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제16장. 인연의 갈래들 (3)
도판수는 칠악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백사자 독고구는 오경방 다음가는 실력자로서 녹림의 최고위라 할 수 있어서 그의 발언이 강력할 텐데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금비원패 자동수는 과거 주태소와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는 관계였었다. 서열의 우열은 민감한 문제인 데다가 스무 살이나 나는 나이 차이 때문이었는지 과거에는 주태소의 기를 찍어누르려는 시도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이었다.
변상우의 전임은 취악도(醉惡盜) 송시경이었고 장위의 전임은 태백도귀(太白刀鬼) 곽주열이었다.
단이악귀(斷耳惡鬼) 금효윤과 주태소의 자리를 대신해서 들어온 다른 두 사람은 도판수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자네들은 이 둘을 처음 보지? 이 녀석은 원규(遠赳)라 하고 여기 이 녀석은 악서군(惡西君)이라 하네. 두 사람 모두 영입한 시기가 다르긴 하지만, 실력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원규 이 녀석은 앞으로 금효윤이 맡았던 천자산채를 이끌 것일세. 모두 인사들 하게.”
“원규라 하오.”
“악서군이오.”
새로운 얼굴들이 인사를 하자 다른 칠악들도 인사로 답했다. 변상우와 장위는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모습들이었지만, 다른 세 사람은 달랐다.
“총채주가 실력을 보장한다면 그 정도는 그런가 보다 할 수는 있어도 녹림의 근본도 없는 것들이 벌써 칠악의 이름을 달고 있는 게 난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오.”
자동수의 호전성은 녹림에서도 유명한 것이었다.
“금비원패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소. 아무런 무명도 없는 본인이야 칠악의 후위로 가도 불만은 없지만, 명확한 정리를 원한다면 어울려드릴 수는 있소이다.”
“크캇캇! 이것 봐라?”
원규의 도발적인 언행에 자동수가 쌍심지를 치켜세웠다.
“하하! 동수야, 진정해라. 오늘은 반역자를 심판하고 녹림의 부흥을 기원하는 축제를 열어야지. 너희들 실력자랑은 나중에 자리를 마련해 주마. 독고 채주는 어떠신가?”
“축제라면 얼마든지.”
오경방이 너스레를 떨면서 슬쩍 독고구를 보았다.
녹림십팔채의 이인자면서 터줏대감으로서 공고한 지지를 받는 독고구였다. 나이로 따지면 63세로 오경방보다 연배가 높았기 때문에 그의 심중이 어떤지 궁금했었다.
다행히 지금 상황에 불만이 없어 보이니 오경방은 안심할 수 있었다.
“좋아! 축제를 열어라! 창고를 열어 술과 고기를 준비해라!”
오경방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도판수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도 채주 덕분에 술과 고기 모두 풍족해졌어! 주지육림(酒池肉林)이 뭔지 보여 주자고!”
“총궐령 날짜보다 이틀이나 지각했으니 대가를 치른 것일 뿐이지요.”
“대가는 무슨! 자네가 물자를 준비해 준 덕택에 내가 오히려 감사했다네! 자자, 뭣들 하는가? 자리들 잡게나!”
오경방의 명령에 빠르게 축제 준비가 이뤄졌다. 혁명장과 대산채 곳곳에 모닥불을 피우고 소, 돼지, 닭 등 수십 마리의 가축 등을 잡아서 불 위에 올렸다. 강서표국(江西驃國)을 통해 공수해 온 셀 수 없이 많은 술 항아리들이 사방으로 전달되었다. 노래와 춤이 이어지고 씨름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대산채 입구의 두 감시탑 사이에 두 손을 묶인 채 매달려 있는 주태소였다.
수십 명의 녹림도가 다가와 수차례씩 돌을 던졌다. 경력이 실린 돌팔매에 살가죽이 터지며 피가 튀었다. 이미 황건당에게 실컷 얻어터진 바람에 엉망이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몰골이 더욱 끔찍해졌다. 주태소 아래로 쌓인 돌들이 중엔 그의 피에 젖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얼마 가지 못하고 멈추었다.
주태소의 눈빛이나 미소는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그의 절망적인 형세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눈이 마주친 자들은 기세에 압도되었다. 또 생각보다 투석형에 가담하는 자들이 많지 않았다.
주태소에 분노하는 자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간에 쌓인 정이나 의리가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다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돌아섰으며 돌을 들었다가 던지지 못하고 다시 놓아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광경을 오경방도 보았지만, 크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신병은 확보되었으니 처형만 하면 될 일이었다.
축제는 늦은 밤까지 이어지다 하나둘씩 취기에 눌려 그 자리에 널브러져 곯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오경방이나 채주들도 모두 제 거처나 마련된 숙영지 등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도판수는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었던 사람이었다.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이곳저곳 기웃거리는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도 채주님, 왜 아직도 안 주무셨어?”
“이런…… 다들 술이 왜 이렇게 약한 건지…… 딸꾹!”
“어서 주무슈! 거 참.”
얼마 남지 않은 녹림도 모두 하나둘 자리를 떠나면서 혁명장에는 정말 도판수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제 몸 가누기 힘든 듯 휘청거리며 위태롭게 걷는 도판수는 혁명장을 지나 어느덧 입구 근처에 도달했다. 감시탑 사이에 매달린 주태소를 흐느적거리면서도 힘들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양쪽 감시탑에서 비번을 서고 있던 녹림도 두 명은 기척을 느끼고 도판수 쪽을 돌아보았다.
“도 채주? 술에 많이 취했구만.”
도판수가 바닥에 돌멩이를 주워 비틀거리면서 주태소를 향해 몇 개 던지는데 조준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내공 고수라는 자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술을 독째로 들이붓다가 저렇게 만취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꽤 우스워 보였다.
“킥킥……. 적당히 드셔야지.”
보초 서던 녹림도 하나가 실소를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탁!
도판수가 던진 돌맹이가 마침내 명중했다. 이마를 제대로 맞추면서 잠들었던 주태소의 눈이 끔뻑거렸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도판수를 보았는지 주태소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후우…….”
“꼬라지가…… 딸꾹! 걸레짝 되부렀어.”
“내 몰골이 보이긴 하시오?”
두 사람의 대화에 보초들의 시선이 쏠렸다.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죄수와 대화하는 모양새가 썩 보기 좋진 않았다.
“클클! 그래, 있을 만한가?”
“죽겠소이다. 언제 내려줄 것이오?”
“쯧쯧! 정신 못 차리기는. 자넨 더 처맞아야 해.”
주태소의 말에 감시탑 위 녹림도가 깜짝 놀랐다가 도판수의 대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이씨, 깜짝이야…….’
감시자들이 벌렁거렸던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도판수가 바닥을 더듬더듬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그리곤 왼손으로 주태소의 위치를 가늠하는 시늉을 하더니 돌을 쥔 팔을 휙 휘둘렀다. 그러나 휘두르기 직전 돌이 손에서 빠져나가 버리며 헛손질에 그쳤다.
“아이고……, 울렁거리는 거.”
도판수가 헛손질하면서 몸을 휘청거리자 감시탑 위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이 들렸다.
“딸꾹! 넌 더 맞아야 뎌.”
도판수가 다시 바닥의 돌을 집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감시탑 위 녹림도는 도판수가 무슨 재밌는 짓을 할까,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천히 웅크린 몸을 일으키는 도판수의 모습을 보던 녹림도는 도판수의 손에 돌이 아닌 다른 것이 들렸음을 깨달았다. 달빛을 받아 예기를 번뜩이고 있는 그것은 단도였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으득!
너무 섬뜩하여 소리가 작았음에도 귀에 선명하게 꽂혔다.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반대편 감시탑에서 웬 흑의인이 동료의 목을 비틀어버린 것이 아닌가?
싸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라 다시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도판수의 팔이 그를 향해 펼쳐지며 그의 손에서 단도가 날아왔다.
퍽!
정확히 이마에 꽂히며 쓰러졌다. 그 사이 흑의인이 감시탑을 연결한 다리 가운데로 넘어가 주태소를 묶은 밧줄을 단도로 잘랐다.
떨어지는 주태소를 받아냄과 동시에 울타리 밖으로 돌아 숨은 도판수의 움직임에는 전혀 취한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도판수는 미리 술독을 해독하는 약을 먹어뒀기 때문에 취기가 있었어도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의 만취 상태는 아니었다.
축제 시작부터 여기까지 오면서 했던 모든 행동이 연기였던 것이다.
“괜찮나?”
“죽겠수.”
도판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며 묻자 주태소가 쓴웃음을 지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흑의인이 감시탑에서 뛰어내려 두 사람 옆에 착지했다.
“괜찮으십니까, 형님?”
“이거나 풀어다오.”
주태소가 사슬에 묶인 두 손과 발을 내밀었다. 흑의인은 복면을 내리고는 씩 웃으며 보초 서던 녹림도 품에서 가져온 열쇠로 자물쇠를 해제했다.
그는 바로 도태무였다.
“제가 업겠습니다.”
도태무는 능숙하게 주태소를 당겨 등에 업었다. 손발이 자유로워졌지만, 봉신침과 독 기운 때문에 여전히 신음하는 주태소가 그들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세 사람은 달빛으로 생긴 울타리의 그늘에 몸을 숨기며 빠르게 이동했다. 운이 따르는지 바람과 풀벌레들이 시끄럽게 울어대서 그들이 내는 작은 소음 정도는 덮어 주고 있었다.
오경방은 주태소 건 때문에 찾아온 18채에 명령하여 일부는 대산채 안으로 들이고 11개 산채는 밖에 숙영지를 두어 구역별로 경계를 겸하도록 명령했다.
본래 칠악이 채주로 있는 녹림도는 대산채에 마련된 거처에서 쉴 예정이었는데 도판수는 일부러 대별산에서의 출발을 개인 일정을 핑계로 늦췄다.
대신 그는 축제에 쓸 엄청난 양의 물자들을 약속하고 그것들의 수송에 대해 번거로움을 고려해서 대산채 밖에서 숙영할 것을 제안했으니 오경방은 덥석 승낙한 상황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대별산 대붕채 녹림도의 감시망을 도주로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세 사람은 자신들의 영역에 이르자 빠르게 울타리에서 숲속으로 스며들 듯 움직였다. 그들의 숙영지는 조금만 나가면 나올 예정이었고 이미 수하들은 이 상황을 공유받고 탈출 준비를 하고 있을 터였다.
세 사람은 마침내 숙영지에 이르렀다. 숲 곳곳에 펼쳐진 천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산채들의 감시망과 위치를 연결할 감시망 외곽의 소수만 남고 모두 조용히 어둠 속에 모여 있었다.
“자, 모두 이동하자. 천막들은 내버려 둔다.”
도판수는 곧장 명령을 내리고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두 부자는 몇 걸음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 서야만 했다.
수하들이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뭣들 하는 게냐?”
도판수가 조용히 소리쳤다. 처음엔 불길한 느낌이 스쳤지만, 그렇다고 수하들이 칼을 뽑지도 않고 있으니 배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불길함의 종류는 배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하들이 좌우로 갈라지자 백발백염(白髮白髥)이 사자의 갈기처럼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녹림의 노장 백사자 독고구가 그사이에 서 있었다.
“이거 놀랍군. 대별산의 부자(父子)가 주태소와 함께 반동을 꾀하다니? 허허허…….”
독고구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자 도판수는 몸이 굳는 것 같았다.
같은 녹림칠악이라고 하지만, 상위 서열 3명과 그 아래 4명의 실력 차이는 컸다. 특히 독고구는 자동수, 주태수보다 한 수 위로 알려졌던 실력자였다. 여기 수하들 포함해 모두가 덤빈다면 어떻게 잡을 수는 있겠으나 이 소란을 듣고 들이닥칠 다른 산채의 녹림도를 고려하면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인 셈이었다.
“독고 채주님, 우린…….”
독고구는 손을 들어 보임으로써 도판수의 입을 막았다.
“주태소, 네가 얘기해 봐라. 변명은 당사자에게 들어야지 않겠느냐?”
“크흐흐!”
주태소가 도태무의 등 위에서 웃음을 흘렸다.
“야, 내려줘라.”
엉거주춤 서 있었던 도태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태소를 내려놓았다. 대신 비틀거리는 주태소를 부축하여 자신의 몸에 기대어 설 수 있게 도왔다.
주태소는 무거운 몸 때문에 한숨부터 길게 내쉬었다.
“후우! 독고 영감, 혁명장에서 난 이미 할 말을 다 했어.”
“총표파자가 마교도라는 말을 믿으라는 건가?”
“크큭! 그뿐만 아니라 내 손에 죽은 것들과 각 산채 지휘권을 가진 일부 부두령까지.”
“믿기지 않는다.”
“독고 영감이나 자 채주는 모두 광동, 광서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으니 거리가 멀어 도착하기도 전에 사달이 벌어진 후였겠지만, 그래도 보고를 들어서 알 거 아니야? 삼문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삼문협 참사가 총표파자가 마교도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지나친 비약이다.”
“아니, 당신은 삼문협 참사의 결과가 아니라 왜 그곳으로 집결령이 떨어졌느냐에 대한 의문을 먼저 품어야 해. 당신이 녹림의 이인자라면 말이야.”
“무슨 말이냐?”
독고구의 인상을 찌푸렸다.
“쿨럭! ……삼문협에서 나는 수장됐어야 해. 그게 오경방의 계획이었지. 녹림에 소속감이 강하면서도 지위나 제물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나였으니까. 여기 두 사람도 마찬가지로 수장됐어야 했지만, 난 두 사람을 살렸어. 그리고 산 대가로 나는 동지들이 수장되는 아비규환을 보았지. 씨발! 영감, 우리는 녹림이야. 산도적 취급받고 있지만, 근본은 민중의 혁명군이었다고. 우리가 상인들에게 돈 뜯어내고 반항하는 놈들 죽이긴 했어도 그걸 무차별적인 약탈로 끌고 가진 않았다고. 쿨럭쿨럭!”
조용한 외침이었지만, 독 기운에다가 목에 힘이 들어가자 기침이 재차 터져 나왔다. 주태소가 고통에 인상을 콱 일그러뜨리며 한 손으로 자신의 목을 꽉 쥐었다. 목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손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주태소는 다시 독고구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씨발, 삼문협에 모인 녹림도는 모두 소수 정예로 집결했어. 당신같이 멀리 있는 동지들까지 모이길 기다리려면 3, 4일은 더 있어야 했는데 나와 여기 두 사람이 도착하자마자 때가 됐다며 함선에 탑승을 지시했다고. 송시경 그 자식이 말이야. 그러면서 본인은 제일 마지막 함선에 탑승하고는 군선들이 등장하자마자 소선을 타고 제일 먼저 빠져나갔다고. 이걸 내가 살아남은 뒤에 하도 의심이 든 나머지 황하수채 수령을 족친 끝에 알아낸 거고. ……쿨럭!”
다시금 이어진 기침에 피가 섞인 가래가 끓었다.
퉤!
“하아, 오경방이 마교도라는 거 송시경 그 새끼를 고문해서 들은 거야. 고문해서 얻은 정보라고 거짓말로 치부하면 나 무지하게 섭섭할 거야, 영감. 씨발, 생각 좀 하라고. 혁명군이 근본이었던 녹림이 고작 홍천환 하나 탐내서 움직이는 게 말이 되냐고? 쿨럭! 내가 삼문협에서 그 소릴 듣고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잘도 떠들어대는군.”
독고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주태소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고개를 반쯤 들며 힘들어하는 표정을 드러내면서도 얼굴엔 자신감 넘치는 웃음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독고 영감. 우리 녹림이야. 씨…… 우리가 힘이 없지 자존심도 없어? 고작 마교 따위에 이리 휘둘리며 얼마 남지도 않은 여생을 마감할 거야?”
주태소의 말이 끝나자 독고구의 쌍심지가 올라가며 눈빛이 번뜩였다. 성큼성큼 다가와 주태소의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도판수와 도태무가 당황해서 주춤거렸다.
“건방진 놈, 넌 대체 언제 존댓말을 배울 것이냐?”
“영감이 그럼 총표파자 하시던가.”
“적수비혁전 하겠다면서? 오경방 잡을 힘은 있느냐?”
독고구의 물음에 주태소가 씩 웃었다.
“영감, 나 주태소야. 크크!”
“예의라고는 못 배워 처먹은 놈.”
주태소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독고구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는 품을 뒤적이더니 작은 약병을 하나 꺼냈다.
“봉신침을 녹이고 해독도 시켜 주는 약이다.”
주태소는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고 그 약병을 냉큼 빼앗아 바로 입에 털어 넣었다. 도판수와 도태무가 모두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지만, 주태소는 독고구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것은 도판수 부자를 향해 보내는 신뢰와는 또 다른 의미의 믿음이었다.
독고구는 녹림의 원로이자 근본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가까운 조상이 실제 녹림병의 간부였기 때문이었다. 주태소는 어릴 적부터 독고구에게 이런저런 훈계를 들으면서 녹림의 이런 역사에 대한 설명을 귀가 따갑도록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저 이름 그대로의 산도적이 다 되어 버린 다른 녹림도와는 그 결이 다른 사람인 것이다.
주태소가 약물을 마시며 입을 닦는 걸 지켜보던 독고구는 그의 대범함에 내심 감탄했다.
“하루는 지나가야 완전히 해독될 것이니 벌써 설칠 생각하지 말고. 가 봐라, 어쨌든 난 총표파자가 지시를 내리면 널 쫓을 것이니 방심하지 말고.”
“영감이나 몸조심하시오.”
“극존칭 모르냐?”
주태소가 피식 웃었다. 그는 다시 도태무 등 위로 풀쩍 뛰어 업혔다. 그리고 손으로 도태무의 가슴을 툭툭 쳤다.
“갑시다, 우리는.”
도태무는 독고구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 독고구를 향해 주태소가 씩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도태무의 넓은 등에 얼굴을 파묻고 바로 잠들어 버렸다.
도판수도 독고구에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그런 도판수의 두 손을 독고구가 붙들었다.
“추격은 내일 아침에나 시작될 것이다. 계획은 있느냐?”
“이미 세워두었습니다. 조력자도 있습니다.”
“하긴 뭔가 계획이 있었으니깐 제 발로 잡혀 왔겠지. 온몸이 간덩어리가 아니고서야. 가 봐라.”
도판수는 다시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수하들과 함께 조용히 숙영지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빠져나간 후, 정적만이 감도는 대별산 동지들의 숙영지를 쓱 둘러보던 독고구는 나직이 탄식하며 정강대산채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