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제8장. 마인(魔人) (1)
그의 태도가 너무나 여유로웠기 때문에 흑번과 흑광은 백발노인의 앞뒤를 완전히 점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공격하지 못했다. 암살은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의 기습을 하는 것이 기초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실패하더라도 상처를 주었거나 혹은 심리적인 충격을 줄 수 있으므로 살인이라는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유리한 조건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조건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실력을 명확히 알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백발노인의 실력이 미지수라는 점이 불안정한 요소였다.
그가 보이는 여유로움은 달리 자신감으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 근거를 스스로 갖추고 있다면 그의 실력은 상정 외일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써는 목적 완수를 위한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백발노인이 고개를 좌로 비스듬히 꺾었다.
“등도 내주었는데 덤비지 않는군. 왜지?”
그의 고개가 뒤로 꺾이며 시선이 위로 향했다. 그리고는 씩 웃는다.
“밤을 기다리는 것인가?”
그의 전면에 있던 흑번이 움찔거렸다. 사위에 짙은 어둠이 깔리면 광채를 띄지 않는 흑도와 월하무흔도의 위력은 시각의 한계를 시험하게 되며 한층 더 유리해질 수 있다.
‘지금이라도 기습해야 하는가?’
흑번과 흑광의 생각이 교차할 때, 백발노인의 고개가 우로 꺾였다.
“기다려 주지.”
백발노인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천장 바위 구멍으로 새어 들어오는 황혼의 붉은 빛이 얼마나 기울어져 모습을 감출지 보기도 하고 사공흠과 감평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씩 웃기도 했다. 진하게 하품을 하기도 했다.
사공흠이나 감평은 이 대치를 이용해서 빠져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미 흑살수들의 손에 한바탕 놀아났던 판이었다. 백발노인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그가 흑살수들을 제압할 정도로 무공이 고강하면 도망은 의미 없는 행동이라 할 수 있었다.
백발노인은 정말로 가만히 있었다. 황혼의 붉은 빛이 마침내 자취를 감추었고 사위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다행히 하늘은 맑아 잠시 뒤면 밝은 달빛이 이곳에 스며들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이 피해갈 수 없는 어둠은 훈련받은 흑살수들에겐 최고의 환경이 되었다.
캉!
소리조차 잡아낼 수 없는 움직임으로 빠르게 거리를 좁힌 흑번과 흑광의 두 자루 흑도가 백발노인을 베었다. 그러나 두 칼은 허공만을 가른 채 서로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아주 일시적으로 밝아진 상황에서 사공흠과 감평은 공중으로 뛰어오른 백발노인을 볼 수 있었다.
흑번과 흑광의 움직임은 말 그대로 어둠에 스며든 유령과 같았다. 드리워진 어둠의 장막 속에서도 훈련받은 그들은 대낮처럼 모든 것을 볼 수 있었고, 어둠에 묻힌 흑도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내는 백발노인의 움직임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고수다!’
두 자루의 흑도가 서로 다른 지점을 노리며 백발노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백발노인은 간결하면서도 제한된 공간만을 활용한 채 피하거나 펄럭이는 옷자락으로 충격을 줄여 흘려보내는 기술도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이 마침내 월식무흔도를 펼쳐 냈지만, 그들의 경지는 백발노인에게 미치지 못했다. 그의 장포자락은 마치 두꺼운 가죽 부대 마냥 흑도에 뚫리지도 베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펄럭이는 위협에 공기가 찢어질 정도로 위협이 되었다.
“솜씨 좀 보여 보라니까. 이렇게 기다려 줬는데 기대에 못 미쳐서야 되겠느냐?”
백발노인의 말에 자극을 받은 것일까.
흑번과 흑광의 움직임이 한층 더 기민하게 움직였다.
월식무흔도 잠야십도(潛夜十刀).
공간을 장악하기 위해 종횡으로 난도질하는 흑번의 초식에 이어 흑광이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월식무흔도 승월장영(昇月長影).
지면에 바싹 붙어 파고든 흑광의 도가 아래에서 위로 참격을 뿌렸다. 뒤로 훌쩍 물러서는 백발노인을 쫓아 참격의 도기가 때맞춰 방출되었다.
“클!”
도기가 지척에 이르는 순간 백발노인의 양손이 합장하였다.
펑!
도기가 그의 손안에서 폭발하며 흩어졌다. 흑광이 놀란 눈으로 쳐다볼 때 폭발하는 기의 바람을 뚫고 튀어나온 백발노인이 그의 얼굴을 노리고 손을 훅 뻗었다. 그 속도가 워낙 빨라 황급히 반응하는데 신음이 절로 나왔다.
“큿!”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서 가까스로 피해 낸 흑광이 그대로 몸을 휘돌며 횡으로 베었다.
백발노인은 뻗었던 오른손을 그대로 흑광의 흑도를 향해 돌렸다.
텅!
손에 모인 응축된 기운에 막혀 흑도가 손을 베지도 못하고 튀어나왔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흑광이 놀라는 사이에 이번엔 흑번의 흑도가 백발노인을 덮쳤다.
월식무흔도 단월삼결(斷月三抉).
어둠을 타고 서로 다른 곡선의 궤적을 그리며 도기를 품은 흑도가 짓쳐 들었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쉽게 막을 수 없는 절초였다. 그러나 짙게 드리운 어둠으로 인해 시각적인 정보가 차단된 상황이어야 함에도 백발노인은 이미 모든 상황이 두 눈에 훤하게 보고 있었다.
백발노인의 왼손이 허공을 꽉 움켜쥐었다. 날아드는 세 줄기 도기를 향해 그 손이 아래에서 위, 사선으로 허공을 갈랐다.
카카칵! 쾅!
“커억!”
그의 손짓에 엄청난 기의 방출이 일어났다. 단월삼결의 세 줄기 도기가 방출된 기에 틀어박힌 것도 모자라 그대로 흑번을 덮쳤다. 그 기공은 그대로 흑번에게로 직격하여 폭발과 함께 그의 신형이 튕겨 나갔다.
쿵!
“쿨럭!”
흑번의 신형이 바위벽까지 날아가 부딪치고 떨어졌다. 연신 기침 소리가 터질 때 백발노인과 흑광은 이미 이어 맞붙고 있었다. 흑도는 어둠 속에 완전히 묻혀 육안으로 식별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지만, 백발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흑광의 도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놀라운 점은 맨손으로 이를 막아내고 있다는 점이었는데 두 손을 감싼 응축된 기운으로 인해 맞부딪쳐도 결코 상처하나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월식무흔도 비천묵응(飛天墨鷹).
흑도를 신체 뒤에 숨겼다가 베기를 반복하면서도 손목과 팔꿈치, 어깨, 허리까지 다관절을 동시에 흔들어 만들어 내는 뒤틀린 궤적의 참격들이 쏟아졌다.
퍼퍼퍼퍽!
백발노인은 이번엔 넓은 옷소매를 펼쳐 마치 장막과 같은 벽을 만들었다. 그의 강력한 내공을 머금은 옷자락을 뚫고 지나가는 도기는 없었다.
펼쳐 낸 옷자락은 두꺼운 방벽과 같았지만, 동시에 두 사람 사이의 시야를 가리는 형태가 되었다. 막막한 전개 속에 예상보다 좋은 조건이 만들어지자 흑광은 망설임 없이 내공의 십 할을 흑도에 집중했다.
월식무흔도 월식점정(月蝕點睛).
푹!
전력을 흑도의 끝에 집중시켜 일점을 노리고 찌른다. 그 강력한 돌파력이 가죽 부대같이 단단한 옷자락의 장벽을 마침내 뚫었다.
‘제길……!’
옷자락을 뚫어 낸 검이 벽에 막힌 듯한 감촉과 함께 더 전진하지 못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꿰뚫린 옷자락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훅! 뻗어 나온 왼손이 흑광의 검을 쥔 손을 콱 움켜쥐었다.
“큿!”
흑광이 뿌리치기 위해 힘을 주었지만, 오히려 백발노인의 강해지는 악력에 손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에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츠렸다. 그 사이 백발노인은 자신의 가슴을 누른 채 멈춘 흑도의 도신을 오른손으로 움켜쥐었다.
까앙!
오른손에 힘을 주자 흑도가 그대로 반 토막 나며 지지를 잃은 흑광이 그만 무릎을 꿇었다. 백발노인은 그대로 부러진 흑도를 흑광의 옆구리에 박아 버렸다.
푹!
“끄윽-!”
때마침 천장 바위 지형의 구멍에서 달빛이 세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장내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공흠과 감평도 어둠 속에서 벌벌 떨면서도 궁금해했던 싸움의 결말을 마침내 보게 되었다.
“크크! 쥐를 갖고 놀던 고양이 행세를 하다가 그 쥐가 된 기분이 어떠냐?”
“큭! 장난은 ……씨발.”
백발노인이 손을 뻗어 흑광의 복면을 내렸다. 입으로 피를 머금은 채 악물고 두 눈은 분노에 물든 채 노려보고 있었다.
백발노인이 씨익 웃었다. 수염도 없어서 그 웃음이 아주 적나라했다.
“본좌가 그래도 쫓아다닌 정이 있어서 저놈이 아니라 농락하던 널 여기 시체들 길동무로 삼기로 했으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아라.”
“어차피…… 쿨럭! 다…… 죽일 거면서. 크크!”
백발노인이 검지를 들어 까딱가딱 거렸다.
“본좌는 정말 살려 줄 참이란다.”
“크크! 그렇다면 너도 나처럼 죽게 될거야.”
“재미없네.”
백발노인의 비웃음이 차갑게 변했다.
으득!
“끄아악!”
그는 왼손을 들어 흑광의 오른손목을 부러뜨리곤 놓아주었다. 흑광은 그대로 비명을 내질렀다. 부러진 손목에 내장까지 파고든 옆구리에 박힌 검에 의한 이중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어쩔 줄 모르는 듯 몸을 꼬아댔다. 그 모습에 혀를 차던 백발노인의 오른손이 흑광의 얼굴을 콱 움켜쥐었다.
“끄으!”
“흑광!”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던 흑번은 백발노인의 손에 머리채를 붙들린 흑번의 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그러자 백발노인이 흑번에게 시선을 던졌다.
“넌 살려 줄 테니까 거기 있어 그냥. 어차피 못 구하잖아?”
“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흑번이 그 말에 멈칫했다. 살수에게 냉정함과 감정을 통제하는 기술은 강력한 무기였고 흑번도 백발노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이성을 찾았다. 뻔뻔하게 목숨을 부지해서라도 이 상황을 상부에 전달할 의무가 있음을 자각했다.
“네놈 이름이 흑광이로군.”
“크으……. 본좌, 본좌 거리는 네놈은 누구냐?”
“크흐흐흐흐!”
백발노인에게서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그의 몸 주변으로 스멀스멀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검은 안개와 같은 그것이 백발노인 주변으로 서서히 소용돌이치면서 모여들더니 그의 팔을 타고 가서는 흑광의 머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끄으으…아아악!”
비명 일성(一聲).
콰직!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손을 놓자 일그러진 두상과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아 내는 흑광의 끔찍한 모습이 드러나며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달빛이 이 암굴 안을 스며들고 있었지만, 여전히 사위가 흐릿하였다. 그러나 그 끔찍한 광경을 보지 못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본좌가 연로하다 하나 아직 염라대왕에게 일러 줄 이름은 없느니라. 끌끌!”
사공흠과 감평은 공포에 젖어 덜덜 떨고 있었다. 죽음을 가까이 달고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한손에 사람의 머리가 터져 죽는 광경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두 눈으로 목도한 그 끔찍한 광경에 자기도 모르게 입장을 대입하고 말았으니 그 공포감에 심리가 지배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희들은 본좌가 가면 떠나도록 해라. 살려 준다는 약속은 바로 지켜 줄 것이니.”
대수롭지 않게 말할 만큼 더는 백발노인을 상대로 실력을 시험해 보겠다 나설 자는 아무도 없었다.
백발노인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사공흠에게 갔다. 그가 앞에 다가오자 사공흠은 뒷걸음질 치다가 자기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놈아, 겁먹었다고 오줌 싸면 정말 죽여 버린다?”
“으으!”
스며든 달빛에 비춘 백발노인의 노안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홍천환은 어디 있느냐? 네가 갖고 있느냐?”
사공흠의 머릿속이 잠깐 복잡하게 뒤얽혔다. 그러나 생존을 희망하는 강력한 의식의 자극은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한 번에 덮어 버렸다. 그의 손이 품속을 잠시 더듬었고 다시 꺼낸 그의 손에는 목함이 들려 있었다.
“호오? 한 번 열어 보아라.”
사공흠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목함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마침내 그 안에 영롱한 붉은 핏빛을 머금은 홍천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두 눈으로 잠시 뚫어지게 바라보던 백발노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홍천환이 맞군.”
백발노인은 손을 뻗어 목함의 뚜껑을 닫고 그것을 가져와 품에 챙겼다. 그 사이에 사공흠과 감평, 흑번 세 사람의 얼굴에 일시적으로 의문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흥분했다거나 놀라는 기색도 없이 마치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마주한 것 같은 말의 음조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중원무림에서 이런 영약, 환단이 존재를 드러낸 적이 최소한 근 1, 20년간은 없었다. 따라서 백발노인의 반응이 다른 세 사람 상식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분명히 의문을 가질만한 부분이었다.
목적한 것을 손에 넣은 백발노인은 사공흠에게 더는 눈길을 주지 않고 돌아섰다. 그리고 천장을 잠시 올려다보더니 손을 휙 휘둘렀다.
슈악! 콰쾅!
응축된 기공이 방출되며 천장 암석에 충돌하자 굉음이 터지면서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 부서진 바위들과 그 위에 얹혀 있었던 흙더미들과 풀뿌리들이 일제히 쏟아져 내려왔다. 백발노인이 통통 뛰며 물러나면서 쏟아지는 것들을 피해냈다.
잠시 후 자욱했던 먼지가 가라앉으며 밤하늘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별들이 반짝거림이 선명할 정도로 맑은 하늘이었다.
그곳을 뛰어오르려고 기마자세로 몸을 누르던 백발노인이 멈칫하고는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의 살심(殺心)이 바뀌었는지 몰랐다는 생각에 세 사람이 흠칫 놀랐을 때, 백발노인이 씩 웃었다.
“살아남은 놈들한테는 내 이름을 알려 주어도 되겠지.”
꿀꺽!
사공흠이 마른 침을 덜컥 삼켰다.
여기 있는 누구 하나 백발노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무림의 유명한 고수들 가운데 이 노인과 흡사한 용모파기를 대조할만한 자가 없었고 무공도 근원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무슨 이름이 입에서 튀어나올 것인가 여섯 개의 눈이 백발노인의 입에 집중되었다.
“일월신마(日月神魔). 대 천마신교(天魔神敎)의 일월신마이니라.”
터엉!
본인을 일월신마라 밝힌 백발노인은 씩 웃음을 남긴 채 하늘로 튀어 올랐다. 그 높은 곳까지 한 번에 솟구쳐 오른 것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잠시 좌중이 조용히 침묵이 맴돌았다.
파슥!
갑자기 위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세 사람 모두 흠칫 놀랐다.
달빛 아래 인영(人影)이 움직였다.
바로 일월신마였다.
“참고로 본좌는 감숙으로 향할 것이니라.”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자신이 가는 방향을 알려 주다니?
다시 그의 모습과 기척이 사라지자 세 사람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눈빛을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