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66화 (66/432)

66화 - 제13장. 무너지다 (5)

* * * *

다시금 부활한 혈마의 태동을 알리는 일월신마의 외침.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내외궁에서 싸우던 교도들이 즉시 행동을 멈추고 일제히 후원으로 달려왔다. 그 외침과 더불어 천무경과 진도건이 격돌하면서 발생하는 소음들에 반응하여 천혼당, 화산파 등도 멈칫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수월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후원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엄청난 싸움을 놀란 눈으로 보면서도 행동은 멈춤 없이 후원 구석의 수풀 뒤 천 자락들을 들쳤다.

거기에 있던 것은 미리 준비된 활응선익(飛鷹宣翼)이라는 날개 장치.

척추를 받치는 지지대를 허리와 양 겨드랑이를 고정하는 가죽끈으로 조이고 팔다리를 연결하는 고정쇠를 장착한다. 종아리쯤에 좌우로 돌돌 말려 고정된 천과 그걸 풀 수 있는 끈은 손목 고정쇠여 걸려 있어, 당기면 천 자락이 풀리면서 그 선을 따라 손목까지 천이 풀리게 되어있었다.

일월교 본산이 있는 천산에서 교도들의 담력 시험 및 놀이문화로써 존재하는 활강비행 가능한 장치를 탈출용으로 쓰기 위해 백여 벌 챙겨온 것 중 일부를 화산에까지 가져온 것이었다.

눙숙한 몸짓으로 활응선익을 입고 이어 각 수라도 자신의 것들을 입는다. 일월신마도 어느새 지붕 위에서 내려와 익숙하게 입으며 천무경과 진도건을 힐끗 돌아보았다.

천하오절이라고 하지만, 현 중원무림의 천하제일은 천무경임을 일월신마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진도건에게 큰 중상을 입고 노지신과 싸움에서 많은 기력소모가 있었다고는 했지만, 명현단을 복용하고 며칠 간의 운기조식 덕택에 9할은 회복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도 천무경과 싸움은 말 그대로 완패였다.

최고의 몸 상태라 해도 그를 상대로 이길 수 있었을까?

일월신마는 비관적으로 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진 데다가 그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터라 미래의 재대결을 기약해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진도건, 그에게 한 조치의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홍천환은 가진 내공증진의 효능만큼이나 마기도 크게 숙성된 상태였다. 홍천환 제조 시에 온갖 자연에 머물던 사념들이 응집되고 홍천환의 기운을 야금야금 잠식해서 수십 년의 세월을 견뎌온 그 힘은 예상 이상이었다.

일월신마는 그 홍천환을 자신의 음양기로 한꺼번에 몸에 흡수되지 않도록 보호하였다. 되려 홍천환의 진도건의 체내에서 일종의 내단(內丹)처럼 변화하며 그의 음양기를 잡아먹는 터라 수시로 관리해야만 했다.

그렇게 음양기의 기운을 주입하는 양을 점점 늘리고 이것으로 홍천환으로 형성된 내단을 천천히 분해하여 음양기가 가진 융합(融合)과 반해(反解)의 과정으로 딸려 들어가도록 유도하였다. 시작이 어렵지 일정 흐름을 타기 시작하면 그 이후로는 자생적으로 흐름이 성장하여 매우 빠르게 내단을 조장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일월신마는 천무경이 도착할 때까지 이를 지켜보다가 뇌관을 풀어 버렸다.

적절한 때에 마침내 홍천환의 기운은 폭주하여 진도건의 삼단전을 동시에 잠식해 들어갔고 그의 예상에 이미 상단전에 머무는 진도건의 ‘신’은 육신에서 분리되고 소멸하였으며 지금은 말 그대로 살의에 미쳐 버린 귀신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가시죠, 일월신마님.”

일월수라가 뒤에서 재촉했다. 그도 심각한 내상을 입었기 때문에 빨리 이곳을 탈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월신마는 당장 떠나는 것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저것이 바로 혈마다. 봐라, 저 전율스러운 모습을……!”

휘익!

쾅!

느닷없이 그들 방향으로 핏빛 검기가 날아들자 일월신마가 손으로 쳐 냈다. 눈먼 공격이었음에도 손목이 저릿저릿한 것이 실로 그 위력이 상당했다.

“크크크……!”

자신을 애먹였던 천무경을 몰아붙이는 진도건의 모습은 가히 예상대로였다.

막강한 내공을, 그것도 아주 거칠고 파괴적인 성질의 마기를 얻은 진도건은 천무경뿐만 아니라 사방에 검기를 난사했다. 피아를 가리지 않음에도 검속은 따라잡을 수도 없이 빨라 천무경이 온몸을 호신강기로 두르지 않았다면 벌써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마기의 경력은 호신강기를 뚫고 천무경의 몸에 작은 상처들을 내기 시작할 정도였으니 만약 싸움이 길어진다면 승패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콰쾅!

“크윽……!”

또다시 날아든 검기를 일월수라가 받아 내며 신음을 흘렸다. 일월신마가 보기에도 그의 상태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결과를 지켜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진도건은 저렇게 홍천환의 마기를 폭발적으로 쓰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 고갈상태를 맞이할 것이었다. 진기가 모두 소모되고 선천진기마저 빨려 나가면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었다. 기왕이면 천무경을 방해해 그의 죽음을 유도하고 싶었지만, 그의 현재 몸 상태로 저 공방 속을 비집고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좋다, 가자.”

그의 말에 반색하며 네 사람은 일제히 연화봉의 만장절애로 몸을 던졌다. 일정 거리 낙하하다가 양쪽 손목의 장치를 당기자 다리 쪽의 천 자락이 촤르륵 풀리면서 두 손과 연결되어 흡사 날다람쥐처럼 양 날개를 펼쳤다. 네 사람은 공기의 저항을 받으며 활강하여 운해 속을 뚫고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일월신마 등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서 묵허자는 노기가 치밀어올라 이를 까득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쫓아가 검이라도 던지고 싶었지만, 혈마화한 진도건이 검기를 난사하는 바람에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천혼당도 마찬가지였다. 섣부르게 후원으로 진입하다가 몇 명은 실제로 비명횡사하였고, 급히 물러서는 사이에 석대호와 사대금강이 장벽을 치며 일원들을 뒤로 물렸다.

콰쾅! 쾅쾅!

후원을 나누던 돌담이 무너지고 연화궁 곳곳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천무경이 직접 막아서고 있음에도 피아를 가리지 않고 날아가는 검기들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었다.

“화산 제자들은 조를 이뤄 각 층 지붕에 위치하라! 날아드는 검기를 막아 연화궁을 보호해라!”

이제야 입관할 길이 열렸는데 이대로 연화궁이 무너지게 둘 수 없었다. 복구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 녀석…….’

소름 끼치는 붉은 기운을 넘실거리며 뿜어내는 진도건의 모습을 묵허자도 알고 있었다. 옥녀지 근처에 쓰려져 있는 천서은을 백척협 위에서 마주했을 때 진도건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었는데 지금 같은 모습이 그의 기억과 너무나 달라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더군다나 지금 보여 주고 있는 힘은 감히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칫…….’

묵허자는 다시금 날아드는 검기를 향해 몸을 날려 막아 내면서도 진도건의 저 모습은 그를 더욱 착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남궁평과 범굉대사는 역할을 교대하였다. 범굉대사가 소림승으로서 오래전 백성을 위한 구제구휼 활동도 같이 해 왔기 때문에 의술을 꽤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소림사의 일선지(一禪指)는 기혈을 안정시키는 데 최고의 무공이었다.

범굉대사는 자신의 승복을 찢어 옥녀지의 물에 적신 다음 상처를 닦아 내었다. 상비약으로 들고 다니는 소독용 약을 뿌리고 재차 금창약을 잔뜩 뿌려 덮었다.

“으윽……!”

범굉대사는 승복을 다시 길게 찢어 상처를 꽉 동여맸다. 앞뒤 모두 관통한 상처였기 때문에 의원에게 다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남궁 당주가 안으세요. 당장 하산하여 의원으로 가야 합니다.”

남궁평이 천서은을 안아 들었다. 그러자 천서은이 남궁평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잠깐! 도건을 멈춰야 해요.”

“일단 여기서 나가자. 너무 위험하다.”

네 사람은 서둘러 자리를 피해 연화궁 쪽으로 이동했다. 천서은은 여전히 천무경과 진도건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에 담긴 걱정과 안타까움은 자신의 고통조차 잊게 할 만큼 너무나 컸다.

도대체 왜 한 식구끼리 이리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단 말인가?

진도건의 마기가 더더욱 폭주하며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왔다. 천무경은 급소를 보호하고 있었지만, 입고 있는 옷이 대부분 피에 젖어 붉게 물들 정도였다. 잔 상처들에 불과했지만,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올 정도라는 것은 언제든 치명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소리였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진도건의 검기는 강력했다.

완벽한 유형화된 검강이 아니었음에도 마기의 파괴적인 경력은 천무경의 강기를 거칠게 침식해 들어갈 정도로 완벽한 방어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이 미친 검속은 감히 제어할 수 없었다.

급소를 절대 우선으로 방어하면서 셋 중 하나는 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파천신공을 습득한 진도건의 무위로서 기대했던 방향은 맞지만, 이지(理智)를 잃은 광인은 아니었다.

혈마.

여기서 멈추지 못하면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 휩쓸려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이 정도 파괴력이라면 자신을 제외한 여기 모두를 전멸시킬 수 있을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도건. 네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일월신마의 술수가 이토록 잔혹하였단 말이냐?’

파천신공 개벽(開闢).

삼단전을 모두 개방하고 정기신을 일원화한다.

기의 발현에 장애가 되던 장벽이 일시적으로 길을 열고 삼단전에서부터 의지가 닿는 곳에 즉각적으로 발현한다.

푸르스름한 벽력(霹靂)의 기운이 전신을 타고 흐른다.

“아직 멀었다, 녀석아.”

쿠콰콰콰콰!

시야를 붉게 물들이는 수십 다발의 검기를 향해 연타를 던진다.

연화봉이 진동할 정도의 거대한 경력들의 충돌.

양측이 뿜어내는 경력의 폭풍 속에서 천무경은 단숨에 뚫고 들어가 거리를 좁혔다. 진도건의 검은 여전히 쫓기 힘들 정도로 빨랐지만, 이번엔 호신강기를 뚫어내지 못했다.

콰콰쾅!

“쿨럭!”

되려 천무경의 주먹이 세 차례나 가슴에 꽂히면서 진도건이 피를 토하며 밀려났다.

“키야아아아악!”

괴성을 토해 내는 진도건.

영혼을 찢어내는 듯한 귀곡성에 듣고 있던 모두가 하나같이 오싹한 느낌을 경험한다.

동시에 더욱 거칠게 터져 나오는 붉은 기운들이 하늘을 뚫어 버릴 듯 솟구쳤다.

거대한 살기, 파괴적인 투기, 날카로운 검기.

그 모든 것이 한층 더 증대되어 천무경을 향해 쏟아졌다.

다시금 상처가 아로새겨지고 피가 튀었다. 그것을 받아내며 주먹을 내질렀다.

파팟!

고통을 경험해서일까, 정면충돌만 하던 진도건이 공격에 반응하여 흘려내길 시도했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지만, 천무경의 경험은 벌어질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예측 가능한 범주에 두고 있다.

진도건의 어깨를 잡아채며 다시금 가슴을 두들긴다.

퍼퍽!

이번엔 진도건의 발차기도 빨랐다. 마지막 주먹과 발차기가 동시에 교차하며 그 충격에 둘 다 뒤로 밀려났다.

퉁!

“크아아악!”

뒤로 밀려나기가 무섭게 하늘로 날아오른 진도건이 다시 한번 참격을 휘둘렀다.

이번엔 검강으로 유형화되어 쏟아지니 이를 천무경도 그냥 받아낼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양손에 강기를 두르며 날아드는 검강을 맞잡았다.

콰릉!

강기의 폭발, 그 사이를 뚫고 진도건이 검을 내려찍었다.

카득!

그 자리에 있던 천무경의 신형이 사라지고 진도건의 무극신검이 암반 위에 처박혔다. 어느새 진도건의 뒤로 돌아간 천무경의 일격이 비어 있던 옆구리에 꽂혔다.

꽝!

굉음과 함께 진도건의 신형이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그 와중에도 검은 놓치지 않았다. 연이은 충격에 분노하였는지 진도건이 몸부림치며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아!”

다시금 분출되는 붉은 기운의 파장이 휘몰아쳤다.

도대체 홍천환의 힘이 어느 정도이길래 여전히 저런 기운을 뿜어낼 수 있을 거란 말인가?

모두가 그렇게 놀라고 있을 때, 천무경은 더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진도건이 힘을 다시 끌어올리는 틈을 노리고 천무경의 신형이 다시금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쌍장을 때렸다.

파천신공 벽뢰장.

콰르르릉!

천둥소리가 터지며 거대한 경력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핏빛 기운이 정면에서 휘몰아치며 다시 한번 두 거대한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경력을 순간적으로 쏟아붓는 찰나, 한가운데를 뚫고 진도건의 왼손이 불쑥 튀어나와 진도건의 가슴팍 옷자락을 붙잡았다. 왼팔이 피가 튀며 타들어 갈 정도였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천무경을 붙잡는 손길은 어느 때보다 억셌다.

푹!

진도건의 노림수는 다음 수에 있었다. 붉은 검강으로 휘감은 무극신검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천무경의 가슴을 세로로 꿰뚫었다.

몰아치던 경력이 흩어지며 그 광경이 모두의 시선에 들어왔다.

“안 돼!”

천서은의 날카로운 비명이 귀에 들려왔다.

천무경은 무너지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반응한 덕분에 심장을 빗겨나가 어깨 가까운 부분으로 검이 박혔기 때문이었다.

터텁!

천무경의 두 손이 진도건의 양 손목을 붙잡았다. 진도건이 몸부림쳤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처럼 계속 싸운다면 치열한 소모전이 될 가능성이 컸다. 서로의 공격을 온전히 막아 내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했을 때, 진도건의 기력이 완전히 고갈되거나 천무경이 어떤 치명상을 허용하게 되는 어느 한쪽으로 귀결되어야 끝이 날 싸움이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 그 한계를 예상하기 어려운 마당에 당장 주위에 천마신교 교도들은 사라진 상황에서 천무경도 굳이 뒤를 생각할 이유가 없어졌다.

정면 대결은 이제 피하고 내력 대결로 끌고 가는 것이 천무경이 내린 결론이었다.

막대한 파천신공의 진기가 진도건의 손목을 통해 침투하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휘몰아치던 기운이 급작스럽게 맥없이 흩어지며 진도건의 마기도 체내에서 저항하기 시작했다.

파천신공과 음양기로 폭주하게 된 홍천환의 마기.

잠시간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오래 지속하지 않았다.

“끄아아아아!”

그것은 비명이었다.

천무경의 내력이 진도건의 내력을 모두 뒤집어 놓기 시작했다.

겁화멸마.

가공되지 않은 정순한 기운은 진도건을 잠식한 마기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마기는 분노와 본능적인 살의를 자양분으로 폭주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렇듯 직접 침투하여 공격하기 시작하자 고통이 앞서 더욱 몸부림치게 되었다.

“크르륵……!”

그 위험성을 깨달았는지 다시금 분노를 불태우며 천무경을 노려보았지만, 오히려 내력공격은 더욱 가차 없이 이뤄지고 있었다.

마기는 점차 제거되고 기혈은 타버리고 있었다.

진도건은 두 눈은 분노로 가득 찬 붉은 안광으로 일렁이고 있었으나 이미 몸은 버티지 못하고 입으로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고 있었다.

“깨어나라. 네가 정신 차리지 않는다면…….”

이대로 죽일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정적과 진도건의 비명만이 간간이 들려올 때, 두 사람의 대치로 사람들은 내력 대결에 들어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천무경이 진도건을 제압하여 공격 중인 것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천서은이 소리쳤다.

부들부들 떠는 진도건의 두 눈에 광기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천무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놈은 혈마. 이젠 잊도록 해라.”

나직한 목소리였으나 천서은의 귀엔 분명하게 들려왔다.

“안 돼요!”

그녀가 놀라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남궁평이 강하게 붙들었다. 격한 움직임에 복부의 상처에서 더욱 피가 새어 나오며 그녀도 비틀거렸다. 신음을 삼키면서도 고개를 필사적으로 젓는 그녀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오르며 앞을 가리고 있었다.

휘이잉-!

그때였다.

바람 소리. 그러나 보통의 산바람보다 훨씬 날카로운 느낌의 소리였다.

천무경의 눈이 번쩍 뜨이며 시선을 돌렸다.

연화봉 절벽 너머로 보이는 낙안봉 쪽에서 보이는 한줄기 기운과 그 뒤의 사람 그림자.

그 기운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들고 있었는데 짧은 시간 거리를 더할수록 그 기세가 커져 순식간에 하늘과 땅을 이을 것만 같은 높이로 확장되었다.

그것은 검기였다.

[손을 떼시오!]

무엇보다 귀에 꽂히는 단호한 전음.

천무경은 믿을 수 없는 크기에 놀라면서도 정확히 자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듯한 기세에 이를 악물었다.

그는 결코 진도건에게서 그냥 손을 뗄 수는 없었다.

날아드는 자가 아군인지 적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미 혈마가 되어 버린 진도건의 목숨을 끊어 놓는 것이 무림의 안녕을 위해서도 옳은 일이었다.

순식간에 증폭시킨 파천신공의 진기는 곧장 진도건의 하단전을 공격했다.

단전을 파괴해야만 했다.

슈우우욱!

그 먼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 오는 검기에 천무경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았다.

파앙!

급격하게 기를 거두며 발생한 파장에 진도건의 몸도 튕겨 나갔다. 천무경도 빠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그 자리로 낙안봉에서 시작되었던 검기가 날아들었다.

파아아아!

천무경은 놀란 눈으로 보았다. 자신의 자리를 덮친 검기가 순간 형상을 잃어버리더니 그대로 진도건 주변을 따라 휘돌기 시작하였다. 날아오는 검기도 쉽게 받아내기 힘든 기세였는데 이미 손에서 떠난 기운을 이렇게 성질을 바꾸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낙안봉에서 여기까지 말 그대로 ‘날아온’ 한 노인이었다.

천마신교 교도들처럼 활강장치를 이용한 것도 아닌 맨몸으로 날아온 노인은 바로 조강선이었다.

조강선이 연화봉에 내려서자마자 손을 휘이 젓자 진도건을 감싸던 바람이 돌연 사라지며 진도건의 몸이 붕 떠올랐다. 자신에게로 당겨와 살펴본 진도건은 계속 고통에 부들부들 떨며 입으로 피를 조금씩 토해 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두 눈은 여전히 붉은 기가 감돌고 있었고 얼굴엔 노기가 가득 차 있었지만, 눈가로 묘하게 눈물 같은 것이 맺혀 있었다. 고통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조강선의 마음을 착잡하고 무겁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당신은 누구시오.”

천무경의 차가운 질문에 조강선이 그를 돌아보았다.

천무경은 거친 싸움을 치르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었다. 오른손으로는 왼쪽 가슴에 박힌 무극신검을 무심히 뽑아버리고는 점혈법으로 지혈을 하면서도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다.

“이 녀석은 내가 데려가리다.”

“단전은 부서졌을 것이오. 허나 화근을 제거하려면 목숨도 거둬야 하오.”

“그것도 내가 결정하겠소.”

“당신을 어찌 믿지?”

“그동안…… 이 녀석을 맡아 줘서 고맙소.”

천무경은 재차 말을 잇지 못했다. 조강선이 진도건을 안고 절벽을 뛰어내렸기 때문이었다. 놀라 쫓아가 절벽 끝에서 내려다보았는데 두 사람은 어느새 운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 아아아……! 으흐흑!”

천서은이 털썩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난데없는 상황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지만, 그들에겐 마침내 치열했던 모든 싸움의 종지부를 찍는 울음소리였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긴장을 풀면서도 착잡한 눈으로 서로를, 또 부서진 지형지물과 건물들을 둘러보았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천무경도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딸아이와 진도건의 관계를 눈치채고 응원하는 마음이 무척이나 컸었다.

진도건은 혈마가 되었고, 천서은에게 칼을 꽂았다.

그는 자신에게도 칼을 꽂았으며 이성을 찾을 기미가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거두려 했었다.

그 결정과 행동이 딸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마음이 무거웠다. 딸에게 상처입힌 자에게 분노하는 건 아비로서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자가 딸이 사랑하는 자라면 결국 선택의 가치를 되짚어볼 수밖에 없다.

“하아…….”

오늘따라 화산에 짙게 낀 운해를 가만히 내려다보게 된다. 아내 주약화와 사별했을 때만큼 마음이 무거운 것은 아니었으나 복잡하기로 그때보다 더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맡아 줘서 ……고맙다라.”

저 운해 속으로 사라진 노인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보던 천무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산으로 기울고 있는 태양과 낮은 하늘.

무거운 긴장이 모두 풀려 버린 오후의 바람은 아주 싸늘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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