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제15장. 조가장(趙家莊) (1)
“장수 조태번(趙泰藩)은 황명을 받들라. 기주성(冀州城)에 도착한 5만 병력의 통솔권을 위임하니 북부대장군(北部大將軍) 남양(南陽)을 도와 몽골족들의 침략 행위를 막아내고 적을 물리치도록 하라. 이번 원정에 공을 세운다면 그대 가문의 지난 죄를 사면토록 할 것이다.”
상선(尙膳)이 기주부로 직접 찾아와 내민 황제의 친서를 조태번은 무릎을 꿇고 받았다.
호랑이 같은 그의 용모와 풍채는 늠름하여 가히 일군을 통솔할 장군으로 보였지만, 그가 그저 기주부윤(冀州府尹)에 머물러 있는 것은 100년 전 그의 조상 가운데 일군을 통솔하던 장군이 군법을 거역하고 탈영을 하면서 그 후손들에게 원죄가 뒤집어 씌워진 탓이었다.
100년 전이라면 이곳 하북지방의 황실이 바뀔 정도의 변화였지만, 금 황실도 지역의 기존 군부나 사대부들을 흡수 기용하게 되면서 조씨 일가에 대한 원죄도 어쩔 수 없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조태번의 무용은 황실에 소문이 돌 정도로 유명했으니 아무리 기주가 번성한 도시라고는 하나 부윤이라면 능력에 비해선 한직이라 할 수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북부의 난국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조 장군뿐이라 여기고 계시오. 남 대장군을 도와 전란을 종식한다면 폐하께서는 분명 조 장군께 큰 벼슬을 내리실 것이오. 듣기론 추밀원(樞密院)의 부사(副使)로 임명하신다는 소문이 있소이다.”
상선이 껄껄 웃으며 조태번을 꼬드겼다.
사실 말이 꼬드기는 것이지 어찌 황명을 거역한단 말인가? 게다가 전란으로 인해 하북지방이 큰 혼란에 빠져 있으니 그도 이 문제에 대해 고심이 깊은 상황이었다.
남양 대장군은 10만을 이끌고 장성을 넘어 몽골 기병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으나 들려오는 소식은 별로 좋지 않았다. 남양이 고집스럽고 자존심이 강해 조태번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통솔 능력을 고려한다면 이번 몽골족들의 거병(擧兵) 수준이 심상치 않았다.
“황명을 어찌 거스르겠습니다만, 소신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장군이 요구하는 부분에 대해 내게 일임하셨으니 어디 말씀해 보시오.”
“소신의 창은 적들을 토벌하기 좋으나 대군을 이끌기엔 병법이 부족합니다. 소신의 형 조태상(趙泰詳)을 통솔권자로 임명해 주십시오.”
“조태상이라……, 좋소. 폐하께 조태상을 무원장군(武元將軍) 절도사(節度使)로 조 부윤을 부사로 임명하도록 주청을 드리겠소이다. 여기 장군패(將軍牌)를 받으시오.”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태번은 또 한 사람의 부장인 안호필(顔豪泌)과 함께 5만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였다.
상선도 조태상이 직을 받드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하여 동행하였다.
그의 형 조태상은 조가장에서 은거하고 있었는데 본래 관직에 대한 욕심은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해 조태번이 무술을 익히는 동안에 그는 병서를 읽어 군사전략에 상당히 밝았다.
게다가 보민(保民)에 대한 뜻이 있어서 조태번은 충분히 자신의 형이 절도사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태번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4만 9천은 안호필에게 맡겨 조가장으로 바로 향하도록 하였고, 그는 1천 기의 기병을 추려 산서로 이동했다.
그는 기주부윤으로 있으면서 화북지방 일대를 휘젓고 다니는 흑응대에 관심이 많았다. 이들의 역할은 보급선이 말라가도록 마을과 전답을 불태우고 약탈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섬멸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미 본대의 위치를 어느 정도 특정하여 추적하고 있었고 조용히 병력을 이동시켜 산서의 울창한 산림지대 속에 숨겨 두었다.
산서 일대의 지형은 눈에 훤하므로 천 기의 기병을 숲에 숨겨 이동시키는 것은 그에게 일도 아니었다. 일주일 넘게 산림 속을 이동하던 그는 정찰병으로부터 흑응대가 조가장을 노리고 이동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황군이 제2군을 편성하여 병력을 북상시키고 있는데 그 통솔권자가 조가장에 있으니 척살하라는 밀지가 흑응대에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안호필은 예정대로라면 역현(易縣) 근처에 주둔시키고 군사 500명을 이끌고 조가장에 있을 조태상을 모시러 갈 예정이었으니 만약 흑응대가 노린다는 정보가 사실이라면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조가장으로 향하던 조태번은 백여 기의 흑응대 움직임을 포착하였고 그들을 조용히 따라잡았다. 그리고 적들이 고작 3명을 잡기 위해 포위진을 펼치는 것을 보고 황당해했다.
조태번은 흑응대의 움직임과 진도건 등의 움직임을 언덕 위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기병대에게 돌격 신호를 하달하였다.
조태번의 기병대는 수적으로도 10배가 많았기에 몽골 기병들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자들로부터 흑응대 본대가 조가장으로 직접 가고 있다는 정보까지 입수하였다.
서둘러 이동해야 했지만, 조태번은 그보다 흑응대가 포위한 세 사람. 정확히는 한 사내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 소녀까지 합한 네 사람의 정체가 몹시 궁금했다. 그들이 보여 준 무용으로 보아 강호무림의 고수들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태번도 조가장의 무공을 익혔고 강호의 고수들 못지않은 무용을 자랑하는 자였지만, 이들 세 사람의 무공은 분명 놀라운 구석이 있었다.
“모시고 왔습니다.”
진도건과 서혜, 영은성, 최현걸이 서서 말 위에 갑주를 걸친 조태번을 올려다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평범한 장수가 아니었다.
“강호의 협사(俠士)들께선 어쩐 일로 흑응대의 공격을 받으셨소?”
“일전에 놈들의 일부를 처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이 은원으로 남았는지 함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영은성이 공손히 대답하며 언덕길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행객들을 상대하는 작은 마을이 여전히 화재에 휩싸여 밤을 밝히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 상황을 모두 지켜본 조태번은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다.
“강호 협객들의 무공을 견식하게 되어 영광이었소.”
“별말씀을.”
다그닥다그닥.
조태번과 영은성이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하는 동안에 한 기병이 말을 끌고 조태번에게 다가왔다.
“장군, 서둘러야겠습니다. 흑응대가 곧 조가장에 도착할 것이라고 합니다.”
“안 장군은?”
“아마 도착하셨을 텐데 수적 열세라 오래 버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저희가 제때 도착할 수 있다면 앞뒤로 포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장졸(將卒)이 대화하는 사이에 영은성이 손을 들었다.
“우리도 조가장에 가는 길입니다.”
조태번이 놀란 눈으로 영은성과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조가장에는 무슨 일로?”
“아, 그게…….”
영은성은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끌었다. 그러자 진도건이 그의 어깨를 잡아 뒤로 끌며 앞으로 나섰다.
“조강선이라는 이름을 아시오?”
“네가 그 이름을 어찌 아느냐?”
되묻는 조태번의 얼굴에 심상치 않은 기색이 떠올랐다.
조씨 가문이 과거 조상의 군법 위반과 탈영으로 인한 원죄에 휩싸여 출세의 길이 막혔는데 그 위법한 조상이 바로 그의 조부(祖父)가 되는 조강선이었다. 북송 북부군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장군이 그런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선 나름의 사연이 있었지만, 그 일로 가문 전체가 잠시 황실의 핍박과 의심을 받기도 했으니 그 가문의 차남으로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런 이름이 강호의 협사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이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어진 진도건의 대답은 그를 더욱 당황하게 했다.
“나는 그분의 제자요. 그분께서 내게 남긴 전언이 있어…….”
“잠깐! 그 무슨 헛소리냐? 그분은 이미 타개하시었을 텐데 당신같이 젊은 사내가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믿으란 말이냐?”
진도건은 서혜의 손을 놓고 기병에게 다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창을 줘 보시오.”
조태번이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는 들고 있던 창을 진도건에게 건네주었다.
진도건은 잠시 공터로 나와 창을 가만히 잡고 어떤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례대로 열여섯 개의 창식을 순차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풍운십육창식(風雲十六槍式).”
조태번이 놀라 중얼거렸다.
조가장이 가장 번성하며 무가로 이름을 날린 때는 바로 조강선이 임관하던 때였다. 그가 가문에 남긴 창술이 바로 풍운십육창식이었으니 지금의 조태번을 만든 창술이기도 했다.
풍운십육창식의 초식을 다시 줄이고 강력한 내공과 함께 위력적인 무공으로 펼쳐 낼 수 있도록 수정한 창술이 풍운칠기창이었다. 조강선은 제 작년에 진도건에게 이 두 가지를 모두 사사하였으니, 마치 이날을 위해 안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진도건은 하고 있었다.
“갈 길이 바쁘지 않습니까?”
“……이들에게 노획한 말을 주어라!”
조태번의 시선은 쉽사리 진도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38세인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이 사내가 조부의 제자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가 펼친 창술은 틀림없는 풍운십육창식이었다.
“대열을 정비해라! 조가장까지 전력으로 달릴 것이다!”
조태번은 아직 진도건이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흑응대의 뒤를 치는 것이 시급했다.
조태번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병들이 빠르게 대오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빠르게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진도건 등도 세 필의 말에 나눠 타고 조태번의 바로 뒤를 따라 달렸다.
몽골족뿐만 아니라 거란족과 여진족의 고위층들 사이에서 근래 중원의 장군들 가운데서 가장 두려워하는 자를 꼽는다면 조주혼(趙朱魂)이 가장 먼저 거론되곤 했다. 그는 오랑캐 토벌이라는 목적으로 자주 북벌을 이끌었던 장군이었기에 이민족들에게선 공포의 대상이었다. 가진 용맹과 지략이 매우 대단하여 그의 군사들만큼은 초원의 용맹한 기병대들도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조주혼.
주혼(朱魂)은 실제로 그 장군의 자(字)였다. 본명은 강선이었으니 그 조강선이 맞았다.
그가 군에서 실각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초원의 모든 이민족은 크게 안도했다고 하였다. 실제로 수십 년간 토벌군이 편성된 사례가 단 두 번에 그쳤을 정도였고 그마저도 위협이 되지 않았으니 조강선의 존재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지금 후발대로 진군하는 군사의 통솔자가 그 조씨 일족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 임명을 차단하도록 흑응대에 발 빠르게 명령이 하달되었다.
지금의 몽골족 거병의 기세는 그 어느 때보다 크고 강력했지만, 조씨 일족이 그들에게 선사한 아픔의 역사는 절대 가볍지 않았기에 무시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병력이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군사들을 통솔하는 장수가 누구냐에 따라 병력의 질이 달라지는 법이었다. 황실에서 임명한 장수의 수준이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사전에 위협을 차단할 수 있다면 분명 그것은 상책(上策)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흑응대가 하북산서 일대를 휘젓고 있었으니 상책에 부합하는 최고의 묘수였다.
흑응대주 바이라는 홀로 분지에 올라 멀리 보이는 군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은 분지 끄트머리에 진을 치고 있었고 그 뒤엔 울창한 숲이 보였다. 바로 이어지는 산세의 오르막을 따라 펼쳐진 숲 사이로 눈 덮인 지붕이 보였다. 어두운 밤인데도 하얀 지붕과 까만 가시 같은 숲나무들과의 대비가 조가장의 존재를 드러내게 하고 있었다.
바이라가 서 있는 언덕 아래엔 900기의 흑응대가 조용히 숨죽이며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푸히히힝-!
곧 있을 전투를 예감하였는지 말이 흥분한 듯 들썩거리며 움직였다. 바이라는 능숙하게 말을 진정시키면서 들고 있던 창을 번쩍 들었다.
“흑응대 전군! 돌격하라!”
바이라의 외침이 상산 분지 안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뿌우우-!
두두두두두!
뒤따르는 뿔피리 고동소리와 함께 900기의 흑응대 기병들이 바이라를 지나쳐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열기와 짙은 살기가 흙먼지들과 대지의 떨림을 온몸으로 받으며 군세(軍勢)를 형성한다.
“이랴!”
그들 한가운데서 마침내 바이라도 박차를 가하며 한 몸이 되어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안장 머리에 걸어 놓은 뿔피리를 들고 힘있게 두 번 분다.
뿌우, 뿌우우-!
그 신호에 맞춰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속도를 조절한다. 그리고 마침내 검으로 적을 찌르는 듯한 추행진(追行陣)을 형성했다.
그들의 등장을 눈치챈 안호필군 보병들이 방진을 구축하는 듯했지만, 바이라는 자신의 흑응대가 놈들을 일거에 쓸어버리리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지의 끝과 끝.
거대한 흙먼지를 꼬리처럼 달고 돌진하며 분지를 가로지르는 흑응대는 달리면 달릴수록 사기가 올라가면서 모두 하나같이 살의에 휩싸이고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리고 분지의 중앙쯤을 돌파했을 때, 그 열기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 열기 한가운데서 달리던 바이라의 시선이 문득 숲속 조가장의 지붕에 닿는다.
둥-, 둥-, 둥-!
어디선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북소리.
언제부턴가 조가장 지붕 위에서 힘차게 흔들리는 하얀 대장기.
500여 명의 보병대 좌우가 넓게 날개를 펼치는 듯한 광경.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불길한 예감이 순간 머릿속을 스칠 때였다.
드드드득!
순간 땅속에서 밧줄에 당겨져 튀어나오는 목창(木槍)의 방벽.
밧줄은 보병대까지 연결되어 이백여 명 모두가 힘껏 당기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오랜 시간 준비된 함정이었다.
그것은 불과 흑응대로부터 몇 장 거리 앞에서 튀어나왔으니 달리는 말을 멈출 수도, 말머리를 돌릴 수도 없었다.
그대로 처박히는 수밖에.
콰드득! 콰드드득!
“끄아아악!”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
최전방의 기병들은 말과 사람이 한꺼번에 뒤엉켜 목창에 꼬챙이가 되고 뒤따르던 기병들도 속도를 죽이지 못하고 연속으로 몸을 던져댄다. 겹겹이 튀어나온 목창은 십여 장 폭으로 충분하게 설치되어 있었으니 시체의 벽에 부딪혀 공중으로 날아온 사람과 말들 모두 뾰족하게 벼려진 목창벽을 향해 웅장하게 몸을 던진다.
솟구쳐 오르며 피보라를 퍼뜨리는 전열의 참상을 목도한 바이라가 급히 손을 들고 소리치며 고삐를 당겼다.
“모두 멈춰라!”
이백여 명에 이르는 막대한 병력이 목창의 방벽에 몸을 던져 죽고 나서야 간신히 중열과 후열이 말을 멈춰 세우기 시작했지만, 바짝 달라붙을 정도로 뒤엉켜 버린 진형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이익! 거리를 벌려라! 벌리란 말……!”
다급하게 외치면서 달라붙은 부하들을 밀어내던 바이라는 무심코 적진 쪽을 보았다가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쩍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은 채 그의 고개와 시선이 적진에서부터 하늘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화살 비가 하늘을 덮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