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 제12장. 화산 (1)
화산.
오악(五嶽) 중 서악(西嶽)으로 구분되는 영산(靈山)으로, 구름을 뚫고 고고하게 서 있는 조양봉(朝陽峯), 연화봉(蓮花峯), 낙안봉(落雁峯)의 세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봄이 되면 아름다운 매화가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며 하얀색, 붉은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옷을 갈아입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겨울을 앞둔 화산은 그 험준한 산세에 걸맞게 차가운 바위지대의 속살과 침엽수들의 푸르면서도 뾰족뾰족한, 날카롭고 위험한 형세를 보여 준다.
연화봉의 정상에는 도교의 궁관(宮官)인 상궁(上宮)은 주인을 잃고 전각들의 형세만 갖춘 채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봄이었다면 매화가 피어 아름다울 테지만, 꽃이 만발했던 옷은 벗은 지 오래라 멀리서 보기에 더욱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무림 형세 속에서 화산파도 지금 상궁의 모습과 그게 다르지 않은 신세였다. 종남파처럼 멸문되진 않았지만, 그 직전까지 몰리는 존폐의 기로에서 이 연화봉의 궁관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흩어졌다. 지금은 다른 산봉우리나 깊숙한 곳에 세워진 작은 도관 등으로 흩어져 있으면서 간신히 소수의 도사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신세였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고 기회가 찾아와 무림의 사파 주류 형세를 다시 뒤엎고 연화봉 상궁을 되찾는 꿈을 모두 갖고 있었다.
그들이 흩어진 뒤로 3, 40년간 누구도 상궁을 차지한 자가 없었으나 오늘 이곳에 화산파 도사가 아닌 불청객 수십 명이 당당하게 들어서는 중이었다.
도교가 아닌 일월교와 천마신교의 사상을 가진 자들.
상궁의 산문을 열고 들어선 일월종 교도들의 인도자 사대수라(四大修羅)의 수좌 일월수라(日月修羅)가 주변을 훑어보았다. 다시 뒤를 돌아보니 그 뒤에는 다른 세 명의 수라들이, 그 뒤로 교도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쉬고 내일은 예정된 위치에서 적들의 진입에 대비한다.”
“복명!”
일월수라의 말이 떨어지자 교도들이 흩어졌다. 곧 있을 큰 싸움에 대비하여 일부는 도관의 방들을 정리하여 잘 자리들을 마련하고 일부는 가져온 식사 거리를 준비하러 주방을 찾으러 이동했다. 그리고 일부는 묵직한 등짐을 지고 사대수라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사대수라는 상궁 깊숙이 더 들어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상궁 뒤편의 옥녀지(玉女池)라는 연못이 있는 곳이었다.
추위에 생기를 잃은 잿빛 잔디와 제멋대로 성장한 잡초들 사이에서도 아름드리 매화나무들이 힘있게 가지를 뻗어 내고 있었다. 매화나무 아래엔 푸른 하늘과 햇빛을 받아 내며 물결치는 옥녀지가 있었으며 그 뒤로 펼쳐진 운해(雲海)와 기암괴석의 산봉우리들이 주는 경관은 심장이 멎을 정도의 압도하는 느낌이 있었다.
“서악 절경에 어울리지 않은 그림이야.”
뒤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처럼 그 풍광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얼굴에 붕대를 두른 채 칼바람에 백발이 휘날리는 노인이 옥녀지 옆 작은 바위에 앉아 있었고, 옥녀지 너머 가장 굵은 매화나무에 한 사내가 팔다리를 사슬로 결박당한 채 혼절하였는지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일월신마와 진도건이었다.
“왔느냐?”
“일월종주이시자 저희의 교주님이신 일월신마님을 뵙습니다.”
사대수라와 뒤따라 들어온 교도들이 일월신마를 향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그들이 이렇게 대면한 지 벌써 보름도 넘었으니 이미 수십 년 함께 해왔음에도 꽤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이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급하게 전서를 띄운 것인데 때맞춰 도착했어.”
사대수라는 일월신마가 일월교일 때부터 가장 아끼는 심복들이었다.
일월혼극마공의 정수를 제대로 잇고 따라온 수하이자 엄밀히 가장 가까운 사제들이기도 했다.
사대수라의 수좌는 일월수라로 일월신마 다음가는 실력자로서 일월신마 부재 시 대행 역할을 하는 자였다. 금강수라(金剛修羅)는 외가무공까지 섭렵하여 강력한 완력과 단단한 육체를 자랑하는 거인으로 사대수라의 방패라 할 수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은 앙검수라(殃劍修羅), 금궁수라(金弓修羅)로 본래 출신이 다른 자들이었으나 그 특출난 실력을 인정받아 일월혼극마공까지 사사하고 사대수라의 자리를 차지한 자들이었다.
“저놈입니까? 신마님에게 상처를 입힌 놈이?”
“크크크! 그래.”
일월수라가 진도건을 슬쩍 보며 묻자 일월신마가 웃음을 흘렸다.
일월수라를 비롯한 다른 수라들도 포박당한 진도건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쉬이 믿을 수 없었다.
상체와 얼굴을 붕대로 감고 있는 일월신마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어 전에 느꼈던 위엄있는 모습과 너무도 상반되는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일월신마에게 그의 생애 통틀어 가장 심각한 부상을 주었음에도 저렇게 사로잡혀 있는 현실과 괴리감이 있었다.
“홍천환을 복용했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멀쩡하군요.”
일월수라가 진도건의 모습을 훑어보며 드는 생각을 얘기했다.
“마기를 증폭시키기 위해 음양기를 주입하여 중단에 봉인하고 혼돈 상태를 유지하는 중이다. 봉인을 풀어내면 그 폭주는 걷잡을 수 없겠지.”
“한데 원래는 구마진이 복용할 예정이지 않습니까? 왜 이런 선택을 하셨는지…….”
“그놈은 음흉함과 욕심이 지나쳐 한 집단을 이끌 놈이 아니다. 흡성대법을 맹신하는 순간부터 글러 먹었어. 혈마종주의 역할은 놈의 그릇에 맞지 않아. 잘못하면 마도대의까지 그르칠 놈이다.”
“이놈은 적합하다는 말씀입니까? 마도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금강수라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진도건을 보며 물었다.
금강수라는 마도대의를 위해 선봉에서 싸울 자로서 자신들이 걸어온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남자였다. 그런 측면에서 아무리 대마의가 만든 영약을 복용했다 한들 같은 마도인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그보다 더 순수한 물건이다. 사파무공의 영향을 받긴 하지만, 무인으로서의 그릇은 구마진 따위와 비교할 정도가 아니다. 소모품이 될지, 마인으로 살아남아 우리에게 돌아올지 혹은 목에 칼을 겨눌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판에서 천무방에게 타격을 가하기에 이만큼 좋은 패(牌)가 없다.”
“천무방과 천무경은 저희가 가장 경계하던 자인데 저놈 갖고 되겠습니까?”
“본좌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허나 확실한 것은 힘을 얻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될 수도 있는 놈이라는 것이지. 혹시 아느냐? 저놈이 폭주하였을 때, 천무경의 목을 칠 수 있을지. 크크크크!”
일월신마의 입이 찢어질 듯 길게 벌려지며 웃음을 흘리는데 하얀 치아와 붕대 위로 드러난 눈빛이 어우러져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꽤 재미있을 것이야! 그렇고말고!’
일월신마는 자신의 계획에 확신이 있었다. 어떤 결과를 안겨 줄지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 파장이 기대 이상을 보여 줄 것이라는 자기 확신도 강하게 갖고 있었다.
화산에 살면서도 본궁이 있는 연화봉에 오를 수 없는 것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화산파의 도사들로서는 그리운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화산의 유서 깊은 도관들은 상징과도 같은 세 개의 봉우리와 그 잔도를 따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연꽃의 또 다른 꽃잎처럼 세 봉우리를 받들어 올리는 듯한 형세로 운대봉(雲臺峯), 옥녀봉(玉女峯) 등이 있었는데 이 봉우리들을 연결하는 산세의 능선을 따라서도 많은 도관이 있었다.
그 모두가 본래는 화산파의 관할 아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무림맹의 패배와 사파의 악착같은 공세에 항복한 이후, 이 주 도관들로부터 쫓겨나듯 나와 산 중턱이나 협곡 깊숙한 곳의 작은 도관에서 흩어져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때로는 화산에 머물기에 그 슬픔이 너무 커서 좀 더 벗어나 진령산맥(秦嶺山脈)을 따라 있는 도관들로 벗어나 있기도 했다.
오랜 세월 함께 하였어도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었다.
화산파에 몸담은 세월이 적은 제자들은 아예 산을 떠났고 아직 애정이 남았던 중장년과 노년의 도사들만이 남아 어린 고아들을 거두어 그 맥을 힘겹게 잇고 있었다.
사패련과의 맺은 조약에 따라 연화봉에 직접 오르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다른 봉우리들은 그나마 출입 정도는 가능했다.
이를 특별히 감시하는 사파 무림인들은 없었지만, 이미 명성이 추락하여 다수의 젊은 제자들이 떠나간 데다가 연화봉과 상궁을 점유하지 않은 화산파는 그 상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일부러 낙향하듯 깊은 곳에 숨어 살고 있었다. 그래서 때때로 한 달마다 연화봉의 도관(道觀)들과 상궁을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조양봉이나 낙안봉, 운대봉의 등의 가까운 곳에 올라가 도관을 청소하면서 연화봉을 보다 내려가곤 했었다.
물론 28세의 영은성(英銀星)은 그보다 더 자주 운대봉에 오르곤 했었다. 그는 짙은 눈썹과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호남아(好男兒)의 용모와 군청색 도포가 잘 어울리는 젊은 도사였다. 그리고 과거의 젊은 세대의 도사들이 떠나간 화산파의 도문 명맥 속에서 그렇게 한 세대를 건너뛰어 사조뻘의 스승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젊은 화산검수(華山劍手)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거의 이삼일에 한 번씩 운대봉에 올라 도관들을 청소하고 나서는 멀리 보이는 연화봉을 비롯한 다른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옛날 화산파의 위용 있던 모습은 어떨까 상상을 펼치기도 했었다. 그리고 도관 한가운데서 매화검법(梅花劍法)의 초식들로 검무를 추며 그 포부를 풀어내곤 했다.
‘과연 내 대가 끝나기 전에 다시 화산의 연화봉에 올라, 도관에 화산파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까?’
이 생각은 그가 운대봉을 오를 때마다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그런 생각을 이어가지도, 검무를 추며 포부를 더 크게 키우지 못하고 있었다.
영은성은 도관의 지붕 위에 올라 경직된 표정으로 연화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작은 형체들이 달빛 아래서 움직이고 있었고 횃불인 것 같은 불빛도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그 형체들은 다름 아닌 사람의 그림자들이었다.
지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사패련에서 파견 나온 자가 감시차 연화봉에 잠깐 올랐다 사라지는 걸 년에 한두 번 보곤 했었지만, 수십 명의 무리가 연화봉을 점거하고 있는 모습은 그에게 너무 낯설었다.
“저자들은 대체 누구지?”
영은성은 잠깐이라도 저들의 동태를 살펴봐야 하는지 갈등했다. 그러나 섣불리 접근했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혹시 화산의 도관에 수상쩍은 움직임이 발견되면 즉시 보고부터 하라는 스승님의 당부가 떠올라 급히 운대봉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운대봉의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 화산협곡으로 진입하기 전에 북쪽 가파른 잔도를 통해 내려가면 군선봉(群仙峯)으로 넘어가기 좋은 절벽이 나왔다. 반대편에 있는 절벽의 거리만 오십여 장에 이르고 높이 차이도 컸지만, 각 절벽 가까이에 두텁게 자란 소나무들에 두꺼운 밧줄을 묶어 팽팽하게 연결해 두어 이를 왕래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직접 가까이 오지 않으면 쉽게 발견되기 어려웠고, 그래서 영은성과 그의 사부, 사숙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영은성은 망설이지 않고 그 밧줄에 발을 디뎠다. 아무리 팽팽하게 연결해 두었어도 바람이 불면 크게 흔들리는데도 영은성은 미끄러지듯이 밧줄을 타고 군선봉을 향해 빠르게 내려갔다.
암향표(暗香飄)라는 화산파만의 절세의 경공술이 없었다면 무공이 경지에 이르지 않는 이상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할 행동이었다. 화산의 험준한 산세에서 무공 수련을 하는 화산파는 오래전부터 경공술로도 유명했는데 영은성은 이를 잘 이어받은 것이었다.
빠르게 군선봉으로 넘어간 영은성은 더 깊은 협곡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울창한 청송림을 지나자 거대한 동굴에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올려 도관으로 증축한 군선관(群仙觀)이 모습을 드러냈다.
군선관 아래 길을 따라 얼마간 내려가면 작은 도관이 허름하게 한 채 더 지어져 있었는데 진선관(秦宣觀)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도교 경전을 공부하며 혹시 모를 민간인의 왕래를 상대하고, 군선관 안에서는 숙식을 해결하면서 도관 너머 동굴 더 깊은 곳에서는 횃불과 천장 빈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조명 삼아서 화산파의 제자들이 모여 무공 수련을 하기도 했다.
때마침 군선관 문을 나서던 도사 서정오(西政悟)가 영은성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영은성!”
영은성도 그를 발견하고 몸을 날려 가까이 다가갔다.
“정오야, 큰일 났다. 저기 연화봉에…….”
“빨리 진선관에 가라. 스승님께서 검수들을 모두 모으시고 너를 기다리고 계신다.”
“뭐? 알고 계셨단 말인가?”
“석대호(石大虎) 어른도 오셨다.”
“역시 보통 일이 아닌 거 같군.”
석대호는 강호의 흘러가는 소식들을 전해 주면서 여러 가지 화산파가 명맥을 이어가는 데 많은 도움을 주어온 개방의 고수였다. 그가 중요한 손님이긴 하지만, 스승님과 사숙들 몇 명만 회의하는 일이 보통이었다.
영은성은 방향을 틀어 진선관을 향했다. 가까이 가자 과연 내부에 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영은성은 문 앞에 잠시 서서 합장을 하고 입을 열었다.
“스승님, 영은성입니다.”
“들어오너라.”
영은성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진선관 안으로 들어갔다.
문 반대편에는 도교 최고신인 삼청(三淸)의 목조 천존상(天尊像)들이 웅혼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그 앞에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석대호와 함께 영은성의 스승인 묵허자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좌우로 군선관의 화산검수 13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