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제9장. 한계(限界) (3)
이제는 결정해야 할 때다.
힘을 배분하던 것을 멈추고 무리해서라도 전력을 끌어내야 할지를. 내상이 심해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자리에서의 싸움을 승리로 끝내야만 했다. 뒤에 기다리고 있는 문제들이 아직 산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캉!
“합!”
기합과 함께 패도를 휘둘러서 자소덕 등을 힘으로 밀어냈다. 두 사람이 뒤로 몇 걸음 밀려나면서 그들 진형의 간격이 벌어졌다. 측후방에 있던 교도들은 아직 거리를 벌리면서 막 달려들려 할 때였다.
그 간격의 틈으로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동시에 전력을 다해 내공을 끌어올렸다.
쿠우우우!
단전의 바닥까지 쥐어 짜내면서 기운을 폭발시킨다. 완전한 형상은 아니었으나 강기에 가까운 기운이 그의 패도에 응집되었다. 외부로 무시무시한 투기가 발현되었다. 그러면서 노지신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창자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신경을 관통했다. 내상 때문에 한계를 두드릴 정도로 무리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힘을 얼마만큼 유지할 수 있을지 그조차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곧바로 달려들어 다시 포위해야 할 자들이 행동하지 않고 뭔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노지신은 그들의 시선이 자신이 아니라 뒤를 보고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장학……!”
장학과 관무영, 장우태, 하소정이 가까운 둔덕의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뛰어내리고 있었다.
“노 장로님, 저희가 돕겠습니다!”
그들의 등장에 노지신은 반색했다. 그는 즉시 전방을 바라보며 자소덕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강기를 방출했다.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에 잠시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던 자소덕은 그들이 적임을 깨닫고 결정을 내리지 못함을 후회했다. 그의 후회를 징벌하듯이 노지신이 달려들며 강기를 쏘아 내자 별수 없이 이 악물고 엽도를 휘둘렀다.
꽝!
“윽!”
일월혼극마공의 음양기를 충돌시켜 폭발을 증대시켰음에도 노지신의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강기에 밀려 뒤로 주르륵 밀렸다. 두 손이 저릿저릿한 와중에도 그의 두 눈은 급히 노지신을 찾았다.
“찾을 필요 없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쳐들며 반사적으로 두 자루 엽도를 머리 위로 올렸다.
카각! 푹!
뚝 떨어지는 패도를 아직 저릿한 느낌이 남아 있는 엽도로 제대로 막아 낼 수 없었다. 왼손에 든 엽도에 충돌하는 순간 그 충격에 그만 도를 놓치고 말았다. 노지신의 패도는 그의 어깨에 내리꽂혔다.
“끄윽!”
자소덕은 충격에 밀려 무릎을 꿇으면서 저도 모르게 왼손으로 패도를 붙잡았다. 짓누르는 압력과 고통에 표정이 일그러졌다.
텁!
오른손에 들고 있던 엽도를 노지신에게 휘둘렀지만, 그의 왼손에 팔목을 잡혀 버렸다.
“크윽! 너, 너에게 천운이 따르는구나…….”
“인정하마.”
노지신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땀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단정하게 상투로 정리되었던 머리카락이 다 풀어져 산발이 되었다. 내상에 기운이 들끓는 고통을 느껴 본 것이 최근 이십 년 동안에도 없었음을 생각하면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자소덕은 시선을 비스듬히 돌렸다. 어느새 새로이 등장한 장학 등에 의해 교도들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자신들은 노지신과의 대결로 이미 많이 지쳐 있었지만, 장학 등은 사실상 일월신마와의 대치가 그리 치열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력이나 기력이나 만전 상태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기 때문에 수적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천마신교 교도들을 거칠게 몰아붙이며 하나둘씩 쓰러뜨리고 있었다.
일월신마가 유희와 변덕으로 장학 등을 살려 보낸 것이 자소덕을 사지로 몰아넣은 셈이었으니 참 얄팍한 운명이었다.
자소덕이 다시 노지신의 눈을 마주 보았다.
노지신은 그의 눈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읽었다.
“마침내 천하에 마도가 강림하여 새로운 길을 개척하니 정사의 무림 모두 천마의 기치 아래 무릎을 꿇으리라! 크하하하핫!”
피를 토하면서까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린다.
노지신은 그의 그런 모습이 여태껏 자신이 상대해 온 자와 동일 인물인지 헷갈릴 정도였지만, 그가 사교도라는 것으로 뒤늦게 이해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서컥!
오른손에 힘을 주고 기운을 불어넣으며 단숨에 패도를 당기자 그날이 심장을 지나 복부에서 빠져나온다. 돌아서서 패도를 휘둘러 도신에 묻은 피를 뿌려 내는 사이 생명의 불꽃이 꺼진 자소덕은 끔찍한 모습으로 뒤로 쓰러져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푹!
“하아, 하아…….”
노지신은 패도를 땅에 꽂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교도들의 수는 차츰 줄어 네 명 동수가 되었다가 하나둘 더 목숨을 잃으며 마침내 장내가 정리되었다.
털썩!
노지신은 싸움이 끝났음을 확인하자 마침내 긴장이 풀렸는지 주저앉아 버렸다. 그 순간 울컥하며 죽은 피가 목을 타고 넘어왔다.
“우웩!”
급히 몸을 옆으로 기울여 피를 토해 냈다. 등골을 타고 싸한 기운이 올라오고 시야도 잠깐씩 흐릿해짐을 느꼈다. 자소덕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마지막 강기를 방출한 것이 크게 무리가 온 듯했다.
노지신은 소매로 입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급히 운기조식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장학 등 네 사람은 교도들 모두의 죽음을 확인하고 노지신에게 다가갔다가 그가 운기조식을 하고 있자 즉시 그 주변을 둘러섰다.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속마음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애가 타고 있었다.
“노 장로님…….”
이곳에까지 오면서도 최악의 상황은 없길 원했지만, 기대는 연속적으로 어긋나고 있었다. 최소한 여기에 도착할 때쯤이라도 노지신 본인이 처한 상황을 무리 없이 해결했길 바랐다. 그러나 두 눈으로 목도한 현실은 정반대의 우려하던 결과였다. 노지신의 안위를 지킬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것이 씁쓸할 따름이었다.
운기조식은 생각보다 길어져 시간이 흐를수록 네 사람의 속내는 계속해서 타들어 갔다. 진도건이라면 분명 일월신마와 싸움을 벌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서둘러 도우러 가지 않으면 그 안위를 장담키 어려웠다. 특히 나자룡이 고통에 죽어가던 모습을 본 하소정으로서는 점점 더 조급해지는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침착해라.”
“……네.”
장학이 그녀를 조용히 타일렀다. 하소정이 물어뜯던 손을 내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더는 동료를 잃고 싶지 않았다. 이만큼 당원 조원들과 정이 들었는지 그녀조차도 이제야 깨달았다. 굳이 가깝기로 따지자면 진도건이 나자룡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가 잘못된다면 그 원인의 끈이 자신들에 닿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랬기에 불안감은 계속 증폭되어만 갔다.
마침내 노지신이 눈을 떴을 때는 운기조식에 들어간 지 한 시진 이상 시간이 흘러간 후였다.
“후우.”
노지신은 깊은숨을 토해 내며 스스로 돌아보았다. 충격이 기혈이 흔들린 것이어서 다행히 회복은 많이 된 것 같았다. 그는 곧 눈을 뜨면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밤하늘 달이 이미 중천을 지나 조금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노지신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앞에 선 사람들의 숫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진도건과 나자룡은 어디 있느냐?”
하소정은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다른 사람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장학은 노지신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하였다. 나자룡의 죽음에 대한 경위와 진도건이 앞서서 일월신마를 뒤쫓은 것까지 핵심만 짚었다. 나자룡의 죽음을 들었을 때 노지신의 낯빛이 급히 어두워졌고 진도건의 얘기에선 걱정의 빛이 드리워졌다.
“일단…… 가자. 앞장서라.”
장학 등이 앞장서고 노지신이 그 뒤를 따라갔다. 맨 뒤에서 따라가는 그의 표정은 매우 큰 상심에 젖어 있었다.
‘내 실책이다, 내 책임이야. 오랜 평화에 타성에 젖어 방심한 탓이 크다. 천마신교라는 세력이 등장하는 것조차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이들이 오늘 계획된 움직임을 실행한 것이라면 우리는 홍천환이란 영단을 탐하여 가장 주의해야 할 적의 동태를 놓치게 된 꼴이나 마찬가지다.’
오랜 정사의 견제 속에서도 우위에 있었던 것은 정파라는 것이 오랜 역사가 말해 주지만, 혈마의 난을 기점으로 정파는 크게 흔들렸고 견제만 하던 사파는 정파를 철저하게 공격해 그 세력을 완전히 축소해 버렸다. 수많은 피를 대가로 지금의 천무방과 검림, 구룡문은 사패련이라는 기치 아래 수많은 기득권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군관과 협력하여 치안 유지에도 어느 정도 동참하면서 과거 정파 무림맹이 했던 역할을 잘 대체했다고 생각하였다.
노지신 스스로는 아직 모든 것을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천마신교의 세가 일월교를 흡수할 정도라면 그 크기를 짐작하기 어렵고 만약 사패련과 같은 규모 혹은 그 이상이라면 중원 무림이 최악의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 왔습니다.”
노지신은 익숙한 듯 낯선 폐허를 마주하며 한번 놀라고, 그 한가운데 작은 봉분이 제 주인의 칼을 비석 삼아있음에 한번 슬퍼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나자룡의 무덤에 손을 얹으며 잠시 눈을 감고 그의 혼을 추도했다. 그리고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십자열파참을 시전해서 만든 것과 유사한 꼴이 펼쳐졌지만, 그 영역이 비할 데 없이 더 컸다.
일월신마의 무공이 그 부하들의 경우로 추론해 본다면 이런 위력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짐작은 하지만, 그의 실력이 자신과 비교해서 어느 쪽이 우위인지 속단할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가 열세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으음……!”
그때 하소정의 신음이 들려왔다. 두 손을 맞잡으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노지신이 살펴보니 그녀의 핏줄이 잿빛으로 어깨까지 이어져 있었다. 본래 내공으로 눌러 손 언저리에서 마기를 억제하고 있었는데 직전의 싸움으로 퍼져 버린 것이었다.
“이게 그 마공 때문이냐?”
“……예.”
“진즉 얘기하지 그랬느냐?.”
노지신은 그녀의 상태를 걱정하며 그녀의 두 팔을 붙잡고 진기를 흘려 넣었다. 마기는 노지신의 내력에 의해 금방 태워 없어지며 그녀의 도드라졌던 혈관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노지신은 마공의 특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래. 진도건이 향한 방향을 특정할 수 있겠느냐?”
“저곳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같이 내려가자.”
다섯 사람은 능선길을 따라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달려 내려갔다. 깊은 밤중이라 사위가 조용하여 풀벌레들 우는 소리조차 별로 없었다. 달리면서 나는 옷깃 스치는 소음이 아니라면 만약 누군가 싸운다면 그 소리를 듣기엔 충분한 환경이었다.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나 싸움이 벌어졌다면 어떤 식의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참 어정쩡한 상황이군……. 진 위사는 일월신마와 과연 싸웠을지, 그랬다면 언제 어디서 그러했는지 알 수가 없으니.’
한동안 내려가던 장학은 수색의 필요성을 느꼈다.
“장로님, 지금부터는 거리를 벌려서 수색하면서 가는 편이 어떻습니까?”
“흐음.”
노지신은 잠시 멈춰서서 생각에 잠겼다. 장학의 말도 일리가 있었지만, 이미 기습을 당해 본 상황에서 따로 거리를 벌린다면 혹시 모를 매복이나 적을 마주쳤을 때 제대로 대응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혼자라면 얼마든지 선택의 폭이 넓었지만, 수하들의 안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다. 자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모두 이십 장 정도 거리를 벌려 훑으면서 내려가자. 만약 위험을 감지하면 즉각 몸을 피하며 경고를 보내야 한다.”
“알겠습니다.”
장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지신의 고민은 그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진도건을 찾는 목적이 중요했기 때문에 필요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고민해 둔 위치를 말하려고 할 때였다.
삐이-.
노지신이 손을 번쩍 들어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장학의 입 앞을 가렸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그가 손을 뻗어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곳은 그들이 내려가던 방향보다 조금 북쪽으로 기울어진 방향이었다.
“방금 피리 소리가 들렸다.”
장학 등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은 소리였다. 그러나 노지신은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아주 멀리서부터 희미하지만 높은 소리로 제법 길게 이어졌기 때문에 그는 그 방향도 특정해 가리켰다.
“저곳이다.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갈 방향과 비슷하니 가보자꾸나.”
“알겠습니다.”
피리는 그들의 신호체계에 없었지만, 천마신교라면 어떤지 알 수 없다. 충분히 의심해 볼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네 사람도 앞서가는 노지신을 믿고 그 뒤를 따라갔다. 노지신은 그들이 뒤처지지 않도록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달려갔다.
소리의 진원지로 추정되는 지점은 제법 멀었지만,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라고 여겨졌다.
수풀을 빠르게 헤쳐나가며 경사를 따라 내려갔다. 비탈은 점점 완만해져 발밑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지자 속도를 좀 더 붙였다. 잠시 숲이 우거진 지점에 들어왔는데 그곳을 뚫고 한동안 달리자 멀리 나무들 틈 사이로 제법 달빛 아래 환하게 비추는 트인 밤 풍경이 엿보였다.
파아-!
마침내 숲을 뚫고 탁 트인 전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은 검은 장막 아래 반월이 구름에 가리지 않고 지면을 비추고 있었고 초원 분지라고 해도 될만한 넓은 초원이 주변을 빙 둘러싼 수풀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밤하늘 달빛 아래에서 밤바람을 받아 투명한 백발을 휘날리는 한 인형이 그 초원 한가운데 고고하게 서 있었다.
“이, 일월신마입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달빛 아래 그 특징적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그 정체를 장학 등이 알아보지 못할 리가 만무했다. 마침내 주적이라 할만한 상대를 멀리서나마 보게 되자 노지신은 저절로 긴장감이 들었다.
장학은 멀리 있는 일월신마를 확인하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도건이, 보이지 않습니다.”
초원 위에는 오로지 일월신마 한 사람밖에 없었다. 주변에 시체로 보일 만한 물체도 보이지 않으니 달빛을 받아 휘날리며 반짝이는 백발의 기괴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지한 노지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표정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