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제12장. 화산 (2)
석대호는 육 척을 조금 넘는 작은 키에 예순이 넘는 나이의 노인이었지만, 내외공이 탄탄한 고수로 개방 독문 무공인 항룡십팔장(亢龍十八掌)이 경지를 이루었다 평가받는 자였다. 그 앞의 묵허자는 운대봉과 옥녀봉, 조양봉 근처에 은거하면서 맥을 잇고 있는 화산파 제자들이 모여 만든 임시 조직인 은화당(隱華當)의 당수를 맡고 있었다.
“구소자(久素子)에겐 종요(種嶢)를 보냈으니 내일, 이 시각에 때맞춰 조양봉 점유를 시도할 것이오. 우리도 동시에 운대봉을 점령한 후에 화산협곡을 통해 돌파하는 천무방과 소림승들에 보조를 맞추어 연화봉으로 돌진하는 것이 제 계략이오.”
이제 막 진선관에 들어온 영은성에겐 눈길 주지 않은 채 석대호는 계속해서 현재 상황을 고려하여 조치한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마도나 천무방이나 똑같은 놈들인데.”
묵허자가 차가운 어투로 대답했다.
‘아직 앙금이 있으시구나…….’
스승의 목소리를 들은 영은성은 묵허자가 아직 적개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화산파와 천무방은 직접 부딪친 역사가 있었고 그 대가로 연화봉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특히 3년 전에 우연히 마주친 천무방의 젊은 검객을 제압하지 못했던 개인적인 일을 치욕스러운 기억으로 갖고 있었다.
그때 영은성은 대결 현장을 직접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돌아온 묵허자가 그동안 쌓아 온 수행의 결과치에 크게 실망하면서 화산파의 암담한 현실에까지 마음을 쓰며 한탄하는 모습은 아직도 마음 쓰린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다행히 그 이후에 기적 같은 기연이 닿아 지금의 묵허자를 비롯한 숨어 지내는 화산파 제자들 모두 실력이 급상승한 상태였다. 묵허자는 원시천존께서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음을 감사해하며 그때의 기연을 ‘화산파에 여명(黎明)이 닿은 날’로 묘사하곤 했었다.
그랬기에 묵허자도 열등감을 자신감으로 마음가짐을 정리하며 날카로운 성격도 꽤 부드러워졌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파에 대한 적개심도 많이 사라졌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영은성은 제 스승과는 다르게 적개심을 갖기보다 승부욕을 더 갖는 편이었다. 묵허자를 상대했던 천무방의 젊은 검객을 한 번 만나서 검을 겨뤄 보고 싶었기 때문에 석대호가 천무방 얘기를 하자마자 기대하던 만남이 성사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일월신마도 부담스러운 상대지만, 일월교의 사대수라가 모두 연화봉에 오른 것으로 파악되네. 그들 모두 일문을 이끌 수 있는 정도의 고수들, 거기다 구소자 측의 화산제자들까지 합심해도 마흔이 넘지 않은데 저쪽은 60여 명이나 되니 수적으로도 열세이네. 은원은 접어 두고 합심해야 할 때이네. 그래도 천무경은 편협하지 않은 인물이고 소림의 범굉대사도 합류해 있으니 자네에게도 서로 도울 적당한 명분이 되지 않은가?”
“흥! 천무경이 편협하지 않음을 어찌 보증할 것이오? 소림승들과 붙어 있는 건 분명 다 제 이익 때문이 아니겠소? 제 제자를 구하러 화산에 오는 것이 아니오?”
석대호의 상세한 설명에도 묵허자는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그러나 석대호는 묵허자의 말에 틀린 부분이 있음을 느꼈다.
“천무경의 제자가 아니라 천혼당 무사고 듣기론 천무경 여식의 호위무사라 하더이다. 소모품으로 버릴 자라면 이렇게 구하러 달려오겠소? 그리고 북쪽에서 천무방의 두 장로가 직접 이끄는 천혼당 본대도 환도종을 물리치고 있다고 하니까 거리가 멀긴 해도 존재위협이 될 것이오. 세가 약한 우리 정파는 이를 잘 이용해야 하오.”
“칫……. 사패련은 무림의 권력을 틀어쥐었으면 진즉에 새외세력들을 감시하고 마교의 발호를 막았어야지. 이권에만 욕심을 부리니 홍천환 같은 허무맹랑한 것에 유인당한 게지, 쯧쯧!”
“홍천환이라……. 혈마지란은 멀지 않은 역사이고 우리에게 치명적인 역사이니 무시할 것은 아니오. 만약 그 정도 수준의 고수가 또 나타난다면 이번엔 정사 가릴 것 없이 괴멸 위기에 빠질 것이오.”
묵허자가 홍천환을 헛것처럼 치부하는 것 같으니 석대호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반응했다.
한편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영은성은 석대호의 얘기 중에 ‘호위무사’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조금 전 생각났던 3년 전의 이야기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석 대협, 주백자 어르신이 계시는데 무얼 걱정하십니까? 혈마에 대한 빚을 털어 내고 정파를 부흥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계시지 않소? 그나저나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는지 아시오?”
묵허자를 비롯한 화산 제자들에게 찾아온 기연이란 바로 주백자였다.
조강선과 유변이 그들의 제자 원건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한 노력을 할 때, 주백자는 그것뿐만이 아니라 무너진 정파의 재부흥을 위해 사명을 다하고 있었다. 그는 비단 무당파로 돌아가 사죄하고 남은 제자들을 수습하는데 그치지 않고 전국을 돌며 봉문(封門) 조치로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한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살아남은 문파들을 찾아가 그들의 끊어진 무공의 맥을 다시 연결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그뿐만 아니라 개방이 새외 사교도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감시하는데 의무를 다하고 있음을 알고 그들을 도와 천마신교를 주기적으로 감시하기까지 했다.
‘무당파의 파문제자’, ‘혈마지란의 원흉’에서 이제는 정파 재부흥을 위한 밑거름을 자처하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주백자였다.
“묵허자여, 주백자께서 무너진 정파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자진해서 노력하시는 것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되오. 물론 그분은 혈마지란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만약 우리를 모른 척했다면 강호무림은 마도에 모두 먹히고 우리는 어둠의 백 년, 혹은 그 이상을 더 보내야 할지도 모르오. 게다가 이미 주백자께선 인간의 천수를 초월하신 분, 언제 우화등선(羽化登仙)하실지도 모르는데 중원인끼리 반목하기만 하면 누구도 미래를 보장할 수 없을 것이오.”
“……그 점은 나도 알고 있소이다.”
묵허자가 대답한 후에 진선관에 모인 화산파 검수들을 둘러보았다. 13명 가운데 무려 10명의 나이가 50대 이상이었다. 영은성을 포함한 나머지 3명 만이 20대 검수였다. 세대 간의 간극이 이토록 크니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도가무학의 자산을 이 젊은 검수들에게 잘 전달할 책무가 있었다.
묵허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둘러보았다.
“화산파 은화당의 검수들은 들어라.”
“예, 당수님!”
일제히 외치며 대답하는 13인의 검수들.
“석 대협께서 말씀하셨듯이 오늘 연화봉이 마도의 손에 더럽혀 졌으나 이는 우리 화산파가 다시 태양 아래 발돋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과거의 쓰린 은원은 잠시 접어 두고 천무방을 이용하여 마도의 손에서 연화봉을 탈환할 것이며, 천하에 화산파가 아직 건재함을 알릴 것이다.”
스릉!
검을 뽑아 천장을 가리키니 13인의 매화검수 모두가 그를 따랐다.
“그리하여 화산파의 흩어진 도문 가족들을 다시 결집하고 화산 오봉(五峯)에 우리의 깃발이 다시 걸릴 것이다. 삼청의 천존께서 굽어살피실 것이니! 화산의 매화검이 마교를 단죄하리라.”
되살아나는 정파의 정의, 화산파의 긍지의 불씨가 거기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불사를 수 있는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림맹이 무너져 정파의 힘이 추락하였음에도 개방이 걸어온 대의를 존경하오. 빈도를 포함한 우리 은화당과 화산파는 석 대협의 지도를 따를 것이오. 원시천존!”
“원시천존께 감사할 일이오.”
자신의 설득에 응해 준 묵허자에게 석대호가 합장과 도호로 화답하였다.
봉문을 하거나 산산이 흩어져 버린 정파 문파들을 연결하고 강호무림의 미래를 위해 사패련에 척을 지기보다 오래전부터 새외무림에서 암약하는 움직임들에 주목하고 남은 전력의 방향을 트는 결정까지 작금의 정파 무림 현실에서 개방의 역할은 주효했다.
특히나 무당파로 돌아간 주백자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를 단순히 무당파만이 아니라 정파 무림 전체를 위한 공공재적 성격으로 활용한 판단은 두고두고 역사에 남을 일이었다.
* * * *
푸르륵!
이십여 기(騎)가 화산 북서쪽 산문(山門)에 도착했다. 가장 가까운 화산의 동쪽 진입로는 산세가 워낙 험준하고 길이 발달하지 않아 등반이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조금 더 돌아온 것이다.
산문을 지나 좀 더 진입하자 지금은 사는 사람들 없이 무공을 모르는 노도사 둘이 관리하는 옥천원(玉泉院)이 나왔다. 오는 길의 경사가 급격하진 않았지만, 오르막길을 꽤 오랫동안 질주한 탓에 말들이 짙은 입김을 연방 토해내고 있었다. 쉽게 진정되지 않고 말머리 방향을 이리저리 돌려대니 모두 낑낑대며 말을 제어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원시천존.”
그들의 등장에 모습을 드러낸 노도사를 보고 사대금강 료정이 말에서 내린 후 다가가 말을 걸었다. 소림사임을 밝히자 노도사는 반색하며 반겼는데 수상한 사람들이 대거 화산파에 올라갔음을 알려 주며 그들이 오르는 길을 격려해 주었다.
“도사님께 말을 맡기지요.”
노도사는 옥천원 입구 근처의 마구간을 안내하였고 천무방을 포함해서 모두 말을 끌고 와 기꺼이 맡겼다.
“가자.”
천무경의 필두로 그 뒤를 남궁평, 이혁성, 천서은이 바짝 따라붙고 범굉을 비롯한 소림승 다섯이 뒤따라갔다. 천혼당이 그 뒤를 받치며 빠르게 화산협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초입의 계곡 다리를 넘어 오리관(五里關)을 지나고 우측의 바위벽에 좌측의 거대한 바위 하나가 기댄 형태의 석문(石門)까지 조용하게 돌파하였다. 좌우의 울창한 숲의 향취가 콧속을 스며들 새도 없이 긴장감을 느끼고 산을 오르니 점점 산세가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좌우로 깎아지른 듯한 형세의 높게 솟은 바위산들은 마치 화산협을 따라 이어지는 하늘길을 안내해 주는 것만 같았다.
험준한 산세, 좌우의 낭떠러지, 좁은 길목들, 계곡물의 소리 등은 함정을 파기에 아주 좋은 지형이었다.
천무경은 이미 감각을 최대한으로 열어 두고 있었다. 혹시 모를 기습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는데 이것은 범굉대사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기감이라면 천무경이 단연 위였지만, 술법을 간파하는 데 있어서 정신수양으로 인한 법력이 높은 범굉의 감각이 더 앞서있었다.
퓨퓨퓨퓽!
순간 들려오는 파공음에 모두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정면의 좌우 양쪽의 언덕에서 힐끔힐끔 보이는 사람의 그림자들과 손에 들린 석궁, 하늘을 가리는 화살비가 거의 동시에 천무경의 눈에 잡혔다.
텅!
천무경의 신형이 화살비의 등장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로 도약했다.
좌우 산세의 높이가 워낙 높고 적들과 거리도 멀기 때문에 천무경도 적들의 은신을 미리 감지하기엔 어려웠다. 그러나 조용히 숨죽이고 있으면 모를까, 움직이면서 기척을 내는 것을 감지 못할 천무경이 아니었다.
“천혼당은 계속 전진하라!”
입으로 지시하면서 눈은 화살비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좌우로 펼친 두 팔에 순간 내력을 집중했다. 두 팔을 크게 하늘을 향해 떨쳐 내자 엄청난 규모의 장풍이 화살비의 영역보다 더 크게 몰아쳤다.
휘이이잉!
강력한 돌풍이 휘몰아치며 날아들던 화살들이 허공에서 길을 잃고 제멋대로 뒤섞여 버렸다.
퓽!
그 순간 남쪽 하늘 어딘가에서 숲이 팍! 하고 터지면서 강철의 점 하나가 번쩍하고 빛났다. 거친 파공성과 함께 돌풍을 뚫고 천무경에게 쏘아져 날아든 것은 다름 아닌 화살이었다. 심지어 강기까지 두른 시강(矢罡)이었으니 못 뚫을 것이 없었으나 상대는 천무경이었다.
턱! 콰직!
아무렇지도 않고 눈앞으로 날아든 화살을 붙잡아 버리더니 그대로 악력으로 부러뜨려버렸다. 잡히는 순간에 화살의 강기는 이미 더 큰 기운에 의해 소멸해 버렸다.
퓨퓨퓽!
때마침 잇따른 파공성과 함께 또다시 강기가 맺힌 화살 다섯 발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번엔 천무경이 아니라 천혼당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날아드는 화살이 보통 기세가 아니었으니 천혼당뿐이었다면 꿰뚫리는 자도 나왔을 것이지만, 이들 앞을 달리는 자들의 무공은 이 화살의 주인만큼 경지를 이룬 자들이었다.
범굉대사와 남궁평이 각기 두 발의 화살을, 이혁성이 한 발의 화살을 쳐 내었다. 범굉대사의 쌍장에도, 남궁평과 이혁성의 검에도 모두 강기를 두르고 있으니 뒤따르는 천혼당 무사들 모두 감탄을 금치 않으면서도 그들의 뒷모습에 굳건한 신뢰의 시선을 보내며 발을 멈추지 않았다.
몇 차례 화살비들과 함께 시강이 쏘아져 나왔지만, 이미 기습으로 가치를 잃은 만큼 방패는 단단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건방진 것들.”
나뭇가지들을 밟으며 하늘을 나는 듯 달리는 천무경이 차갑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