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제10장. 인과율(因果律) (4)
50명 남짓 사는 작은 마을에 의원이 있는 것이 드문 일이긴 했지만, 만약 그렇다 한다면 이 마을에서 의원이 갖는 권위라는 것은 사람 생명을 살리는 일 특성상 촌장과 같은 권위를 갖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런 상식과는 별개로 이 마을 사람들 다수가 혈마종의 교도들이었기 때문에 현재 그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대마의 유변의 제자인 모홍도가 대우받는 것이기도 했다.
해가 저물고 사위에 어둠이 깔리며 시계가 짧아질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은 네다섯 명씩 의방에 모여 모홍도의 진찰을 받았다. 다만 그것은 보통의 건강 검진이나 병증 진료는 아니었다. 내공의 흐름을 점검하고 체내에서 어떠한 불협화음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침술과 추궁과혈(追宮過穴)을 통해 제자리로 돌려놓고 더 발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런 과정이 발생한 원인은 대마의 유변이 개발한 두 가지 영약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체질을 개선하여 마공을 익혀도 마기에 의한 정신잠식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호하는 명현단(明玄丹)이었다. 검은색을 띠나 영롱한 빛마저 담아내는 유광의 환단이었는데, 원건의 주화입마가 그에게 안겨 준 정신적 충격이나 마음의 빚은 상당히 큰 것이어서 이런 영약을 개발한 것이었다.
마공은 성장이 빠르고 직접적인 힘의 표출작용이 많아 강력했지만, 수명이나 정신을 갉아먹는 반대급부가 심하여 주화입마라는 반작용이 존재했다. 유변은 이것을 막기 위한 단약과 의술을 개발하여 마정보화감(魔精補和監)이라는 의서를 편찬하였고, 이것을 천마신교에 합류한 의원과 일부 무인들에게도 보급하여 안정적인 마인 양성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모홍도도 혼란스러운 심경을 품고 천마신교와 접촉했다가 유변의 의서를 접하고 크게 감탄하여 현재까지도 품에서 놓지 않고 탐독하는 상황이었다.
모홍도의 이런 진료는 한 시진째 이어지고 있었고 이제 막 끝을 보고 있었다.
“휴우!”
마지막 한 사람의 추궁과혈과 침술 작업을 마친 모홍도가 한숨을 쉬며 이마의 땀을 닦아 냈다. 이 작업도 사실상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으니 이 마을에 있는 교도들 모두 명현단 복용에 대한 보신체화 과정이 끝난 셈이었다.
‘내일 여섯 명만 몰아서 마무리 지으면 끝나겠군.’
모홍도는 침상에 누워 조용히 운기조식하는 교도들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까지는 마공 수련자는 일정 경지에 오르지 않으면 은연중 드러나는 마기를 통제할 수가 없어서 접하는 사람들에게 위압감, 위화감, 불쾌감 등을 전달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유변이 제조한 명현단과 마정보화감에 따르는 의술의 관리를 1년 이상 꾸준히 받으면 그렇게 평상시에도 마기가 표출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능했다.
교도들이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이 마을을 세워 정착하고 또 다른 도시들에도 녹아 들어갈 수 있었던 결과에는 유변의 공로가 가장 결정적이었다 할 수 있었다. 이런 작업들이 이미 수십 년간 진행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마인이 양성되고 다른 종교, 집단을 통합하면서 세를 불려 왔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모 의원님.”
촌장이 의원에 들어와 부르자 모홍도가 땀을 닦다 말고 그를 보았다.
“일월신마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어서 가자.”
모홍도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월신마가 계획을 따르지 않는 행동을 보인 것에 대해 신경이 쓰여 밤잠을 설치기까지 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얼굴엔 심통 가득한 표정이 그대로 떠올라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홍도야.”
“일월신마를 뵙……!”
서둘러 달려가 일월신마를 맞이하던 모홍도가 인사를 하다말고 놀라 멈춰 섰다.
일월신마가 평소의 깔끔한 옷차림을 선호하던 모습답지 않게 옷을 제대로 여미지 않고 대충 걸쳐 입은 모습은 완전히 반대되는 것임에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몸통을 붕대로 칭칭 감은 모습도 놀랍지만, 얼굴까지 같은 상황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떻게 이런…….”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놀라 모홍도의 입이 쉽게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이미 일월신마는 예상하였기 때문에 그저 껄껄 웃을 뿐이었다.
“내 한 놈 붙잡아서 보내지 않았느냐?”
“누구……, 에엥!?”
잠깐 미간을 찌푸리던 모홍도의 얼굴에 다시 놀란 빛이 가득했다.
지하실에 묶여 있는 진도건의 모습이 잠깐 떠올랐지만 이내 머리를 도리질 치며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그는 일월신마가 농담한 거로 생각했다. 그는 바로 홍천환에 대해 따질 생각으로 서둘러 왔음에도 일월신마의 모습이 워낙 충격적인 탓에 당장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 아무튼 의원으로 들어오십시오. 제가 한 번 봐야겠습니다.”
“이미 치료 다 했네.”
“어디 동네 돌팔이와 저를 비교하려고 하십니까? 정말 제대로 조치했는지 직접 봐야겠습니다. 당장 따라오십시오.”
모홍도가 바로 앞에서 으르렁거리고는 휙 몸을 돌려 가 버렸다. 그 모습에 일월신마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리면서도 그 뒤를 순순히 따라갔다. 모홍도의 의원으로 들어가니 아직 다섯 명이 운기 중이어서 일월신마는 의자 하나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모홍도는 일월신마의 상의를 벗기고 얼굴과 상체의 붕대를 조심스럽게 벗겨 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상처들이 촛불 아래 모습을 드러나자 모홍도가 다시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잠깐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으신 거 맞지요?”
“이놈의 새끼가.”
“……죄송합니다. 허, 이거 참. 아무리 봐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일월신마가 누구인가? 중원에서는 유명하지 않았어도 서장에서는 일월교의 이름은 천마신교 이전 가장 강력한 문파이자 포달랍궁의 불교 다음가는 종교집단였다. 특히 일월신마라는 이름은 천마신교에 복속되기 이전부터 일월교주를 가리키는 별호로서 유명했다. 오히려 현재 다른 여덟 마종주(八魔宗主)들의 명칭이 뒤에 신마(神魔)로 정해진 것은 역시 일월신마의 힘과 위세를 시사하는 바가 컸다.
“봤으면 붕대나 묶어라.”
“아, 알겠습니다. 근데 누구를 상대하셨길래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모두 베인 상처인 것을 보니 혹시 백령신검 강정학이라도 상대하신 것입니까?”
“비무제로 사패련에 있을 자가 신선도 아니고 종남산까지 하루 이틀 만에 어떻게 오느냐? 천무방 장로 노지신이다. 본좌 손에 죽긴 했지만, 만만치 않은 상대였지. 이 상처가 그자의 솜씨다.”
“그럼 다른 상처들은…….”
“진도건. 그놈 솜씨다.”
“아, 아니…… 농담이 아니란 말입니까?”
“쯧.”
모홍도는 붕대를 다시 감으면서도 여전히 믿을 수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일월신마의 상처는 말 그대로 죽음에 닿아 있는 상처였다. 그렇게 만든 자가 이런 작은 마을 지하실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 현실감이 없을 정도였다.
“놈은 잘 묶어 두었느냐?”
“예.”
얼굴의 붕대 작업이 끝나자 일월신마가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
“보러 가자. 앞장서거라.”
일월신마는 모홍도를 앞세워서 촌장 집으로 향했다. 집 뒤뜰에 풀줄기들을 엮어 만든 덮개를 들추자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끼익!
“크하하하핫!”
지하실에 모홍도를 따라 내려간 일월신마가 침상에 누워 사지가 묶여 있는 진도건의 모습을 보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진도건이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보고 있었다.
“크크크…….”
일월신마가 가까이 다가가 실소를 흘리며 진도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진도건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이리 내려다보는 것은 내게 싸움의 기쁨을 선사한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 터.”
구궁!
일월신마는 돌침상 양쪽에 손을 대더니 괴력을 발휘하여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벽에 기대어 세워 버렸다. 진도건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사슬이 짧진 않아서 다행히 발이 땅에 닿긴 했지만, 몸이 아래로 쳐지면서 족쇄가 밀려 손목, 발목을 쓸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붙잡혀 있는 것을 보니 지난날 싸움이 기억나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본좌 평생에 걸친 싸움 중에 너와 같은 자는 없었다. 너도 이 꼴을 보니 제법 뿌듯해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냐?”
“뿌듯할 게 뭐가 있겠소? 당신 목을 베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오.”
“너의 내공이 좀 더 강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어떠냐? 천마신교에 가입하는 것이. 본교의 힘이라면 널 1년 안에 본좌의 위치까지 끌어 올려 줄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정말 본좌의 목을 벨지도 모르지. 솔깃하지 않으냐?”
“어불성설(語不成說)이오.”
“뭐 그렇게 대답할 줄은 알았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모홍도는 일월신마의 상처가 정말 진도건이 만든 것 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 검술이 뛰어나도 일월신마는 절대고수라고 할 만할 텐데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도대체 어떤 경지에 이르렀길래…….’
모홍도도 문득 진도건의 검술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월신마의 말을 믿는다면 아마 자신은 반응도 하지 못하고 목이 달아날 쾌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공이 약해서 일월신마의 목을 베는 데 실패했다는 말.
일월신마는 1년 안에 자신의 위치로 끌어올려 줄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마공의 특성과 명천단(明天丹)을 생각해서 얘기한 것이 분명했다. 명현단이 체질을 바꾸고 마공 체득에 도움을 주는 영약이라면 명천단은 순수하게 내공 증대를 목적으로 만든 것이며 주화입마의 위험성도 최소한으로 줄인 영약이었다. 마의사 유변의 필생의 역작이라 할 수 있기도 했다.
‘그만큼 탐이 날 만한 재능이라는 건가.’
그 명천단이라면 분명 일월신마의 묘사를 참고했을 때 그와의 차이를 메우기에는 충분할 것이 분명했다.
“생각보다 욕심이 없나 보군. 천무방이 당대 사파 최고의 문파이지만, 천마신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새로운 길을 받아들이고 배움의 시각을 넓힌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일월신마가 굳이 진도건을 설득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의 재능에 진심으로 감탄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관심 없소.”
“혼자 움직이는 것을 보고 소속감이 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쉽군.”
진도건이 천무방에 대한 소속감이 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를 받아준 것은 둘째치고 이제 천서은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단계에 이르렀으니 이젠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곳이었다.
반면 일월신마는 진도건의 반응이 아쉬워 입맛을 다셨다. 물론 그도 진도건에게 입교를 계속해서 설득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이미 이곳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 동안 진도건을 어찌할지에 대한 계획은 모두 마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진도건이 신교에 입교한다는 만일의 경우가 발생할 때 그도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확인한 것이었다.
문득 일월신마는 무관심으로 대응하는 진도건에게 오기가 조금 생기는 것을 느꼈다. 곧 심술 맞은 생각이 떠오르니 이내 그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후후! 그래서야 어디 복수를 하겠느냐? 벌써 두 사람이나 내 손에 죽었거늘.”
“그게 무슨 소리요?”
처음으로 진도건의 눈빛이 흔들렸다.
“노지신. 꽤 좋은 적수였다.”
철컹! 쿵!
족쇄와 사슬이 아니었다면 앞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이 몸부림쳤다. 그 힘에 밀려 침상이 잠깐 벽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부딪쳤다.
이를 악물고 미간은 찌푸려졌으나 그 눈썹의 흔들림이 묘하다. 떨리는 눈동자엔 분노와 불신과 슬픔이 동시에 공존하니 그의 복잡한 심경이 여실히 드러났다.
“……사실이냐?”
“사실이다. 그런데 말이 그새 짧아졌군. 화가 단단히 났어. 크크크!”
진도건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강호의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생사의 갈림길 앞에 서기 마련이고 언제나 죽음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만 한다. 그것은 진도건 본인도, 노지신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곤 하지만, 가까운 지인의 죽음은 때때로 강한 분노를 일으킨다. 그리고 이는 슬픔과 분노가 혼재되어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되는 이유가 된다.
노지신은 천무방에서 존경받는 장로였고 진도건과도 개인적으로 다른 두 장로에 비해서는 꽤 친근한 관계를 유지했던 무림의 선배였기 때문에 슬픔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분노는 이미 나자룡의 복수를 이유로 크게 한번 쏟아 낸 바 있었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몰랐다.
푹 숙인 머리 아래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일월신마의 짓궂은 듯한 표정이 살짝 불편한 것을 본 것처럼 바뀌었다.
그가 기대한 것은 더욱 강렬한 분노. 그러나 눈물은 그가 원하는 것에 반하는 반응이었다. 인정(人情)의 가치를 인정은 하지만, 눈물을 따르는 슬픔이라는 감정은 그가 별로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화가 나지 않느냐?”
“…….”
“내게 복수하고 싶지 않으냐?”
“……검이라도 손에 쥐여 줄 것인가?”
“크크!”
진도건의 냉소적인 대답에 일월신마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일월신마는 장포 옷자락 안쪽에 손을 가져갔다. 뭔가 뒤적거리는 시늉을 하더니 빠져나온 그의 손에 작은 목함이 들려 있었다. 두 손으로 목함을 열자 그 안에 영롱하면서도 묘한 마력의 빛을 은은하게 뿜어내는 작은 환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홍천환!”
옆에서 그 행동을 무심히 지켜보던 모홍도가 놀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