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제9장. 한계(限界) (5)
서로가 불리한 지점이 있어 쉽게 끝나질 않으니 차라리 그들의 경지와 수준에 맞게 남은 전력을 모두 끌어내어 승부를 결정짓자는 것.
일월신마가 두 팔을 벌려 손에 음양기를 집중시킨다. 거대한 기운이 응집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영역을 확산시키니 그를 중심으로 오른쪽의 풀들은 점점 바짝 말라가고 왼쪽으로는 풀들은 하얗게 얼음꽃이 피어났다. 점점 커지는 두 기운을 반경 일 장 안으로 잡아두니 한정된 영역 안에서 두 개 다른 기운이 맹렬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 안에 있는 일월신마가 멀쩡하게 서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노지신은 번뇌일단의 자세로 그의 모든 내력을 패도에 집중되었다. 도강을 형성하고 그것이 점점 커지더니 그 크기가 노지신의 건장한 체격을 가릴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작아지니 어느새 패도의 도신만을 예리하게 감쌌다. 그 패도를 두 손으로 잡고 어깨 위로 걸칠 듯 내려 금방이라도 돌진할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빛무리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노지신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일월교 교주이자 천마신교 일월종의 종주인 일월신마.
천무방의 힘을 상징하는 장로전 소속의 태원도왕 노지신.
일월혼극마공 일월천도멸옥(日月天道滅獄).
태원구패도법 태원봉신도(太元封神刀).
“흐아압!”
쿠르르르!
일월신마를 중심으로 아지랑이 가득한 열기의 일양기와 서리꽃 한풍이 몰아치는 월음기가 그를 둘러싸니 그의 모습조차 희끗희끗 보이지 않는다. 그런 그의 두 손이 막대한 기운들을 끌어당겨 가운데로 모으자 음양이 혼재되어 그를 중심으로 잿빛 죽음의 반구형 공간이 만들어진다.
폭발의 진음(震音)이 인간 영혼 밑바닥의 공포심을 강제로 끌어올리는 듯하다. 그 소리와 죽음의 기운은 보고 있는 모든 사람이 느끼는 공통된 심정이다.
퉁!
그 당사자인 노지신이 그 영역으로 뛰어들었다. 가장자리에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압력이 그를 짓눌렀다.
오로지 사문(死門)만이 있을 죽음의 영역에서 노지신은 오로지 일념에 집중하였다.
도신합일(刀神合一).
내 칼에 모든 의식과 혼을 담아 하나가 되어 휘둘러라.
콰릉!
노지신의 칼날이 영역에 닿는 순간,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베인 것처럼 일월신마의 일월천도멸옥의 영역이 반으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기와 기의 충돌로 인한 광휘(光輝)가 잿빛 영역의 틈을 뚫고 번져 나갔다.
영역의 분리가 점점 깊어지며 일월신마의 지척에 이르렀을 때 반쯤 당겨져 있던 일월신마의 두 손이 마침내 합장을 이루었다.
쿠콰콰콰콰!
혼재하던 음양기가 마침내 하나의 혼돈을 이루며 그 잿빛은 완전한 사색(死色)으로 변하고 파괴적인 폭풍은 일대를 끝도 없이 휩쓸어 갔다. 반을 가르며 뿜어져 나오던 광휘마저 삼켜질 정도이니 사방 반경으로도, 땅에서 하늘로도 위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숲에 숨어서 숨죽여 지켜보던 장학 등 네 사람은 일월신마의 기운에 노지신이 삼켜진 모습이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몰아치는 후폭풍을 눈살을 찌푸린 채 얻어맞으면서도 현장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은 이 싸움의 결과에 많은 것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승패는 둘째치고 진도건의 행방, 그들 모두의 안위 그리고 홍천환까지.
달라붙는 날파리들을 물리치고 홍천환을 회수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일이 어느새 눈 한번 깜박이니 낭떠러지로 몰아넣은 형국이었다.
직접적인 폭발에 의한 진음이 사라지고 후폭풍의 여파도 잦아들면서 장내 자욱했던 흙먼지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안으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천천히 그들 눈에 들어왔다. 일대의 토양 자체가 모두 뒤엎어져 깊은 곳은 사람 허리 높이 수준까지 지면이 움푹 파여 있었다. 이곳에서 일월신마를 마주했을 때도 일부 그런 곳이 있었지만, 이 격돌로 그 흔적마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마침내 중심부를 가리던 흙먼지가 바람에 의해 밀려났을 때, 네 사람 모두 반색했다.
멀리 있어서 분명하진 않았지만, 최초의 격돌 때의 위치를 떠올려 보았을 때 좌측의 일월신마는 무릎을 꿇고 있었고 우측의 노지신은 패도를 들고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승리의 여신이 누구 손을 들어주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겼어!”
“그래, 이겼어. 역시!”
“하아, 다행이야.”
하소정이 놀라워하며 소리쳤다. 관무영과 장우태도 감탄과 안도의 한숨을 동시에 풀어놓았다.
“가자.”
장학이 웃으며 먼저 앞으로 나서 뛰어갔다. 나머지 세 사람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 푸르던 초원이 흙더미에 뒤덮이고 움푹움푹 파여 흉물스러워진 일대의 모습이 보기 꺼림칙했던 느낌은 오래 가지 않고 그 자리를 승리를 만끽하는 환희의 물결이 파도치고 있었다.
그들과의 거리를 중간 정도 좁혔을 때였다.
장학이 갑자기 달리던 속도를 줄이더니 발걸음을 멈추고 다른 사람들도 멈춰 세웠다.
“왜 그래요?”
“무슨 일…….”
하소정이 장학을 보며 물어보는 사이 장우태도 묻는 말을 꺼내다가 멈추고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하소정도 장학의 표정을 보고 시선을 돌렸다.
“아, 안 돼…….”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부정하는 하소정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무릎을 꿇고 고개마저 푹 숙이고 있던 일월신마의 신형이 움찔거리면서 움직임을 보이더니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기다린 것처럼 노지신의 신형이 힘없이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쿨럭!”
기침하는 노지신의 입으로 꽤 많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 광경에 장학 등 네 사람 모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자, 장로님!”
네 사람이 근처까지가 살펴보는 순간 불안감이 증폭되어 절망감에 휩싸였다.
일월신마의 상체엔 기존에 진도건이 새겼던 십자 검상의 흔적 옆에 사선으로 커다란 상처가 벌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역시나 완전히 베지 못했는지 그 크기가 죽음에 다가갈 만큼 깊지 않았다. 다만 노지신의 강력한 도강이 일월신마의 몸에 도달하면서 그 상처의 주변이 하얗게 타들어 간 상태였다. 또 두 팔은 압력에 못 이겨 실핏줄이나 세맥이 터지면서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움직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꼴이 끔찍했다. 입으로도 핏물이 흘러나와 턱을 적셨지만, 그의 상태 모든 부분에서 노지신에 비교할 것은 아니었다.
노지신의 상태는 끔찍했다.
우측 두부가 한 치가량 함몰되어 그 오른쪽 눈이 압력에 터져 피눈물에 젖어 있었다. 어깨도 부러져 팔이 덜렁거리고 있는데 패도를 아직도 쥐고 놓치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강력한 근육이 지탱하고 있던 상체는 검게 변색하고 쪼그라들었다. 일부는 소멸한 것처럼 푹 파여 출혈이 상당했다. 머리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음에도 왼쪽 눈으로 일월신마를 보는 눈빛만큼 여전히 살아 있었다.
“네놈의 죽음을 반드시 받아내고야 말겠다!”
네 사람이 일제히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일월신마를 노려보는 그들 가운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크크크…….”
그의 웃음에도 힘은 없었지만, 네 사람을 돌아보는 그의 표정은 그들이 가소롭다는 의식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아서라. 내 기력이 없어도 네놈들 손에 죽을 것 같으냐? 게다가 우리 신마들에겐 언제나 감시자가 따라붙는 법이다.”
금방이라도 달려들려던 네 사람이 모두 멈칫했다. 그들이 멈칫한 이유는 일월신마의 말도 말이었지만, 그의 뒤쪽 방향 멀리 보이는 숲에서 두 사람이 어느샌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남녀로 밤중이라 구분되진 않았지만, 검회색 무복의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중 남자는 남서쪽에서 나타나 가만히 있었는데 북서쪽에서 나타난 여자는 이쪽으로 나는 듯 달려오고 있었으니 이미 거리가 꽤 가까워져 있었다.
3, 4장 거리를 일보에 달리니 한눈에 보아도 경신술의 경지가 상당한듯했다. 자세만 보아도 한눈에 만만치 않은 고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월신마님. 고생하셨습니다.”
“아아, 연(蓮)이냐? 오랜만에 좀 지치는구나. 세 사람이나 상대하니 나도 무리한 것 같아.”
“언제나 혼자 움직이셔서 그렇습니다. 이자들은 제가 정리할까요?”
“끌끌, 두어라. 일월교는 약자에게 관대한 법이니. 영웅이 떠나는 길에 울어 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마도를 걸음에 앞으로도 피 볼 일은 얼마든지 많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끌!”
장학 등이 눈물과 함께 울분을 참아내는 모습을 보며 일월신마가 혀를 찼다. 그는 걸음을 옮겨 노지신을 향해 걸어갔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노지신의 눈빛은 점점 생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이 자들은 살려 보내줄 것을 약속하지. 좋은 상대였다. 편히 가거라.”
“쿨럭! 지… 진도거…….”
“……죽어가는 마당에 부하 아끼는 마음이 대단하군. 우리가 사지 멀쩡하게 잘 데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일월신마는 몸을 돌려 발걸음을 돌려 연이라는 여자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흐으, 하아아…….”
깊은 회한의 감정이 묻어나오는 노지신의 마지막 호흡을 끝으로 그의 외눈 눈빛에 남아 있던 생명의 불씨가 마침내 꺼져 버렸다.
“장로님!”
“노 장로님!”
“흐어어엉!”
천무방 장로전 태원도왕 노지신.
향년 75세.
싸늘해지는 가을 막바지 청명한 하늘과 반월 아래 종남산 기슭 어딘가에서 마침내 긴 인생을 마감했다. 특유의 인자함으로 천무방 모든 무사에게 두루 존경을 받았으며 언제나 위험에 앞서 뛰어들어 기꺼이 방패가 되었던 남자였다. 끝내 나자룡을 잃고 진도건을 찾지 못하였으나 생존을 확인한 것으로나마 아쉬움을 덜어내고 마침내 황천의 강을 건넜다.
얼마간 걷던 일월신마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폐허가 된 초원 안에 슬픔과 통곡이 가득 찼다. 80년 넘는 삶을 살아오고 마도를 걸으며 방해가 될 만한 감정은 많이 내려놓았다. 그러나 오늘, 인생에 그의 한계를 시험한 기억 남을 적수들을 만났고, 그중 한 남자에게 작별을 고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니 잠시 뜨겁고 슬픈 감정이 미약하게나마 그의 천산 고지처럼 차가운 심장을 관통했다.
일월신마는 다시 가던 발걸음을 옮겼다.
“네가 이곳에 있는 것을 보아하니 추격에 실패했구나.”
“예, 얼마 가지도 못하고 존재를 들켜 버렸습니다.”
“과연…… 대단하군. 환상무형술(幻相無形術)을 익힌 너희를 감지해 내는 것은 나도 다섯 장 거리 안이 아니면 불가능한데 말이야. 역시 대단해.”
“아는 자입니까?”
“본좌도 확신하는 것은 아니야. 다만 저 녀석들을 기다리는 동안 곰곰이 생각하니 가능성을 점쳐 볼 만한 자들이 떠올랐다.”
“그게 누굽니까?”
일월신마가 연의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본교와도 관련 있지.”
“일월교 말입니까?”
“천마신교. 나의 일월교는 사실 중원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
“……잘 모르겠습니다.”
“천마신교 창시 비화에 관해 공부 좀 하여라. 국(菊)에게 물어봐라. 녀석은 무영각(無影閣)에 오래 있었으니 아마 알고 있겠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게다.”
그의 시선이 남서쪽 감시자가 있던 곳에 닿았다. 그 감시자의 이름은 국이었으며 모두 식물 이름의 외자 별명을 부여받았다. 그들의 출신 등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천마신교의 감시자 육성기관인 무영각의 각주밖에 없었다.
“국은 진도건을 잘 인계한 모양이군.”
“마침 가까운 곳에 대마의 어르신의 제자께서 교도들과 함께 있어서 전달했다고 합니다.”
“내가 간다고 하였고?”
“예.”
“좋다. 다른 곳들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들은 바 있느냐?”
“아직 시작 단계이다 보니 특이사항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군. 그럼 나도 홍도(紅道)에게 치료 좀 받으면서 며칠 쉬어야겠구나. 진도건을 어찌할지 생각도 할 겸. 크흐흐!”
“그 노인의 정체는 끝내 안 알려 주시는군요.”
연은 아직 20세밖에 되지 않아 다른 무영들보다 감정 절제가 부족한 편이었다. 이렇게 아주 딱딱하지만 토라지듯 투정을 부릴 때가 있었다. 보고 있으면 손녀를 보는 듯한 감정이 들곤 했다.
“에구, 삭신이야. 진영까지 업고 가 주면 말해 줄지 생각해 보마.”
“……혼자 가세요.”
연의 모습이 환상처럼 주변에 녹아들며 시야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 기척도 점점 멀어져 그가 감지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자 아예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에이, 노인 공경도 모르는 것 같으니라고.”
일월신마가 투덜거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외상 때문에 출혈도 있었고 내상도 있어서 움직이는데 불편한 느낌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울컥하며 죽은 피가 식도를 타고 올라와서 뱉어내기도 했다.
일월신마는 두 손바닥을 들어 살펴보았다. 피로 범벅된 채 굳어 버려 더러워져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손바닥에 생긴 화상 흔적 같은 백화(白化)된 흉터였다
노지신과 장학 등의 도착보다 두 시진 정도 전.
진도건을 무릎 꿇린 상태에서 막 목숨을 거두려 할 때 나타난 노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쳇. 오랜만에 자존심 상했어. 끄으으……!”
일월신마는 내상과 쌓인 피로감으로 굳어진 몸으로 힘껏 기지개를 켜댔다. 그리곤 경신술을 펼치며 하산을 위해 숲속을 뚫고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