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제11장. 대담(對談)의 끝에 (2)
조강선의 시선이 잠시 먼 하늘을 향했다.
무언가 답답한 응어리 같은 것이 가슴 한구석에서 느껴지며 무게도 없는 한숨 호흡조차 무겁게 느껴졌다.
“조 형과 주백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소이다.”
“약속대로 3개월 후에 다시 돌아간 그 비처에서 자네가 남긴 서신을 우리도 보았지. 원건에 대한 죄책감과 속죄의 의지를 토로하는 짧은 글귀에서 자네가 우리의 인연을 벗어던지고 은거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네. 우리는 자네와 단용후의 인연을 몰랐으니까. 한 세월 주백자와 함께 그의 도가공부를 배워 보면서 시간을 보냈네. 주백자는 원건에게 전수한 대정검결(大精劍訣)이 기실 뿌리가 무당파의 검법에 있었던 것이 원인으로 본인의 원죄가 제자에게 덧씌워진 것으로 생각한 죄책감에 그 무공을 파기하였네. 그리고 그는 무당파 도사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서 도가 공부에 전념했지.”
“주백자는 자신의 무공에 대한 욕심이 제자를 그르쳤다고 생각했나 보군요.”
“그런 셈이지.”
여기에는 주백자만의 더 깊은 사연이 있었지만, 두 사람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부분이 있었기에 더 설명이 필요 없이 공감하고 있었다.
“나는 좀 더 형식에서 탈피한 자유로운 검결을 만들고 싶었네. 그것에 대한 내 고민이 녹아든 것이 원류검결이었는데 사실 이는 방법론보다는 운동법에 가까운 것이었지. 신검합일에 함의를 두고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자유로운 동작들의 수행을 지속, 반복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접근하였는데 사실 이는 1, 2년 수행해서 익힐만한 것이 아니었지. 그때 주백자의 도가 공부는 신선술로 발전하고 있었는데 욕심을 버리겠다 했지만, 내 이론에 흥미가 생겨 결국 기의 운용 흐름을 검결에 맞게 자연스러울 수 있도록 설계하여 주었지. 후후! 결국, 내 이론을 통해 자기 욕심을 다시 해소하려던 것이지.”
그때의 상황이 잠시 생각난 조강선이 피식 웃었다.
조강선의 그러한 시도는 하나의 무예가 완성의 단계로 나아가는데 지평을 연 것이었고, 주백자의 죽일 수 없는 무공에 대한 미친 열정과 그의 사상은 원류검결에 신선술까지 적용되어 전신세맥과 신선술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인간의 잠재적 능력을 자연스럽게 초월할 수 있는 검결로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이론과 수행을 직접 하면서 원류검결이 거의 완성될 때쯤에 주백자가 먼저 떠났네. 진정한 반선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어느 순간 현인(賢人) 같은 모습을 보이더니 세상을 도울 일이 없는지 찾아보겠다고 하더군.”
“허허……!”
“나도 2년 정도 더 공부하다가 길을 떠났네. 세월은 이미 수십 년이 무심히 흘러 버렸고 세상도 어느새 많이 바뀌어 있더군. 지역의 변두리로 떠돌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곤 했는데 그러다 만난 것이 진도건이란 아이였네. 10살짜리 아이가 폐허가 된 마을에 숨어 살면서 인근 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먹을 것들을 훔치고 다니는데 어찌나 몸놀림이 재빠르고 유연한지 꽤 흥미롭게 지켜봤지. 그렇게 거둬 살펴보니 원건과 같은 글자 이름이 들어가는 데다가 그처럼 좋은 몸과 운동신경을 갖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눈빛이 참 투명하고 맑아 내 눈을 사로잡았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난 어느새 녀석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고 있더군.”
이야기하는 조강선의 눈빛과 표정엔 활력이 넘쳐흘렀다.
그때의 기억은 그의 인생 통틀어서도 지음들과 함께 원건을 가르칠 때만큼 즐거운 기억이던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변도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비슷한 기억을 떠올린 것이리라.
“정말 정신없이 세월을 보냈네.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던 도건은 내 훈련을 믿고 따라와 주었고 나도 가르칠 맛이 나서 몹시 즐거웠지. 그렇게 5, 6년을 아무 생각 없이 제자만을 보면서 시간을 보낸 것 같네. 그러다 어느 날 도건의 부모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고 폐허로 만든 도적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을 접했네. 조사를 해 보니 화아문(火芽門)이란 간판을 달고 문파를 세웠는데 문제는 놈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네. 마치 원건이 폭주한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유사 증상을 보이는 것이었네.”
미소 띤 얼굴로 얘기를 듣고 있던 유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런 그의 표정을 슬쩍 살피며 조강선이 말을 이었다.
“몇 놈을 붙잡아 심문하니 홍문단(紅門丹)이란 걸 복용하면 내공이 증가하여 무공이 강해지지만, 약한 주화입마 증상으로 폭력성도 증가하는 부작용을 얘기하더군. 자네는 이 얘기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있는가? 내 생각엔 홍천환의 부작용과 닮아 있어서 말이야.”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맞소. 당시 염황당(炎皇當)이란 곳에서 단용후와 교류하면서 홍천환과 비슷하지만, 효과 측면에서는 약한 제조법을 받아가 시험했던 것을 기억하오. 화아문도 아마 도적들을 제압한 후에 무공증진을 미끼로 꼬드겨서 만든 문파일 것이오.”
염황당에서 비롯된 것이니 불씨라는 뜻으로 문파 이름을 만든 것이었다.
“그랬었군.”
“추억 얘기 편하게 듣나 했더니 이거 심문을 당한 기분이오.”
“허허……. 이거 자네를 불편하게 했군.”
“어차피 조 형이 날 찾아온 것은 대화하면서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소. 중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 때문이지 않소?”
“그렇네. 자네의 위치를 추적하면서도 마교인들을 감시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전격적으로 움직임들을 보이더군. 그래서 더더욱 자네에게 묻고 싶었지. 이런 것이 최선이냐고?”
유변이 고개를 숙였다.
가만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무언가 생각을 거듭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고 조강선을 쳐다보았다.
“조 형이 또 다른 제자를 통해 속죄하려 했지만, 나의 죄책감은 그런 수준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소. 나의 의술과 약제술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찾을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난 서장까지 건너가 단용후를 찾아갔었소. 어렵게 찾아 만난 단용후는 나를 기억하고 아주 반가워하는 그에게 나는 홍천환의 문제를 제기했지. 천혼제정대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그는 인정했소. 그리고 제대로 성공한 사람이 나밖에 없다며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더이다. 마기의 폭주를 막을 방법을 연구해 달라고.”
단용후를 만나 그에게 강력하게 항의했을 때, 그가 눈물을 흘리며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털어놓았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힘에 대한 솔직한 갈망과 이의 연구 결과들이 이런 부작용으로 나타났을 때, 그는 그것을 제대로 통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스스로 기치를 세운 마도대의의 포부를 실현할 어떤 것도 시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많은 의학적 지식을 갖추었으며 무공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홍천환을 완성한 유변이 찾아온 것은 정말 둘도 없는 기회였다.
단용후의 눈물이 진심이었는지 혹은 이용하기 위한 연극인지는 지금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그의 마인 양성을 위한 영약 제조법 연구에 대한 시도는 유변이 많은 공을 들여왔던 것이었으니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 할 수 있었다.
“난 거기서 생각했소. 만약 더욱더 치밀하게 연구하여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이들을 구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원건에 대해 속죄를 하면서 변방을 떠돌며 소외된 자들에게 꿈을 실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완전히 단용후란 자에게 붙은 것인가?”
유변이 인상을 찌푸렸다.
“붙었단 표현은 나의 선택에 대한 모욕이오.”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조강선은 유변의 심기를 거슬렀음을 깨닫고 사과하려 했지만, 말을 더 잇지 못하였다. 그의 고개가 돌아간 방향은 뒤뜰의 출입문이 있었고 잠시 뒤에 사마월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수!”
경계심 가득한 표정과 강력한 투기.
구중궁궐인 마원당에 모르는 자가 침투할 가능성은 일도 없다고 생각한 관점이 무너졌기에 사마월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동시에 눈앞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 동안의 노인은 대체 누구길래 여기까지 나도 여태 눈치채지 못하게 침투할 수 있는 것인가? ’
그의 모든 감각으로도 감히 무공수준을 가늠해 볼 수 없는 존재였다.
스륵.
조심스럽게 일어나는 조강선의 움직임에 사마월이 움찔 놀랄 때, 유변이 그의 행동을 말렸다.
“경계를 거두어도 된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반문하면서도 사마월은 유변의 말이 고마웠다.
그는 조강선으로부터 아무것도 느낄 수도, 헤아릴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두려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흐음, 오늘은 이만해야겠군. 내일 다시 와도 되겠는가?”
“……그러시오.”
“허락해 줘서 고맙네.”
펄럭!
짧은 대답을 남기고 조강선은 사마월과 반대 방향을 향해 정자에서 뛰어내렸다.
“거긴 낭떠러지……!”
사마월이 놀란 눈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간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던 조강선이 어느새 운무를 뚫고 날아올라 건너편 수직으로 치솟은 바위산으로 건너갔기 때문이었다.
‘허공답보!’
전설로만 전해진 경공술을 두 눈으로 목도한 사마월은 순간 꿈을 꾸었나 싶어 볼을 세게 꼬집었다.
“다, 당수. 저자는 대체…….”
유변은 무심한 시선으로 구름을 뚫고 바위산을 오르는 조강선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주 옛날 나와 가장 가까웠던 친우니라. 내일은 특별한 일 없으면 들어오지 말게.”
“혹시 당수를 해하려 하지는 않을는지요? 이렇게 숨어든 이상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
“신교를 적대할 것 같긴 하지만, 나를 향해 칼을 뽑지는 않을 걸세.”
“흐음!”
“왜 싸워 보고 싶은가?”
유변의 물음에 사마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수준이 아닌 것 같습니다.”
“후후후!”
유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차분한 표정이 된 유변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금의 단 교주도 단신이라면 저 사람을 결코 당해낼 수 없을 걸세.”
사마월이 다시 한번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바라본 교주 단지운의 무공은 가히 천외천이었다. 중원의 천하오절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절대고수로 평가할 수 있는 8인의 마종주들 모두 그의 앞에 굴복하고 무릎을 꿇지 않았던가?
유변도 다시 한번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이 말을 철회할 수는 없었다. 단용후와 유변이 만들어낸 마도의 길, 그 역사의 집대성이 천마신교 교주 단지운이라는 한 인물로 완성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조강선을 마주한 그의 감상은 충분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조 형을 보니 내가 마도대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아직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 다행인 것 같소.’
밤늦게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다시 눈을 뜬 유변은 오전 동안은 서재에서 책을 읽고 약재들을 다듬으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 식사를 마칠 때쯤 밖에선 비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마원당을 후문으로 나와 뒤뜰을 바라보니 아직 조강선은 내려오지 않은 듯하였다. 하지만, 그가 나오면 금방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생각했다.
“제가 옆에 없어도 되겠습니까?”
뒤에 서 있던 사마월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후후! 네가 있으나 없으나 내 안위엔 영향이 없다. 하인을 시켜서 차를 달여오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사마월이 물러가자 유변은 선 채로 눈을 감고 잠시 빗소리를 음미했다. 그리고 우산을 펼쳐 천천히 정자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조강선이 건너편 바위산에서 허공답보로 건너왔다. 그 거리가 엄청나게 멀었음에도 유유히 짙게 끈 운무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듯한 모습이 마치 신선이 강림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유변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서 약간의 자격지심 같은 것을 느꼈다. 과거 각자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치를 생각해 보면 다소 씁쓸함이 있었다.
하지만 조강선의 모습이 과거 그가 길을 선택하며 그리던 모습이 아님은 분명했다.
‘나에겐 나의 길이 있다. 내가 그리는 미래가 있다. 그것을 위해 언젠가 당신과 싸워야 할 날도 있겠지…….’
유변은 미리 정자의 한쪽에 비켜서서 앉아 있었다. 따라서 조강선도 그 반대편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잘 잤는가?”
“덕분에 잠을 좀 설쳤소이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군.”
“조 형은 어디서 주무셨소이까?”
“바위산을 오르다 보니 하늘의 별을 감상하기 좋은 탁 트인 곳이 있더군. 거기에 누워서 잤네.”
“허허허…….”
인사를 하는 사이에 사마월이 하인을 시키지 않고 직접 차반(茶盤)을 들고 나왔다. 그는 두 번째 보는 조강선에게 가벼운 목인사를 하고는 차반을 두 사람 사이에 두었다. 유변은 찻주전자를 들어 잔 두 개에 각각 찻물을 따랐다. 찻잔에는 대추, 깨, 호두 씨 등이 들어 있었는데 구기자를 달인 찻물을 넣고 몇 분 기다리면 진하고 고소한 향이 올라올 터였다.
“개완차(盖碗茶)라는 이곳 회족(回族)들이 즐겨 마시는 차라오. 향이 아주 좋소이다.”
“이런 좋은 대접을 받을 줄 몰랐는데. 고맙소.”
조강선이 사마월을 보며 감사를 표했다. 사마월은 별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잠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유변에게 인사를 건네곤 뒤뜰을 나갔다. 대화할 때 나가 있으라 하였으니 그저 믿고 충실히 기다릴 따름이었다.
두 사람의 침묵 속에 유변은 잠시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렸다가 조강선에게 건네주었다.
“마셔 보시오.”
“흠. 좋군.”
조강선이 찻잔을 들고 코로 그 향을 먼저 음미했다. 그리고 후룩! 하고 한 모금 마셨다.
‘독을 탔을 수도 있는데 거리낌이 없구나!’
이어 찻잔을 입에 가져가면서도 조강선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힐끔 본 유변은 속으로 감탄하면서 이어 차를 마셨다.
이 차에 독 같은 것은 없었다. 어떤 독도 아마 그를 쉽게 해할 수 없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최소한 만독불침(萬毒不侵) 수준의 자기 확신이 있지 않은 이상 의심 정도는 해 볼 수 있음에도 그를 철저하게 믿는지 조강선의 행동에는 일체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조강선은 다시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유변의 말처럼 향이 참 좋은 차였다.
그는 차분한 눈빛으로 유변을 바라보았다.
“어제 내 말에 대해 먼저 사과함세. 미안하네.”
“괜찮소. 다 잊어버렸소.”
조강선은 사과로 다시 대화를 시작하고자 했고 다행히 유변은 마음을 열어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