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71화 (71/432)

71화 -제14장. 한파(寒波) 속에서 (5)

* * * *

정빈관(停賓館)에 들어가 방 두 개를 빌렸다. 한 방은 영은성과 최현걸이, 다른 한 방은 진도건과 서혜가 같이 썼다. 진도건은 서혜를 침상에서 재웠으며 자신은 바닥에 앉아 운기조식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서혜는 침상에 누워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이후에 그들은 흑응대 분대를 한 번 더 마주쳤다. 50여 기 가운데 절반이 세 사람의 손에 죽어 나갔다. 서혜는 숨어서 눈을 감고 있었지만, 떠나는 길에서 기어코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보면서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에 진도건은 그녀를 꾸준히 토닥여 주고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아주 어릴 적 도적 떼들에게 부모가 모두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본 아픔이 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눈앞의 참상이 두려울 수는 있으나 미래의 불확실성은 그보다 더 큰 두려움이 될 수 있으니 의연해져야 한다는 조언에 조금은 힘을 내게 되었다.

‘근데 안 자고 저렇게 앉아 있으면 안 피곤한가…….’

무공의 무도 모르는 서혜로서는 앉아서 운기조식하는 것만으로도 수면 못지않은 휴식을 취할 수 있음을 알지 못했다.

서혜는 한동안 계속 진도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천히 찾아오는 졸음을 애써 참아 보지만, 눈꺼풀은 차츰 눈을 덮어갔다.

“꺅!”

거친 손길로 끌어안는 느낌에 서혜가 깜짝 잠에서 깨며 소리를 질렀다. 서혜는 자신을 안은 사람이 진도건임을 알고 왜인지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묘한 감정의 경계에서 머물러 있을 여유가 없음을 깨달았다.

진도건은 서혜의 손에 젖은 천 조각을 쥐여 주었다.

“이걸로 코를 막거라.”

서혜가 젖은 천으로 코를 덮는 사이에 진도건은 문을 걷어차며 밖으로 나섰다. 때마침 영은성과 최현걸도 급히 방을 나왔는데, 건물 안이 벌써 검은 연기로 가득 차 있었고 천장은 불길에 휩싸이며 열기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여기 마교도 거점이었어?”

“아니!”

영은성의 물음에 최현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조가장이 있는 상산(常山)까지 가는 길에 마교도가 거점으로 삼고 있는 마을이 어디 있는지 최현걸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선에서 이곳은 아니었다.

진도건은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곳곳에 짚더미들이 있어 활활 불타고 있었고 옆에 있던 항아리들도 깨져 나가면서 술인지 기름인지 모를 액체가 쏟아져 불길을 더욱 키우고 있었다.

“함정은 맞는 것 같다.”

챙!

진도건은 검을 뽑아 앞으로 내밀었다.

“엇!”

영은성과 최현걸이 놀라 서둘러 진도건의 뒤로 갔다.

휘류류류!

검을 중심으로 바람의 돌기 시작했다. 이 바람은 이내 주변의 연기와 불길까지 빨아들였고 가벼운 집기들까지 빨아들일 정도로 점점 켜졌다.

쾅!

가볍게 대각선으로 휘두르자 그 회류(回流)가 위로 날아가며 천장을 뚫어 버렸다. 불길도 연기도 닿지 않는 바람의 통로가 일순 형성된 것이다.

진도건은 다시 검에 바람을 모았다.

“따라나서라. 밖에 적들 조심하고.”

팟!

진도건은 난간을 딛고 천장의 구멍을 통해 하늘로 뛰어올랐다. 밖으로 나오자 밖의 상황이 한눈에 보였다. 마을 전체가 불바다로 변한 상황이었고 당장 가까운 밖에 적들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바로 동쪽으로 인접한 마을 밖 언덕에서 일제히 불화살이 쏘아져 왔다.

후아앙!

진도건은 그 화살들을 향해 검풍을 날려 버렸다. 영은성과 최현걸도 때맞춰 구멍 난 천장을 통해 빠져나왔다.

검풍을 날리면서 몸을 돌리자 더 많은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불화살 때문에 언덕 위의 적들이 보였는데, 모두 말을 탄 채 화살을 쏘고 있었고 그 수가 이삼십여 기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흑응대다.”

“말은?”

“모두 죽여놨어.”

서둘러 마구간부터 살펴본 최현걸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퓨퓨퓽!

카캉!

“이크!”

곡사(曲射)로 불화살을 쏘아대던 적들이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직사(直射)로 겨누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곧장 경공을 펼쳐 마을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문제는 흑응대가 마상궁술도 매우 능하다는 것이었다. 적들이 달리고 있는 언덕은 나무가 별로 없었고 길이 깔끔하게 이어졌기 때문에 초원지대가 아님에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조금만 더 가자!”

진도건이 검풍을 연달아 일으키며 외쳤다. 그들의 화살은 위협적이긴 했지만, 대부분은 진도건이 일으킨 검풍에 휘말려서 비껴가 버렸다. 아주 늦은 밤이었기에 적들은 그걸 보지 못하고 계속 활을 쏘고 있었지만, 만약 진도건이 없었다면 쉽게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었다.

얼마간 달리자 흑응대 앞을 숲이 가로막으면서 날아오는 화살이 멈췄다.

힘을 분산시킬 이유가 사라지자 그들은 곧장 경공에 속력을 더욱 내었다. 그들이 달리는 길은 오르막길이었다. 길은 무척 넓었고 좌우로는 숲과 산세가 펼쳐지고 있어서 눈으로만 본다면 다른 길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달리는 방향이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기도 했다.

허나 그들은 얼마간 오르막을 오르다가 발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십여 장 거리의 오르막을 끝으로 내리막이 이어졌는지 시야에서 길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곳에서부터 흙먼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달리는 소음 때문에 미처 듣지 못했던 소리도 귀에 잡히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잠깐.”

진도건이 먼저 반응하여 멈췄다. 영은성과 최현걸도 그를 지나친 직후, 바로 멈춰 섰다. 그리고 그들 모두 오르막길 너머에서부터 들려오는 땅 울림을 들을 수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세 사람의 시선이 서로 얽히는 순간.

우와아아아!

거대한 함성과 함께 일단의 몽골 기병들이 달빛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는 거의 백여 명에 이르렀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뒤쪽의 동쪽 숲에서 활을 쏘며 쫓아오던 이십 기의 기병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 씨……!”

최현걸이 어이없어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순식간에 앞뒤로 포위된 형국.

애초에 머물렀던 마을부터 함정이었던 것을 고려해 보면 애초에 이런 상황까지 적들은 설계한 것이 틀림없었다.

뒤쪽이 스무 기에 불과해서 먼저 처리하기 위해 다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저 백여 기의 기병들에게 이 길은 내리막이기 때문에 무서운 속도로 좁혀 올 것이 분명했다. 적들은 보란 듯이 바로 돌진하지 않고 포진을 넓게 펼쳐 길을 모두 막았으니 어느 쪽을 돌아보아도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활로라면 동쪽의 숲이었다.

울창한 숲을 이용한다면 기병대의 돌진을 막을 수 있고 적을 상대하기도 쉬웠다. 하지만 적들이 추격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벗겨내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쪽도 함정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서쪽 산림지대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다섯 배는 멀었는데 이미 흑응대는 그들을 몰이라도 하듯 한쪽 날개를 내밀며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뿌우우-!

뿔피리 소리가 연방 시끄럽게 울려 퍼졌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지 온갖 괴성이 일대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백여 명이 지르는 위협적인 고함과 겨울밤 냉랭한 공기는 썩 잘 어울려 평범한 자라면 공포심에 오줌이라도 지릴 것이었다.

서혜는 진도건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장포 옷깃에 귀를 덮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는데, 이 소리 때문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진도건은 소녀의 작은 체구를 안고 있던 왼손으로 등을 쓸어내리면서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진 대협, 어떡할까요?”

영은성도 걱정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던 마을 내 전투와는 다르게 지금 여긴 개활지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오르막길 위에 백여 기의 기병들이 있었다. 적들의 돌진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 자리에 기다렸다가 싸운다면 십성 공력 전부를 쏟아붓는다 한들 절반도 못 죽이고 창에 꿰어 죽을 게 뻔했다.

“서쪽에 활로가 있구나.”

“예?”

“그게 무슨?”

영은성과 최현걸이 서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어느새 앞뒤 기병들이 협력하여 포위망을 완성하고 있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부대 폭이 얇아 뛰어넘어갈 수 있어도 수십 발의 화살이 바로 하늘을 뒤덮고 또 기마들이 바로 추격할 텐데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질 않았다.

하지만, 진도건은 그들과 다른 것을 이미 보고 있었다. 부대 너머로 좀 더 멀리 시선을 주고 있었는데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새들이 잠깐씩 날아오는 것들이 보였다.

그 위치는 점점 가까워지는 모양새였다.

단순히 시각적인 단서 외에도 진도건은 일대에 있는 모든 기운을 선명하게는 아니었지만, 일종의 흐름, 열기, 파동 등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무엇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연기의 감응으로 인해, 기공으로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경력의 바람을 의지만으로 일으킬 수 있게 된 것처럼 그런 다양한 기운들을 무의식 속에 시각화하듯이 느끼게 된 것이었다.

한때는 이 능력 때문에 예민함이 극도에 달해 몹시 고통스러웠으나 스승의 도움으로 정신수양을 이어오면서 지금은 조금 불편한 수준에 불과할 정도까지 이르렀다.

‘멀지 않았군.’

그 열기의 파동은 서쪽 숲 끄트머리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진도건은 의식을 세 사람 주변에 집중시켰다. 곧 그들을 감싸는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영은성과 최현걸도 잠깐 당황하긴 했지만,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아주 고요하고 주변으로만 점점 거대한 돌풍이 형성되고 있었다. 진도건의 눈치를 살피니 그가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들도 안심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회오리바람과 딸려 올라가는 흙먼지들로 인해 포위하고 있던 흑응대 안으로 당황스러운 기색이 퍼져 나갔다. 백인대장 바타르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활을 쏘아라!”

퓨퓨퓨퓽!

바타르의 지시에 맞춰서 수십 발의 화살이 일제히 쏘아졌다. 그러나 회오리바람이 제법 거세게 불고 있어서 대부분이 튕겨 나갔다. 일부 내공이 높은 장수들이 쏜 화살이 회오리바람을 뚫고 들어가는 듯하기도 했지만, 이미 기류에 휘말려 빠져나갈 뿐이었다.

“이익!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저것도 곧 사라질 것이다. 모두 돌격하라!”

뿌우우-!

두두두두두!

바타르가 돌격명령을 내리자 위에 있던 기병대들이 일제히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달빛에 비친 언덕길을 마치 검은 파도가 몰아치는 것 같은 장관이 일었다.

그 순간 회오리바람도 걷히면서 진도건 등 세 사람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진도건은 돌진해 오는 기병대를 향해 앞으로 두 걸음 나서며 하늘로 검을 치켜들었다가 서쪽으로 검을 가리켰다.

기병대 한가운데서 돌진하던 바타르도 진도건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진도건의 검을 따라 그들 기준으로 동쪽 숲 쪽에 시선을 주었다.

바타르는 보고야 말았다.

숲에서 쏟아져 나오는 일단의 기병들을.

우와아아아!

그동안 질러대던 뿔피리와 괴성들, 그리고 지금 돌진하면서 발생하는 땅 울림으로 인해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서쪽 산세는 몽골기병들이 달리는 언덕길보다 높았기에 쏟아져나오는 기병들의 돌진력은 무시무시했고 그 꼭짓점은 그대로 몽골기병대의 옆구리를 뚫어 버렸다.

그들은 모두 황실 정규군의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다.

휩쓸려 버린 몽골병들이 허공에 날아가 버리거나 말과 함께 짓밟혔다. 진도건 등을 향해 돌진하던 기병대들의 진형이 무너지면서 그 기세가 완전히 죽어 버렸다. 서쪽에 함께 포위진을 형성했던 몽골기병들도 갑자기 뒤를 덮치는 부대들로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저게 대체……!”

최현걸이 놀라 입을 쩍 벌린 채 다물지 못할 때, 진도건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우리는 아래를 친다.”

“아, 알겠습니다.”

느닷없는 정규군의 등장으로 아래에서 진을 치고 있던 이십 기의 기병들도 혼란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잠깐 시선을 뺏긴 사이에 진도건 등은 그들과의 거리를 무섭게 좁혀오고 있었다.

“모두 베어라.”

진도건의 차가운 목소리에 기다렸다는 듯이 영은성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매화검법 매화성우(梅花星雨).

자하신공을 운기하자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분홍빛 매화들이 하늘에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것들은 영은성의 검격과 어우러져 몽골기병들에게 쏟아졌다.

그 아래로는 경력을 실은 검풍이 지면을 스치듯 날아와 몽골기병들의 전면을 앞서 덮쳐 버렸다.

촤촤촤착!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