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 제16장. 인연의 갈래들 (5)
강호에 몸담은 무림인이라면 어찌 그 이름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그의 말이 끝나자 대붕채 녹림도 옆으로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자들.
지붕 위, 시설들 근처뿐만 아니라 정문을 제외한 나머지 울타리나 감시탑 위로도 모습들을 드러내니 그 수가 일견 200인에 이른다. 복식이나 신체는 제각각이었으나 왼팔에 뚜렷한 청색 천을 묶어 아주 자그맣게 소속감을 표시하고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철권왕 안효철이 설립한 ‘중천’이라는 결사체에 몸담은 낭인들이었다.
‘철권왕 안효철이 시발 여기서 왜 나와?’
중천의 명성이 높긴 하지만, 여전히 수적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두렵진 않았다.
다만, 안효철은 달랐다. 그는 천하오절이었고 절대고수였다.
천하오절 대부분 면식이 있지만, 그중 가장 많이 만난 자는 천무경이었다.
젊었을 적 천무경과 오경방은 경쟁 관계에 있었지만, 오경방은 한계를 깨지 못하였고 천무경은 경지를 이루었다. 열등감이 강하게 남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천무경의 강함을 인정하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
안효철은 그런 천무경이 직접 만나 겨뤄 보기도 하고 논검(論劍)까지 하면서 평가한 남자였다.
천하오절이란 명성은 바로 천무경이 손에 쥐어준 셈.
중천과 대붕채 4백 명 대 녹림 2천 명.
질 수 없는 싸움임에도 안효철 한 사람으로 인해 힘의 저울은 반대로 기울어진다. 그 정도의 무력으로 평가해도 부족함이 없다.
“주태소! 감히 녹림의 일에 외부인을 끌어들이다니!”
오경방이 이 악물고 호통을 쳤다.
주태소는 그저 시선을 힐끔 던질 뿐, 그에 반응한 사람은 안효철이었다.
“원규는 마교 환도종 소속이고 악서군은 마교 염황종 소속이다. 녹림칠악의 결정에 외부인의 입김이, 그것도 마교의 개입이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은 매한가지 아닌가?”
“당신이 무슨 증거로 그걸 말하는 거지?”
안효철은 몸을 수그려 악서군의 신발을 벗기기 시작했다.
“염황종의 무공이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신강 화염산으로 순례를 다녀온다곤 하지. 그리고 화염산 정상에서 맨발로 입공(立功)을 수행하는 과정을 겪는다고 알고 있다. 무공이 신체를 보호해 주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화염산의 열기를 직접 견뎌야 하는 발바닥은 새까맣게 탄 것처럼 변해 두꺼운 굳은살이 생기지.”
신발과 덧신을 모두 벗겨 낸 악서군의 발바닥은 안효철의 말처럼 새까맣기 그지없었다. 흙먼지에 더럽혀진 수준으로 변명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안효철이 이번엔 원규의 시체로 걸어가 상의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환도종의 무공은 자기들이 만든 환술에 영향을 받으면서 힘이 강해지기도 하는데 그 작용이 중단전에서 가장 강하게 일어나지. 그렇기 때문인지 명치 부근이 자색을 띠면서 정도가 심하면 남색(藍色)으로 발전되며 경화되지. 이렇게.”
상체를 모두 드러낸 원규의 명치는 안효철의 말처럼 남색을 띠었고 혈관이 번지듯 반 뼘 거리 정도로 퍼져 있었다. 안효철은 손바닥을 뒤집어 손등과 손가락 등을 덮은 철갑으로 명치를 두드렸다.
딱딱!
피부조차 물렁거림 없이 오히려 부딪치는 건조한 소리가 들리고 있으니 이를 직접 본 자들의 눈빛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
마교인들의 그런 특징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지만, 원규와 악서군 두 사람이 가진 증상들이 결코 강호무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특히 녹림의 어떤 산채, 어떤 무공들도 저런 증상을 동반한다는 소리는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중천이 천마신교의 발호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그들이 마교에 대한 지식을 축척하고 있을 논지는 녹림의 그것과 달리 안효철의 이야기를 충분히 뒷받침 해준다.
낭인들은 기본적으로 무림 세력들보다 백성들에 더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일부 마을들에서 천마신교의 교리가 스며들거나 꾀임을 당하여 방패막이로 사용되는 등의 피해들이 발생했다. 이런 민중 저변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정사 막론하고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사람들이 하오문, 개방 같은 집단 외에는 바로 낭인들이었다.
낭인들은 개인적으로 대응하였다가 역부족임을 깨닫고 하오문, 개방 등과 상의하여 백성들을 지킬 수단을 취하게 되었다.
이때 이 얘기를 들은 천무경이 개방과 하오문의 정보력을 동원하여 안효철을 찾아낸 후, 그와의 담판을 통해 결성하게 된 조직이 바로 중천이었다. 낭인들이 근거지를 두고 결집하지는 않더라도 의사결정을 해 줄 수 있는 중심을 맡아줄 인물이 필요하였고, 그 무력과 상징성으로 가장 적합한 사람이 바로 안효철이었다.
안효철의 말들에 신뢰가 가느냐?
오경방 바로 뒤의 앞렬에 있는 자들은 직접 듣고 바라 본 내용의 일치성을 뒤에 있는 동료들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그 파장이 삽시간에 2천 명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들의 혼란 속에 오가는 설왕설래들이 이 일이 가져온 파장의 무거움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했다.
대붕채 녹림도는 무거운 침묵으로 2천 명의 동지들을 바라보았다.
대산채와 16채의 녹림도는 대붕채 동지들의 시선이 침묵의 원성처럼 느껴졌다.
주태소가 앞으로 세 걸음 걸어 나왔다.
“적수비혁전을 요청한다. 오경방은 자신의 결백을 직접 동지들이 보는 앞에서 증명하라.”
“……크크크! 저 두 놈이 마교도라 해도 남은 칠악의 과반이 동의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아. 그리고 넌 동지 살해 혐의가 명백하니 칠악에서 제외다. 네 권리를 행사하고 싶으면 네가 죽인 세 명이 마교도라는 증거라도 내놓던가.”
“증거는 없지.”
“아니면 안효철 네가 날 강제로 내릴 텐가?”
“녹림에 간섭할 수는 없지.”
“크크크크!”
오경방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주태소를 보며 비웃었다.
안효철이 간섭하지 않는다면 네가 무슨 일을 벌일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오경방은 칠악 전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그럼 칠악의 표결을 시작하지. 나 독고구는 오경방과 주태소의 적수비혁전에 찬성한다.”
오경방이 놀란 눈으로 독고구를 돌아보았다.
“나 도판수도 적수비혁전에 찬성한다.”
오경방이 두 눈을 부라리며 도판수를 다시 돌아보았다.
“넌 자격 없어!”
“도판수의 칠악 제외 판결은 이뤄진 바 없네.”
“뭣이?”
쏘아붙이는 오경방에게 독고구가 단호한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그리고 독고구가 이번엔 변상우와 장위 두 사람을 굳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희들이 마교와 짜고 칠 생각을 하려는 게 아니라면 잘 얘기해야 할 것이다.”
“어, 어디서 협박입니까?”
“우리도 가, 같은 칠악…….”
“껍데기는 총표파자가 씌우지만, 인정은 동지들로부터 받는 것이다. 다른 십팔채주가 아닌 너희가 칠악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모두가 납득하던가?”
“어, 억지를…….”
역정을 내려던 장위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른 채주들이 차가운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칠악의 자격을 같은 산채의 인원에게 물려줄 근거는 없었다. 녹림 동지들을 선도하기에 합당한 실력과 공로를 모두 인정받을 수 있는 자가 칠악이 되었을 때, 모두가 거기에 따를 수 있는 법이었다.
“이, 임명된 것은 우리요! 우리는 칠악의 권리를 행사할 자격이 있소. 적수비혁전은 반대요.”
“나도 반대요!”
두 눈을 부릅뜨고 기꺼이 반대를 선언하는 두 사람에게서 독고구는 마음속 한구석 품고 있던 의심을 확신하였다.
표결이 동수, 남은 사람은 자동수였다. 그는 웃음을 흘리며 긴 팔을 들어 올려 머리를 긁적였다.
“아이 씨부럴…… 큭큭! 별안간 이게 무슨 일인지 말이야. 오늘 하루 똥개훈련 하면서 상황 참 더럽게 굴러간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렇게 흘러가네. 이보시오, 총표파자. 당신 마교도요?”
“흥! 그럴 리가! 배신자 따위의 말을 믿는가?”
“내가 예전부터 저놈과 투덕거릴 자주 해댔는데 말이오. 그건 저놈이 예의도 모르는 싹수 노란 놈이라서지 녹림의 근본을 모르는 놈은 아니었단 말이오. 오경방, 당신이 결백하다면 적수비혁전에서 정당하게 증명하시구려.”
“자동수!”
오경방이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오경방의 시선은 외면한 채 주태소를 힐끔 노려보고는 아예 등을 돌렸다.
독고구가 뒤를 돌아 녹림의 동지들을 둘러보았다.
“칠악 표결의 향방은 결정되었다! 지금부터 오늘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 대한 판결은 적수비혁전의 승자가 내릴 것이다! 그 누구도!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혁명장의 중앙을 비워라! 대산채를 둘러서 대오를 만들어라! 녹림의 결기가 오늘 다시 세워질 것이다!”
우와아아아아아!
새하얀 갈기를 휘날리며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듣던 녹림의 환호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주저하던 자들도 그 기세에 휩쓸려 의지를 함께 했다.
정강산 전체를 쩌렁쩌렁 울릴 만큼 거대한 함성의 파도에 적수비혁전을 치를 당사자인 주태소와 이를 중재하러 나섰던 안효철도 찌릿찌릿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오로지 오경방만이 화난 얼굴로 어금니를 씹고 있었다.
혁명장의 중앙은 빠르기 비워졌다. 2천의 녹림도는 어느새 대붕채와 낭인들 사이사이에 섞여서 혁명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가옥이나 어떤 시설물도 관계없이 빽빽하게 그 지붕까지 활용되어 들어차자 마치 거대한 원형경기장을 보는 듯했다.
그 중앙에 주태소와 오경방이 서 있었다.
녹림은 궁금했다.
원규, 악서군에 잡혀 왔다던 주태소가 과연 오경방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오경방이 무림의 정점에 군림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백사자 독고구보다 강한 고수였기 때문에 총표파자 자리를 차지할 수 있던 것이다. 일파의 수장이 부하였던 자의 도전으로 쉽게 휙휙 바뀔 정도로 가벼운 자리가 아니었다.
“크크! 그래, 이제 원하는 데로 판이 깔렸는데 자신은 있더냐?”
“왜, 쫄리냐?”
“대산채를 뛰쳐나간 이후의 세월 동안 네가 뭘 해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재능에 취해서 하라는 수련은 안 하고 떠돌아다니기만 했던 네놈이 이 싸움에서 무얼 얻을 수 있을지 실로 궁금하구나.”
“궁시렁궁시렁 말 참 많네. 안 덤벼?”
“네가 할 소리냐?”
“쳇, 자존심은.”
저벅저벅 발걸음을 떼기 시작하는 주태소가 걸음이 늘어갈 때마다 자세를 점점 낮추며 속도를 붙여간다. 어깨 위의 낭아도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살기 어린 두 눈으로 오경방을 노려보았다.
팟!
일순 거리를 좁히며 참격을 날렸다.
카앙!
주태소와 오경방의 칼이 허공에서 빠르게 부딪치기 시작했다. 주태소의 칠랑구유도와 오경방의 광풍도법(狂風刀法)의 절초들이 쏟아지며 거칠게 충돌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결을 바라보던 녹림도의 표정엔 놀라운 감정이 떠올랐다.
두 사람의 대결이 용호상박으로 어느 한쪽의 우열을 논하기 어려울 정도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놀라워하는 사람은 바로 다른 칠악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오경방의 무공과 실력은 익히 보던 바였기 때문에 그와 대등하게 싸우는 주태소가 놀랄 따름이었다. 어릴 적 재능은 있었으나 그래도 아직 덜 여문 과실 같았던 칠랑구유도의 위력이 비로소 만개하여 녹림이 자랑하는 상승무공으로써의 가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쳇, 녹림의 천재라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투덜거리는 자동수의 모습을 본 독고구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떤 무공이든 경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재능과 그릇이 필요한 법이었다.
오경방도, 독고구도, 자동수도 해내지 못한 벽을 깨는 모습을 주태소가 보여 주고 있었다.
칠랑구유도 견랑격세.
열 개의 도광이 먹이를 노리고 달려드는 늑대처럼 동시에 오경방을 향해 쏟아졌다. 함께 밀려오는 도기의 파도가 오경방의 칼에서 일어나는 광풍을 깨부수고 있었다. 이를 해체하듯 파훼했던 진도건이 보여 준 쾌검의 신기(神技)가 오경방의 광풍도엔 없었다.
콰콰콰콰!
광풍의 장막이 늑대의 발톱에 찢겨 나가는 듯했다. 경력의 충돌과 폭발 속을 뚫고 주태소의 신형의 튀어나왔다.
스캉!
도광이 번쩍이며 솟구쳤다. 오경방이 급히 칼을 끌어당겼지만, 참격의 기세 모두 막아낼 수는 없었다.
“크윽!”
도신에 가려지지 않은 허벅지와 상체 일부에 자상이 생기며 피가 솟구쳤다. 오경방이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급히 도를 휘두르며 뒤로 뛰어올랐다.
캉!
주태소는 가볍게 칼을 받아내며 쫓지 않고 공중에다 가볍게 휘둘렀다. 바닥에 오경방을 베면서 묻은 피가 흩뿌려졌다. 목을 틀어 불편함을 풀어내면서도 침착하게 오경방을 보고 있었다.
“허억, 헉, 헉!”
오경방의 얼굴엔 패색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격전의 바람 속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상처들이 몸에 많이 남아 있어 옷가지들은 거지꼴이 되어 있었고 특히 직전의 공격에 큰 상처를 입은 모습이었다.
“큭큭큭!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네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실력을 숨기고 살았나?”
실력을 숨겼다?
주태소는 그것에 글쎄라고 답할 것이다.
오경방이 지적한 대로 그는 꽤 게을렀고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던 편이었다. 그러나 천하의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상황을 맞닥뜨리면서 넓어진 견식은 그의 그릇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호적수를 만나고 나니 나중에는 깨달음의 계기가 되더라고.”
“호적수라, 누군지 궁금하군.”
“쯧! 글쎄,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서 말이야. 그래, 이제 충분히 쉬었나? 이대로 죽여서 시체의 신발을 굳이 벗기긴 싫은데.”
“크하하하! 그래, 결착을 지어야지.”
주태소의 말에 좌중이 잠깐 술렁였다. 안효철을 통해 확인한 악서군의 비밀이 대비(對比)된다. 오경방을 향한 의심에 부채질을 더하는 대화 속에 이미 녹림의 복심이 크게 변하고 있었다.
“후읍!”
휘이잉!
오경방이 크게 호흡을 들이마시자 그의 발밑 주변으로부터 돌풍이 한차례 불었다.
주변에 있던 자들은 그 바람에 맞닿는 순간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화르륵!
바람과 함께 불길이 일렁이며 전신을 아우른다. 전에 없던 강력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거대한 불길의 회오리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피, 피해랏!”
공터의 구석까지 몰린 터라 오경방에게서 일어난 거대한 불길이 삽시간에 주변을 덮치기도 했다. 고수들이 막아서긴 했으나 화상을 입는 자들이 나왔다.
녹림도의 피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습은 더는 오경방에게서 총표파자로서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오경방의 심정도 그와 같았다.
염황종의 무공을 드러낸 이상, 이 싸움의 승리가 그의 손에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안효철이 그를 살려둘 리가 없었다. 백령신검 강정학과 맞붙었다던 염황신마와 그는 엄연히 실력 수준에서 차이가 났기에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광염극양공(狂炎極陽功)과 광풍도법을 결합한 내 최강의 초식이다. 네 최강의 초식으로 받아 보아라.”
“그게 당신의 전부인가?”
“크하하하! 내 진신전력을 보고도 그따위 말을 하느냐?”
“훗!”
주태소의 비웃음에 오경방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거대한 불길의 회오리가 다시금 크게 출렁였다.
“힘이 무엇인지 보여 주마!”
불길을 거느리고 오경방의 신형이 주태소를 향해 나아갔다. 그의 온몸과 칼을 타고 휘몰아치는 불길의 광풍은 닿는 모든 걸 불태워 버릴 듯이 맹렬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광염극양공.
광풍도법 풍림화산(風林火山).
주태소가 두 손으로 낭아도를 쥐고 칼등을 가볍게 어깨에 올려놓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어내며 최대한 근육을 이완시킨다.
신경을 날카롭게 벼려내며 일선(一線)의 목표를 머릿속으로 그려낸다.
용솟음치는 내공 그저 칼날만을 날카롭게 벼려내며 모든 의식의 집중을 낭아도에 집중한다.
도신합일.
가장 기초적인 경지이며, 힘만 추구해서는 간과하기 쉬운 심오한 경지.
그 중요성을 인지하게 해 준 사내의 이름이 잠시 머릿속에 떠오른다.
‘……살아 있냐?’
폭주하는 불길의 열기로 피부가 따끔거리는 통증 때문에 집중이 흐트러질 만도 하지만, 주태소의 강한 의식의 흐름은 그 모든 것을 흘려 버렸다.
칠랑구유도 효천낭아(哮天狼牙).
선인 양전(楊戩)의 효천견(哮天犬)에 늑대의 이빨을 더하여 낭아도에 담는다. 주태소의 육신은 효천견의 돌진을 담아 불길 속에 뛰어들었다.
콰아!
일격의 순간에 거대한 칼날의 강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불길의 폭풍을 일도양단하고 동시에 일섬도광이 오경방을 수직으로 관통하였다.
푸슛!
도강의 격류에 반작용이었는지 거대한 핏줄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육신이 수직으로 둘로 갈라지며 쓰러지는 오경방의 시체 앞에서 주태소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주태소가 결의에 찬 시선으로 녹림의 동지들을 둘러보았다. 복중에 내공을 담아 힘 있는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적수비혁전은 끝났다. 나의 행적이 일부 동지들에게 상처가 되었겠지만, 거기에 대의와 정의가 있었음을 나는 증명하였다. 이 자리를 빌려서 경고한다. 마교에 힘을 구걸한 자가 있다면 자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녹림이 그런 사특한 교리에 휘둘리는 것을 난 용서치 않을 것이다. 내게 도전해서 권리를 쟁취하는 행동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주마.”
변상우와 장위에게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거대한 위압감에 덜덜 떨더니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마교도임을 자백하는 것이었다.
“저 둘을 포박해라. 그리고 두 산채의 채주는 실력과 자격을 검증하여 새로 선출할 것이다. 또 지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자 있다면 속죄의 기회를 줄 것이다.”
주태소는 말을 끊고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번엔 뒤를 돌아 시점을 바꾸었다. 안효철과 중천의 낭인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녹림은! 중천과 마찬가지로 민중의 편에서 마교도들에 대항할 것이다! 오늘부로 약탈행위는 중단하고 마교의 발호를 차단하는 데 녹림혁명의 힘을 쏟아낼 것이다. 나 주태소는, 총표파자의 가장 예리한 칼로서 모든 싸움에 선봉에 설 것을 약속한다.”
2400여 명의 녹림과 중천 사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적수비혁전은 총표파자의 권위를 쟁탈하기 위한 정당한 대결인데 총표파자의 칼이라니.
주태소는 오경방 시체 허리춤에 달린 거대한 표주박 술병을 손으로 풀었다. 그리고 독고구를 향해 던졌다.
“총표파자의 권위는 녹림의 가장 큰 어른이신 백사자 독고구에게 이양한다! 나 같은 떠돌이 망종보다 녹림을 잘 이끄실 것이다. 이의 있는 자는 지금 나와 나를 꺾으면 된다.”
주태소의 무용을 본 자 어느 사람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
얼떨결에 술병을 받아든 독고구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푹 숙이며 빈손으로 뜨거워진 이마를 짚었다.
독고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주태소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늙은이 굽은 등골을 사골까지 우려먹을 작정이냐!?”
주태소가 웃음을 터뜨린다.
“크하하하! 영감이 죽기 전까지만 고생 좀 해 주쇼.”
“빌어먹을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