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제11장. 대담(對談)의 끝에 (5)
“아시다시피 무림맹이 와해하고 우리 정파의 주축을 이루는 문파들은 대부분 그 기반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다시 정사대전을 일으켜 현실을 뒤집어엎기엔 우린 너무 많은 인적 자산들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암울하더라도 우리의 역사적 자산과 신념을 미래 세대를 위해 어떻게 이어지도록 할지 노력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지요. 이는 제2의 본거지 역할을 했던 개봉 분타가 무너지면서 중원의 많은 고수를 잃은 개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중화 전토의 정보를 취급하는 개방에게 여러분들의 손길이 적은 변방의 지역 지부들은 다행히 그 힘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들은 정파의 패배에 눈물을 삼키면서도 본연의 임무를 계속 이어갔으니 새외무림에 대한 감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때부터 천마신교를 감시했다는 말이오?”
“천마신교가 발호한 것은 사실 20년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방의 정보에 따르면 이미 100년도 훨씬 전부터 사교도들의 움직임들이 자주 발견되었는데 특히 관심을 끌었던 게 그들 사이에서 ‘마도’라는 개념이 은밀하게 퍼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마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중원 무림의 판도를 역전시켜 마도라는 새로운 정의를 세우는 것. 이를 위하여 힘을 기르고 은밀히 세를 넓혀 온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것과 대사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이오?”
“천마신교는 홍천환을 미끼로 종남산 방향으로 몰려드는 자들에 대한 습격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미 지금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일일 것이며 방주께서도 곧 마주칠 일입니다. 산서 천무방 본진에서도 종남산으로 무사들을 출발시켰지요? 그들도 이미 천마신교 내의 환도종으로 분류되는 자들에게 그저께 습격을 받은 상황입니다.”
여유롭게 웃으며 듣고 있던 천무경의 표정이 처음으로 살짝 굳어졌다.
“결과는?”
“물리쳤지만, 피해가 조금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오는 길에 더 지속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얘기를 들은 천무경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홍천환을 미끼로 한다면 종남산에도 직접적인 움직임이 있을 텐데 알고 있는 것이 있소이까?”
“천마신교에 편입된 일월교의 교주 일월신마가 직접 움직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일월신마? 강한 자요?”
“개방이 전해준 정보에 따르면 그 실력을 측정키 어려운데 새외무림에 오가는 소문들을 종합해 본다면 당대 무림의 천하오절과 비교할 만하다고 합니다.”
천무경의 얼굴에 웃음이 거의 사라졌다.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범굉의 말을 신뢰하고 일월신마의 실력도 소문대로라면 앞서간 노지신 등이 위험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새외무림의 무공이 뛰어나면 얼마나 뛰어나겠는가 하는 생각도 있었다.
노지신은 그가 인정하는 천무방의 고수였고, 큰 잠재력을 가진 진도건을 일부러 붙여 보낸 것도 만일의 상황을 대비한 선택이었다.
그만큼 두 사람에 대한 믿음이 컸다.
“과장이 심한 것 아니오?”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다만 소승은 천무방이 더 피해를 보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이곳에 온 것입니다. 방주께서야 거리낄 것이 없다 하더라도 휘하의 분들은 그렇지 않으니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일단 산서로 돌아가시고 저희와 협력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소림사와 협력을 하자?”
“힘을 합쳐 천마신교에 대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핫! 대사와 여기 사대금강을 보면 과연 소림사가 세가 기울었어도 저력이 있음을 내 충분히 인정하겠소이다. 하지만, 본방이 누군가의 협력을 구할 만큼 허술해 보인다면 대사의 오산이오. 소림의 옛 위명을 찾고 싶다면 당당히 겨루면 될 일이오.”
“소승의 말을 곡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 정파의 옛 영광을 위해 사파에 도전하기엔 역부족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소승이 말하고 싶은 바는 명확합니다. 천마신교는 방주께서 생각하신 것보다 훨씬 크고 강합니다. 중원 무림 전체를 상대로 싸움을 걸어올 만큼 말입니다.”
“후후후! 대사의 말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우린 앞으로 가야 하오. 이미 앞서 보낸 자들이 있기 때문이오.”
“……아미타불.”
범굉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천무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소승들이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신경을 꽤나 쓰시는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천무경이 씩 웃으며 잠시 범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분하고 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범굉의 눈에서 최소한 사파 무리에게서 볼 수 있는 이권에 대한 욕심이나 음흉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소위 정파의 눈인가?’
천무경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오.”
“아미타불.”
천무방과 소림사 승려 다섯 명 모두 객잔에 머물며 잠을 청했다. 그들의 앞에 곧 폭풍이 몰아칠 걸 예고하는 것처럼 마치 폭풍전야와 같이 평화로운 밤을 보냈다.
아직 해가 뜨지는 않았는 않았으나 사위에 장막을 쳤던 어둠이 서서히 걷어지고 있었다. 새벽 사이에 깔린 안개 때문에 시계는 닫혀 있었다. 바람도 없이 차갑고 축축하게 젖은 공기가 썩 유쾌하지 않은 아침이었다.
객잔을 나온 천서은은 하얗게 서리 낀 흙바닥을 발로 쓱쓱 문댔다. 장포의 옷깃을 목까지 여미는 본능적인 손길 위로 그녀의 얼굴 위로는 다소 걱정 어린 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도건……. 잘 있는 거죠?’
그녀는 어젯밤 천무경과 범굉의 대화에서 노지신을 따라간 진도건이 어쩌면 위험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식적으로 소림사가 이런 식으로 강호에 다시 등장한 건 평범하게 볼 일이 아니었다. 힘을 비축하고 비축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여 사파 무림을 쳐야 하는 것이 그들이 노릴 수 있는 최선의 행보. 그러나 제3세력으로 인해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예상하는 위협이 생각보다 크다고 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아……!”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천서은은 착잡한 심경이 안개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흘겨보며 말 안장 위로 올라갔다.
“가자!”
천무경을 필두로 천무방과 소림사 승려들이 한 무리가 되어 서쪽 초원을 가로질렀다.
두두두!
동녘 하늘에 해가 조금씩 떠오르면서 날이 더욱 밝아졌다. 꽤 짙게 낀 안개 때문에 빛무리가 산란하며 시계를 더욱 어지럽혔다.
“반 시진 정도 달리면 남소(南召)라는 마을이 나옵니다.”
반 시진.
멀리서 안개 사이로 마을의 윤곽이 보였다. 아직 이른 아침, 마을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밤잠 없는 노인 몇몇이 깨어나 집 앞을 빗자루로 쓸어내는 모습들이 보였을 뿐이었다.
마을 중앙을 관통하는 도로에 진입하면서 말의 속도를 줄였다. 굳이 마을 사람들을 배려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속도를 줄이시지요.]
범굉의 전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색에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에 내린 천무경의 판단이었다.
조용한 마을.
갑작스럽게 마을에 나타난 일단의 말을 탄 사람들이 신경 쓰였는지 슬쩍 눈치를 보는 밤잠 없는 노인들과 막 일어난 듯한 아낙 몇몇도 더 눈에 들어왔다.
살랑 불어오는 얕은 바람에 안개가 출렁이며 스르륵 밀려났다. 뿌옇게 보이던 길가의 모습들이 좀 더 세세하게 보이면서 멀리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들도 같이 눈에 들어왔다.
드그그…….
네 명 정도의 그림자가 보였는데 그 뒤로 수레를 끌고 천무경과 반대 방향에서 그들 쪽으로 천천히 오고 있었다. 멀리 있었고 안개 때문에 행색이 잘 보이진 않았다.
다시 주변을 살피면서 가는 중에 그들의 형상이 좀 더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옷차림에 제법 건장한 사내 둘, 여자 하나.
다만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이 뭔가 이 마을과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었다. 성별의 조합도 검은색 행색도 썩 어울리지 않았다. 별거 담지 않은 듯한 수레인데 무거운지 길 한가운데서 힘없이 끌고 있는 듯한 모습도 좀 그렇다.
“길을 막을 것 같군요.”
남궁평이 목소리를 내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가까이 있던 천혼당의 배정교(裵鄭喬)가 그의 옆으로 나섰다.
“옆으로 비켜서라 하겠습니다.”
천무경은 배정교가 앞으로 말을 달려서 빠르게 수레 끄는 무리에게 향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있으면 길 앞이 트일 거로 생각하면서 말이 가는 들썩임에 몸을 맡겼다.
잠시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안개는 여전히 짙었고 마을은 조용했다. 외지인을 딱히 반기는 모습은 아닌 듯하지만, 눈치를 보는 모습이 마냥 이상하진 않았다. 다만 그래도 규모가 아주 작은 마을이 아니고 이제 묘시(卯時)가 되어 일어날 시간이 되었음에도 생각보다 일어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또 다르게 느껴졌다.
‘묘하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앞을 바라보던 천무경의 눈빛이 달라졌다.
수레 끄는 자들은 여전히 길 한복판에 있었는데 배정교가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다만 그 모습이 무척 급박해 보였다. 그리고 거리가 더 가까워져 배정교의 표정이 모두 눈에 들어오자 천무경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느꼈다. 그 분위기가 삽시간에 주변에 모두 퍼져 나갔다.
“바, 방주님……!”
“무슨 일이냐?”
“그, 그…….”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사색이 되었다. 붉게 충혈된 눈에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이랴!”
천무경이 서둘러 말을 몰아 배정교를 지나쳐 뛰쳐나갔다.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천서은과 남궁평, 이혁성 등 천혼당 모두가 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범굉 등 승려들도 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안개를 뚫고 점점 가까워지는 수레를 끄는 사람들.
으흐흑…….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누가 흐느끼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전에 수레 옆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면서 바짝 천무경의 뒤를 따라가던 천서은은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장 조장……!”
수레 앞에서 멈춰 선 채 흐느끼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장학과 관무영, 장우태, 하소정이었다.
천서은이 말에서 급히 내려 가까이 다가가면서 그들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들 곁에 있어야 할 세 명이 보이지 않았다.
진도건, 노지신, 나자룡.
불안감이 휩싸이는 와중에 천무경과 천서은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 뒤의 수레에 닿았다. 흐느끼는 네 사람을 지나쳐 수레 옆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수레 위 무언가가 짚 이불에 덮여 있었다. 그 무언가가 사람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수레 끄트머리 쪽에 짚 이불 바깥으로 튀어나온 사람의 발, 다른 가장자리에 드러난 상처 난 손이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설마!’
천무경의 손이 짚 이불의 한쪽을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걷어 냈다.
“노 장로님……!”
“나자룡……!”
거기에 노지신과 나자룡의 시신이 끔찍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노지신은 머리 한쪽이 함몰되고 그쪽 눈이 붉게 물든 모습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고 나자룡은 당장 눈에 보이는 목과 얼굴 모두 검게 변한 괴기한 모습이었다. 특히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자룡은 흙에 더럽혀진 상태였다. 홍천환을 회수하러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 되려 시신과 함께 돌아온 것은 그들을 보내기로 했던 천무경으로서는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아미타불!”
범굉과 사대금강 모두 염불을 외우며 죽은 두 사람의 넋을 위로했다.
‘이 두 사람 모두 마공에 당했구나.’
그들은 단번에 이들이 일월신마와 마주쳤음을 직감하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마공의 살상력이 보통이 아님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어찌 된 일이냐?”
분노가 느껴지는 천무경의 목소리에 장학 등 네 사람이 고개를 푹 숙였다.
“송구합니다…….”
천무경의 시선이 네 사람을 훑어보았다. 격전을 치른 모습이 눈에 바로 들어왔다. 무언가 말하려는 모양새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때였다.
“방주.”
범굉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시오.”
“이 마을. 아무래도 적진 한가운데 들어온 것 같소이다.”
“응?”
범굉의 말에 반응한 천무경이 감각을 열었다. 특별한 낌새가 느껴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갑자기 주변에 낀 안개가 점점 잿빛으로 변하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특히 멀리 시선을 던져 보면 무언가 검은 기운이 모락모락 이곳을 향해서 몰려오고 있었다.
자신보다 빨리 낌새를 알아챈 범굉의 반응에 내심 놀라는 그때 그의 의문에 대한 범굉의 대답이 들려왔다.
“술법입니다. 귀들을 막으시지요.”
범굉의 말에 천혼당은 모두 귀를 틀어막았다. 천서은과 남궁평, 이혁성도 귀를 막으며 소림사 승려들을 보았다. 사대금강도 모두 귀를 막는 것을 보고 범굉이 음공을 펼치려는 것을 깨달았다. 천무경만이 물끄러미 범굉을 바라볼 뿐이었다.
범굉이 두 손을 단전에 모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의 가슴이 눈에 띄게 부풀어 올랐다. 그 순간 입을 열자 마치 범종을 때리는 듯한 웅장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우우우웅!
그것은 바로 불문 전설의 사자후(獅子吼)였다. 귀를 막은 사람들도 그 소리가 손을 뚫고 고막을 울렸는데 이것이 사람의 외침인지 착각이 들 정도로 묘한데 여기에 정신을 쏟고 있으면 순간 정신이 어지러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범굉의 사자후가 터지자 갑자기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여전히 수증기에 의한 안개가 조금 남아 있긴 했지만, 음공의 파장에 밀려 나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특히 잿빛 안개들이 확연히 물러나며 사술과 상극인 사자후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놀랍군.”
천무경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사자후의 강력함도 몸소 느끼면서 범굉의 술법이라는 말의 의미를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잿빛 안개가 걷히면서 멀리서 느껴지지 않던 기척들이 느껴졌다.
아무리 술법이라도 천무경의 감각을 쉽게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사전에 멀찍이 떨어져 술법 뒤에 숨어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신음과 쓰러지는 소리가 천무경의 귀에 잡혔다. 힐끔 주변을 보니 거리에 나와 있던 노인들은 모두 사자후에 기절해 쓰러진 상태였다.
“마을 외곽에 사교도들이 숨었구나. 모두 죽여라.”
천무경의 싸늘한 지시가 떨어졌다.
노지신과 나자룡을 잃고 이미 분노에 가득 휩싸여 있던 천혼당이 일제히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남궁평과 이혁성도 각기 남북으로 찢어져 흩어졌다.
“아미타불!”
사자후를 끝난 범굉이 숨을 몰아쉬며 다시 염을 외웠다. 그의 염은 이 마을을 뒤덮을 죽음을 위로하는 염이었다. 아무리 적이어도 살생은 불가에서 큰 죄임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나한, 소승들도 가야 하는지요?”
“마도와의 전쟁. 우리의 길에 죽음이 뒤따르는 것은 불가피하나……. 학살이 될 판에 가담하는 것은 불문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겠느냐?”
“죄송합니다.”
사대금강이 사과하는 사이에 사방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섞여 나왔다. 불 보듯 뻔한 죽음이라는 심판이 천마신교 교도들을 향해 잔인하게 쏟아졌다.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은 소림사 승려들을 비롯한 천무경과 천서은 그리고 장학 등의 네 사람이었다.
천무경이 장학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장학, 상세히 설명하여라.”
“……예.”
장학은 지나온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노지신과 자신들이 양 갈래로 흩어지게 되면서 자신들이 먼저 일월신마와 마주쳐 결국 나자룡이 죽게 된 상황. 이후 뒤쫓아 오던 진도건을 만나서 그들은 아직 오지 않은 노지신을 찾으러 가고 진도건은 일월신마를 뒤쫓았던 일. 합공에 고전하던 노지신을 도와준 이후, 진도건의 뒤를 쫓다가 다시 만난 일월신마와 노지신의 대결. 그 자리에 진도건이 보이지 않았던 상황까지 모두 설명해 주었다.
“진 위사는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요?”
천서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장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 장로가 일월신마와 싸우기 전에 먼저 진도건과 만난 게 확실하면…… 일월신마가 혼자가 아니었으며 이미 진도건을 빼돌렸을 수도 있겠군. 왜 그랬을까?”
“아버지.”
“살아 있다면 되찾아와야지. 일월신마는 곧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천무경이 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흩어졌던 남궁평과 이혁성, 천혼당 무사들이 빠르게 모여들었다.
천무경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노 장로와 나자룡이 적과 싸움에서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진도건은 적들에게 납치된 것인지 그 소식이 알 길이 없다. 허나 높은 확률로 놈들의 손에 있을 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놈들을 찾아 이 사태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고 진 위사가 살아 있다면 되찾아와야 할 것이다.”
“존명!”
천무경의 무거운 목소리에 그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짧게 답하며 외치는 모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모두 일제히 말에 다시 올랐다.
이제 막 출발하려는 그때 멀리서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해 말을 타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기다리자 그 두 사람이 천무경 앞에 서서 포권을 취하며 예의를 갖추었다.
둘 다 남루한 행색이긴 하지만, 왼쪽의 인물은 격전을 치른 듯 입고 있는 옷이 정상적이 아닌 데다가 여기저기 상처들도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은 상대적으로 멀쩡한 모습이지만, 행색 자체가 워낙 남루하여 길거리에서 동냥하는 거지를 보는 듯했다.
범굉은 바로 그 오른쪽의 거지를 알고 있었다.
“덕호(德虎).”
“범굉대사님을 뵙습니다. 역시 천무방과 같이 계셨군요.”
범굉과 면식이 있고, 행동 방향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거지의 신분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었다.
바로 개방의 거지였다.
“이 사람은 우리와 접촉하며 소통하는 개방의 덕호입니다.”
“천무방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반갑소.”
“방주님!”
천무경이 덕호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옆에 있던 자가 그를 불렀다. 천무경이 그를 돌아보자 그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소인 하오문의 사공흠입니다! 방주께 알려드릴 소식이 있어 급하게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자네가 사공흠이로군.”
하오문이 홍천환의 위치를 선두에서 추적하고 그를 보조하기 위해 노지신이 앞서 출발한 것이었다. 천무경은 그 하오문 무인 중 한 사람이 사공흠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사공흠이 급한 일인 듯 서둘러 입을 떼는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일월신마가 지금 진도건이란 자를 데리고 옛 화산파 도관에 올라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