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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64화 (64/432)

64화 - 제13장. 무너지다 (3)

교도가 몸이 크게 기울고 칼을 든 방향도 어정쩡해져 다급할 수밖에 없는 지금 상황에서 그녀는 최선의 수를 시도해야만 했다. 머리를 노리고 비스듬히 떨어지는 교도의 칼은 분명 떠 빨랐지만, 천서은에게 있어선 이미 예상 가능했던 수였다.

카각!

떨어지는 궤적도, 위치도 모두 예측한 대로다.

도검이 부딪치고 그 힘이 실리니 천서은의 몸이 기우뚱한다. 그러나 그 충격을 받은 방향으로 힘을 받아 내면서도 거기에 맞게 허리를 수그리고 검을 기울이니 교도의 칼은 검신을 긁으면서 천서은의 머리카락만 일부 잘라낸다. 천서은의 신형이 빙글 돌며 발로 교도의 오른손을 누르니 재반격이 불가능해졌다.

“윽……!”

몸조차 가누기 힘든데 휘두르는 시작점이 막히니 반격이 멈춘다.

스컥!

무극신검이 교도의 목을 지나가며 섬뜩한 소리가 퍼졌다. 들고 있던 칼까지 놓고 목을 틀어막지만, 이미 두 손 사이로 쏟아지는 피는 멈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타개할 길이 안 보이던 싸움에서 정말 운이 좋게도 천무경과 일월신마의 격돌 파장이 길을 열어 준 것에 천서은은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당장 그녀의 시선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진도건에게 달려갈 만한 틈이 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시야를 가리던 것들이 개어지며 천무경과 일월신마의 모습들이 좌중의 시선에 잡혔다.

두어 걸음 밀려난 천무경과 달리 일월신마는 이삼여 장 가까운 거리나 밀려났음을 지면의 흔적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차이 나는 것은 또 있었다.

비교적 머리카락과 옷차림만 조금 헝클어진 천무경에 비해 일월신마는 이미 붕대는 다 터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입고 있는 옷자락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 어느 부분 할 것 없이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일부 상처는 다시 터져 피가 새어 나왔는데 특히 곳곳이 피멍이 들고 살 거죽이 터져나간 듯한 모습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허억… 허억…….”

힘들게 붙이는 호흡 사이로 검은 피가 입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천무경은 한 손을 살짝 들며 손날을 세웠다. 승패가 갈렸으니 이제 노지신과 나자룡의 복수를 마쳐야 할 차례다. 그의 시선이 무심하게 일월신마의 얼굴로 떨어졌다.

눈동자는 빛을 잃었고 눈자위도 퀭하여 얼마 가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상처 난 처진 볼과 반쯤 벌린 입에도 힘이 없었다. 잠시 일월신마의 목숨을 직접 취할 생각을 하고 있던 천무경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어차피 꺼져 가는 목숨, 좀 더 고통이 지속하길 바랐다.

천무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월신마가 꺾이자 확실히 주변에서 치러지고 있던 싸움에 영향을 끼쳤다. 기세를 탄 남궁평이 앙검수라를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범굉대사도 나한권(羅漢拳)으로 두 적을 거뜬히 밀어붙인다. 애초에 천무경의 손에 큰 내상을 입은 일월수라도 이혁성의 쾌검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면서 몸에 호신강기를 둘렀음에도 몸에 상처가 쌓여 간다. 지쳐 가는 모습이 눈에 선명하니 곧 있으면 무너질 듯하다. 그리고 천서은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기감을 확대하여 위치를 찾았다.

천서은은 어느샌가 연화궁을 돌아 후원으로 가는 길을 달리고 있었다.

‘성급하다.’

내외궁 모두 전세는 기울어서 더 신경 쓸 이유가 없었기에 그는 곧장 천서은에게 따라붙으려 발을 떼었다.

“서두를 필요 없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무경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피에 엉겨 붙은 백발과 전신의 거대한 상처들로 흡사 시체 같은 모습. 그러나 눈빛만큼 생기를 넘어 섬뜩한 무언가를 담고 있어 흉흉하게 빛났다.

일월신마가 섬뜩한 웃음을 만면에 담고 거기에 서 있었다.

“무엇을 말인가?”

차갑게 대꾸하는 천무경.

“크크! 혈마가 강림하실지니 제물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팟!

그 말을 듣자마자 천무경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 신형은 곧장 연화궁 뒤로 돌아가는 지점에서 다시 나타났다.

일월신마와 뒤엉킨 채로.

파파팡!

“윽!”

놀랍게도 처음 터져 나온 신음은 천무경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권각을 주고받는 공방에서 일월신마의 출수에 범상치 않은 기운이 실려 있었다.

이전의 첫 충돌에서와 같은 양상으로 주고받음에도 그때와 결이 완전히 달랐다.

다 죽어가던 몸이었기에 조금 방심했던 것도 있었지만, 지금 전해져 오는 타격의 충격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일월신마는 천무경의 일격에 황천마경(黃泉魔境)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월혼극마공의 마지막 단계였으며 일월신마조차 그동안 넘어서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음양반합(陰陽反合)이 굳이 좌우로 양분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이뤄진다. 그것으로 펼치는 모든 출수에 위력은 더욱 강력해지고 변화무쌍하다.

콰르릉!

천무경도 단숨에 구성 공력을 끌어올린다. 푸르스름하여 영험한 기운이 전신을 에워쌌다. 일격일격의 수준이 차원을 달리하며 다시금 일월신마를 몰아붙였다. 아무리 일월신마가 새로운 힘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이제 기사회생(起死回生)한 마당에 천무경과 다시 대등하게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일월신마는 꿋꿋이 버텨 내었다. 그 충격의 여파를 받아 내면서도 치명상은 피해내었다.

‘본좌의 앞에 일월의 진리가 있나니……!’

크카카카!

쏟아지는 천무경의 강기를 뒤틀린 역장으로 받아 냈다. 부서지는 기운의 곡성(哭聲)이 터지며 일월신마의 표정도 일그러진다. 그러나 버텨 낼 수 있음에 씩 웃으며 피에 젖은 치아를 드러냈다.

파천신공 교룡파연(蛟龍破緣).

발톱을 드러내는 듯한 오른팔 손아귀에 강력한 경력이 소용돌이친다. 경류의 날카로움을 어디에 비할 데 없을 정도이니 파지직! 전류마저 튀었다. 단숨에 펼쳐내는 심상치 않은 모습에 일월신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으며 음양역장을 겹겹이 쌓았다. 진기의 소모는 이미 큰 상태였지만, 음양반합의 진리는 철옹(鐵甕)의 방벽을 세웠다.

쿠콰콰콰콱!

파천무봉.

새삼 그 별호의 무게를 다시 한번 느낀다.

말 그대로 찢어발겨 졌다.

그 어떤 음양반, 음양합의 역장도 압도적인 힘 앞에 먼지처럼 바스러져 갔다.

거침없이 뚫고 들어오는 천무경의 손에 일월신마가 쌍장을 쳐 냄과 동시에 몸을 비틀어 피해 내며 뒤로 뛰었다. 그러나 천무경의 신형은 마치 일월신마의 그림자인 마냥 찰싹 달라붙었다.

퍼퍽! 퍽!

일월신마가 양손을 번갈아 휘두르며 반격을 했지만, 천무경은 피하고 두들겼다가 흘려보내며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커헉!”

노구의 몸뚱어리가 뒤로 날아가 내궁 벽에 쿵! 하고 처박혔다. 일월신마가 울컥하며 피를 토해 내기가 무섭게 천무경의 왼손이 그 핏물 채로 일월신마의 목줄을 움켜쥐었다.

“끄으……!”

번쩍 든 오른손의 주먹에 푸르스름한 불꽃이 서리는 듯하다.

너무나 차가운 천무경의 표정과 그 주먹을 번갈아 바라보는 일월신마의 두 눈에 흉흉했던 마기는 의미 없이 퇴색되고 두려움만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파아앙-!

천무경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일월신마도 힘겹게 고개를 틀며 간신히 눈길을 틀었다.

천무경과 일월신마가 전력으로 부딪혔던 조금 전의 일처럼 지금도 모두가 간신히 이어가던 싸움을 멈추었다.

부르르 떠는 자도 있었고,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는 자도 있었다. 포식자를 코앞에서 마주한 산토끼처럼 경직된 자도 있었고, 본능적으로 투기를 끌어올리는 자도 있었다.

하늘로 치솟은 붉은 기둥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황혼보다 더 붉은 기류가 구름을 물들이고 공기마저 끈적이게 오염시켰다. 육성(肉聲)으로는 전혀 들을 수 없는 소름 돋는 기괴한 귀곡성(鬼哭聲)이 연화봉 위 모든 사람의 머릿속을 관통하였으니 그들 눈앞에 ‘절망(絶望)’이란 두 글자를 아로새겼다.

그것은 천무경도 마찬가지였다.

“킥! ……혈마가 깨어났다.”

후원 방향으로 시선이 고정되어 있을 때 낮게 읊조리는 일월신마의 목소리가 고막을 간질였다.

콰쾅!

일월신마가 좌장으로 천무경의 팔을 올려치고 우장으로 그의 가슴을 때렸다. 그 충격에 내궁 벽이 무너지고 일월신마는 그대로 외궁 벽 쪽으로 날아갔다.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기쁨, 무엇보다 계획이 완성된 순간이 찾아왔음을 자각한 순간에 온 희열이 만면에 사악한 웃음을 가득 머금게 하고 있었다.

천무경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지며 입가로 피가 살짝 새어 나왔다. 잠깐 정신을 팔린 사이에 얻어맞은 터라 일월신마의 음양기가 침투하여 괴롭혀댔지만, 그에겐 큰 문제는 아니었다. 파천신공 내력이 만드는 겁화멸마(劫火滅魔)의 자생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침투한 음양기를 소각할 것이다.

문제는 후원이었다.

퉁!

땅 울림과 함께 천무경의 신형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연화경의 거대한 도관 전각과 부서진 5층 지붕을 지나치며 마침내 후원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꽤 넓은 바위지대와 시든 잡초를 품은 토양, 한쪽에 있는 옥녀지와 앙상한 가지만 남기 시작한 아름드리 매화나무, 그 뒤에 단장절애 절벽 끝 너머로 펼쳐진 운해 속 바위산들의 절경. 이 모두 눈에 들어오는 것 하나도 없었다.

후원의 한 가운데.

천서은과 진도건이 거기에 있었다.

길게 풀어헤쳐 바람에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은 붉은 윤기가 맴돌았다. 등 뒤로 기울어진 태양에 살짝 고개 숙인 얼굴엔 그림자가 드리워져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두 눈 만큼은 붉은 인광(燐光)이 타오르는 듯하다.

상의가 날아가 밖으로 드러낸 단단하고 날렵한 근육질의 육체는 차가운 산바람에 검푸르게 얼어 있었는데 그 몸에 위태롭게 안겨 있는 천서은의 어깨를 왼손으로 붙잡고 있었고, 오른손은 그녀의 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천서은은 두 발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힘없이 머리를 뒤로 젖혔으니 머리카락은 애처롭게 진도건의 머리카락과 같은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왼손은 진도건의 목을, 오른손은 얼굴을 쓰다듬고 있어 그저 큰 관심 없이 본다면 그 간절한 애잔함이 손길에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아주 조금, 조금씩 두 사람의 얼굴은 점점 멀어져 갔다. 발은 제대로 땅을 딛지 못하고 그저 진도건의 몸에 기댄 채 굽어지고 있는 무릎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천서은의 붉은 선혈을 머금고 그녀의 허리 뒤로 삐져나온 진도건의 검 때문이었다.

“도건…….”

헐떡이는 깊은 숨소리와 함께 힘겹게 토해지는 천서은의 목소리.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며 아주 잠깐 경직된 시간 흐름 속,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한 천무경의 얼굴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물들었다.

마치 금강야차(金剛夜叉)가 현신한 모습이 이러할까.

“진도건……, 네 이노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넋두리같이 내뱉은 석 자 이름. 그 끝에는 진노한 천신의 일성이 사자후가 되어 터져 나왔다.

팡!

공기, 공간이 터졌다.

천무경의 신형이 하늘에서부터 진도건을 향해 포화처럼 날아갔다. 그 사이에서 다시 한번 천무경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천무경의 존재를 눈치챈 진도건이 마치 품에 매달린 천서은을 짐짝처럼 뒤로 던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검에서 몸이 뽑히며 선혈은 하늘로 흩뿌려졌고 그녀의 힘없는 신형은 부웅 날아가 옥녀지로 떨어졌다.

첨벙!

“으아아아!”

파천신공 창천벽뢰(蒼天碧雷).

천신의 벼락이……, 천무경에게서 하늘로, 다시 하늘에서 진도건에게로 떨어졌다.

그것은 파천신공 십성 공력, 전력의 징벌(懲罰)이었다.

콰르르릉!

큐앙!

푸른 벼락의 광휘는 두 눈을 태워 버릴 정도로 모든 것을 덮어 버렸지만, 그 사이를 뚫고 나온 붉디붉은 혈광(血光)은 제 주인에 닿는 것들을 모조리 삼켜버릴 정도로 심연의 깊은 어둠마저 품고 있었다.

공기를 베는 참격의 궤적을 따라 뿜어내는 핏빛 검강이 치솟으며 푸른 강기의 벼락을 갈라내니 천무경에게까지 그 파고가 닿는다.

쾅-!

충돌의 포효가 터져 나오며 천무경과 진도건이 동시에 같은 거리를 밀려났다.

저릿저릿하는 두 손의 떨림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잠시 바라본 천무경이 다시 분노의 불길을 온몸으로 뿜어내며 진도건을 바라본다. 그의 처절한 적개심이 닿자 진도건도 반응하며 거대한 혈광의 소용돌이를 재차 뿜어낸다.

키야아아아-!

다시 한번 머릿속을 관통하는 귀곡성.

전신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고 두 눈마저 붉은 흉광마저 뿜어낸다. 피를 머금은 입속과 천서은의 피로 적셔진 신체까지 그 이유에 끔찍한 기분만이 느껴졌다.

“크하하하하하!”

그때 연화궁 전각 꼭대기에 나타난 일월신마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일월신마는 화산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서서 희열에 가득 찬 얼굴로 천무경과 진도건의 대치를 내려다보고 입을 열었다.

“드디어…… 혈마가 태어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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