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47화 (47/432)

47화 - 제10장. 인과율(因果律) (1)

무영각은 천마신교가 창시되기 전부터 교주 일가를 모시던 자들이었다. 교주가 곧 무영각주였으며 무영각에서 육성된 자들을 통틀어 ‘무영(無影)’이라고 불렀고 개개인은 외자 이름을 부여하여 불렀다.

그들은 대부분 평범한 외모나 신체조건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에나 녹아들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 게다가 환상무형술은 설령 절대고수라 불리는 자들이라도 반경 다섯 장 안에서 감지해 낼 수 있는 자들은 손에 꼽았다. 역으로 무공이 약한 자라면 바로 눈앞에 서 있어도 시야가 왜곡되는 기미 정도만 느낄 수 있을 뿐이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최고의 살수이기도 했다. 물론 교주가 직접 육성하였으니 무공도 뛰어났다.

국은 추정 나이 50세가 넘어 무영을 통틀어서도 나이가 많은 편이었고 그만큼 실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만큼 천마신교의 창시 이전의 마도 탄생도 그 역사적 비화를 대략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국은 일월신마 앞에 나타난 노인의 정체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수염과 머리카락 중앙은 짙은 흑발에 좌우의 모발은 백발을 단정하게 정리한 모양새와 중장년 세대의 위엄 있는 외모적인 특징, 어딘가 신비로운 눈빛을 가진 노인이었는데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노인은 일월신마가 진도건을 죽이려는 찰나 그의 눈앞에 나타났는데 일월신마는 끝내 살수를 쓰지 못했다. 두 사람은 무언가 대화를 나누었고 일월신마는 국을 불러 진도건을 데려가게끔 지시하였다.

그렇게 해서 국은 혼절한 진도건을 등에 업고 산을 내달리고 있었다. 그가 달려가기 시작하고 얼마 뒤 폭음이 터져 나왔으니 아마 일월신마와 그 노인이 충돌한 신호일지 몰랐다.

‘연이가 지켜보고 있으니 결과를 들어보면 되겠지. 직접 보고 싶긴 한데.’

국은 경신술을 최대한 전개하여 빠른 속도로 산에서 내려갔다. 쉬지 않고 달리는 그의 목적지는 명확했다.

이미 홍천환을 회수하기 위하여 특정 위치를 점거하여 일월신마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곳까지 반 시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산을 모두 내려오고 난 이후로도 숲을 좀 더 달려갔을 때 국의 앞에 나타난 것은 십여 명이 꾸린 야영지였다. 작게 모닥불을 피운 채 쉬고 있었던 그들은 국이 웬 남자를 업고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구, 국? 일월신마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책임자가 누구냐?”

퉁퉁한 체형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소인 장룡(張龍)입니다.”

국은 업고 있던 진도건을 땅에 내려놓았다.

“이자를 데리고 모홍도(牟紅道)가 있는 진영으로 옮겨 가거라. 일월신마님의 명령이시다.”

“저흰 홍천환을…….”

“일월신마께서 가지고 직접 가겠다 하셨다. 이 자는 내상을 입고 점혈로 제압해 둔 상태이긴 하나 검술이 매우 뛰어나니 활개를 치게 두면 낭패를 겪을 수 있다. 반드시 사지를 봉인시켜야 한다. 내공이 약하니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쓸데없는 감시의 눈을 피할 수 있도록 주의하거라.”

국은 지시를 모두 마치고 자리를 떴다. 다시 일월신마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국이 사라지자 장룡은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단 팔다리를 묶어라.”

별도의 노끈을 챙겨 오지 않아서 두 사람이 허리를 조인 천을 풀어 진도건의 두 팔을 뒤로 넘겨 묶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은 모닥불에 흙을 덮어 불을 끄고 주변 흔적을 정리하고 있었다.

작업이 마무리되자 장룡은 진도건을 한쪽 어깨에 들쳐 메고 부하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새벽길은 아무래도 인적이 아예 없다시피 하여 그들은 빠르게 직선 길로 달리는 것을 선택했다. 당장 이 시간에 말을 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을에 잠입해 들어간 자들의 도움을 빌릴 수도 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매복의 근거지로 활용되어야 할 곳들이었기 때문에 철저히 경신술로 빠르게 달려갔다.

그들이 관도(官道)와는 멀리 떨어진 감숙과 섬서 경계지역의 작은 마을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약 두 시진이 조금 못 미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이 이름 없는 작은 마을은 천마신교가 오래전부터 미리 장악해 둔 마을이어서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장룡 등은 말 그대로 인적 없는 새벽 시간대를 활용하기 위하여 최대한 빠르게 달려온 탓에 그들 모두 진이 빠질 대로 빠진 상황이었다.

불침번으로 순찰을 하던 교도는 장룡을 발견하고 마을에 가장 큰 초가집으로 향했다. 그의 부름에 잠에서 깨어 일어난 모홍도는 투덜거리면서 대강 의원복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미리 보내 두었던 장룡과 교도들임을 알아보았다.

“쫓아온 자는 없었느냐?”

“헉헉……. 새벽 시간이어서 관도를 벗어난 개활지들 중심으로 움직였으니 숨어서 쫓아온 자들은 없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홍천환은?”

“일월신마께서 가져오신다고 합니다.”

모홍도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월교를 거느린 일월신마는 교주와 종주라는 지위에 맞지 않게 워낙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이어서 항상 어디로 튈지 몰랐다. 그만큼 개인적인 행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홍천환의 추적과 회수 임무를 교지 받은 것이었다.

원래라면 일월신마는 장룡에게 홍천환을 건네주고 다른 싸움이 일어나는 곳으로 길을 나섰어야 했다. 그러나 장룡이 홍천환 대신 엉뚱한 놈을 달고 왔으니 과연 홍천환을 제대로 들고 올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놈은 뭐냐?”

“일월신마께서 사지를 묶어 잘 데리고 있으라 하셨습니다. 점혈로 제압해 둔 상태인데 검술이 매우 뛰어나 풀려나면 골치 아플 것이라고 합니다.”

“쯧! 다 죽어가는 놈이 무슨 골치 아프게 한다고.”

모홍도는 땅에 널브러진 진도건을 발로 툭툭 찼다. 그는 이리저리 몸을 기울이면서 진도건의 상태를 훑어보았다. 산발한 머리카락에 입고 있는 옷은 멀쩡한 구석이 없었고 여기저기 묻어 있는 핏자국이 그가 치른 격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모홍도는 이 사내가 일월신마와 싸움을 치렀음을 알았다. 칼날에 의한 상처보다 기공에 의한 폭발에 당한 흔적이 대다수였기 때문이었다.

모홍도는 쪼그려 앉아 진도건 손목의 맥을 짚었다.

‘정말 음양기를 침투시키진 않았군.’

일월신마는 이따금 적의 최후를 선사할 때면 직접 내력을 주입해 상대방의 진기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체내 기의 흐름이 완전한 혼돈 상태가 되고 주입된 음양기는 충돌을 반복하여 마기를 뿜어내니 내공이 약한 자는 검게 변색하여 괴사(怪死)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일월신마가 이 남자를 살릴 생각이었다는 것을 음양기를 침투시키지 않은 것으로 증명이 된 셈이었다.

“이놈 천무방 천혼당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진도건의 의복이 엉망임에도 누군가가 그의 소속을 알아보고 얘기해 주었다.

모홍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천무방이 제일 먼저 불 속으로 뛰어든 나방이었군.”

“어찌할까요?”

“지하실에 가두고 사지를 봉해 두어라. 일월신마가 알아서 하신다니 쓸데없이 건들지 말고. 그분 심기 건드렸다가 시체가 되면 부모도 알아보지 못하니까 시키는 대로 해.”

“큭큭, 알겠습니다요.”

모홍도의 말을 알아들은 교도가 웃음을 흘리며 진도건을 들쳐 멨다.

모홍도가 있는 마을로부터 남쪽으로 오십여 장 떨어져 있는 곳에 작은 수림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장룡이 마을에 진입한 시점에서 한 노인이 마을이 잘 들여다보이는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고 있었다.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마치 나는 듯 가볍게 가지와 나뭇잎을 밟고 뛰어오르더니 가장 높은 지점 부근의 나뭇가지에 걸터앉았다. 반백의 머리카락이 특히 눈에 뜨이는 노인은 바로 진도건 생존을 두고 일월신마와 대치했던 노인이었다.

“잘 도착했군.”

노인은 장룡이 진도건을 모홍도에게 인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곤 나뭇가지에 드러누웠는데 큰 흔들림도 휘청임도 없이 마치 침상에 누운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의 손에는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는데 검집에서 뽑아내자 끝부터 한 뼘 정도가 부러진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의 호수와 가까운 검신에는 ‘탈명’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바로 진도건의 검이었다.

노인과 일월신마의 대결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애초에 어느 정도 대화로 일월신마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었던 탓에 어차피 진도건을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일월신마의 호승심 때문에 겨루게 되었지만, 결국 몇 합 주고받지도 않고 노인의 무력시위로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노인은 열 장 밖에서 쫓아오는 연을 일찍이 쫓아내고 국이 가던 길을 추적했다. 아무리 경신술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자연에 새겨진 사람의 기흔(氣痕)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무림인이라도 쉽게 보지 못하는 일종의 생기(生氣)의 흐름에 따라 새겨진 발자취 같은 것이어서 노인처럼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세 손가락을 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조차도 한 사람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혹시 천하에 그들과 같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의인화하여 얘기한 것이었다.

노인은 검을 유심히 보았다.

평범한 철검.

‘탈명’이라는 글귀는 단조 금형으로 뜬 것이 아니라 마치 강기 같은 것을 이용해 강제로 새긴 모양이었다.

천무방이라 하였으니 아마 방주쯤 되는 인물이 직접 새긴 것일지도 몰랐다.

손잡이를 감싼 검은색 가죽끈은 손에 부드럽게 잘 감겼다. 손때가 묻고 땀이 배어 그 색이 바래기도 하고 헤지기도 하였지만, 그만큼 길이 잘 들어 있어 주인의 노력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검신도 멀쩡하진 않았다. 검날은 멀쩡한 곳을 보면 잘 벼려져 있었지만, 직전의 격전으로 이가 빠진 부분이 많았다. 배면도 온갖 미세한 상처가 셀 수 없이 많았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제 주인의 악전고투를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손을 보호하는 호수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도건아, 네 검의 거창한 이름치고는 험하게 성장했구나.’

노인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반백의 위엄 있는 중년의 용모와 신비로운 눈동자를 가진 노인인지 중년의 나이인지 헷갈릴 정도의 그는 바로 진도건의 검술 스승이었다.

제자에게 이름조차 알려 주지 않아 그저 사부님, 스승님이라고만 들었었는데 현재 그의 이름과 존재를 제대로 기억하고 친분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현세에 살아 있는 사람이 단 두 사람뿐이었다. 우연히 누군가를 돕거나 어떤 스치는 인연이 생겼을 때, 그 누군가가 그에게 이름을 물어본다면 그는 그저 노야(老爺)라고 불러 달라할 뿐이었다.

천무경이 궁금했던 원류검결을 사사한 스승이 바로 이 노인이었는데 사실 노인은 진도건이 이 정도로 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진도건의 재능이 비범한 줄은 알았다. 그러나 원류검결 자체가 무림 세간의 상승무공이라 분류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그에게 특기할만한 내공심법을 전수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가 지켜본 진도건의 10대는 그저 나이대치고는 검을 잘 다루고 운동능력이 좋은 그런 청소년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원류검결이 아무런 특징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원류검결은 검을 찌르고 휘두르는 모든 동작을 하는 데 있어서 진기의 흐름이 절대 막힘이 없도록 극한의 자유로움을 부여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또 검결과 호흡을 일체화시키면서 축기도 가능하게 하였는데 이때 호흡에 의한 축기가 단전에 쌓이는 것이 아니라 전신세맥으로 뻗어 나가 신체를 보다 강하게 다져 주는 효과가 있었다. 무엇보다 원류검결이 뛰어난 한 가지 특징은 아주 장시간 수련하였을 때 사람의 선천진기(先天眞氣)를 성장시켜 준다는 점이었다.

선천진기의 성장은 달리 말하면 영혼, 신(神)의 성장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어떤 유혹이나 사술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갖게 해 주며 그 어떤 사특한 기운도 그 사람을 지배하거나 오염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그 수련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 효과가 배가 되었다. 이는 어찌 보면 신선술(神仙術), 성불경(成佛經)과 같은 것이다. 평범한 인간이나 무림인이 선천진기를 강화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런 측면으로 잠재력은 무한하다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본 진도건이 기절한 상태여서 인사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노인은 제자가 원류검결을 단 하루도 놓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신은 10년 전보다 훨씬 단단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은 파천신공이라는, 노인으로서는 이름을 모르는 내공심법, 신공이 더해져 빠른 속도로 내공이 쌓이는 모습이었다. 원류검결과 성장한 선천진기는 비옥한 토양이었고, 파천신공은 작열하는 태양이었다. 진도건이라는 식물이 아래로는 뿌리를 단단하게 내리고 그 가지는 하늘에 닿을 정도로 뻗어 올라갈 가능성을 품게 된 것이었다.

진도건은 그것에 대한 입증을 일월신마와의 싸움에서 보여 주었다.

노인이 보고 경험한 일월신마는 가히 절대고수라 칭할 만했다. 먼 옛날 직접 경험해 본 절대고수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진도건은 초식 대결에서 그런 일월신마를 압도했다. 속도는 이미 한 수 위였으며 반사적으로 수를 읽어내는 생각의 속도도 결코 그에 뒤지지 않았다. 설사 일월신마의 마공에 검이 부러졌을 때도 한계를 시험하는 쾌검의 연사와 거대한 기공의 영역을 일점으로 파고드는, 경지를 넘어선 검술과 집념은 노인도 감탄할 정도였다.

하지만 진도건은 패배했다. 그의 검은 일월신마의 목에 닿았지만, 부러진 검 끝은 날카롭지 못했다. 게다가 마침내 일월신마에게 닿았을 때는 음양기의 거대한 압력을 온몸으로 받아 내느라 그만 혼절하는 바람에 일말의 힘도 남지 않았다. 이미 초점을 잃은 눈을 마주 본 일월신마가 앙천대소(仰天大笑)하며 여유롭게 기운을 허공에 날려 버릴 정도였다.

노인은 진도건의 모든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진도건을 떠났을 때부터 더는 그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기로 하였고 아예 잊고 살았었다. 그러나 너무나 잘 성장한 제자의 모습을 보니 그가 이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게 둘 수는 없었다. 증손주를 키운 마음으로 보살폈던 아이였다.

노인은 그렇게 해서 일월신마의 앞에 나타났고 그와의 대화 끝에 진도건의 부러진 검을 대신 들었다.

진도건을 가르칠 때도 들지 않았던 진검을 손에 쥔 일이 30년? 40년? 그 세월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오래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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