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제10장. 인과율(因果律) (5)
“너희가 찾던 것이 이것이다.”
일월신마는 홍천환을 진도건의 눈앞에 보여 주었다.
처음으로 홍천환을 본 진도건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묘한 마력을 뿜어내며 사람의 시선을 끄는 요물이라는 생각이 앞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빛깔 고운 이 영단을 노리고 천무방을 비롯해 우리가 흘려보낸 정보에 낚여 몰려드는 놈들. 너희도 이것 때문에 내 손에 두 사람이 죽었으니 참 안타깝겠어.”
진도건이 울분 섞인 눈으로 일월신마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일월신마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너라면 이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부숴 버릴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너의 목도 베어 낼 것이다.”
“이걸 너에게 먹인다면?”
“……뭐?”
“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놀라 뒤늦게 반응하는 진도건과 그 옆에서 강력하게 항의하는 모홍도.
일월신마는 오로지 제 생각만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홍천환을 집어 눈앞에 들어 보였다.
“이렇게 보니 더욱 숙성되고 마기가 성장한 것이 느껴지는구나.”
“일월신마님!”
모홍도가 소리치자 일월신마가 그를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정말 진심이야……!’
모홍도는 더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일월신마가 이미 생각을 굳혔고 그의 결정을 뒤엎기 위해서는 교주와 태상교주 모두 끌고 와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당장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 모두 이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까.
일월신마는 과거 유변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때의 정보를 빠르게 머릿속에 정리를 끝내고는 진도건을 향해 풀어내기 시작했다.
“홍천환은 최초 3개가 완성되었다. 그중 한 개는 제작되자마자 유변이 직접 복용하고 내공증진에 큰 효과를 보았지. 그 시기에 홍천환의 마기는 아주 약했다. 그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아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지. 유변이 무당파의 파문제자와 떠돌이 검객을 만나 의기투합하고 어느 순간 공동제자를 육성해 보자라는 생각을 모았을 때 다시 원건에게 홍천환이 사용된 것은 약 20여 년 뒤였다. 초기엔 알 수 없었지만, 원건은 무림맹의 공격에 주화입마에 빠짐과 동시에 폭주가 되어 혈마가 되었지. 유변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정파의 무공을 이은 자가 마인이 되었다면 그 원인은 바로 그가 만든 이 홍천환에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유변은 절망감에 빠졌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50여 년 뒤에 홍천환은 강호에 모습을 드러냈다. 20년간 숙성된 마기가 혈마라는 존재로 탈바꿈시킬 정도였다면 70년의 세월을 받아들인 이 홍천환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쿵!
“커억!”
일월신마의 왼손이 순간 튀어나오며 진도건의 목줄을 쥐고 밀어붙였다. 숨이 막히는 고통에 표정이 일그러지는 진도건에게 얼굴을 보며 그는 진도건의 턱관절을 눌러 입을 강제로 벌리기 시작했다.
“꺼어어……!”
일월신마가 홍천환을 집고 남은 중약지와 소지로 얼굴의 붕대를 뜯어내었다. 흉물스럽게 변한 그의 얼굴이 진도건의 눈에 들어왔다. 일월신마의 눈빛에서 음흉함, 잔인함이 고스란히 전해질수록 진도건은 사지가 묶이고 목줄마저 눌린 상태로 허무하게 발버둥 쳐댔다.
“본좌조차도 한 박자 늦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너의 검을 칭찬한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과연 네가 이 홍천환을 흡수한다면 너의 검은 어떤 위력을 발휘할 것인가? 또 네 정신은 과연 홍천환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빡!
일월신마가 이마끼리 거칠게 부딪쳤다. 그의 광기가 튀어나올 듯한 이글거리는 눈빛이 진도건의 눈빛을 뚫고 감정까지 덮쳤다.
“크크크! 그리고 그런 널 천무방 놈들에게 던져 놓았을 때, 너의 검에 몇 명이나 죽어 나갈까? 고작 두 사람 죽인 날 이토록 죽이고 싶어 하는데, 네 검에 수십 명이 죽어 나간다면 너는 너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
“으가악……!”
홍천환이 열변을 토하는 일월신마의 입과 어떻게든 다물려는 진도건의 입 사이로 들어왔다.
더더욱 사악하게 빛나는 일월신마의 눈빛과 달리 진도건의 입은 다물어지지 못했다. 일월신마는 그 억지로 벌려진 입속으로 홍천환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목을 죄던 손을 푸니 자연스럽게 삼켜졌다.
꿀꺽!
“허억……! 헉! 헉!”
진도건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어뜨린 고개 아래로 침이 후두둑 떨어졌다. 묵직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명치에 이르기까지 그 이질적인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 이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결국, 저질러 버렸어……!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모홍도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 광경을 보던 촌장의 표정도 똑같았다. 모홍도가 그에게 눈치를 보내며 손으로 뭔가를 쓰는 시늉을 해 보이고 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촌장이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이곤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진도건은 불안과 공포로 머릿속을 지배당했다.
이 정도로 극단으로 몰린 경험이 그의 삶에 언제 있었던가?
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일월신마와 홍천환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인데 그것을 본인이 복용하게 되었다는 것과 일월신마가 늘어놓은 말들의 내용이 겹치면서 그야말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때였다.
트트특!
일월신마가 진도건의 옷을 뜯어냈다. 밖으로 드러난 진도건의 탄탄한 몸을 흘겨보더니 두 손바닥을 그의 가슴에 대고 눌렀다. 그리고 음양기를 진도건의 몸속에 침투시켰다.
“끄으!”
일월신마의 두 팔과 손에서 시작되어 진도건의 가슴까지 검은 기운이 스며드는 것이 눈에 확연하게 드러났다. 왼손에 닿은 가슴은 보랏빛으로 차갑게 식어가고 오른손에 닿은 가슴은 벌겋게 익어갔다. 그 순간 그것이 마치 원을 그리는 듯 진도건의 명치로 모여들었다.
“끄아아아……!”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일그러진 얼굴 속 살의에 찬 눈빛이 일월신마에게 정면으로 향했다. 그 눈빛을 받아내며 일월신마가 사악하게 웃음을 흘렸다.
“크크크! 재밌는 얘길 하나 해 주마. 네가 지금 살아 있는 이유, 네 스승이 나타나 막았기 때문이다.”
눈빛에 떠오른 살의가 흩어지며 일월신마에게 진실을 묻는 의지가 떠올랐다.
‘……스승님이라니!?’
일월신마가 그 눈빛의 변화를 인지하고 더욱 웃음이 짙어졌다.
“넌 스승의 이름을 모른다지? 본좌가 알려 주마. 너의 스승의 이름은 조강선. 본교의 대마의 유변과 무당파의 주백자와 함께 혈마 원건의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 중 한 사람이다! 놈은 본좌에게 유변과의 관계를 거론하여 제 제자에게 살 수 있는 선택지를 주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준 것을 본좌는 절대 용납할 수 없지. 어떻게 하면 갚아줄 수 있을까? 자신의 제자가 다시 한번 혈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자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자신들의 첫 제자였던 혈마 원건을 죽였던 그때처럼 또 다른 혈마가 된 두 번째 제자를 이번에도 자신의 손으로 죽일 것인가? 폭주하는 너를 분명 막으러 올 것이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도건의 표정은 고통에 일그러지는 한편에 복잡한 운명의 연결고리가 자신에게 얽혀 있음을 깨달아 점점 고통마저 잊어버린 듯한 표정이 되었다. 두 눈이 앞을 보고 있음에도 초점이 흐려져 일월신마의 얼굴을 보는 것인지 혹은 그 너머의 혼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일월신마의 얼굴에 마침내 웃음기가 사라지며 싸늘한 표정만이 남았다. 그 표정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너를 혈마로 만들어 주마.”
으득!
까가가각!
“으그그극…. 크아아아아아!”
* * * *
청해 서녕.
수없이 솟아오른 산봉우리들 속 광활한 고원과 거대한 청해호수 옆에 세워진 도시. 높지 않은 성벽과 전각들과 한족(漢族), 강족(羌族)이 뒤섞여 다양한 문화적 색채를 보여 주는 청해 최대 도시였다. 중원 황실의 권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여 지금은 음지로 천마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도시이기도 했다.
성벽을 나와 청해호 방향으로 더 나아가다 북쪽 산지로 틀면 거대한 청의향(靑醫鄕)이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권력자나 부호들이 병증 관리를 위해 주로 이용하는 의원들의 마을이었다. 그리고 그 마을 가장 깊숙한, 기암괴석(奇巖怪石)과 울창한 산림, 청해호의 지류가 닿는 절경을 품어낸 곳에는 마원당(魔原當)이라 불리는 거대한 전각이 있었다.
마원당에는 어떤 병이라도 고칠 수 있는 신의(神醫)가 산다는 청해의 풍문이 있었다. 서녕의 전임 태수가 불치병에 걸려 죽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가 마원당의 당수 의술에 따라 20년의 생을 더 누리고 마감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소문의 주인공은 바로 천마신교의 대마의 유변이었다.
마원당 뒤뜰의 정자에 앉아 가만히 자연의 바람을 쐬며 명상을 하는 유변의 모습은 사람들이 신의라 부를 정도로 무언가 신성한 기풍을 느낄 수 있었다. 용모가 특이한 것이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얗게 셌어도 특이하게 조금 길게 자란 눈썹이 젊은 사람들의 것처럼 검었다. 주름 깊은 얼굴은 평온한 인상이었다. 두꺼운 양모로 만든 청포(靑袍)로 몸을 덮어 가부좌를 튼 유변의 중심으로 둥그렇게 펼쳐져 있으니 그 모습이 썩 아름다웠다.
“당수.”
40대 중후반 중년인의 얼굴로 붉은색의 장포를 입은 무인이 뒤뜰로 들어와 유변을 불렀다.
“무슨 일이냐?”
“모홍도님 편에서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유변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무인을 바라보았다.
사마월(司馬月)이란 이름의 사내로 유변이 제작한 명천단과 태상교주 단원진이 직접 무공을 가르쳐 육성한 자로 사실상 유변을 대신해서 혈마종의 무력을 대리 통솔하는 위치의 인물이었다. 그의 실력은 검강마저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그의 주된 임무는 유변을 보호 및 보필하는 것이었다.
유변 본인도 평범한 인간의 수명을 초월한 생을 누린 것에 맞게 그 무공이 막강하다 할 수 있었지만, 다른 마종주들에 비하면 다소 부족하니 사마월 같은 사람을 가까이에 붙여 두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태상교주의 포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유변이 천마신교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특별한 것이었다.
“가져오너라.”
사마월은 손에 든 서신을 유변이 내민 손에 올려놓았다. 유변은 그것을 가져가 펼쳐 안에 적힌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하다가 펼친 서신 그대로 사마월에게 다시 넘겨주었다. 사마월도 안의 내용을 읽고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일월신마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실까요? 진도건이란 자는 또 누구고…….”
유변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홍천환의 존재가 세상에 다시 드러나는 것은 그로서도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 규합된 혈마종의 힘과 그 잠재력을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상징적인 인물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동감하여 홍천환을 찾는 일을 허락한 것이었다.
정확한 위치는 유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종남산이란 것만 기억하지, 그 비처의 위치는 특정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다만 생각지 않게 중원무림은 이미 홍천환의 존재를 눈치채고 몇 년 전부터 움직이고 있었다는 정보는 천마신교에게 호재였다. 홍천환을 회수함과 동시에 그것을 이용한 함정을 짜고자 했었는데 먼저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천마신교 중심의 모든 인물이 마도에 하늘의 뜻이 닿아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일월신마는 단 태상과 마도대의를 함께 맹세한 자다. 기다려 보자꾸나. 그의 결심이 이미 선 상황이라면 전격적으로 움직일 테니 어쩌면 당장 내일이라도 다음 소식을 보내올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만 가 보거라. 난 명상을 좀 더 해야겠구나.”
“예.”
사마월은 순순히 물러났다.
대마의의 신변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지만, 천마신교의 세가 가장 큰 곳 중 하나인 이곳에서 유변이 누군가의 위협을 받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청의향이 의원들의 마을이지만, 하나같이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었다. 또 혈마종에 입교한 고수들이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으니 구중궁궐(九重宮闕)의 삼엄함을 자랑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사마월의 생각은 한 사람으로 인해 완전히 틀리게 되었다.
청의향으로 날아든 비둘기를 따라 마을 속으로 스며들 듯 들어온 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런 기척도 없이 사마월이 오고 간 문의 지붕 위에 팔짱을 낀 채 서서 유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조강선이었다.
마치 언제 그곳에 있었냐는 듯 완벽하게 지워졌던 존재감은 사마월이 뒤뜰에서 떠나고 잠시 뒤에 서서히 유변의 감각에 스며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감겼던 유변의 눈이 떠지며 조심스럽게 시선을 올리니 뒤뜰 후문 지붕 위에 오랜 친구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오랜만일세.”
언제나 평정을 잃지 않던 유변의 눈동자가 그 말처럼 오랜만에 가늘게 떨렸다.
오랫동안 듣지 않아 잊은 줄 알았건만, 조강선의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