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제15장. 조가장(趙家莊) (3)
피륙을 갈라낸 언월도를 다시 한번 허공을 향해 휘둘러 피를 털어낸 조태번의 표정엔 적장을 베었다는 희열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흥미로운 시선으로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진도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조태번은 다시 전장을 살펴보았다. 돌아온 기병대들이 대장을 잃은 흑응대를 도륙하고 있었고 보병대 안에 갇힌 자들도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수십 명 수준의 사상자만 남기고 천 기에 가까운 흑응대를 전멸시켰으니 정말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판을 짜 놓은 것은 필시 자신의 형 조태상의 작품일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조태번의 시선이 다시 진도건에게로 이동했다.
진도건은 근처까지 와 바이라의 말 머리에 박힌 자신의 검일 뽑았다. 그리고 말가죽에 피를 닦아 내곤 검집에 넣었다.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지?”
“보였소.”
“후후, 미래라도 본단 말인가?”
“그런 것보다는 의지의 결집 같은 걸 느낄 수 있다고 해야 할까…… 뭐, 그 정도뿐이오.”
조태번은 진도건을 새롭게 다시 보고 있었다.
이민족들의 땅에서의 전쟁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으나 진도건의 그런 능력이라면 분명 전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
“조 장군!”
조태번은 즉석에서 진도건에게 제안을 하고 싶었으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조가장 쪽 숲에서 10여 명 정도가 말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선두에 안호필이 어깨를 쫙 펴고 있었고 그 바로 왼쪽에 상선이 승전에 기분 좋은지 웃으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안호필 옆에는 정말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친형 조태상이 있었다.
조태번은 말을 몰아 그들에게 다가갔다.
“안 장군, 수고하셨습니다. 상선께서도 고생하셨습니다.”
“허허! 조 장군, 장군의 형님께서 병법에 밝다 하여 상장(上將)을 맡기신다고 하였을 때 내 긴가민가했었는데 오늘로 조 장군의 의견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었소.”
“오늘 흑응대를 전멸시킨 공은 전적으로 조태상 상장군에게 있소이다.”
상선과 안호필이 크게 사기가 올라 칭찬을 계속 아끼지 않았다. 조태상은 덤덤하게 그저 따뜻한 눈으로 동생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번아.”
“그래도 건강해 보이오.”
“너의 지휘가 제법이구나. 적군의 움직임을 꿰뚫어 볼 줄이야.”
조태번은 그 말을 듣고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진도건은 이번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던 영은성과 최현걸을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항상 진도건이 안고 다녔던 어린 소녀 서혜가 진도건에게 달려가 안기는 모습도 보였다.
조태번이 다시 제 형을 보며 씩 웃었다.
“운이 좋았소. 얘기는 안에서 마저 합시다. 저와 안 장군은 잔적을 마저 처리한 후에 군을 정비하고 올라가겠습니다.”
“그래, 이따 보자.”
“조 장군, 부장들에게 대충 맡기고 어서 올라오시구려.”
“알겠습니다, 상선.”
흑응대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전부 쓰러졌고 곧 상산에는 승리의 환호가 울려 퍼졌다. 조태번과 안호필은 빠르게 부대를 지휘하여 야영 준비를 지시했다. 달이 밝았으나 이미 밤이 깊어서 이곳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움직여야 했다.
진도건 등은 조태번의 특별대우를 받아 인솔하는 병사를 따라 조가장으로 들어섰다.
조가장은 상산 중턱 숲속에 있는 꽤 큰 장원이었다. 그러나 왜인지 조가장의 건물, 시설 등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듯했다.
담장엔 넝쿨이 제멋대로 자라 있었고, 장원 내 정원의 나무들도 관리된 흔적 없이 제멋대로 가지를 뻗고 있었다. 정원엔 풀들이 메말라 있었으나 대부분 잡초에 불과했다.
지나가는 하인들도 적었다.
안호필이 데려온 30여 명의 병사 외에는 정말 뜨문뜨문 눈에 띄었는데 당장 눈에 보이는 하인들보다 10배는 더 많아야 이 큰 장원 전체가 관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에 뜨이는 흥미로운 시설들도 있었다. 내원 담장은 마치 성벽처럼 오르내릴 수 있는 구조로 세워졌는데 그 위에는 화살을 다발로 동시에 쏠 수 있는 연노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시설마다 배치되면 백여 발의 화살을 동시에 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내원은 가옥들이 세 채가 있었고 중앙에 3층 전각이 있었다.
시선을 높이 던져 보니 3층은 앞으로 튀어나온 난간이 있었는데 거기에 지휘기(指揮旗)가 달빛 아래 펄럭이고 있었다.
진도건 등이 병사를 따라 전각 내 대청으로 들어서려 할 때였다.
문이 열리면서 상선과 안호필, 그리고 네 명의 부장들이 나오고 있었다. 부장 중 한 사람이 진도건 등을 알아보고 손짓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네.”
진도건 등은 상선과 안호필 등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곤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상선이 문이 닫히자 안호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 사람 중 하나가 말 위에서 날아다녔던 자이지요?”
“그렇습니다.”
“조태상이 저자들을 설득할 모양새인데 도움이 되겠소이까? 창천맹도 북부군과 서부군에 무림인들을 파견했는데 성과가 영 시원찮아서…….”
“조 장군의 판단을 믿어 보시지요.”
“에헴!”
상선이 헛기침하며 뒷짐을 지고 걸어갔다.
그는 황명이 담긴 서신을 들고 창천맹을 찾아갔던 일을 떠올렸다. 무림과 황실은 상호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비록 무림이 50여 년 전엔 금 황실에 대적하였다고는 하나 지금은 세종(世宗) 완안옹(完顔雍)의 치세 아래서 백성들은 안정을 되찾았다. 이런 마당에 다시 백성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전란(戰亂)이 닥친다면 무림도 기존의 관례대로 협조하는 건 당연한 관례였다. 게다가 이 전쟁은 새외무림이 주도한다는 정보가 있기에 협조를 강하게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창천맹주는 협력을 약속하고 전장과 가까운 문파들에서 우선으로 무인들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무슨 문제인지 원하는 성과가 빨리 나타나지 않고 전쟁이 1년 넘게 길어지고 있었다.
상선은 거기에 대해서 탐탁지 않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빈객을 모시는 가옥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진도건 등은 대청 안으로 들어서서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앙의 상석엔 조태상이 있었고 좌우로 조태번과 근육질의 두 팔을 드러낸 초로(初老)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진도건은 서혜의 손을 잡고 영은성, 최현걸과 함께 선 채로 그들 모두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조태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네 사람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강호의 귀인(貴人)들께 인사 올리오. 본인은 이 조가장을 관리하는 조태상이라 하오.”
“진도건이오.”
“화산파의 영은성입니다.”
“개방의 최현걸입니다.”
서혜는 슬그머니 진도건 뒤로 숨었다. 진도건의 옆구리 쪽에서 빼꼼 얼굴만 내놓고 굳은 얼굴로 쳐다보는 게 귀여웠다.
그 모습에 조태상이 피식 웃었다.
두 형제 모두 부인과 자식들이 있었는데 조태상은 슬하에 딸 셋만 있었다. 그랬기에 서혜를 보면 대부분 장성한 딸들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조태번의 가족들은 기주부에 거처를 두고 있었다.
“내 동생은 함께 왔으니 잘 아실 것이고, 이쪽은 모웅(毛熊)이라 하고 조가장에서 대장장이로 일하고 있소.”
모웅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럼 모두 앉으시지요.”
조태상의 권유에 진도건 등은 그들과 한 자리 떨어져서 탁자 좌우에 각각 앉았다. 그들이 모두 앉는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조태상도 자리에 앉았다.
조태상은 진도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진도건도 그를 쳐다보았다.
형제의 얼굴이 닮긴 했지만, 조태상의 용모가 좀 더 잘생긴 편이었다. 수염은 목 아래까지 단정하게 기르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묶지 않고 길게 풀어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대비되는 매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조태번과 달리 조태상의 얼굴에는 확실히 그것이 있었다.
조강선의 인상이.
“동생을 볼 때는 몰랐는데, 당신을 보니 스승님의 핏줄이 맞는 것 같소이다.”
“그렇소이까? 그대는 조부님의 제자라고 했는데 무엇을 배우셨소. 무공이오?”
“검술과 조가의 창술을 배웠소.”
“군략은 배우지 않았소이까?”
“배우지 않았소.”
“아쉽구려. 조부께선 북쪽의 이민족들 사이에선 악마로 묘사될 정도로 대단한 장수셨소. 전장에 있으셨던 기간에 10년도 되지 않았지만, 우리 가문의 영광이었었소.”
“형님, 이 자가 조부님의 제자인지 아직 확신할 수 없지 않소?”
조태번은 조태상이 진도건을 정말 조부 조강선의 제자라는 걸 인정하는 듯이 얘기하자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조강선이 군복을 벗어 던지고 강호에 나갔으니 어딘가 무공을 남긴 것을 주워 배웠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태상은 부드러운 미소로 조태번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조부님의 제자가 맞다.”
“어찌 그리 확신하시오?”
“넉 달 전에 여기에 오셨었다.”
“누가 와……. 조부님이 말이오!?”
조태번이 놀란 눈으로 조태상에게 물었다.
조태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는 잠시 비스듬히 위로 시선을 던지며 지난 그때를 생각했다.
“소문보다 더 대단하고 신비로운 분이셨다. 저 이민족들에게 악마로까지 불리셨던 분이 쫓기듯 강호에 나가 우리로서는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을 사신 것이다. 신선이 있다면 그분 같으셨을 것이야. 그렇지 않소이까?”
조태상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마지막 물음과 함께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그렇……소.”
대답하던 진도건은 문득 조태상의 미소에 슬픈 감정이 묻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잠시 그 기분을 곱씹어 보던 그는 불길한 소식을 직감했다.
“스승님은 어디 계시오?
“그래, 그대가 여기에 온 것은 조부님 때문이겠지. 조부님께서 떠나기 전에 내게 말씀하셨소. 만약에 스스로 진도건이라고 하는 청년이 이곳에 왔을 때, 자신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이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알려 주라고 하시었소.”
“뭐?”
“이럴 수가……!”
“형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진도건이 불신의 눈을 부릅떴다. 영은성, 최현걸 그리고 조태번까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번져갔다.
영은성의 미간이 고민에 좁아졌다.
반선의 경지에 올랐다 한들 영생(永生)은 불가능하다.
물론 이도 짐작일 뿐이지만, 도가에 따르면 수양이 깊어질수록 육신이 가진 영신(靈神)의 껍데기로서의 의미가 희미해지며 스스로 무위자연(無爲自然) 속에 이르게 되니 이는 곧 우화등선한다고 하였다.
무인으로서 조강선은 가히 무림의 정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 그가 누군가의 손에 죽었을 거라는 상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반면 진도건은 그보다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월신마의 마수에 빠져 혈마로 폭주한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바로 앞에 두고 조강선이 그에게 쏟아부은 노력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원류검결은 선천진기를 강화하였고, 혈마의 기운으로부터 영신이 보호되었다.
끔찍한 사건으로 마음은 황폐해지고, 하단전은 부서져 기혈은 엉망이었으며, 상단전은 빈껍데기만 남아 영혼만을 가까스로 보호하고 있었다.
조강선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진도건에게 쏟아부었다.
가진 내력을 모두 쏟아부어 부서진 하단전을 다시 조성하였고, 중단전이 제 역할을 못 하고 홍천환의 영향 때문에 폭주할 때마다 그를 제압해야만 했다.
정신이 쉽게 돌아오지 않자 조강선은 자신의 몸부터 먼저 추슬렀다. 그리고 아예 제압하지 않고 되려 검을 주고 풀어놓으니 그야말로 광폭의 검무가 펼쳐졌는데 그것을 조강선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상대해 주었다.
홍천환의 마기가 없으니 더는 기운의 폭주는 없었지만, 살의가 육신을 지배했다.
하지만, 진도건이라는 검객의 시작은 원류검결에 있었고 그것은 곧 선천진기의 자극과 전신의 모든 크고 작은 기혈의 활성화를 의미했다. 그가 검을 휘두른다는 것은 곧 원류검결에 따라 움직이는 걸 의미했다.
그야말로 시간을 한계까지 밀어붙여 가면서 진도건이 몇 주간 검무를 추며 덤비는 걸 조강선은 상처 없이 받아주기만 하였다. 반선의 경지에 올라 자연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체력에 한계가 없고 진도건과 동등한 수준의 쾌검을 가진 조강선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름여 고행(苦行) 끝에 진도건은 마침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검을 놓고 털썩! 주저앉고는 온몸이 땀범벅이 된 채로 자애로운 얼굴로 바라보던 스승 조강선의 모습.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스승이 제자를 살리기 위해 아끼지 않았던 각고의 노력은 이미 영혼에 새겨져 있었다.
아아!
해일처럼 한꺼번에 밀려오는 회한(悔恨)의 감정에 스승에게 다가가 무릎 꿇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았던가!
진도건의 떨리는 눈이 점점 아래로 쳐졌다.
여전히 스승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조태상은 스승의 손자가 되는 남자였다. 넉 달 전에 찾아왔다는 말도 예상되는 행적과 일치하니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스승님은 어디로 가신 것이오? 당신은…… 스승님의 죽음에 대한 연유를 알고 있소이까?”
드드득.
조태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자가 뒤로 밀렸다. 그는 자리의 뒤쪽으로 걸어가 장롱을 열었다. 장롱의 상단부터 중앙까지는 서책들이 있었고 하단에는 서랍장이 있었는데 조태상은 그 서랍장 중 하나를 열고 무언가 꺼내었다.
그는 장롱을 정리한 후, 다시 자리로 돌아와 탁자 위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가로세로 1척쯤 되는 상자였는데 앞부분의 잠금쇠를 톡 건드려 풀어 내고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많이 해지고 다소 색이 바랜 백의(白衣) 한 벌이 고이 접어 보관되어 있었는데 진도건은 그것이 스승의 것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지난 3년 동안 오로지 이 옷 한 벌만을 입어 왔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영은성과 최현걸도 마찬가지였으니 정말로 조강선의 죽음이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