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제11장. 대담(對談)의 끝에 (3)
두 사람은 잠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 이후, 다시 화제를 어제의 대화 주제로 돌렸다.
“그럼 이제…… 단용후와 함께한 사연을 얘기해 주시겠는가?”
“그보다는 내가 왜 그에게 협력했는지를 얘기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경청하겠네.”
“마도의 무공은 힘에 대한 갈망으로 빠른 내공의 축기나 아주 파괴적이거나 폭력적인 특성을 갖는 것이 특징인데 그러다 보니 사람의 육신이나 정신을 많이 망가뜨리는 문제가 있었소. 아주 높은 경지에 도전하는 것이 아님에도 주화입마나 폭주 같은 증상은 아주 빈번하게 발생하는 현상이었소. 어차피 무림이라는 세상은 힘의 논리로 통용되는 세상이거늘 정사로 양분되어 유무형의 자산을 독점하고 지배하는 현재의 구조에서 이들에 속하기 어렵거나 근본적으로 다른 자들은 항상 소외되어 왔소. 힘이 있으면 쉽게 소외가 되겠소? 마공의 이런 본질적인 문제가 힘을 키울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 그들을 무림의 주류들로부터 외면받게 했소이다.”
“사파에도 끼지 못하는 부류들인가?”
“이치에서 벗어난 이론들과 성급한 접근들, 같은 힘의 논리에서도 사파 무공들이 보통 효율을 중점으로 두고 이야기한다면 이 부류의 무공들은 극단적인 힘의 추구로 변칙적인 고민을 하는 자들이었소. 당연히 완성도 면에서 부족한 것이니 여러 부작용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오.”
“단용후는 어떤 자인가?”
“힘의 논리를 믿는 사람. 극단과 변칙을 추구하다 실패를 맛본 자들에게 성공으로 올라설 지침을 만들어 준 사람. 이런 자들을 마도의 깃발 아래에 모아 이 무림의 구조를 전복하고 주류로 올라설 수 있는 토대를 만들려고 했던 사람. 그는 충분히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고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던 사람이오. 능력이 있는 만큼 스스로 과신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대에서 이룰 수 없는 미래임을 인정하고 후대에 양보했던 남자요.”
“그자에 대한 자네의 믿음이 말에서부터 느껴지는군.”
“작고한 지 오래지만, 단용후야말로 마도대종사(魔道大宗師)라 평가할만한 사람이오.”
“자네의 평이 그러하다면 한 번쯤 만나 봤으면 좋았겠군.”
마도대종사 단용후.
그의 무공은 지금 시대의 절대고수들에 미치지 못하였지만, 다양한 마공의 부작용들을 연구하고 그것을 공통으로 해소할 방안을 연구했던 자였다. ‘마경환도(魔境環道)’라는 이론서를 편찬하여 이 기틀 아래에서 다양한 극단의 무공들의 부작용을 줄일 방법을 제시하여 소외된 자들로부터 큰 인정과 신뢰를 받았다.
단용후는 그들에게 마도로써 인도하며 미래에 대한 포석을 놓기 시작하니 그 결과가 종교 혹은 특정 성격의 집단으로 구성된 천마신교를 지탱하는 아홉 개의 기둥, 구대마종(九大魔宗)이었다.
이 중에 일월마종 일월교는 선대 일월신마가 단용후와 각별한 사이로써 이미 그 힘과 세력이 확고한 종교집단이었다. 사혈신마가 이끄는 사혈주는 운남 지역에서 독공으로 유명한 문파로 독공의 한계로 나이가 40줄에 이르면 수명의 막바지에 이르는 치명적인 약점을 단용후의 도움으로 극복에 성공하면서 협력하게 된 경우였다.
“그는 많은 문제를 해결해 왔지만, 그것으로 현 무림을 뒤엎을 힘을 기를 시간이 부족한 것은 해결할 수 없었소. 그래서 필요했던 것이 내공증진에 도움이 되는 영약이었고, 홍천환이나 홍문단 같은 것이 바로 그가 원했던 성과였소. 그러나 실험적이었던 영약의 제조법들은 본래 마공이 갖는 한계와 같은 부작용이 있었기에 이것을 해결해야만 안정적으로 고수들을 각 마종에서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이오. 나는 그래서 그에게 협력하여 이 영약들의 부작용을 제어할 수 있는 새로운 제조법의 연구에 나선 것이오. 그렇게 해서 원건과 같은 문제를 그들에게서 일소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속죄를 대신에 할 수 있지 않을까…… 한 것이로군.”
“그렇소이다.”
유변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였다.
“미래를 설계하는 자에게 내 능력이 도움이 된다면 원건과 같은 상황에 부닥쳐 죽음을 맞이할 수많은 마도인들을 구제하는 길이 되지 않겠소이까?”
“구제라…….”
어제에 이어 유변의 생각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은 조강선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무림의 정사가 경쟁하는 구도는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대부분 정파가 그 주도권을 쥐고 있었긴 했지만, 사파는 나름 비주류 중의 주류로써 세력다툼을 벌이며 그 위세를 과시해 왔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비주류 중의 비주류들은 철저히 외면이나 박해를 받으며 무림 사회의 어둠 속에 숨어 살아온 것인데 단용후가 계획하고 유변이 동조한 ‘마도’라는 의미는 이 음지에 있는 자들을 양지로 끄집어내는 일이었다.
이는 기득권을 이루고 있는 무림 세력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강호 무림이 많은 피를 흘릴 것을 예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50여 년 전의 혈마지란은 무림에 던진 중요한 전언으로써 정사의 세력균형이 뒤바뀐 중요한 역사였다. 그리고 100여 년 전에 이미 단용후란 남자는 작금의 사태를 계획한 원흉(元兇)이었다.
‘아니, ……마도를 걷는 저들에겐 선구자(先驅者)인 셈이겠지.’
조강선은 다시 이어 물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군. 그들이 겪었던 부작용, 영약의 부작용을 해결하려고 수십 년을 노력했으니, 그럼 성과가 있었는가?”
“명천단과 명현단이 내가 거둔 최고의 성과요. 홍천환에 비해 약효는 조금 떨어지지만, 주화입마에 빠지는 부작용은 마도환경의 운기법과 내 마정보화감에 따른 의술을 더하면 /막을 수 있고,/ 빠르게 힘을 취할 수 있지요. 만약 본인이 재능이 있다면 무림인들이 말하는 화경과 같은 수준의 ‘극마(極魔)’의 경지에 이를 수도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오.”
자부심이 느껴지는 유변의 말에 조강선이 가까운 기억을 떠올렸다.
“일월신마가 그 경지인가?”
“그렇소.”
“천마신교의 교주는?”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신 분이지요.”
“그렇군.”
유변은 솔직하게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이미 마도대의의 진격은 시작되었기 때문에 지금 이 파도를 막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도와 정사의 대립.
마도인들의 의지와 힘에 의한 패도.
앞으로 벌어질 전란이 눈에 훤히 보이는 이유였다.
“자네는 마도를 위해 끝까지 가시려는가?”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는 이 두 눈으로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소이까?”
말에 힘이 느껴졌다. 의지의 반영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유변 또한 마도 역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역사 속에서 단용후와 함께 아주 중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주백자를 포함한 세 사람이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 보낼 수 있었던 건 이렇게 서로가 근본부터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달랐기에 서로를 알아보고 끌어당겼으며, 달랐기에 다시 각자 갈 길을 가는 것이었다.
세 사람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시작하여 합쳐지고 찢어졌다가 그중 두 사람이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이제는 서로 적임을 확인한 셈이니 이대로 떠난다면 다시 만날 땐 칼을 겨눠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흠!”
조강선은 무거운 마음에 내뱉는 숨소리를 크게 내었다. 그의 눈빛이 강렬해져 유변의 두 눈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느낀 유변이 피식 웃었다.
“날 베시겠소이까?”
유변은 솔직한 심정으로 많은 것을 털어놓은 만큼 서로가 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 점을 꼬집는 것으로, 만약 이대로 헤어진다면 어떤 무기로 조강선을 겨누게 될지 그조차 모를 일이었다.
“허허! 내가 그런 인정머리 없는 놈이었던가?”
“헛헛헛…….”
조강선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대신 교주를 만나 볼 생각이네. 극마라 불리는 경지를 초월했다고 하니 얼마나 강할지 궁금해지는군. 그의 목을 베어 이미 파도치는 물결의 중간을 틀어막을 수 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 그런…….”
유변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모를까 조강선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리 교주 단지운이 강함이 초월적이라고 해도 조강선이 살아온 생애의 깊이를 쫓아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물론 단지운 본인의 강함은 물론 그의 주위에 많은 호법이 있으므로 조강선이 말하는 것처럼 쉽게 벌일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안감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오.”
“전쟁을 조기에 막으려면 시도해 봐야지. 자네가 이 일을 알려 줄 터이니 주백자와 함께해야 하지 않을까 싶군.”
“주백자는 어디에 있소이까?”
“알아봐야지.”
조강선은 대답하며 떠나려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따라 일어난 유변은 조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옛 친우 앞에서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 조금 후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조강선이나 주백자나 자신이나 사실 천리(天理)에서 다소 벗어난 존재들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큰일들에 직접 개입하는 것보다 한 발짝 물러서서 지켜보는 것을 선호하기 마련이었는데 조강선이 이런 책임감을 보여줄 줄 몰랐다.
잠깐 생각이 복잡할 때였다.
“당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사마월이 뒤뜰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손에 서신 하나가 들려 있었다.
“조금 전, 모홍도로부터 도착한 전서인데 좀 보셔야겠습니다.”
사마월은 빠르게 다가와 유변의 손에 서신을 쥐여 주었다. 막 떠나려던 조강선은 모홍도라는 이름에 서신의 내용에 흥미가 생겼다.
‘진도건이 붙잡힌 마을을 이끄는 의원 이름이 아닌가?’
유변은 서신을 펼쳐 쓱 훑어보더니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홍천환 전달은 불가능. 일월신마가 독단적으로 진도건을 혈마로 만들기 위해 복용시킴.”
내용의 마지막을 읽으면서 유변은 조강선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떠올랐으니 이것으로 그의 방향을 틀 수 있을 것 같다는 짐작에 확신이 들었다.
“진도건에게 홍천환을?”
“가 보셔야 하지 않겠소이까?”
“흠. 진도건의 선천진기는 도가의 도사들보다 더 순수하고 강해서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일세.”
자신과 주백자가 만들어 낸 원류검결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유변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런 그를 조강선은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마교주에게 가지 않도록 날 꾀어낼 생각을 하는 것인가?
그렇게 의심이 드는 와중에 문득 어제 유변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때맞춰 그 생각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유변이 입을 열었다.
“조 형, 내 진지하게 조언하리다. 홍천환의 부작용을 줄인 영약을 왜 명천단이라 명명하였는지 아시오?”
“왜인가?”
“일월교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오. 그들의 음양기를 따로 운기할 수 있는 방법론은 독보적이오. 그들의 조언과 실험에 대한 조력이 없었으면 내 성과도 불가능했을 것이오. 일월(日月)이 만나니 명(明)이오, 명을 다시 찢으면 일월이니 혼돈과 조화는 그들에겐 한 끗 차이. 일월신마가 의도를 갖고 조 형의 제자에게 홍천환을 먹였다면 절대 가볍게 볼 일이 아니오. 일월신마는 마기의 폭주를 제어도 가능하지만, 폭주시키는 것도 가능하다오. 하물며 원건이 먹었던 것보다 그 성질이 수십 배, 어쩌면 그 이상도 강해졌을지 모르는데 거기에 일월신마의 손길이 닿는다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오.”
유변의 진지한 이야기에 조강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도 홍천환이 품었을 마기에 대한 염려의 생각이 들었던 찰나에 유변이 이렇게 강조를 하고 있으니 진도건에 대한 걱정의 마음이 더 강하게 드는 것이다.
“그 홍천환이 그 정도의 물건이라면 자네는 어찌 감당하려고 회수하려 했는가?”
“홍천환을 복용할 예정이었던 구마진은 흡성대법을 제대로 습득한 사내요. 덕분에 내공의 양 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온갖 성질의 마공이 그의 몸 안에 공존하고 있소이다. 그러니 가능성을 본 것이지요.”
조강선은 이젠 정말 유변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제자가 무림에 뛰어든 이상 스스로 죽음을 곁에 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그의 최후가 원건과 같은 것이라면 조강선으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막는 것은 최소한 조강선에게 있어서 무림의 미래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서둘러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군.”
“기다리시오.”
막 몸을 돌리려던 조강선을 유변이 멈춰 세웠다. 조강선이 그를 돌아보자 유변은 손을 들어 대기 신호를 보내며 정자에서 내려왔다. 그는 마원당에 들어가더니 잠시 뒤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서책 한 권과 작은 가죽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마정보화감과 명현단 다섯 개를 넣었소. 폭주하는 마기를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오. 정량은 본래 하루 한 개이지만, 어떤 상태일지 모르니 잘 판단하시길 바라오.”
“이대로면 마인이 되는 것이 아닌가?”
“조 형의 검결로 강해진 선천진기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알 수 없지요. 본래 마공이라는 것은 선천진기를 자극하고 오염시키는 경향이 있으니까.”
“자네의 호의를 믿겠네.”
조강선은 서책과 주머니를 모두 품에 챙겼다. 그리곤 곧장 정자를 나오더니 하늘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방향은 어제 나섰던 바위산 쪽이 아닌 마원당과 청의향을 가로지르는 방향이었다. 그 움직임이 워낙 빨라 사라졌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아마 그대로 하늘을 가로지른다면 누구도 조강선의 존재를 알아채기 어려울 듯했다.
사마월이 염려스러워하는 얼굴로 유변을 보았다.
“마정보화감과 명현단을 저자에게 주어도 되겠습니까? 혹시 저희에게 해가 될만한…….”
“단 교주를 치러 간다고 했었네.”
“예?”
유변은 무심히 대답했지만, 사마월이 놀라 되물었다.
“그의 발길을 돌리는데 저것들과 홍천환이면 싸게 먹힌 걸세.”
사마월은 유변의 말이 왠지 이해가 갔다.
조강선과 교주 단지운을 모두 직접 대면해 본 한 사람으로서 누가 더 강할 것이냐를 놓고 논의해 본다면 사마월은 조강선을 택할 수밖에 없는 심경이었다. 두 사람이 실제로 붙여 봐야 알겠지만, 불 보듯 뻔한 결과이지 않을까 싶었다.
“홍천환을 엉뚱한 사람이 먹게 되었으니 구마진에겐 뭐라 전할까요?”
“사실 그대로 전달하게. 단 태상과 논의해서 결정한 사안이긴 하지만, 그런 욕심 그득한 놈에겐 애초에 주고 싶지도 않았네.”
“후후! 그럼 구마진이 혈마종주가 되는 일은 철회되는 것입니까?”
사마월이 기분 좋게 웃는 이유는 그도 구마진의 휘하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워낙 음흉하고 음지에서 획책하는 것을 즐기는 자라 무공의 강함과는 별개로 절대적 힘의 논리와 패도를 추구하는 천마신교의 교리에 맞지 않은 인사였다.
“글쎄…….”
유변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구마진의 얼굴보다 앞으로 다시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조강선의 얼굴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