최현걸 두 사람 이름 때문이었다. 그때 부맹주에게 들었던 바로 자신의 후계자가 화산파의 제자 한 명과 함께 조강선에게 가르침을 청하기 위해 자주 거기에 간다고 했으니까. 소개 최현걸이 바로 용두방주의 제자고, 영은성은 화산 장문인 묵허자의 제자지 않느냐?”
“도건과 두 사람이 친분을 맺었을 거라는 건가요?”
“그렇지.”
영은성은 천서은도 3년 전에 일월신마로부터 진도건을 구하기 위해 화산을 올랐을 때 한 번 봤기 때문에 누군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폐관 수련을 하는 동안 천무경은 그동안 네 차례 무화동에 찾아와 수련의 성과를 점검해 주면서 강호 돌아가는 정세를 알려 주곤 했었다. 그러므로 현재 정사 무림의 관계와 창천맹의 상황을 조금은 이해하고 있었다.
“하아…….”
천서은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난날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머릿속을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을 검으로 찌른 순간 그때 진도건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많이 이겨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따금 눈을 감았을 때마다 그때의 환영이 어둠 속에 선명하게 잡힐 때가 있었다. 그러면 그날 밤엔 잠이 들기 전에는 눈물로 시간을 보내다가 지쳐 잠들곤 했었다.
머릿속으로는 그때의 진도건이 혈마였을 거라고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마음에 남은 흉터는 자꾸 진도건이 찌른 거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천무경과의 치열했던 혈투는 그것을 설명해 주는 것 아니었냐고 말이다.
지금에 와서 천준의 말에 따르면 진도건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고 하였으니, 복잡한 심경을 조금은 위로해 주는 듯한 기분도 들어 조금은 다행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 출발하나요?”
어제 처음으로 천준이 무화동으로 찾아와 소식을 전했을 때, 천서은은 어차피 폐관을 끝낼 계획을 하고 있었으므로 쉽게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나올 때까지만 해도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면서 부친이 내린 명령을 이행할 책임감만 신경 썼으나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는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라졌다.
“오늘이라도 뛰쳐나갈 기세로구나. 사흘 뒤다. 그때까지 잘 준비하고. 북쪽은 여기보다 겨울이 길다 하더라.”
“네. ……3년을 기다렸는데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죠.”
“야, 무섭다.”
천서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그럼 가 볼게요.”
“그래.”
천서은이 인사를 보내면서 뒤돌아설 때,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 저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저와 비무를 한번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비무?”
옆에서 그 얘기를 들은 주유현이 재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당파 검선 소요자의 제자시다. 좋은 상대가 될 것 같은데? 조카의 수련 성과도 보고 싶고.”
천서은은 물끄러미 청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으로 빚어낸 것만 같은 피부와 아름다운 이목구비, 봉황의 눈을 잠시 마주 보던 청명은 부끄러움에 시선을 내렸다.
그 모습에 천서은은 피식 웃었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 스물여섯입니다.”
두 살 차. 3년 전 진도건의 나이였다.
“내가 누나네.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예, 옙!”
청명이 바짝 굳은 채 대답했다.
“밖으로 나가서 바로 하지.”
그렇게 말을 던지고서 천서은은 바로 몸을 돌렸다. 대청 벽면에 걸린 검을 손에 쥐고 곧장 밖으로 나섰다. 청명은 잠시 주유현과 천준을 돌아보고 쭈뼛거렸다.
“재밌겠네. 우리도 나가서 보지.”
천준이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은 곧장 천무전을 나왔다.
천무전 바로 앞에서 천서은은 손에 든 검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부드럽게 휘둘러 보고 있었다.
청명은 어색하게 서서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 합니까?”
“응.”
“저… 목검으로 하는 게.”
“무당파가 마교와 싸울 때 너도 있었니?”
“예.”
“거기서 목검으로 싸웠니?”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얘기한 건 비무라서…….”
“걱정 마. 다치게 안 할게.”
천서은은 그의 말을 자르고 툭 던지듯 말했다.
그 말이 청명의 자존심을 조금 건드렸다.
사패소룡비무제의 우승자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스승과 사조들에게 듣기로 정파무림맹엔 천하제일무림대회가 있었고 연배에 상관없이 가진 모든 무공을 겨뤄야 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끼리만 겨루는 사파의 비무제와는 수준 자체가 다르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
천무방의 공녀이자 비무제의 우승자인 천서은에 대해 무림의 선배로서 어느 정도 존경심은 갖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라도 그 정도 비무제에선 충분히 우승을 다퉜을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청명은 어린 나이임에도 이미 소요자를 제외하면 사숙들도 이기기 어려운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후우……. 좋습니다. 혹시 상처를 입으시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빈도의 강호 경험이 일천하니 조절이 쉽지 않습니다.”
무거운 걸음을 옮겨 천서은의 반대편에 선 청명이 결의가 담긴 눈빛을 그녀에게 보내었다.
‘좋은 눈빛이 됐네.’
쭈뼛거리던 모습이 사라지고 소문으로만 듣던 옛 천하제일검문 무당파의 도사가 자리에 서 있었다.
스릉!
청명은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 검결지(劍結指)와 함께 태극검법(太極劍法)의 기수식(起手式)을 취했다.
‘저게 정파의 허례(虛禮)인가?’
물결을 그리듯 공중에 한 번 검을 휘두르고는 자세를 낮춘 채 왼손의 검결지로 송문고검(松紋古劍)의 검신을 쓸어내며 상대를 겨누는 자세였다.
반대로 천서은은 검을 가볍게 바닥에 늘어뜨린 상태로 섰는데 가만히 청명이 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기수식이 끝나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들은 적 있는지 모르겠는데. 무당파의 보물 무극검. 내가 갖고 있어. 네 검이 내 검보다 뛰어나면 돌려주도록 할게.”
청명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무극신검이라니.
응당 무당제일검 소요자의 손에 들려 있어야 할 검이었다. 무당파 장문진인 중양자(中陽子)는 자신보다 뛰어난 제자에게 그 신검을 하사하지 못하는 현실을 종종 슬퍼하곤 했었다. 사조의 슬픔에도 개의치 않아 하는 소요자의 모습에 청명은 제자로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곤 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더 큰 결기가 그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지 않을 수 없었다.
“절 자극하시는군요.”
“후후!”
천서은은 물론 지켜보던 천준과 주유현은 청명에게서 느껴지는 기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정파의 봉문이 해제된 시점에서 육파일방, 사대세가 중에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문파는 개방, 사천당문 그리고 무당파였다. 게다가 천하오절 급의 인물이라는 소요자의 제자라는 점에서 청명에게서 느껴지는 검기(劍氣)는 과연 기대를 충족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이거 만만치 않겠는걸?’
천준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느낌만으로도 청명이 3년 전의 진도건이나 천서은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비무제 참가 전에 보았던 두 사람의 실력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비무제 이후의 두 사람의 실력과는 분명 괴리가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천서은에게 눈을 돌렸는데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오히려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천서은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입을 뗐다.
“무당파의 검법은 후발제인(後發制人)이라던데 내가 선공하면 바로 위력을 보여 줄 수 있는 건가?”
“하하……, 너무 얕보시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무당파 최고의 검을 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거지.”
청명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들어오십시오.”
태극검법의 후발제인은 예로부터 그 명성이 자자할 정도로 강력했기에 오죽하면 ‘무당파 도사를 만나면 먼저 공격하여 반드시 이길 거라는 기대는 접어라.’라는 말이 강호에 농담처럼 돌기도 했다.
천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 감지 마.”
중얼거리듯 얘기하는 경고에 청명은 냉담했다.
‘무슨 소리를…….’
핏!
미세한 파공성.
천서은의 팔은 어느새 앞으로 내밀어져 있었으니 그녀의 손끝에서 시작된 검은 어느새 청명의 목젖 바로 앞에 멈춰서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파공성은 간신히 그 뒤에 들려왔을 뿐이었다.
눈 한 번 감은 적도 없는데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짓쳐 든 검에 청명은 화들짝 놀라 뒤로 뛰어오르며 검을 휘둘렀다.
캉!
천서은의 검이 청명이 휘두른 검에 튕겨 나가 공중에서 팽그르르 돌았지만, 이내 천서은의 손에 빨려 들어갔다.
“허억허억…….”
폭발할 것처럼 끓어오르는 긴장감에 청명은 마치 한 시진 내내 전력을 다해 다툰 것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때마침 이혁성은 내원의 중문을 통해 들어온 상황이어서 천준과 주유현 반대편에서 천서은의 일검을 목도한 상황이었다.
‘완벽한 일섬뢰. 게다가 이기어검……인가.’
천서은은 손에 잡힌 검을 다시 한번 손안에서 굴리며 편한 위치로 잡았다. 그리고 청명을 향해 눈을 돌리며 자세를 다잡았다.
“다시 간다.”
“흡!”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서은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어느새 청명과의 거리가 검을 섞을 정도로 좁혀졌고 천서은의 장검이 일격에 쪼개 버릴 듯 벽검세(劈劍勢)를 펼쳤다.
이번엔 청명도 반응했다.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는 검을 향해 송문고검을 휘둘렀다.
검대검이 부딪히는 순간 내력으로 검로를 틀어 자세를 무너뜨릴 참이었다. 하지만, 검과 검이 가까워지는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감당할 수 없는 검력이라는 것을.
북천검법 낙양벽중(落陽劈重).
쩌엉-!
청명은 천서은의 검력을 받아내지 못했다.
송문고검은 두 동강이 나버렸고 검신의 상부 파편이 그대로 목을 스치고 날아가 버릴 때까지 그는 경직된 채 움직이지 못했다. 부르르 전해지는 떨림은 쥐고 있던 반 토막 검자루조차 놓치게 했다.
천서은은 검을 거두고는 청명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이혁성에게 걸어갔다.
이혁성과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이제 황검당주신가요?”
“그렇습니다.”
“오랜만의 대련인데 몸이 덜 풀렸어요. 이 당주께서 제 검을 좀 받아주세요. 합이 잘 맞을 것 같은데.”
“……그러시죠.”
이혁성은 청명을 힐끔 보았다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천서은이 보여 준 쾌검은 진도건이나 이혁성을 닮아 있었다. 파천신공이 어떤 성취를 이루었는지 몰라도 그녀의 검력은 청명의 검을 일격에 부러뜨릴 정도로 강력했다. 이혁성이 보기에 청명의 무공이 무척 뛰어나다 보임에도 단 두 수에 결과가 이러하다면 천서은의 실력이 얼마나 향상됐는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한 판 붙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편 천서은은 이혁성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다가 뒤돌아서서 아직 멍하니 서 있는 청명을 바라보았다.
“겨뤄 보고 싶다고 말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얕봤지?”
천서은의 물음에 청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에 참전하러 가는 길이야. 이런 일대일 대결이 아니라 눈먼 칼에도 맞을 수 있는 곳이 전쟁이야. 나 한 사람에게도 그렇게 얕보고 방심하는데…… 그대로 가면 너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야. 거기서도 원시천존 찾으려 하지 마.”
천서은의 말에 청명은 한 대 얻어맞은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반쯤 벌린 입으로 조용히 탄식했다.
청명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리고 떨어뜨린 송문고검 파편을 두 손에 쥐고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주유현을 바라보았다.
“숙소에 돌아가 있겠습니다.”
“……같이 갑시다.”
주유현은 고개를 차마 들지 못하고 있는 청명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초출내기 젊은 도사였으나 광혈종과 난전을 치른 드문 경험을 가졌다. 그러나 수백수천을 상대해야 할지 모르는 전쟁터는 그것과 또 다른 차원의 도산검림이니 보다 진중한 각오가 필요함을 깨달을 필요가 있던 것이었다.
‘나도 한 수 배우는군.’
주유현도 그건 마찬가지였기에 쓴웃음을 머금으면서 청명과 함께 걸었다. 그는 천서은과 이혁성에게 인사를 건넨 후, 외원으로 먼저 나갔다. 청명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꾸벅 고개만 숙이고는 서둘러 주유현의 뒤를 쫓아갔다.
천서은은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혁성을 보며 싱긋 웃었다.
“당주님, 그럼 우리 시작할까요?”
“좋습니다.”
스릉!
이혁성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냈다. 검명(劍鳴)이 명쾌하게 울렸다.
“시작할게요.”
천서은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검을 찔렀다.
일섬뢰와 일섬뢰.
두 줄기 검광이 동시에 번쩍거리며 공중에 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