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6화 (36/432)

36화 - 제7장. 바람이 변하다 (5)

살문.

단 백 명으로 이뤄진 암살을 전문으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집단으로 그들의 주요 목표는 무림고수들이나 철통같은 호위를 받는 군관의 주요 위인들이었다. 특히나 철통 호위를 받는 고위관료들만큼 어려운 상대가 감각이 특출나게 뛰어난 무림 상위의 절정고수들이었다.

살문의 상징적인 무공은 월식무흔도(月蝕無痕刀)와 구유무영보(九幽無影步)이었다. 검게 칠한 칼을 다루는 월식무흔도는 살수들이 암살 상황을 피해 저항하는 무림인들이나 관료와 그 호위들을 상대로도 어둠 아래라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상승무공이고 그것이 설령 어둠 아래가 아니라도 충분히 위력 있는 무공이었다.

살문의 정점엔 본명은 알려지지 않은 살문주 월하사신(月下死神)이 있었고 그 아래 네 개의 조직등급이 있었다. 이 조직들은 4인의 신살수(神殺手), 16인의 흑살수(黑殺手), 20인의 인살수(忍殺手), 50인의 일살수(日殺手)으로 구분되었으며 절정고수 이상을 상대하는 자들이 바로 신살수와 흑살수들이었다. 인살수와 일살수들은 암살로 온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때 주로 활용되며 인살수만이 흑살수로 승급할 수 있는 그 경계의 실력을 갖춘 자들이라 할 수 있었다.

사공흠은 하오문의 주력 고수로서 높은 위치에서 많은 정보를 다루고 있었기에 살문의 이런 조직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두 명의 살문 살수들이 바로 흑살수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제길……!’

복면 뒤에 조롱 섞인 웃음을 숨기고 있을 흑살수 한 사람은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들만의 사호(死號)로써 부르는 이름인 흑번(黑飜)이라 불리는 복면살수는 여유롭게 관망한 채 동료인 흑광(黑狂) 혼자 하오문과 비혈단 5인을 상대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촤악!

검은 칼날의 그림자가 비스듬히 날아들었다. 미처 반응하지 못한 비혈단원이 또다시 피를 쏟으며 쓰러지자 이젠 사공흠과 매경엄, 감평만이 남았다.

“흐앗!”

사공흠이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흑광의 구유무영보는 미끄러지듯 그를 지나치더니 이미 그의 칼에 상처들을 입고 가쁜 숨을 쉬고 있는 매경엄에게 접근했다.

슈슉!

매경엄도 칼을 휘둘러 격렬히 저항했지만, 무의미한 몸짓이었다. 흑광의 유령 같은 움직임 때문에 칼이 닿질 않았다. 흑광은 어느새 매경엄의 칼을 피해 등 뒤로 파고들더니 왼팔로 목을 조른 채 옆구리를 통해 흑도를 박아 넣었다.

푹! 촤악!

“끄으……!”

심장까지 검을 깊이 박아 넣었다가 뽑아내자 엄청난 피가 흘러나왔다. 매경엄의 두 다리가 더는 신체를 지탱하지 못하고 그만 무릎을 꿇고 머리를 그대로 땅에 처박았다. 뜬 눈으로 절명한 채 더는 호흡을 잇지 못했다.

“안돼!”

그대로 절명해 버린 매경엄의 모습에 사공흠이 눈물을 떨구며 소리쳤다. 악에 받친 외침 속에 담긴 비통한 심정은 듣는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사공흠 본인도 감평도 두 발을 떼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크크! 이젠 홍천환은 너희의 시체를 뒤져 찾을 것이니 애걸해도 소용없다. 그래도 내 넓은 아량으로 죽는 순서쯤은 논의해 볼 수 있게 시간을 주마.”

“씨발…….”

감평이 입으로 욕을 뱉었다.

죽는 순서를 논의해 본들 무슨 소용인가? 구명(救命)의 기회가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목숨을 두고 농락당하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지만, 도무지 이를 타개할 방안이 떠오르지 않음에 크나큰 좌절감을 맛보고 있었다.

‘죽기 싫어!’

생존 의지와 두려움이 혼재되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의식의 반영인지 칼을 든 손도, 두 다리도 덜덜 떠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살고 싶으냐?”

“씨발, 그러면 여기 어디 죽고 싶은 놈도 있냐?”

“그럼 어디 솜씨 좀 보여 봐라. 솜씨가 쓸만하면 두 다리만 거둬가도록 하지.”

“뭐, 뭐?”

흑광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두 팔을 펼쳤다.

“다리가 없어도 여기 환경 정도면 연명하기에는 괜찮잖나?”

“미, 미친 새끼!”

“화가 나면 덤비던가.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그 기회마저도 놓친다고? 그쪽도 잘 생각해봐.”

흑광의 말에 사공흠이 움찔거렸다. 정말 그의 말처럼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본래 여기까지 힘겹게 온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방향이었고 또한 다리 없이 살아남는다는 상상만으로도 느껴지는 비참한 기분은 스스로 어떤 선택을 강요할 수 없게끔 하고 있었다.

뿌득!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어차피 멀쩡히 살아 돌아갈 가능성이 없다면 허무하게 판결을 기다리느니 무인으로서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하는 것이 자존심에 상처를 덜 입는 길이다. 하오문이 바닥 세계의 온갖 잡배들이 모여 세를 이룬 문파긴 하지만, 본인은 무인의 핏줄에 가까운바 묏자리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의지였다.

“호오, 결의가 섰는가? 크흐!”

“널 누가 말리겠냐마는 너무 오래 놀지 마라.”

사공흠, 감평과 달리 흥분에 몸을 부르르 떠는 흑광을 보며 흑번이 한 마디 던졌다. 같은 흑살수였으며 같은 무공을 익히고 같은 훈련을 받았지만, 그는 흑광의 성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살수라면 깔끔하게 죽음을 선사해 주고 물러나는 것이 상식이지만, 흑광은 미칠 광(狂)이라는 제 이름처럼 언제나 상대를 갖고 놀다가 죽이는 짓들을 자주 벌였다. 근 몇 년간 살문의 악명이 자자해진 원인은 단순히 암살을 업으로 한 문파임을 떠나서 흑광의 암살 현장에서 벌인 행각들이었다.

흑번은 팔짱을 낀 채 세 사람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공흠과 감평은 필사적으로 흑광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단 한 번이라도 몸에 맞추기 위해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발을 별로 움직이지도 않는 것 같은데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구유무영보의 신기가 소름 끼칠 정도였다.

“윽!”

흑광은 자신의 확실한 우위를 이용하여 두 사람을 철저하게 농락했다. 공격들을 이리저리 피하다가도 어느새 움직인 흑도는 두 사람의 몸 여기저기에 작은 상처들을 만들어 나갔다. 조금씩 배어 나오는 출혈 때문에 입고 있는 옷들 군데군데가 붉게 물드는 것이 눈에 확연히 들어올 정도였다.

“아아, 이거 둘 다 너무 실망이야. 이게 끝이라면 다리가 아니라 목을 떨어뜨려야 할 것 같은데?”

흑광의 말에 흑번은 팔짱을 풀었다. 이젠 시체를 뒤져 홍천환을 찾고 자리를 떠서 살문주에게 바치는 일만 남았다.

“그럼 비혈단 놈 먼저!”

흑광의 목소리에 감평이 반응하여 급히 칼을 다리 아래로 뻗었다. 그러나 킥킥거리는 비웃음을 흘리며 그의 뒤로 돌아간 흑광이 그대로 무릎 뒤 오금 쪽을 노리고 흑도를 휘둘렀다.

그때였다.

따앙-!

“윽!”

돌멩이 하나가 어디선가 날아와 감평의 다리를 베려던 흑도를 때려 저지시켰다. 흑광이 신음을 뱉으며 훌쩍 물러났다. 웅웅! 흑도의 강한 떨림이 손바닥에 그대로 전해지는데 손아귀에 힘이 빨리 돌아오지 않을 정도였다.

‘물!’

돌이 흑도를 때리는 순간 흑광은 눈앞으로 스쳤던 몇 개의 물방울을 놓치지 않았다. 그 돌이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흑광이 두리번거렸다.

흑번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빠르게 눈을 돌려 그 날아든 돌의 출발지를 찾았다. 그리고 그는 흑장포를 뒤집어쓴 채 물웅덩이에서 천천히 나오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누구냐?”

갑작스럽게 등장한 또 다른 정체불명의 인간에게 흑살수들이 경계심 그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리를 잃을지도 모를 두려움에 그만 주저앉은 감평이나 멍하니 이 상황을 넋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사공흠도 그 흑장포인을 보았다.

‘저기는……?’

사공흠은 흑장포인이 등장한 위치가 자신과 동료들이 지나왔던 수중동굴을 똑같이 지나왔음을 깨달았다.

흑장포인은 머리까지 덮고 있던 장포 자락을 벗어 내렸다. 그리고 거기서 물에 젖은 새하얀 백발과 수염이 없는 노인의 용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를 증명하는 듯한 주름이 얼굴에 산재했지만, 그래도 그 짙은 눈썹과 눈매, 오똑 솟은 콧날이 인상 깊은 노인이었다.

“웬 놈이냐?”

흑광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자신의 유희를 방해한 자를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살기를 뿌려댔지만,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대범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면 그 실력에 자신감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백발노인은 얕은 미소를 짓고는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 말더니 튕기는 시늉을 보였다.

“크크! 본좌의 탄지(彈指)가 쓸만하더냐? 오랜만에 써먹어 본건데 잘 맞췄네.”

“정체를 밝혀라.”

“크! 거 말 한 번 짧은 녀석이로고.”

백발노인은 웃으며 투덜거리고는 물에 푹 젖은 몸을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두 팔을 흔들고 몸을 방방 뛰면서 물기를 털어댔다. 장내에 시선을 거둔 틈을 노리고 흑광이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소리조차 발생하지 않는 구유무영도의 힘을 입고 흑광의 신형이 백발노인의 머리 위에 도달했다. 도기를 입힌 그의 참격이 그대로 백발노인을 향해 떨어졌다.

슈악!

흑도는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어느새 옆으로 한 발 옮겨 피해낸 백발노인이 씩 웃으며 흑광의 멱살을 노리고 손을 뻗었다. 애초에 다음 수까지 생각한 흑광이 공중제비를 돌며 백발노인의 팔을 걷어차고 그 힘으로 다시 거리를 벌렸다.

‘고수다.’

흑광, 흑번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백발노인의 여유로운 데다가 범상치 않은 움직임에 두 사람이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가장 긴장감을 품기 시작했다.

“살문의 구유무영보인가? 처음 봤는데 아주 유령처럼 움직이는 것이 쓸만한 것 같구나. 크크크!”

“식견이 넓으시군. 지나가는 길이라면 가던 길 가시고, 그렇지 않다면 정체를 밝혀라.”

“크크크! 가던 길 갈 참이지만, 마침 여기가 경유지라서 말이야.”

경유지란 말에 살문의 두 살수뿐만 아니라 사공흠과 감평도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평이한 말 속에 들어 있는 속뜻의 의미는 명확했다.

백발노인은 뚜벅뚜벅 걸어가 사공흠의 앞에 멈췄다. 사공흠이 다분히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검을 앞으로 내밀어 백발노인을 겨누었다. 백발노인은 그것이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는지 여유롭게 손가락으로 스윽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기련산에서부터 여기까지 쫓아와서 처음 얼굴을 마주 보는데 인사는 안 하고 검부터 들이미나 그래?”

사공흠이 놀란 눈으로 백발노인을 보았다.

‘기련산?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내가 완전히 안내견이 된 셈이 되었구나!’

사공흠은 단번에 백발노인이 자신으로썬 어찌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느꼈다. 2주에 가까운 시간 동안 기련산을 뒤졌다가 섬서 종남산으로 와서 며칠 동안 이곳을 찾아 헤매는 내내 근처에 있었다는 소리였는데 꿈에서도 예상치 못할 일이었다.

“그래, 홍천환은 있더냐?”

“…….”

사공흠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살문 흑살수들에게 죽을 운명이었으니 이 백발노인에게 죽는다 한들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가까스로 생각해 낸 사유에 불과했고 그는 이미 대답할 이유조차 찾지 못하는, 삶의 의지를 크게 잃어버릴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쩝, 이거 겁을 잔뜩 집어먹었구나. 본좌가 그래도 너희 한 명씩은 살려 보내 줄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아직 대답할 생각이 없느냐? 정말 본좌가 시체를 뒤지게 할 참이더냐?”

사공흠과 감평의 눈빛엔 생기가, 흑번과 흑광의 눈빛엔 황당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흑번이 차가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노인네가 욕심이 과하구나.”

“아까부터 본좌, 본좌 이 지랄을 하는데 어디서 빌어먹던 놈이길래 거만을 떠느냐? 홍천환이 무슨 물건인 줄 알고?”

흑광도 거칠게 말을 쏟아내며 한수 거든다.

그 말에 백발노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고 녀석, 살수가 왜 이렇게 혀가 길어?”

흑번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을 뒤덮은 바위 지형의 구멍들 사이로 비추던 햇빛이 대부분 사라지고 아직 남아 비추는 것들은 그저 비스듬히 천장부만 밝힐 뿐이었다. 그 영향으로 이미 주변엔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기 시작했다.

흑번이 다시 백발노인을 바라보았다.

“밤이 다가온다. 실력에 자신이 있나 본데 ‘밤하늘 아래 살문의 흑도를 피할 수 없다’는 강호의 말을 들어 본 적은 없나?”

“흥미롭구나. 한동안 저놈들 꽁무니만 쫓아다니느라 지루했는데 솜씨 좀 보여 주거라. 솜씨 좋은 놈은 살길을 열어 줄 터이니. 크크크!”

흑광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그가 사공흠과 감평에게 했던 말을 백발노인이 자신들에게 그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었다.

흑광이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눈은 백발노인에게 떼지 않으며 아주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등 뒤에 설 때까지도 백발노인은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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