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 제8장. 마인(魔人) (2)
종남산에 도착한 노지신과 진도건, 장학 등은 산어귀에 이르러서 일단의 무리를 마주쳤다. 계곡에 들어섰을 무렵 전면에 있던 언덕 위에서 등장한 그들은 도합 스무 명이었는데 검은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고, 대부분은 손에 제각각 다양한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으니 한눈에 봐도 아군이라 볼 수 없었다.
경륜이 깊은 노지신도 그들의 정체를 쉽사리 가늠할 수 없었다. 행색이 평범하여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없었다.
조장 장학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웬 놈들이냐?”
“그렇게 말하는 네놈은 누구냐?”
장학의 물음에 무리의 중앙에 선 자가 되물었다.
“허허, 이거 예의를 모르는 녀석들이로군.”
노지신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에 다른 이들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누구도 노지신보다 연배가 높아 보이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난 천무방 천혼당의 장학이다. 길을 썩 비켜서라.”
장학이 힘을 주어 말하였다. 천무방의 이름은 당대 무림 문파들의 정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면 길을 비켜 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다르게 돌아온 것은 냉소뿐이었다.
“크크! 천무방이면 길을 무조건 비켜 줘야 하나?”
장학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렇다면 실력 행사를 해야겠지.”
“그것도 좋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모두 조금씩 당황했다. 인혼당, 지혼당이라면 이해하지만, 천혼당은 천무방에서도 정예 중의 정예였다. 아무리 수적 우위라고 해도 이렇게 자신감을 보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여기엔 삼장로 노지신까지 있었다.
“적당히 상대해 주어라.”
그 말과 함께 중앙의 흑장포인이 좌우의 다섯 명과 함께 뒤로 물러나더니 곧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이 사라진 방향은 노지신 등이 가야 할 방향이었다. 남은 14명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노지신이 입을 열었다.
“질질 끌 필요 없다. 빠르게 정리해라.”
스릉!
본인부터 장도를 허리춤의 도집에서 뽑아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진도건과 천혼당 조원들 모두 병장기를 뽑았다.
퉁!
노지신과 진도건을 비롯한 천혼당 5인이 일제히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천무방의 7인은 정체불명의 14인보다 숫자가 절반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압도하였다. 적들의 실력이 뛰어난 편이었지만, 개인차로는 천무방이 모두 위였고 특히 노지신과 이번 비무제로 실력이 한층 더 오른 진도건은 거의 비슷한 호흡으로 한 명씩 쓰러뜨려 나갔다.
왼손은 화상 때문에 여전히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며칠간의 여정 동안 지속해서 관리하여 통증은 큰 무리 없을 정도였다. 내공도 분명한 속도로 축기가 이뤄지면서 마지막 양자성과의 비무와 지금이 또 달랐다.
그 변화를 스스로 인지하여 단호한 검술로 적들을 제압해 가는 모습들은 일행 가운데서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노지신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으니 같이 싸우고 있던 장학과 휘하 조원들도 놀랄 정도였다.
푸욱!
하소정은 자신의 칼에 쓰러지는 흑포인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곧 진도건이 한 사람을 제압해서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자는 왜?”
진도건은 하소정의 물음에 잠시 그녀를 힐끔 보고는 곧바로 제압한 흑포인을 향해 물었다.
“정체가 뭐지?”
“천마신교가 이 땅에 광명(光明)을 펼치리라! 크악!”
혹포인이 고함과 함께 달려드는 순간 진도건의 검이 그의 목을 꿰뚫었다 빠져나왔다. 피를 툭툭 털어내는 진도건의 앞에 어느새 노지신이 와 있었다.
“천마신교? 새로 창궐하는 사교 이름인 것 같군.”
장학과 관무영, 나자룡, 장우태도 모두 근처로 모여들었다. 하소정이 노지신을 보며 물어보았다.
“노 장로님께서도 처음 들어보십니까?”
“새외에도 유명한 사교들이 있지. 서역 불교 본산인 포달랍궁(布達拉宮)에서 사특한 교리에 물든 자들이 만든 성혈교(聖血敎)가 서장(西藏)에 있고 같은 지역에 일월교(日月敎)라는 것도 있다 들었네. 청해(靑海)의 초원 유목민들 사이에서 득세하는 흑마단(黑馬團)이라는 기마단이 관군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고 하는데 그놈들도 종교적 교리를 갖고 있지. 몽고 사막의 유목민들도 비슷한 집단이 있고. 하지만 천마신교는 처음 듣는군.”
“저희가 찾는 홍천환과 관련 있는 종교도 잠깐 중원에 그 이름이 떠돌았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지. 혈마교(血魔敎)였던가?”
“실체가 드러나진 않았죠. 그건 헛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글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 더 많으니까.”
관무영의 말에 장우태가 속단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의 말마따나 과거 혈마교의 이름이 세간에 떠돌았을 때 대부분의 무림인이 크게 경계했었다. 그러나 조사 결과 뚜렷한 세력 포착이 되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흐지부지 잊어버리게 됐었다.
“그나저나 웃긴 놈들이로군요. 부하들을 내버리고 가다니.”
장학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런 실력으로 수적 우위로써 어떻게 해 보려 했던 바보 같은 그들의 생각을 비웃었다.
“어쨌든 심상치 않은 놈들입니다. 이놈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면.”
“사교에 광적인게지.”
진도건의 말에 장학이 다시 한번 대답했다.
태양은 서산에 지고 하늘은 어느새 검은 장막으로 칠해지고 있었다. 몇몇은 길었던 여정에 밤도 찾아왔으니 하룻밤 야영이라도 하고 움직여야 하나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퓨웅!
그것은 신호탄 소리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의 시선이 그 소리의 진원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곳은 그들이 때마침 가고자 했던 방향이었으며 앞선 흑포인 5명이 사라진 방향이기도 했다.
“하오문의 신호탄입니다.”
“가자.”
노지신이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7인이 빠르게 언덕을 올라 숲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신호탄은 자욱한 연기의 기둥을 남기며 확실한 이정표를 제공하고 있었다. 경신술을 전개하여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동시에 뛰어들었던 7인이 일렬로 정렬되기 시작했다.
노지신이 선두에서 달렸으며 그 뒤를 장학, 장우태, 관무영, 하소정, 나자룡이 뒤를 이었고 진도건이 점점 뒤처지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내공이 깊지 않았었고, 특별한 경신술을 익힌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간다.”
나자룡이 진도건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진도건은 멋쩍게 웃으면서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신호탄이 터진 곳은 거리가 꽤 있었지만, 그 위치가 다소 불분명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노지신은 갈림길에서 멈춰 섰다. 그는 신호탄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길은 좌측의 능선을 오르는 길과 우측의 계곡 길로 나뉘어 있었다. 두 곳이 모두 한 지점에 도달할 수도 있고 아예 다른 길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후자라면 거친 산비탈을 헤쳐나가야 할 것이었다.
“장로님.”
장학이 때마침 도착하였다.
“우측 계곡 길로 내가 갈 테니 너희는 좌측 능선을 오르거라.”
“알겠습니다.”
“위험이 있다면 신호탄을 사용해라. 진도건도 너희를 쫓도록 하자.”
노지신은 갈림길 앞에 있던 나무를 베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좌측으로 쓰러졌다. 그는 그 위에 한 번 더 화살표를 새겨 놓고는 계곡 길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장 조장.”
“우리는 왼쪽 길로 간다. 진도건도 우릴 따라올 것이다.”
장학은 때마침 차례대로 도착한 조원들을 보며 말했다. 다섯 명도 빠르게 좌측 능선을 타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떠난 후, 잠시 뒤에 진도건도 그 자리에 도착했다. 그는 곧바로 쓰러진 나무를 발견하고 거기에 새겨진 방향 표식을 확인했다. 그 너머에도 더 많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진도건도 왼쪽 길로 장학 등을 쫓기 시작했다.
한편 노지신은 계곡을 따라가는 길의 지형의 특징들을 실감하고 있었다. 좌우의 높은 지형은 기습을 당하기에도 좋은 지형들이 이어졌음은 기본이었다. 얼마 진입하지 않아 작은 폭의 강(江)과 맞닥뜨렸는데 마침 굽이친 방향이 신호탄의 연기 기둥이 이어지는 방향과 일치하여 그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형이 두 차례 정도 계단식으로 꺾어 내려갈 무렵이었다. 마침내 연기 기둥이 점점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응?”
멀리서 작은 움직임이 감지되어 멈춰 섰다.
수풀로 가려진 위치에서 한 사람이 땅속에서부터 기어 나온 듯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먼지를 터는 모습을 발견했다. 뒤이어 한 사람 더 나왔는데 노지신도 아는 사람이었다.
“하오문의 사공흠인가?”
이제 막 동굴을 빠져나온 감평과 사공흠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사공흠은 이내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고 포권지례를 보였다.
“천무방 삼장로님을 뵙습니다.”
감평이 깜짝 놀라며 옆에서 따라 예를 갖추었다. 비혈단은 천무방과 왕래가 없었고 검림과 구룡문, 사패련에 줄을 대고 있었으니 아무래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또 한편으로 하오문이 천무방을 돕고 있음을 새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노지신은 두 사람의 몰골이 격렬한 싸움을 치른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의 목적은 홍천환 수색이었을 텐데 격전을 치른 몰골임에도 두 사람이 같이 나오는 모습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 ……찾았는가?”
노지신은 감평을 힐끔 흘겨보곤 사공흠에게 재차 물어보았다.
“예, 하지만…….”
사공흠은 자초지종을 노지신에게 모두 설명하였다. 그의 인도에 따라 근처 무너진 지반을 찾을 수 있었고 그 아래 펼쳐진 비경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비경 내 동굴에서 홍천환을 찾았는데 비혈단이 먼저 개입하고 그 뒤이어 살문에게 생명을 위협당했으며 종국엔 일월신마라는 무시무시한 고수를 만나 결국 목숨을 대가로 홍천환을 내어 줄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였다.
“고생했군. 천마신교에 일월신마라…….”
다시 천마신교라는 이름이 나왔다. 직전에 마주친 무리도 아마 천마신교의 교도나 추종자들일 것이었다. 그 이름도 심상치 않은데 일월신마라는 별명을 들으니 직전에 진도건, 장학 등과 이야기할 때 거론되었던 일월교가 갑자기 떠올랐다. 일월신마라는 이름은 천마신교보다 일월교에 더욱 잘 어울려 보였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머릿속이 잠깐 복잡해질 때, 사공흠이 연기의 방향을 가리켰다.
“이 신호탄은 방향을 표시합니다. 이 기울어진 방향으로 아마 놈이 이동했을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북서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마침 그가 달려온 방향과 거의 비슷하니 그 기울기를 크게 못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방향이…….’
일월신마가 향했다는 신호탄 연기의 방향은 계곡을 다시 따라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산을 오르는 방향이었다. 장학 일행과 마주치지 않을까 잠시 걱정이 되었지만, 출발한 위치와 시간이 다르니 그럴 리 없을 거라 결론 내렸다.
“그런데 비혈단과 살문이라…….”
노지신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감평이 움찔거렸다.
감평은 가까스로 사선에서 살아나왔건만 다시 넘어간 발걸음이 또 다른 사선을 밟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머릿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썅, 첩첩산중(疊疊山中)이구나.’
감평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평상시야 그는 노지신이 거들떠 볼 인물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홍천환을 두고 검림, 구룡문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상황이었으니 어떤 일이 닥칠지 쉽게 긍정적인 예측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정보를 차단하겠다고 그에게 칼을 들이대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소, 소인의 목숨을 살려 주시면 무슨 일이라도…….”
“가거라. 일대를 감시하는 비혈단의 눈이 너 하나가 아닐진대 죽여서 무엇하느냐.”
“가, 감사합니다. 그럼!”
감평은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마음이 바뀔까 두려워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사공흠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노지신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노 장로님을 알아서 쫓아가겠습니다. 혹여 하오문의 감시자들이 신호를 보내면 그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저도 유도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고맙네. 사교도가 일월신마 하나만이 아니니 조심하게나.”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