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55화 (55/432)

55화 - 제11장. 대담(對談)의 끝에 (4)

* * * *

말 그대로 무림의 전란(戰亂)이었다.

사실 아무도 이런 사태를 예측한 사람이 없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이라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홍천환의 존재에 대한 소식이 음지에서 떠돌기 시작하며 나름의 세를 유지하고 있는 문파들의 귀에 일제히 들어갔다.

지나가던 상인들이 전해 주는 뜬 소문이든, 객잔에 모인 낭인들이 떠드는 야설(野說)이든 이는 중요한 지점이 아니었다. 세상에 귀를 열어 놓고 있는 무리에게 어떤 의원이 완성해 내고, 혈마라는 결과물을 보여 준 홍천환이라는 이름의 영약의 존재가 알려진 것이다. 그것에 반응하는 자들은 당연히 강한 무공을 원하는 무림인들이고 절대고수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실존했던 전설의 영약에 탐욕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그 뜬소문 중에 ‘사교도’라는 단어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홍천환의 위치로 지적한 섬서 종남산을 향해 모이는 자들도 있었고, 사교도들이 선수 쳤을 거라는 생각으로 미리 감숙 방향으로 움직인 자들도 있었다.

어쨌든 두 지역은 무림인들의 은밀한 화두였고 가장 앞서 움직였던 천무방부터 검림, 구룡문 그리고 사패련으로 이어지는 사파무림의 주축들부터 수많은 중소방파와 낭인들까지 모여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지역으로 진입한 무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소문의 진원지가 천마신교였기에 당연한 결과였으며 그 준비도 철저했기 때문에 소문을 쫓던 자들의 세력이 크든 작든 관계없이 피해를 피해갈 수 없었다.

제일 먼저 산서에서 출발한 백두기와 장태환이 이끄는 천무방은 천마신교의 환도종(幻道宗)과 충돌했다.

홍천환과 관련된 계획에 가장 중요한 변수는 천무방의 움직임을 어떻게 제어할 것이냐가 문제였기에, 감숙 명사산(鳴沙山)에 은거지가 있어 거리상으로 가장 가깝고 지연 역할에 제일 적합한 환도종이 사전에 //이미// 주력을 섬서, 산서 경계로 옮겨 놓은 상태였다.

그들은 천무방 40여 명의 무리가 한 마을에 들어와 숙박에 들어서는 곳에 자신들이 자랑하는 환마강진(幻魔降陳)을 펼쳤다. 백두기와 장태환이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부하들을 서둘러 깨웠지만, 상대적으로 무공이 낮은 몇몇이 암살되었다. 천무방은 불리한 환경에서 싸우게 되었지만, 환술이 거의 통하지 않은 백두기와 장태환의 존재 덕분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그러나 환마강진 아래에서 나타난 환도신마(幻道神魔)가 두 장로를 동시에 상대한 상황은 천무방에게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다행히 환도신마가 패배하여 약간의 부상을 안고 물러났지만, 그들이 펼친 환술에 경각심을 가진 천무방의 이동속도를 늦추는 데는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큰 전투가 벌어진 곳은 비단 천무방 뿐만이 아니었다.

검림은 전혀 더더욱 예측지 못한 곳에서 기습을 받았다.

본래 강정학은 미리 서진하고 있던 검림 검객단들을 하남과 섬서 경계 근처에 있는 서협(西峽)에서 보기로 하고 미리 이동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시기 첫째 제자 강도혁을 필두로 한 검객들은 여남(汝南) 인근의 호숫가를 지나던 때에 적을 맞닥뜨렸다. 그들은 바로 천마신교 염황종의 교도들과 염황신마(炎皇神魔)였다. 염황신마가 일으키는 불길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니 그 자리에서 둘째 제자 천잔살검 마산호가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십여 명의 검객들이 비명횡사하여 결국 쫓기듯 도주하였다.

백령검왕 강도혁의 무공은 천무방 장로들과 비견될 만했지만, 염황신마의 염룡마공(炎龍魔功)과 화룡도법(火龍刀法)의 위력은 천마신교 안에서도 순수한 파괴력만으로 일월신마와 비견될 정도로 평가받는 데다가 그 영향력이 광역으로 미치니 강도혁으로서 방패 역할을 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다행인지 의도적인지 도주로가 서쪽으로 마련되어서 그들은 즉시 서협으로 향했고, 이를 염황종이 여유 있게 뒤쫓는 형국이 되었다. 그렇게 천하오절 수좌를 다투는 백령신검 강정학과 염황신마의 격돌을 예고하고 있었다.

금태하의 구룡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금태하는 여덟 계수에게 지시하여 북서로 움직이게 하여 방현(房縣)이라는 곳에 문파 제자들을 이동시켰다. 그러나 산지 협곡 지형에서 천마신교 광혈종(狂血宗)이 나타나 일제히 공격하니 순식간에 피바람이 불었다.

광혈종은 대마의 유변이 사용을 금지한 홍문단을 아직도 사용하는 문파로 그 숫자가 구대마종 가운데서 세 번째로 많은 곳이었다. 사파무림 삼강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구룡문을 제압하기 위한 포석이었는데 이것이 아주 적절한 것이 구룡문의 절대고수 금태하가 사패련에 있었기 때문에 광혈종의 수장, 광혈신마(狂血神魔)를 상대할 인물이 없었다. 여덟 명의 계수들은 금태하보다 한 수 아래였고, 광혈종에는 광혈신마 외에도 사수인(四囚人)이라 불리는 네 명의 고수들이 계수들과 비슷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광혈신마를 협력하여 물리치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다만 구룡문이 열세에 처한 상황 속에서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던 것은 무당파의 도사들이 그 자리에 등장하여 광혈종을 공격하였던 덕분이었다.

북쪽 가까이에 무당산이 있던 것이 구룡문으로서는 천만다행이었던 일.

놀라운 점은 숨죽여 지내던 무당파가 나타난 것도 놀라웠지만, 한 도사가 단신으로 광혈신마를 상대하여 물리침으로써 그 이름이 훗날 강호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의 도호(道號)는 소요자(逍遙子)라 하였고, 훗날 태극검선(太極劍仙)이라 불리게 되며 무당파의 재부흥을 일으키게 된다.

어쨌든 금태하는 이와 같은 소식을 비혈단 덕에 일찍이 소식을 접했고, 그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는 후문은 사패련에서도 유명한 일화로 남게 되었다.

사파무림에서 그 세력의 크기로 가장 큰 녹림은 총표파자의 지시로 삼문협에 정예들이 모였었다. 그들은 결집을 마치자마자 황하수채의 도움을 빌려 열 척의 배를 타고 황하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미리 진을 구축하고 있던 전선(戰船)들의 불화살 세례를 맞고 다섯 척이나 수장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섬서 황하 수역을 담당하던 수군 지휘관 몇이 혈마종에 가담한 상태였기 때문에 때를 노려 멋대로 전선을 움직인 것에 전혀 군부도 대응하는 게 불가능했고 이를 몰랐던 황하수채와 녹림의 정예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침몰한 전선에 있던 녹림도들 일부는 뭍으로 간신히 빠져나갔지만, 대부분은 강한 물살에 휩쓸려 수장되었다. 살아남은 다섯 척도 두 척은 삼문협으로 돌아가고 세 척은 녹림도들에게 빼앗겨 강변에 배를 대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강변에서 이런 상황을 예측하였던 혈마종 교도들에게 다시 기습을 당하니 무공이 약한 자들 상당수가 죽거나 다치게 되었다.

다른 중소방파들도 천마신교 교도들에게 사전에 점유된 마을에 진입하였다가 습격을 받게 되니 섬서, 감숙을 두르는 주변 지역들 곳곳에선 피와 죽음이 수일 사이로 끊이질 않았다.

특히 사천이 중소방파들의 피해가 컸다. 정파무림 쇠퇴 이후 십여 개의 중소방파들이 서로 세를 겨루며 사천의 패권을 쥐려고 하는 와중에 홍천환의 등장은 모두의 탐욕을 자극했고 결국 많은 문파가 대거 감숙과 섬서를 향해 이동시켰다. 그러나 사천은 새외지역과 인접해 있는, 말 그대로 천마신교가 가장 노리기 쉬운 곳이었다.

운남에 근거한 사혈종이 이 같은 향방을 노리고 은밀히 북진하였다가 이들을 사냥하듯 공격하니까 말 그대로 참사가 벌어졌다. 놀라운 것은 구룡문에게 무당파가 나타난 것처럼 그들에게도 구세주가 등장하였으니 바로 사천의 삼대정파라 불렸던 아미파(峨嵋派), 청성파(靑城派) 그리고 사천당문(四川唐門)이었다.

오랫동안 쥐죽은 듯이 지냈던 그들은 천마신교가 사천 땅에 등장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사혈종를 상대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 사혈종의 전신인 사혈주를 상대한 경험이 있었던 문파답게 독공에 다들 대비가 되어 있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보유한 고수의 숫자인데 오랜 세월 세를 전혀 불려오지 않았음에도 소수 정예로, 하나같이 절정고수 급의 실력을 구축하고 있으니 사혈종은 북으로는 사파 군소방파들에게, 남으로는 삼대정파에게 협공당하는 모양이 되면서 되려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만약 이런 소식을 들은 사혈신마가 제때 나타나지 못해 삼대정파를 상대로 활로를 열지 않은 채 수 시간이 흘렀다면, 사혈종 이백여 명의 절반 이상이 궤멸하는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 * * *

한편 비무제로 사패련에 머물렀던 천무경의 천무방은 길을 떠나기 전 인원을 재편했었다. 우선 이혁성은 동행했던 인혼당 무사들은 모두 천무방으로 돌려보냈다. 아직 실력을 더 길러야 하는 인혼당을 대동하기에는 종남산으로 향하는 길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의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가 컸다. 반대로 실력을 인정받아 남궁혁에게 영입된 소문적과 흑풍양인도 마청래가 동행하여, 16인의 천혼당과 두 명의 당주와 천무경, 천서은을 더한 총 22인이 종남산으로 향했다.

천무경 일행의 행렬은 떠날 때도 꽤 관심을 끌었는데 그들은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서쪽으로 길을 옮겼다. 당연히 홍천환과 관련된 움직임이라고 모두가 생각했지만, 이미 노지신과 진도건, 천혼당 무사들을 미리 보낸 천무경은 여유가 있었다. 그런 그들이 다소 생각을 달리한 것은 여양(汝陽)이라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둠이 깔린 저녁, 여양에서 가장 큰 명호(明護)객잔의 문을 열고 들어선 천무경은 한쪽 탁자에서 때마침 슬그머니 일어나는 승려들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염주를 들고 합장을 하며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승려들을 보고 천무경이 씩 웃었다.

다섯 명의 승려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모두 건장한 중년의 무승(武僧)들이었는데 한 사람은 거대한 금색 법장(法杖)을 들고 있는데 가운데 그들의 지도승 격으로 보이는 노승(老僧)에게서 은연중 흘러나오는 분위기로만 보더라도 법력(法力)이 경지에 이르렀음을 느낄 수 있었다.

“멀지 않은 북쪽에 하필 숭산(嵩山)이 있으니 대 소림사의 스님들로 보이는데 느껴지는 법력이 보통이 아니니 이 만남이 우연입니까?”

“소승들은 방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림사라는 말에 때마침 천무경을 뒤따라 들어온 무인들 모두가 어느새 승려들을 포위했다.

아무리 그 세력이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고 해도 여전히 선종(禪宗) 불교의 고유한 정신이 깃든 곳이며 정파무림에서 무당파와 더불어 양대지주로 군림했던 곳이 바로 소림사였다. 당연히 그에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천무방으로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스님의 법명은 무엇이오?”

“소승은 범굉(凡宏)이라 하오이다. 그리고 이들은 현 사대금강(四大金剛)인 료정(了情), 료성(了成), 료심(了心), 료학(了學)이라고 합니다.”

“범굉대사께서는 어떤 직책을 갖고 계시오?”

“제 사형이자 방장(方丈) 되시는 범우대사(凡宇大師)께서 무공을 멀리하시어 사제인 제가 대나한(大羅漢)이라는 별정직(別定職)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소림의 상세한 소식은 알 길이 없으니 대나한께서는 이 사람이 캐묻는 것 같아도 양해를 부탁드리오.”

“물론입니다.”

“그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셨으니, 어디 대화를 해 봅시다. 너희도 둘러서 있지 말고 요기들 하여라.”

“알겠습니다.”

남궁평이 대답하며 천서은을 비롯한 다른 방도들을 모두 자리에서 물렸다. 다섯 무승의 실력을 가늠하긴 힘들지만, 이 자리에서 그들이 무언가 수작을 부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과연 다시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소림사가 공명정대(公明正大)와 위선 사이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는 지켜볼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건재한 것 같군.’

사실 사대금강으로 소개한 료(了)자 항렬의 스님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자신과 비슷한 경지를 이루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사대금강과 남궁평, 이혁성이 서로 은근히 시선을 던지니 역시나 같은 의식을 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대나한이라 소개한 범굉의 경지는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범굉의 말을 빌려 생각해 본다면 방장을 대신해서 소림사 제자들의 무공수행을 총괄한다는 느낌이었기에 현 소림사의 최고수일지도 몰랐다.

옛 혈마대전과 정사대전으로 많은 고수와 높은 항렬의 스승격 승려들을 잃으면서 상승경지로 인도할 수 있는 선맥(禪脈)이 끊겼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의 고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내심 그 저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소림사가 갑자기 이때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쪽 탁자에 함께 앉았던 천서은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그동안 정파의 활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마치 천하가 사파무림의 것으로 여겨 온 것이 사실이었기에 그들의 존재를 직접 보는 이 상황이 어색한 것이었다.

“글쎄. 다만 저들의 무공이 생각보다 강해 보이는 거로 봐서는 어쩌면 옛 정파무림의 부흥을 이끌었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들 중 일부는 힘을 감추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아아…….”

천서은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승려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남궁평의 얼굴을 흘끔 보았다. 그는 여전히 승려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남궁세가…….’

종남파와 더불어 사실상 남궁씨의 무림세가는 멸문의 길을 걸었었다. 그런 현실 아래에서 소림사가 저런 고수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남궁평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천서은의 머릿속에 작은 궁금증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한편 천무경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범굉을 바라보고 있었다. 좌우로는 사대금강이 앉아 있었지만, 천무경은 그 어떤 위협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과연 파천무봉이로다……! 아무리 주변에 수하들이 많아도 이렇게 나와 사대금강을 지척에 두면 당장의 기습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한데. 역시 당대 최강을 논하는 자라 할 수 있구나.’

흘러가는 생각들을 뒤로하며 다시 한번 합장으로 인사를 건넨 범굉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빈 잔에 차를 따라내어 천무경 앞으로 밀어주었다.

“방주께선 홍천환이란 영약을 회수하러 종남산으로 향하시는 것이지요?”

“그렇소. 왠지 잘 알고 있는 어투인 것 같소.”

“개방이 오래전부터 천마신교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파무림의 사정은 알 길이 부족해졌지만, 덕분에 천마신교의 움직임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해가 필요한 말이로군. 오래전부터 천마신교를 감시하고 있었다?”

“소승의 지금 얘기를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경청하겠소이다.”

범굉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차분한 눈으로 천무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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