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42화 (42/432)

42화 - 제9장. 한계(限界) (1)

일월신마는 반쯤 죽었다 살아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도건의 검력은 그의 정신에까지 충격을 주어 사실상 의식이 끊어졌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익힌 일월혼극마공은 그가 허무하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음양의 강력한 기운은 그의 체내에서도 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데 특히나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충격에 강력한 보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대표적인 장점 중 하나였다.

이것이 바로 일월마벽(日月魔壁)이라 하는데 음양의 서로 다른 두 개의 성질을 가진 기운이 강한 결합과 반발을 동시에 일으켜 일종의 호신강기를 발현하지만, 체내에서만 작용한다는 특징이 있어서 상대하는 사람이 쉽게 알아챌 수 없었다. 이것으로 내상을 보호하고 심지어 검상에도 저항을 하는데 내공이 약한 자의 칼로는 절대 뚫을 수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진도건이 보여 준 검력이란 그가 가진 내공보다 더 강력한 것이었고 그것은 일월마벽이 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진도건의 검속은 일월혼극마공이라는 초상승마공의 자연 발생 공능의 속도를 추월할 정도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일월신마나 사혈신마도 진도건을 새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가만히 보고 느껴지는 진도건의 수준은 절정고수들로 분류되는 자들에 비해서도 모자란 수준인 데 반해 실제 실력은 그 이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전후 차이가 꽤 분명한데 이런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입신의 경지에 이른 고수가 본인의 기운을 완벽하게 갈무리할 수 있어서 평범하게 보이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차이였다.

사혈신마는 못마땅한 눈으로 일월신마를 바라보았다.

“어설프게 상대하다가 볼썽사납게 되진 않도록 해. 생각하지 않았던 불나방들이 늘어났으니 거만하게 굴 때는 아직 아니야.”

“에잉, 본좌를 무슨 호구로 보느냐?”

“제 잘난 맛에 사는 일월교주가 괴물이라는 것은 이 몸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중원의 무공이 마도(魔道)의 대척점에 있기에 얕봐선 안 된다는 얘기지.”

사혈신마가 띄워 주는 발언을 하자 일월신마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이미 경각심이 꽤 올라간 상황이었다. 그는 몸에 새겨진 상처가 흉터로 계속 남아 있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근데 불나방들이 늘어났다니 무슨 말인가?”

“이 중원 땅에 정파란 이름이 허울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물밑으로 제법 오랫동안 움직여 온 모양이더라고.”

“무림 정세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허울뿐일세.”

“글쎄. 천산(天山)에서 나오지 않았던 일월교와는 다르게 우리 사혈주(死血州)가 사천(四川)의 삼대정파(三大正派)와 다툰 역사가 백 년이 훨씬 넘으니까 말이야. 지독한 놈들이야.”

“크크! 재밌겠군, 그거!”

사혈신마의 말이 길어지자 일월신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진도건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적을 앞에 두고 태연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태도가 어이없을 정도였지만, 그것을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 자신의 처지도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정파에 대한 동태는 예상치 못한 정보였다. 중히 다뤄야 할 신호였으나 긴장감 때문에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간다. 노는 건 적당히 해.”

사혈신마는 진도건을 또다시 힐끔 돌아보고는 정말 떠났다. 그의 뒷모습이 점차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진도건은 마음 한편으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여전히 불편한 경계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리를 떠나는 사혈신마가 진도건을 계속 힐끔힐끔 쳐다본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가만히 있을 때는 거친 성격의 기색(氣色)을 고스란히 드러내지만, 진기의 흐름은 진중하고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무공을 펼칠 때는 마도의 무공처럼 폭발적이다. 정사(正邪)의 도(道)가 다름에도 한 몸에 모두 품었으니……. 이 자리에서 죽는 것이 우리에겐 다행일 것이다.’

사혈신마는 진도건의 죽음을 예상했다. 만약 살아남는다면 마도라는 제3의 길을 선택한 일을 후회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일월신마의 손에서 살아남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그는 걱정을 쉽게 털어 버릴 수 있었다.

사혈신마가 떠나는 한편 일월신마는 목과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얼굴과 육신에 아로새겨진 검상과 혈흔이 나름 보기 좋은 외모의 건강한 노인의 얼굴을 섬뜩한 광기를 품은 얼굴로 바꾸어 버렸다.

“본좌 70여 년의 평생 무공으로 감탄해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느니라. 그런데 너도 확실히 거기에 낄 수 있을 것 같아. 큭큭큭!”

“칭찬이오?”

“그럼! 칭찬이고말고! 본좌의 사람 보는 눈이 얼마나 높은지 아느냐? 내 생각에 넌 더 보여 줄 것이 더 있을 것 같아. 부디 내 기대를 충족시켜다오.”

“부담스럽군.”

중얼거리듯 대답하며 진도건은 검을 고쳐 잡았다.

달라지는 진도건의 자세를 본 일월신마가 흡족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 어디 한 번 싸……, 이크!”

퓩!

손이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순간적으로 달빛을 받은 검광이 눈앞에 번뜩이자 일월신마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어 피해 내었다.

볼에 가는 혈선이 그어졌지만,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고 생각했지 설마 검이 닿았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쓰라린 통증을 느낀 것은 잠시 뒤의 일이었다.

‘이놈이 또……!’

생각조차 끝맺음할 수가 없다.

진도건의 모습이 제대로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달빛을 받은 검광이 그의 눈앞에서 번쩍거렸기 때문이었다.

슈슈슈슉!

터터텅!

진도건의 검속에 맞추어 일월신마의 양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공력를 실음으로써 바위 같은 강도를 갖게 되었기에 날카로운 강철의 검날에 대항할 수 있었다. 따라서 무기를 들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일월신마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진도건의 검속은 그의 반응속도를 한 박자씩 더 앞서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팔방을 점유하며 틈틈이 급소를 노리고 짓쳐 드는 검광을 마주할 때마다 섬뜩할 정도였다. 게다가 검속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검력도 상당하여 공력을 집중한 두 팔을 제외하면 다른 신체는 조금씩 상처가 생기고 있었다. 그나마도 일월마벽의 공능이 상처의 깊이를 방어해 주고 있었지만, 그 충격의 반동은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만한 속도를 구사하는데 이렇게 무거운 검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극한의 검속은 예기를 극대화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극강(極剛)에 부딪히면 부러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잘라 낼 수 없어도 그 검속에 굳센 강(剛)의 힘을 실어 낼 수 있다면 기꺼이 충격을 줄 수 있고, 예기와 결합하여 극강조차 종국엔 잘라 낼 수도 있음이다.

검수(劍手)를 섞으면서 일월신마는 자신이 밀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진도건의 모든 검격을 막을 수 없었고, 그렇게 막지 못한 검격은 일월신마의 신체에 차곡차곡 충격을 쌓아갔다. 그마저도 전력을 다해 피하려고 하다 당하는 것이니 가만히 선 채로 맞으면 분명 상처가 깊어질 것이다. 만약 급소를 찌른다면 구멍 내기엔 역부족이어도 검 끝이 장기에 닿을 정도는 충분히 파고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일월신마의 일월반전수(日月反轉手)는 일월혼극마공과 더불어 본인이 가장 자랑하는 무공이었다. 후성이 사용했던 한상혼쌍도술도 일월혼극마공의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는 도법이었지만, 마공의 경지가 극의에 이르면 그 힘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무공이 바로 일월반전수였다. 양손에 상반된 기운을 담아내어 다양한 조화를 부리게 될 때 그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그런데 진도건의 검속은 그보다 빠르고 검격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니 도저히 그럴 여유를 가질 틈이 없었다.

주춤주춤 뒷걸음질이 이어진다. 조금씩 더 멀리 벗어나 보려고 하지만, 악착같이 따라붙으며 검을 휘두르는 진도건의 끈기에 일월신마는 혀를 내둘렀다.

진도건도 일월신마를 검세 안에 가두기 위하여 그의 뒷걸음질에 발맞추었다.

타타타탕!

퓨퓻!

자세를 낮게 유지하며 전력을 다해 손을 움직였지만, 역시나 다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검격을 온전히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양 허벅지에서 피가 튈 정도로 검상이 새겨지니 일월신마는 심정적으로 광기에 몰아 붙여지고 있었다.

‘크흐흐흐!’

진도건의 집중력이 극한의 경계 위에서 외줄을 타고 있는 만큼 일월신마도 그 평생에 걸쳐 발휘해 본 적 없는 정신의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일월반전수.

일양우수(日陽右手), 월음좌수(月陰左手).

진도건이 끈기를 갖고 밀어붙이는 사이 피해를 누적해서 입고 있는 일월신마는 그 속도와 피해 수준에 적응해 나갔다. 그에 따라 심리적인 여유를 조금이나마 갖게 되니 진기 운영이 조금 더 자연스러워진다.

텅텅텅!

진도건은 일월신마의 쌍수와 충돌하여 검으로부터 전해지는 충격의 성질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제길, 조금의 틈이라도…….’

일월신마의 몸에 새긴 상처만 이십여 개에 달하는데 무엇 하나 의미를 두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 속도의 우위가 결코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진도건은 움직임에 간절함을 넘어선 필사적인 심경을 담는다.

일월반전수의 쌍수가 좌우 자신의 영역에서 점차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날아드는 검광 사이에서 따로 놀며 방어하는데 급급했던 직선적인 쌍수의 움직임이 기운의 방출로 인해 각자의 권역을 형성한다.

“흐럇!”

일월신마의 느닷없는 기합 소리. 그러나 그의 쌍수는 그 힘을 어느 정도 선보일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 상태였다.

일월반전수 음양역장(陰陽逆掌).

두 손으로 검격을 비껴 내면서 전반에 펼쳐 낸 약간의 음양기를 움켜쥐듯 손가락을 오므린다. 기운의 연결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두 손을 전후상하좌우 서로 반대로 비틀어 낸다.

공간의 왜곡.

날아드는 검광이 일월신마의 손에 닿기 직전에 미세하게 방향이 틀어지며 비껴갔다.

‘요사스럽다!’

일월신마의 쌍수가 일으킨 작은 변화를 진도건도 놓치지 않으면서도 내심 적잖이 놀랐다. 급박한 상황에서 만들어 낸 작은 권역으로 이런 희한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데 이렇게 속도의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태라면 어떤 힘을 보여 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저 권역을 벗어나자!’

우측으로 보법을 밟으며 적극적으로 측면을 파고든다. 아예 서로 바라보는 방향을 반대로 만들어 버릴 심산의 선택이었다.

이 선택은 진도건에게 있어서 악수였다.

투투투퉁!

급소라는 것은 인체의 중심을 잇는 선에 주로 위치했다.

진도건이 측면을 노리고 빙글 파고든 순간 일월신마의 급소는 그의 시선에 있어서 벗어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일월신마는 진도건을 쫓아 같이 몸을 트는 듯하면서 몇 번의 검격을 막아냈다가 한 손으로 머리를 보호하면서 역으로 몸을 튼다. 신체의 좌측과 등판에 십수 개의 상처가 순식간에 새로 만들어지는 사이에 단 1초의 여유를 가진 우수에 더욱 집중하여 힘을 불어넣는다.

일월반전수.

일양극수(日陽極手), 음파(陰破).

움켜쥔 주먹에 일양기가 한층 배가된다. 주먹의 손등을 심장 가까이 당겼다가 휘도는 몸을 따라 그대로 휘두르니 파고들던 검광 일부를 물리치며 최초 왼쪽으로 찰나 쫓아가며 뿌려 낸 월음기와 충돌한다.

캬앙!

공기가 찢어지고 음기가 깨진다. 상반된 기운의 충돌에 의한 폭발은 일월신마 본인이 평소 만들어 내던 것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그것만으로 진도건과의 거리를 한 발 밀어내기에는 충분했다.

칙!

“읍!”

폭발하는 기운의 파도가 위력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그 반발력에 의해 진도건은 한걸음 정도 밀려나면서 그 억제력에 멈칫하게까지 했다. 한걸음 떨어진다고 검세 안에 가두던 거리를 벗어날 정도는 될 수 없었지만, 행동이 멈칫한 것만으로도 일월신마에겐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슈슈슈슉!

진도건의 검이 섬광처럼 뿜어져 나갔지만, 허공만을 베었다. 그 검광 뒤로 다섯 걸음 거리 이상 멀어지는 일월신마의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고 쫓아갔다.

전력을 다하여 최단 거리로 일검을 찌른다.

천뢰삼검식 일섬뢰.

우웅!

“크크! 충분했다!”

일월신마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든 검을 원을 그리듯 모은 쌍수 안에 가두었다. 상반된 기가 그의 쌍수 안에서 격렬하게 응축되고 울부짖으며 거대한 압력을 형성하니 검이 뚫어내지 못하고 허공에서 붙잡혀 버린 것이었다.

밀어 넣지도 빼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카가강!

상대적으로 검에 충전된 내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나. 잠깐 붙잡힌 상태로 버티던 진도건의 검 끝이 한 뼘 길이만큼 박살이 나버렸다. 그리고 족쇄가 풀리며 잠깐 휘청거리는 진도건을 향해 음양신마가 양손에 응축되어 몸부림치던 음양기를 그대로 분출시킨다. 그리고 진도건은 급히 부러진 검을 끌어당겨 전면에 세웠다.

우르릉! 파아-!

기의 폭풍이 진도건의 전면을 그대로 덮쳤다. 마치 우렛소리 같은 울부짖음이 고막을 두들기다 못해 심장에까지 압박한다. 또 기의 폭풍이 가져온 충격은 마치 거대한 망치로 전면을 두드린 형국이어서 파천신공이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검과 신체를 보호하였음에도 그 피해를 제대로 막아낼 수 없었다.

일월신마는 기지를 발휘하여 다섯 걸음 벌렸고 진도건은 그 대가를 치른 것처럼 열 걸음 가까이 크게 밀려났다. 그리고 뒤따르는 것은 기침을 동반한 각혈이었다.

“커헉!”

기침 사이로 토해지는 핏방울과 입가를 타고 내려오는 핏물.

옷가지서부터 머리칼까지 산발이 된 진도건이 낭패스러운 몰골로 일월신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