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제12장. 화산 (4)
일월암을 뒤로 보내며 산을 더 오르자 창룡령(蒼龍嶺)이 나타났다. 마치 칼날처럼 솟아오른 화강암의 산줄기가 하늘을 바라보며 가파르게 이어져 있는데 그 산세가 어찌나 험준한지 능선의 너비가 사람 한두 명이 서면 꽉 차서 자칫 실수하면 좌우 절벽으로 떨어지기에 십상이었다.
산의 형세가 이러하니 인원의 배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선두에 서고 두 당주와 사대금강 중 두 분은 천혼당 사이사이에 서시오. 범굉대사와 남은 사대금강 두 분은 화산파 제자들 사이에 서서 일렬로 따라오시오.”
“방주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갑시다.”
천무경이 바로 선두에 서서 창룡령 능선을 타고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뒤를 천혼당이 쫓았고 다시 뒤를 화산파 제자들이 쫓았다. 천무경은 천척협, 백척협을 오를 때처럼 먼저 앞서가지 않고 보조를 맞추면서 올라갔다. 그 이유는 당연히 창룡령의 산세가 워낙 위험했기 때문인데 연화봉이나 조양봉이 창룡령을 대각 반항에 있었으니 일전의 강기를 다루는 궁사가 화살이라도 날리면 이전보다 더 큰 위협이었기 때문이었다.
쐐애액!
얼마간 오르자 아니나 다를까 연화봉 쪽에서 다섯 발이 날아들었다. 화살이 공기를 찢어발기는 비명은 들으면 오싹하기까지 했다.
꽈과꽝!
하지만,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천무경 등의 방어로 피해는 없었다. 오히려 사람이 아닌 창룡령 암벽을 겨냥해 충돌하였을 때 그 흔들림과 후폭풍 때문에 일부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면서 떨어질 뻔했다.
“속도를 늦추지 마라!”
천무경의 칼날 같은 외침이 산줄기를 따라 떨어졌다.
연속적으로 날아드는 강기 화살들을 초절정고수들이 받아내며 불리한 환경을 극복해 낸다. 활로 이만한 무공을 보여 줄 수 있는 적이 많지 않다는 점이 다행인 일이었다.
창룡령을 빠르게 올라가는 천무경 이하 무사들.
삐익-!
그때 화살로 신호를 보내는 경적이 들려왔다. 그리고 일제히 정면에서부터 백여 발의 화살비가 일제히 쏟아졌다.
퉁!
천무경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두 손으로 강력한 바람을 전방에 일으키니 화살들 모두가 흩어졌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다시 수많은 화살이 연속적으로 날아들었다. 마치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연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헛짓거리에 용을 쓰는군.’
가장 후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석대호는 적들의 수단이 별 볼 일 없음에 피식 웃었다.
“흥. ……엇?”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호흡을 마시는 순간, 천무경이 일으킨 바람 때문인지 공기의 흐름이 석대호의 호흡을 따라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이 냄새는…….’
어딘가 역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쐐애액!
다시금 연화봉 중간지대에서 날아오는 화살들 그런데 그 방향이 그들보다 좀 더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저 화살을 막아!”
석대호의 다급한 외침에 천무경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왼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전방을 방어하면서 오른손을 휘둘러 강기를 발사했다.
콰지직!
몇 개 화살이 부러져 나갔지만, 급히 발사하였기에 조준이 정확하지 않았다.
꽈직! 꽈직!
펑!
몇 개의 화살이 능선 아래에 박히자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폭발과 함께 엄청난 불길이 아래에서부터 일어나 능선을 덮쳤다.
미리 기름통을 매달아 놓았는데 강기가 실린 화살이 충돌하며 일순 발연점을 넘기는 작용을 일으킨 것이었다.
“흐압!”
위험을 감지한 고수들이 일제히 기운을 방출하며 공기를 때렸다. 거대한 바람이 일며 불길이 밀려났지만, 이미 불길이 옆 수풀이나 나무에까지 옮겨가며 기름통 겉에 칠해진 기름에도 닿으면서 연쇄적인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퍼퍼펑!
거대한 화마가 창룡령의 등줄기를 덮쳤다. 기름이라는 발화체와 더불어 화산 산세를 따라 부는 차고 건조한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불길을 더욱 키웠다. 마치 거대한 화룡 한 마리가 화산을 집어삼키기 위해 불을 뿜으며 등반하는 것만 같았다.
“성공했다!”
금궁수라가 기뻐하며 소리쳤다.
연화봉 중턱에서부터 창룡령까지 직선거리만 해도 백여 장이 넘는 거리였음에도 그는 거기까지 화살을 쏘아 낼 만한 내공을 다루는 기술과 낙양궁(洛陽弓)의 강력한 탄성력은 그의 궁술의 핵심이었다.
“크하하하! 맛이 어떠냐!”
다른 세 명의 수라들도 금궁수라처럼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금강수라가 가장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창룡령 끄트머리에는 갈림길의 관문을 겸하여 세워진 금쇄문(金鎖門)이 있었고 그 지붕에 올라서면 지형지물을 피해 창룡령 능선 아래로 화살을 쏘기 쉬웠다. 이를 이용하여 연사가 가능한 연노(連弩)를 준비하였고 그것으로 천무경의 집중을 끌어낸 뒤에 금궁수라가 부싯돌로 화살촉을 만든 특수화살로 기름통을 터뜨렸으니 완벽하게 계획이 성공한 것이었다.
분명 방금의 공격으로 상당수가 불타 죽었으리라 장담했다.
반면 그 뒤에 서서 화염에 휩싸인 창룡령을 바라보던 일월신마의 눈은 무심했다.
이미 한 차례 기습을 마치고 돌아온 금궁수라의 보고와 창룡령에서의 기습을 지켜본 내용으로는 아직 그의 의심을 충족시키기엔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함께 웃던 일월수라도 그런 일월신마의 모습을 눈치채고 웃음을 그치고 다시 창룡령으로 시선을 던졌다.
“호오.”
바로 그때였다.
일월신마의 붕대 사이로 드러난 입이 벌어지며 씩 미소를 드러낸 것은.
휘이이잉!
백여 장 밖의 거리임에도 평소와는 다른 거대한 바람의 흐름이 느껴졌다. 크게 휘돌며 나아가는 바람결의 중심에는 불타는 창룡령에 있었다.
“이럴 수가……!”
사대수라들의 웃던 얼굴이 모두 놀라 굳어졌다.
일월신마만이 희번덕 웃고 있을 뿐이었다.
거대한 바람이 창룡령을 중심으로 부는 듯하더니 크게 원을 그리는 형세가 바위산의 수풀과 나무들의 기울어짐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 바람의 흐름이 점점 창룡령에 밀집되면서 화염이 사방으로 퍼지는 듯 바람을 따라 휘몰아쳤다.
그렇게 지켜보길 잠시, 그 거대하던 불길이 점점 어느 한 지점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불길이 지나간 자리로 사람들이 큰 소란도 없이 움직이는 모습에 사대수라가 한번 놀랐다. 그리고 그 불길이 모여든 지점에 한 남자가 반백의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공중에 날고 있는 모습을 보며 또 한 번 놀랐다.
“천무방주의 무공이 화경에 이르렀다더니……. 크흐흐흐!”
일월신마의 선명한 웃음소리를 사대수라 모두 천무경에 정신 팔려 듣지 못하였다.
공중에 떠 있는 것도 충격적인데 그 거대하던 불길이 천무경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끌어안듯 두 팔을 둥그렇게 감싼 공간으로 창룡령의 화마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모이고 모여 또다시 작은 공간에 응축되니 더 강력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사방의 바람마저 빨아드려 빨갛다 못해 점점 불길이 백화(白化)되니 이 불길은 사람이 단 1초도 견딜 수 없는 염핵(炎核)이 되었다.
천무경의 신형이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두 발이 땅에 닿고 그의 허리 뒤쪽에 차고 있던 검집이 흔들렸다.
스릉!
허공섭물로 뽑힌 검이 백염(白炎)에 빨려 들어갔다.
파천신공의 강력한 공력이 그 속으로 유입되면서 검을 감싸고 백염을 품는다.
“파천염룡검(破天炎龍劍). 괜찮은 초식명인 것 같군. 그렇지 않은가?”
천무경이 뒤에서 멍하니 보던 사람들을 향해 씩 웃음을 던졌다.
그 모습에 묵허자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오만한지 아닌지 그대는 오늘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오.’
이곳에 도달하기 전 잠깐 대치했던 곳에서 천무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 자루의 검과 그 위를 감싼 유형화된 검강, 그리고 그 겉을 다시 새하얗게 불태우는 백염.
“후우……!”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은 천무경이 마침내 파천염룡검을 쏘아 내었다.
쿠와와와와!
창룡령.
그곳은 화룡령이 아니었다.
차가운 잿빛 바위 피부와 초록빛 수풀 비늘에 상처 입은 창룡이 자신을 덮은 불길을 모두 입안으로 빨아들였다가 단번에 불길의 숨결을 토해 내는 듯했다.
쿠와와와와!
“피, 피햇!”
사대수라가 일제히 뛰어오르며 급히 상궁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일월신마만이 자리를 피하지 않고 쌍장에 음양기를 최대로 뽑아낼 따름이었다. 희번덕거리는 눈빛과 크게 벌린 입에서 광기에 가까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날아드는 거대한 불기둥과 그 중심에서 소용돌이치는 한 자루의 검.
파천염룡검의 초식을 향해 일월혼극마공의 무공을 퍼붓는다.
일월혼극마공 일월붕천굉(日月崩天轟).
콰르릉!
음양기의 결집, 폭발, 발산.
그 거대한 기운의 파고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천무경이 쏘아 낸 불기둥이 일월신마를 그대로 덮쳤다.
콰콰콰콰!
폭발과 굉음들이 연달아 터져 나오며 사방으로 불길이 휘몰아쳤다. 그 가운데 순간적으로 용오름이 일어나며 불길이 하늘에 닿을 듯이 치솟아 오르기도 했다.
“크윽!”
서둘러 벗어나려고 했지만, 결국 파천염룡검의 여파를 막아 내야만 했던 사대수라가 전해진 충격에 신음을 토해 냈다. 모두가 장력을 집중시켜서 막아 내긴 했지만, 말도 안 되는 불길의 열기에 그들의 옷들이나 수염, 머리카락 일부가 타들어 가 버렸다. 온몸이 마치 불에 덴 듯한 통증이 밀려왔기에 신음이 쉽게 그쳐지질 않았다.
“일월신마님은!?”
사대수라의 시선이 일월신마가 있던 자리를 훑었다. 일렁이는 불길과 수풀이 타서 흩날리는 잿가루들 사이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붕대가 일부 터져나가 백발과 함께 펄럭이고 있는 일월신마였다.
“크으으……!”
무언가 집중하는 듯 부들부들 떨면서 신음이 들리는 것을 보니 다행히 무사한 듯 보이는데 아무래도 그 떨림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일월신마님, 괜찮으…….”
“물러서라!”
일월수라가 안부를 물으려 할 때 일월신마가 버럭 소리치자 멈칫했다. 곧 산바람이 불어오며 시야를 어지럽히던 것들이 걷히고 그는 상황을 좀 더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일월신마가 두 손을 모아 음양기를 응축시키고 있었는데 천무경이 쏘아 보낸 검이 두 손 한가운데 공중에서 부르르 떨고 있었다.
쿠오오……!
“저, 저건…….”
“자리를 피하자!”
일월수라가 놀라 하는 금강수라의 뒷덜미를 잡아채며 언덕 위로 뛰어올랐다.
‘일백 장 거리의 이기어검이라니……!’
일월수라의 생각이 정확했다.
파천염룡검으로 쏘아 보낸 장검에 천무경의 기운과 의지가 닿아 일월신마의 공력을 뚫고 심장마저 꿰뚫기 위해 야금야금 음양기 중심을 파고들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아무리 강한 검강을 덧씌워도 손을 멀리 벗어난 검에 그 힘을 오래도록 지속하긴 힘들었다. 목표에 충돌하거나 지나쳐 날아가면 응집되었던 기운이 자연으로 흩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한 자리에 끊어지지 않고 힘을 발휘하는 무공이라면 당연히 이기어검밖에 없었다. 아마 일월신마가 붙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단숨에 방향을 틀어 그들을 노리고 날아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월수라의 판단은 정확했다.
천무경의 이기어검을 만약 일월신마가 붙들고 있지 않았더라면 일대를 휘저었을 것이었다. 그럴 작정까지 계산하고 쏘아 보냈으니까.
“흠!”
사대수라가 어느 정도 장내를 벗어났음을 느낀 일월신마가 더욱 양손에 공력을 끌어모았다. 그 순간 생각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카캉!
순간 검신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갈래갈래 새어 나오는 듯하더니 쇳소리가 터지며 폭발해 버렸다. 그 검날의 파편 조각들이 사방에 쏟아지니 바로 지근거리에 있던 일월신마의 전신을 덮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큭큭큭!”
손가락 정도 크기의 파편들이 일월신마의 두 팔과 상체, 얼굴에까지 박히며 온몸을 피로 물들였다. 오히려 공력을 모으고 있던 두 손만이 멀쩡했다. 애초에 일월혼극마공을 운용하며 온몸을 타고 기류가 흐르고 있었기에 다행히 상처들은 깊지 않았다. 일월마벽으로 박혔던 파편들이 툭툭 떨어져 나왔다. 그러나 기분 나쁜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크하하하하!”
일월신마의 앙천대소가 사자후같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며 창룡령에 닿았다. 그의 웃음은 한참을 이어지다 그쳤다.
그의 시선이 잠시 창룡령의 천무경이 선 지점을 쏘아보았다. 그리곤 언덕 위 상궁을 향해 경공을 펼치며 올라갔다. 마침 웃음소리를 듣고 8부 능선쯤 되는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대수라는 피투성이가 된 일월신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두 눈동자와 좌우로 휘날리는 붕대 조각들까지 눈에 들어오니, 마치 피에 젖은 아수라(阿修羅)가 현신한 듯했다.
“전열을 갖추고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해라. 본좌는 저들에게 던져 줄 선물을 준비할 테니.”
“존명!”
사대수라가 일제히 포권을 취하며 명령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