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제16장. 인연의 갈래들 (4)
“이런 씨발! 그게 무슨 개같은 소리야! 누가 배신한 거 같다고? 도판수? 이런 육시랄! 뭐 하고 있어! 당장 말을 준비해라! 대산채에 합류한 나머지 17채 모두 따라와라! 우리를 배신한 주태소와 도판수, 대별산 놈들을 징벌하여 녹림의 기강을 세우겠다!”
분노에 가득 찬 오경방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다들 심한 숙취에 휘청거리면서도 급히 무기와 말만 대충 챙기기 시작했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오경방의 두 눈에서 불길이 일 듯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급작스러운 지시에 가까운 자들이 머뭇거리면서 의견을 내곤 했으나 싹 잘라 버렸다.
그는 즉시 말에 올라 정강대산채에 모인 녹림도 9할 이상을 모두 출발시켰다. 동시에 가장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황건당 열 명을 골라 6명은 북쪽으로 향하게 하고 나머지 4명은 동서로 흩어지게 하여 주태소, 도판수 등이 어느 방향으로 도망쳤는지 정보를 수집하게 했다.
다들 숙취 때문에 2천 명에 가까운 숫자가 전속력을 내기 어려웠기에 속도를 조절하며 보조를 맞춰야만 했다.
정찰 보낸 수하들을 기다리면서도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해 말에서 낙마하는 자들도 발생하자 오경방은 열불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정신 똑바로 안 차려!”
불호령에도 낙오자는 발생했다. 그러나 오경방으로서는 속도를 마냥 늦출 수만은 없었다.
어느 정도 한계선에서 계속 속도를 유지하면서 한 시진을 달려서야 간신히 행렬에 대오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정강대산채가 전력의 8할 정도였고 나머지 16채가 차지하는 인원의 비율은 2할에 불과했기에 개별적으로 흩어져서 이동하진 않았다.
정강산 주변부터 강서와 강서, 호남의 인접 지역까지 대부분 산세를 이루고 있었기에 흩어져 움직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주태소 등이 도망친 방향을 대별산이 있는 북쪽으로만 미루어 짐작할 뿐이지 그 거리는 사실상 2, 3일은 걸릴 수준이었기에 확정 짓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정보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본대가 길을 잘못 잡으면 흩어진 인원들의 상황이 꼬여 버리게 되는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도판수, 이 찢어 죽일 새끼…….’
사실 도판수가 주태소와 가깝다고는 하나 말 그대로 조금 더 가까울 뿐이지 주태소 개인과 다른 18채와의 관계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주태소 개인으로 보면 출신이 녹림이고 가진 재능과 실력 때문에 녹림칠악의 자리를 주고 소속감을 부여한 것이지만, 개인의 성향으로만 놓고 보면 사실상 ‘낭인’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도판수가 주태소의 탈출을 도운 것은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주태소가 삼문협 황하의 포화와 격류 속에서 도판수와 도태무를 구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것이 후환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총표파자님! 정찰 나갔던 녀석이 돌아옵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오경방은 그 소리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멈춰라! 워, 워!”
행군 정지를 명령하면서 말을 세웠다. 멀리서 황건을 쓴 녹림도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잠깐 기다리자 황건도(黃巾盜)가 근처에 이르러 말을 멈추었다.
“총표파자님, 놈들이 북동쪽으로 가고 있다고 합니다.”
“좋아! 안내해라!”
얼마간 다시 달리자 정찰 나간 황건도 하나가 차례대로 돌아왔다.
“안복현(安福顯)에서부터 북쪽 산길로 진입하는 무리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복현? 씨……, 일단 가자!”
오경방은 인상을 찌푸리며 계속 속도를 내었다.
오경방은 강서 일대를 훤히 꿰고 있어서 안복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달리고 있는 산길은 북쪽을 막은 가산(佳山)을 향하고 있었다. 오경방은 안복현으로 가기 위해 가산지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오경방이 성질을 낸 이유는 안복현 북쪽의 산세는 험하진 않았지만, 점점(點點)이 떨어진 언덕과 숲이 무수히 많고 그 사이사이로 갈림길들이 매우 많아 이후 방향에 추적에 애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추적해라! 가다가 정찰 나간 다른 녀석들을 만나면 그쪽으로 모두 흩어져서 방향을 특정하라고 해!”
“예!”
오경방은 북쪽의 정찰 범위를 넓히도록 지시했지만, 찝찝한 부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잠시 뒤 따르는 수하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2천 명에 가까운 엄청난 무리가 뒤따르고 있었다. 고작 50여 명을 잡는 데 말이다. 말이 전력으로 추격하고 있었지만, 이미 세 시진 전후나 차이나는 거리를 단번에 좁힐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고작 50명을 쫓기엔 너무 많은 숫자였다.
‘젠장, 너무 흥분했나…….’
오경방 본인도 숙취에 화까지 겹쳐서 무작정 다 끌고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놈들이 어디로 움직일지 알고… 필요에 따라 흩어져야 할 수도 있는데… 근데 북쪽으로 가고 있는 거 맞나? 아직 동서로 정찰 나간 놈들이…. 하아, 씨발…….’
숙취에서는 이미 충분히 깨어난 상태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가진 정보로 머릿속에 정리하는데 더 어지러워지는 느낌이라 짜증만 늘어가고 있었다.
동쪽을 따라 넓은 평지 위를 얼마간 달렸을까, 길이 다시 북으로 꺾어질 무렵이었다.
오경방은 다시 행군을 멈춰야 했다. 뒤에서 서둘러 쫓아오는 황건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 내용이 없다면 자연스럽게 행렬에 합류해서 천천히 내용만 전달해도 됐을 것인데 이렇게 악착같이 앞지르려고 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헉, 헉…! 총채주님…… 헉! 크, 큰일 났습니다.”
“뭐가 큰일 나?”
“그, 그게… 웬 놈들이 정강산으로 향하는 걸 발견했는데…….”
“앙?”
“그, 그런데 동지들도 발견을…….”
“야이씨, 똑바로 얘기해!”
“그, 그 정체 모를 놈들과 녹림 동지들 두 무리가 정강산으로 향하는 걸 발견했습니다.”
“숫자는?”
“정체 모를 놈들은 50명쯤 되는 거 같고, 동지들은…… 30명쯤 되는 것 같습니다.”
“뭐야, 시발! 이게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정수리가 찌릿찌릿했다.
정체 모를 무리도 신경 쓰이지만, 녹림도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제 와 정강산으로 올 예정인 다른 산채의 녹림도는 없었다. 게다가 숫자도 30여 명이라는 건 어쩌면 주태소, 도판수 일행일 지도 몰랐다.
숫자도 애매했다. 지금 알려 온 숫자대로라면 정강산에 왔던 수에 비교했을 때 절반이 넘었다.
“도판수나 주태소는 보았느냐?”
“그, 그게 멀리서 발견하고 옷도 비슷해서…….”
확실히 멀리서 봤다면 외견의 구분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돌아가야 하지 않겠나?”
조금 떨어져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독고구가 다가와 물었다.
‘독고 영감 정도는 돼야 구분할 수 있게……. 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오경방이 인상을 찡그리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러다 고민이 깊어지는지 땅을 내려다보며 손톱까지 물어뜯었다.
그때 원규가 가까이 다가왔다.
“총표파자님.”
“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 놓치자고?”
“오히려 대산채에 놈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도판수가 대별산에서 총궐령에 따라 50명만 끌고 왔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만약 그보다 두세 배 혹은 정말 대붕채 전원을 분산시켜 몰래 내려왔다면 대산채 점거를 시도해 볼 수도 있죠.”
“이씨, 그래 봐야 이삼백 명뿐일 텐데…….”
“정체 모를 놈들도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외부세력을 끌어들였다면 시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주태소는 적수비혁전을 요구했습니다. 아마 총표파자님과의 대결이든 전면전이든 각오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대산채 물자들을 털어 갈 수도 있고요.”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악서군이 한 마디 더 거들었다.
그 모습을 독고구가 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절로 주태소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관계가 가까워 보이는군. 역시 그럴 수도 있는가…….’
오경방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대로 쫓아가 봐야 대별산에 이르기 전까지는 따라잡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또 대별산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도망칠 확률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 이대로 정강산으로 돌아갈 때 주태소가 그곳을 점거한다면 빠르게 끝장을 볼 수 있었다.
‘그까짓 인원으로 2천 명 상대로 함정도 불가능하겠지…….’
잘 생각해 보면 주태소의 목적은 오경방을 공개적으로 쓰러뜨리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물자를 털어가거나 도주하는 건 그의 성격과 맞지도 않았고 암살도 녹림 동지들을 위한 명분을 얻기 힘든 행위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목표가 명확하게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대산채로 돌아갈 것이다.”
원규와 악서군이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있는 마을에서 잠시 쉬면서 식사도 배불리 하자. 놈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필경 우리보다 숫자가 적을 것이다. 이럴 땐 여유를 갖고 찍어누르는 것이 상책이지. 후후후!”
오경방과 2천에 가까운 녹림도의 행진은 가히 군대와도 같아서 백성들의 이목을 끌었다. 또 여러 군과 무림의 눈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녹림은 대규모로 움직이는 법이 거의 없었다. 과거 혁명의 역사 때문에 군의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주태소와 도판수 부자의 반동으로 인해 혁명병으로서 움직였던 때를 떠올릴만한 규모의 움직임을 노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혁명을 주도하려는 자는 주태소였다.
오경방이 마교의 하수인이 되어 마교를 끌어들였다는 주장과 함께 녹림의 본질을 되찾으려 하는 일종의 세력 개혁, 세력 재편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오경방은 그 대척점에서 절대다수의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혁명의 홍염으로 타오를 것인가? 구태의 흙에 덮여 불씨는 꺼지고 반란에 그칠 것인가?
대산채로 향하는 길을 따라 달리면서 정강산 일대에 이르자 그런 맥락에 따른 감정의 파문이 아주 조금씩 녹림도의 가슴 속에서 퍼져 가고 있었다.
“대산채다. 문이… 열려 있습니다.”
오는 길에 어떠한 함정도, 견제도 없었다.
십 장 거리 정도 떨어져서 동태를 살펴보고 있는 대산채의 정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안에는 인기척이 충분히 느껴지고 있었는데 의외로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 적당한 소음들이 맴돌며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얼마든지 들어오라 이건가?”
오경방이 입가에 실소를 머금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수하 한 명을 손으로 가리켰다.
“너! 안에 상황을 살피고 오거라.”
“저, 저요?”
“그래! 깊이 들어갈 필요도 없이 열 걸음만 들어갔다 와.”
“…예, 예.”
만에 하나 함정이 있을 가능성을 위해 보내는 희생양. 그러나 거부하면 목이 떨어질 것을 알기에 지목당한 녹림도는 똥 씹은 표정으로 대산채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입구에 다다르자 두꺼운 칼의 도신을 앞에 내민 채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대산채 안으로 들어섰고 곧 오경방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왜 안 와?”
열 걸음 정도 들어갔으면 벌써 뛰쳐나왔어야 정상이었는데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대로 들이닥칠까 고민하던 오경방은 부하 하나를 더 지목했다.
“너도 가봐.”
역시나 똥 씹은 표정으로 어기적거리며 가는 수하의 모습에 오경방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조심스럽게 출입구 울타리 뒤에 숨어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안 들어가냐?”
안으로 들어가도 위험하고 으름장을 놓는 오경방의 모습이 두려웠을 것이다. 녹림도가 울타리 뒤에 숨어서 한숨 푹 쉬고는 그제야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탁탁탁….
누군가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빼꼼 내밀어보더니 반색하며 뒤돌아 오경방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입구에서 앞서 들어갔던 자가 황급히 뛰어나오고 있었다. 들어가길 망설이던 자가 엉거주춤 동료의 뒤에 숨어 오경방 앞으로 다가왔다.
“아, 안에 주태소가 있었는데 모두 들어와도 좋답니다. …공격하지 않겠답니다.”
“뭐? 하핫! 제정신인가?”
“아, 그리고 주태소의 상태가… 꽤 괜찮아 보였습니다. 얻어맞은 상처들은 아직 그대로긴 하지만…, 그 눈빛이나 기세가.”
오경방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해독약을 먹어도 봉신침의 소멸과 해독은 하루를 기다려야 하는데 아직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도판수가 봉신침을 예상하여 해독약을 준비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까짓 놈이 괜찮아 봤자지. 자, 들어가자!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지 기꺼이 두 눈으로 봐주지.”
2천 명의 녹림도가 오경방과 7악, 채주들을 필두로 하여 정강대산채의 드넓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적들이 매복이든, 다른 함정이든 준비했을 수도 있으므로 그 발걸음은 몹시 무거웠고 긴장감이 맴돌았다.
정강대산채의 규모는 정말 컸다.
많은 인원을 수용해야 하므로 산세가 모이는 계곡과 분지를 아우르도록 울타리를 쳤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면서 주변을 둘러보면 가옥들에 가려져 드문드문 보이는 높은 울타리도 멀리 보였지만, 그 너머로는 그보다 더 높은 산지가 대산채를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그 높은 지대와 울창한 숲은 천라지망을 펼치기 좋고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기에도 좋아 항상 든든했지만, 오늘만큼은 대산채의 주인이었던 자신들이 적이 된 것처럼 정강산 산세에 감시당하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더해 얼마간 진입하자 지붕 위와 가옥들, 시설들 옆으로 사람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 또한 긴장되고 굳은 눈으로 오경방과 대산채 녹림도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공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듯이 칼은 칼집에 넣은 채 모두 팔짱을 끼고 있었다.
“큭큭! 이 새끼들이… 싸울 생각도 못 하는 것들이 반란에 동조해?”
오경방이 대놓고 들으라는 식으로 큰 소리로 으름장을 놓자 움찔거리는 자들도 보였다.
대산채를 가로질러 점점 혁명장에 가까워지면서 오경방은 한 가지 깨달았다. 지금 대산채를 점거한 자들은 분명 대별산 대붕채 녹림도들이 틀림없었다. 꽤 많은 숫자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 수가 200명이 가까워 보였다. 그의 뒤에는 그것의 10배가 넘는 숫자의 사람들이 있어서 사실 별것 아니었지만, 괘씸한 것은 분명했다.
별도로 대붕채 녹림도가 아닌 자들의 정체는 쉬이 판별하기 어려웠다.
마침내 혁명장에 이르렀다.
드넓은 혁명장의 가장자리를 서 있는 많은 녹림도, 비어있는 중앙 마당, 그리고 어제만 해도 오경방이 앉아있던 언덕의 상석 위에 주태소가 앉아있었다. 그 좌우로 도판수와 도태무가 서 있는 모습도 보였다.
“주태소, 이노옴-!”
내공을 실은 호통이 정강산 일대를 쩌렁쩌렁 울렸다. 노기를 고스란히 드러낸 오경방과 뒤따르는 무리가 성큼성큼 혁명장 가운데로 모였다.
주태소는 약재와 함께 달였다가 바람 식힌 천으로 붓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눈만 드러내놓고 얼굴을 덮고 있었다. 그는 오경방의 호통과 뒤이어 들려오는 메아리 소리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볐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주태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손을 흔들며 반겼다. 그리고 얼굴을 덮은 천을 당겼다.
상처들의 피는 멎고 붓기도 많이 가라앉았다. 동틀 무렵에 크게 부어오른 얼굴과 몸 상태로 꽤 신음했던 때와 비교하면 상태가 많이 양호해졌다.
상석에 기대 놓았던 낭아도를 든 주태소가 터벅터벅 언덕의 계단을 내려오며 혁명장으로 들어섰다.
“시작해야지? 적수비혁전.”
“크크크! 지랄하고 자빠졌네. 고작 이 정도 숫자로 포위했다고 기세등등한 거냐? 너 같은 병신 새끼를 직접 상대하기엔 내 칼이 너무 아깝잖은가? 녹림의 규율에 따라 적수비혁전은 칠악의 과반이 찬성해야….”
“아,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주태소가 말을 끊고 묻자 오경방의 이마가 팍 일그러졌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 없지.”
“본인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게 아닌가?”
원규와 악서군이 차갑게 말을 내뱉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악서군이 주태소를 노려보며 말을 잇는다.
“우리 둘도 못 당했던 네가 총표파자를 상대하겠다니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군.”
녹림도 사이로 웅성거림이 전파되었다. 주태소를 잡아 온 사람이 신임 칠악인 두 사람이었음이 드러나자 전말을 상세히 몰랐던 사람들은 꽤 놀라워했다.
많은 수가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순히 잡혀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주태소는 자신을 직접 잡으러 온 두 사람의 실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얼마간 어울려준 것이 사실이었다. 분명 그들의 무공은 꽤 위협적이었다.
“크하하하하! 뭐 너희들 베는 거야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명색이 총표파자 상대하려 하는데 닭보다 못한 쥐새끼 모가지 비트는데 드는 힘도 아끼고 싶거든. 미안하다.”
조롱과 거절.
원규와 악서군 두 사람의 두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가소로운 것이….”
금방이라도 주태소에게 달려들 것처럼 자세가 만들어지는 그때였다.
찰그락!
“저놈들이냐?”
여러 개의 쇠가 서로 부딪히며 나던 소리가 작음에도 명징하게 뇌리에 꽂혔다. 소리치지 않았음에도 두껍고 중후한 음성이 묘하게 장내 전체로 퍼져나가며 행동을 멈추게 만들고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렇소.”
오경방에게도 사용하지 않던 경어를 쓰며 답변하는 주태소.
녹림도들 사이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오경방과 비슷한 거구에 걸을 때마다 묘하게 철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풍성한 수염과 어깨 길이의 흩날리는 짙은 흑발, 이마를 두른 검은 머리띠와 그 위에 박혀있는 쌍호(雙虎)가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듯한 모양이 새겨진 장식. 아주 짙은 검은 눈동자는 정강산의 녹음을 빨아들일 것만 같이 검고 깊었다.
무엇보다 거구를 덮은 흑포와 사이사이로 보이는 팔다리와 신체 일부를 감싸고 있는 검은 철갑(鐵甲)의 비늘이 묘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움직일 때마다 찰그락 하는 소리가 거기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넌 뭐야?”
원규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묻는데 그를 바라보는 다른 몇몇 얼굴에 긴장감이 떠오른다.
그 경지를 파악할 수 없고 심지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기에 점점 위압감을 깨닫게 되는 자였다. 그런 생각을 가질 무렵에 철갑의 사내가 살짝 몸을 웅크렸다.
팟!
철갑 사내의 모습이 사라졌다 느끼는 순간, 원규 앞에 나타났다.
철갑의 주먹은 이미 뒤로 당겨져 장전된 상태였다.
퍽!
그대로 후려치는데 반응하여 피할 새도 없이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악서군이 놀라 두 눈을 부릅뜨고 서둘러 몸을 어떻게 움직이려 하는데 어느새 눈앞을 검은 철갑이 덮었다.
빠각!
주먹 쥔 손등으로 후려치니 얼굴이 터져나가며 쓰러졌다.
“끄어어…!”
원규는 아예 머리가 뭉개져 버려 이미 명을 달리했고 조금이나마 반응했던 악서군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꿈틀거렸지만, 얼굴이 철갑 비늘의 날카로움에 뜯겨 나가 출혈이 몹시 심했다. 그냥 놔두면 죽을 것이 분명했다.
철갑 사내는 서서 그를 향해 가만히 손을 뻗어 손바닥을 펼친다. 거대한 경력이 오른손에 모이더니 그대로 악서군을 짓눌렀다.
으드득!
가슴이 움푹 들어가며 폐와 심장을 터뜨려버렸다. 입으로 엄청난 피를 토해내는 악서군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으니 그 표정이 고통스러움을 담고 있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너, 넌 뭐냐?”
오경방의 두 눈에 두려움마저 점점 떠올랐다.
두 사람은 기꺼이 칠악에 꽂아 넣을 정도로 뛰어난 절정고수들이었는데 반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일격에 쓰러져버리는 광경은 그로써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철갑 사내가 쓱 고개를 돌리며 오경방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오경방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내 이름은 안효철이다. 중천(中天)의 장이기도 하지.”
중후한 음성이 역시나 장내로 삽시간에 퍼져나가며 오경방 뒤에 늘어서 있던 2천의 녹림도를 바짝 얼어붙게 했다.
안효철.
그의 별호는 철갑권왕(鐵鉀拳王).
현 시대의 강호 무림에서 천하오절이라 불리는 절대자의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