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 제14장. 한파(寒波) 속에서 (3)
퓨웅!
진도건의 신형이 공중에 머무는 순간, 제무의 화살이 공기를 갈랐다.
신체의 정중앙, 막지 않으면 공중에서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치 풍압에 밀린 낙엽처럼 화살 주변을 빙글 돌며 피해냈다. 게다가 회피와 동시에 뒤로 뻗은 검 끝으로 화살을 감아 한 바퀴 회전과 동시에 돌려보냈다.
팅!
막 두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걸던 제무가 깜짝 놀라며 옆으로 굴러 피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땅을 구르면서도 진도건에게 시선을 떼지 않던 제무는 진도건의 두 눈에서 붉은 광휘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왼손을 앞으로 뻗고 있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갑자기 주변에 떨어져 있던 월도와 창, 화살 등이 파르르 떨기 시작하더니 공중에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씨팔…….’
제무는 본능적으로 몸을 던지며 자리를 피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월도가 회전하며 그가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한 자루만 그런 게 아니었다. 월도, 창, 화살 등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날카로운 것들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솟구치면서 몽골병들을 덮친 것이었다.
으악!
큭!
비명들이 연달아 터졌다.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십수 명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이미 진도건은 이미 마지막 초가를 넘어와 수직으로 검을 베었다. 강하게 응집되어 날카로운 검기는 그대로 날아가 서혜를 앞으로 끌어안은 채 월도를 들이미는 몽골병을 관통했다.
스컥!
“크악!”
반응할 수 없는 속도.
월도를 든 오른손은 바닥에 떨어지고 어깨에선 피가 뿜어져 나왔다. 몽골병의 손아귀에서 서혜가 떨어졌으나 한 줄기 바람이 감싸고 돌면서 눈밭에 떨어지지 않고 멈칫한다. 그 사이에 곁에 떨어진 진도건이 왼손으로 끌어안았다.
“으아앙-!”
서혜가 진도건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영은성이 경공을 펼쳐 날아와 그의 옆으로 떨어졌다.
“진 대협.”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서혜를 잠깐 안고 있어.”
영은성의 품에 서혜를 건네주고 진도건은 곧장 자리를 떠났다.
스컥! 스컥!
일검일살(一劍一殺).
반응조차 할 수 없다. 무리 속에 뛰어들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붉은 선혈이 하늘로 솟구쳤다.
월도로 막는 것이 소용없었다.
진도건의 움직임은 질풍과 같았고 검은 그들의 반응을 한참 앞섰다.
“놈을 죽여라!”
제무의 외침에 최현걸을 포위하고 있던 몽골병들이 일제히 진도건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월도를 든 자들이 전면의 벽을 형성하며 그 사이사이로 창격이 쏟아졌다.
팟!
도약하는 발끝을 따라 새하얀 눈이 피어올랐다. 가볍게 머리 위로 뛰어오른 진도건의 신형이 흔들거리는 듯하더니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몽골병들 사이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검광이 그를 따라 휘돌며 지나쳤음은 물론이었다.
촤촤촤촥!
“커헉!”
다섯 명이 거의 동시에 쓰러지며 순식간에 대오가 와해된다. 몽골병 모두가 평범한 무사가 아니라 무공까지 겸비한 자들인 데다가 급한 데로 병진을 갖추기까지 했음에도 진도건의 움직임을 쫓아가지 못했다.
‘차원이 다르다!’
최현걸은 진도건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진도건의 회복과 수련 과정을 지켜보고 그와 대련을 몇 번 해보기도 했지만, 이렇게 실제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스승 조강선을 보는 것만 같았다.
혈마.
폭주.
모든 것을 잃었고, 다시 새로운 것들로 채웠다.
그 결과의 작은 파편을 두 눈으로 관전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저런 남자를 따르지 않으면 미친 거지!’
최현걸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포위하던 진형은 흔들렸기에 그에게도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그는 들고 있던 창은 집어던져 버리고 사방에 항룡십팔장의 절초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콰쾅!
포위진이 풀리자 적수공권의 최현걸을 상대할 수 있는 몽골병은 더는 없었다. 가슴이 함몰되고 머리가 부서지며 속속들이 쓰러져갔다. 그에게 자유를 선사한 진도건은 다시 다른 쪽의 몽골병들을 향해 뛰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이노옴!”
제무의 몽골어 외침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제무와 다른 몽골병은 각자의 군마를 타고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진도건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말에 박차를 가했다. 각자 장창을 들고 맹렬하게 돌진하는데 그 앞을 가로막던 몽골병들이 일제히 길을 열었다.
두두두두!
몽고군마의 강력한 돌진은 앞을 가로막는 무엇도 튕겨 낼 것이며, 그 기세를 빌린 창격은 분명 꿰뚫지 못할 것이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오는 진도건이 미친놈처럼 보였다.
먼저 움직인 것은 진도건이었다.
팟!
공중으로 몸을 날린 진도건을 향해 제무와 몽골병의 창이 동시에 찔렀다. 짧은 거리 속에서 말의 질주 속도와 합쳐져 화살만큼 빨랐다.
‘또……!’
제무가 쐈던 화살을 공중에서 피했던 것처럼 공중에서 좌로 나풀거리듯 움직이며 뚫지 못하고 곁을 스쳤다. 진도건의 몸이 창대를 타고 회전하여 몽골병을 덮치니 반응하지 못하고 떨어지는 검광에 목이 잘려나갔다.
몽골병이 타던 말은 쓰러지고 제무는 앞을 지나쳐갔다. 제무가 말에 급제동을 걸고 다시 돌아서는 사이에 진도건은 몽골병이 들었던 창을 꼬나 들었다.
“이럇!”
다시금 돌진하는 제무를 쳐다보며 진도건은 가볍게 창을 돌려보곤 호흡을 가다듬었다.
휘이이잉!
창대를 중심으로 경력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재차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던 제무는 불안감이 엄습해옴을 느꼈다.
진도건의 스승 조강선의 옛 별호는 파사검창. 검술과 창술에 있어 경지에 올라 어떤 사특한 방법으로 덤벼도 모두 부순다는 그 이름.
풍운칠기창(風雲七奇槍) 풍룡포(風龍砲).
선풍(仙風)을 담은 창식(槍式).
그대로 돌진해 오는 기마를 향해 내질렀다.
퍼엉!
응집한 회오리바람 기둥이 창 찌르기를 따라 쏘아지며 충돌했다. 말의 머리가 통째로 박살 났고 제무의 전신도 갈가리 찢겨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꼴이 되었다.
사방으로 피의 비가 내렸다.
몽골병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뛰어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주인 없는 말에 타 황급히 고삐를 흔들었다. 떼를 지어 도망치는 몽골병들을 향해 진도건이 피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풍운칠기창 흑운뢰(黑雲雷).
내달리고 도약하는 동안 최대한의 경력을 장창에 담았다. 조금 버거움에도 도망치는 몽골병들의 목숨을 최대한으로 거두는 것이 이 마을에서 목숨을 잃은 노인들을 위한 위령제의 제물이 될 것이었다.
콰콰콰콰!
경력의 기둥들이 몽골병들의 뒤를 덮쳤다. 그 일격으로 또다시 십여 명이 쓸려나가면서 죽거나 중상을 입으니 그 시체들과 피 때문에 눈밭의 하얀 부분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간신히 빠져나가 도망치는 자들이 열 명 이상이 되지 않았으니 거의 궤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아…하아……!”
진도건은 창을 버려둔 채 무릎을 꿇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빠진 호흡뿐만 아니라 사지가 부들부들 떨리고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형님!”
최현걸이 그를 부르며 서둘러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이런 상태가 될 것을 알고 있었는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하아! 하아!”
거친 호흡이나마 이어갈수록 떨림은 잦아들었다. 눈앞이 핑 돌기도 했지만, 금방 초점을 되찾았다.
그는 하단전을 거의 파괴당했었지만, 조강선이 7일간 공력을 쏟아부은 덕분에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홍천환으로 얻은 마기와 그동안 쌓았던 내공 모두를 잃어 버렸다.
하지만, 내공을 모두 잃어 버렸다고 해서 모든 상황이 절망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자는 얻을 수 없는 기연이 닿았다 할 수 있었다.
폭주하는 마기로 상처 입을 뻔한 영혼. 즉, 신(神)은 원류검결로 강화된 선천진기에 의해 보호받았다. 또 혈마화로 삼단전이 강제 연결되어 엄청난 기의 증폭 효과를 거두었었는데, 부서진 하단전을 회복하자마자 이것이 다시 일원화(一元化)에 가까운 형태로 변모하였다.
천무경이 파천신공으로 진도건의 모든 내공을 태워버릴 때, 그로 인해 전신 경혈의 모든 막힘이 뚫려 버렸다. 이미 천무경의 조치로 한 번 뚫렸던 전신세맥인데 이것들이 모두 진기의 흐름에 매우 친화적인 상태가 되면서 자연기(自然氣)와의 통혈(通穴)까지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반선지경에 이른 조강선처럼 자연기에 쉽게 감응하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이미 축기한 내공을 바탕으로 해서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경력을 쏟아내는 일은 힘들었지만, 자연기를 통한다면 어느 정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었으니 진도건이 마지막에 쏟아부은 공격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몸에 무리를 줄 수 있었기에 실질적으로는 내공을 복구하는 길이 최선이었다.
다행히 완전 바닥부터 시작함에도 축기 속도는 꽤 빨라서 3년 만에 검기 정도는 어느 정도 구사할 수준이 되었으니 그 성장이 눈부시다 할 수 있었다.
물론 혈마화의 영향도 남아 있었다. 모발 색이 적색을 띠기 시작했고 때때로 살의가 들끓어 초기엔 정신수양에 신경 써야만 했다. 살의가 떠오를 때마다 눈동자에 적광이 나타나는 것도 그가 겪는 부작용이었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만큼 성정도 다소 거칠어진 면이 있었으나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2년 전만 하더라도 그는 아주 폭력적이고 자학적이어서 조강선이 자리를 비워야 할 때면 몸부림치지 않게 점혈을 해 놓을 정도였다.
그런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보면 지금 그의 상태는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흐흑! 할아버지……!”
서혜의 흐느끼는 소리에 진도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호흡이 가라앉지 않아 어깨가 연신 들썩거렸지만, 그래도 사지에 힘은 붙어 제대로 걸을 수 있었다.
진도건과 최현걸은 걸음을 옮겨 울음소리를 찾아갔다. 골목을 두 번 돌고 보니 영은성이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결국 숨을 거둔 서덕의 시신을 안고 울고 있는 서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최현걸은 영은성 옆에 멈춰 섰고 진도건은 서혜의 곁에 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아이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우리 할아버지를 그만 보내 주자.”
진도건의 따뜻한 목소리에 서혜가 그의 품에 안겨 더욱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세 사람은 마을에서 죽은 백성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모두 노인들로 수가 12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모두 마을 옆 뒷산에 따로따로 봉분을 만들어주고 영은성이 도호를 외우며 넋을 위로해주었다.
몽골병사 시신들은 모두 마을 바깥으로 옮겨 산을 쌓아놓고 불태워버렸다. 혹여나 다시 마을에 돌아올 원 거주자들을 위해서였다. 흑응대 분대가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지만, 다른 분대가 남아 다시 찾아올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고 최현걸은 이제 세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그들의 이목을 직접 끌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현걸은 흩어진 말 세 필을 모아 끌고 왔다. 서혜는 당장 마을에 남겨둘 수 없었기 때문에 당분간 안전한 장소를 찾기 전까지는 진도건과 같이 움직이기로 하고 말에 올랐다.
“진 대협.”
“그 대협 소리 좀 그만할 수 없냐?”
“전 이게 편한데…….”
“나처럼 형님이라고 부르던가.”
영은성이 우물거리자 최현걸이 키득거리며 대꾸했다.
영은성도 최현걸처럼 그렇게 부를까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도가 제자로서 그렇게 부르는 게 너무 세속적인 느낌이 들어서 꺼려졌었다.
“사부님 소식은?”
“여깄습니다.”
영은성은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진도건에게 건네주었다.
진도건은 바로 서신을 펼쳤다.
“못난 제자 진도건은 보아라. 네 몸 상태가 괜찮아지고 몽골족들이 일으킨 전란이 끝나지 않았다면 하북 상산(常山)의 조가장(趙家莊)을 찾아오거라. 어쩌면 네가 할 일이 있을 것이다.”
“하북 상산 조가장…….”
“조가장? 조 선인(仙人)의 본가(本家)일까요?”
선인은 영은성이 별도의 도호가 없는 조강선을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스승 조강선의 일생에 관한 얘기는 진도건도 뚜렷하게 들은 내용이 없었다. 그저 둘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일들에 대한 설명만 조금 들었을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선 오로지 검과 무공만이 오갔을 뿐이었다.
‘나도 스승님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구나.’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진도건은 다시 서신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어쩌면 네가 할 일이…라는 구절에 대해서 묘한 느낌을 받은 그였다.
진도건은 서신을 접어 품에 넣었다.
“가자, 조가장으로.”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형님.”
하북 일대 길은 최현걸이 잘 알고 있었다. 가는 길에 개방분타도 있으니 들려서 조가장의 위치도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말을 타고 천천히 가던 진도건은 조가장이라는 이름을 보고 제법 큰 장원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자 거기에 서혜를 맡기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서혜는 여전히 그의 품에서 훌쩍거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결의가 엿보이는 눈빛으로 새하얀 눈바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진도건은 잠시 어릴 적 고아였을 때,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