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제7장. 바람이 변하다 (3)
사람이 직접 뛰어들었기 때문인지 보다 확실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곽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려와!”
사공흠과 매경엄이 차례로 비탈길로 뛰어들었다. 가파른 지면을 따라 미끄러지듯 한참 내려가다가 야광주를 들고 있는 곽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차례대로 물속으로 빠졌다.
첨벙첨벙!
“푸하!”
떨어지던 속도만큼 잠겨 내려갔던 사공흠과 매경엄이 다시 물 위로 떠 오르며 숨을 뱉었다.
“물이 꽤 찬데?”
“가만히 있으면 얼어 뒤지겠군.”
“가자, 얼른.”
사공흠은 곽중에게 야광주를 넘겨받고 폐부에 숨을 가득 담고 잠수했다. 물속에서 이리저리 둘러본 사공흠은 지금 그들이 있는 자리가 무척 어두워서 야광주를 들고 있는 자신의 주변만이 그 지형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시선을 멀리 던져 살펴보면 특정 위치에서 그 주변 지형지물이 식별되었다.
‘빛이 들어오는 곳인가?’
사공흠은 그렇게 짐작하면서 그곳으로 잠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야광주의 위치를 보며 곽중과 매경엄이 헤엄치며 쫓아갔다. 점점 해당 위치에 가까이 다가가자 그 지형이 눈에 명확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좀 더 자세하게 살피기 위해서 사공흠은 더욱 깊게 잠영을 택했고 그는 그곳에서 위로 통할 듯한 암반 속에 위로 뚫려 있는 수중동굴을 발견했다. 세 사람은 깊이 잠영하였다가 그 수중동굴로 몸을 다시 밀어 올렸다. 그 동굴은 다행히 그리 길지 않았다. 동굴 지형이 수직으로 올라갔다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데 지형을 따라 방향을 틀자 사공흠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선명한 빛이 물속까지 스며들고 또 그 수면이 빛을 받아 아른거리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기쁜 마음을 품고 그 수면을 향해 힘차게 헤엄쳤다.
“푸-하!”
세 사람의 머리가 차례대로 수면 위로 솟아오르면서 참았던 호흡을 토해내며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리고 세 사람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동그랗게 떠졌다.
“이럴 수가…….”
“세상에…….”
“이런 비경(祕境)이 있단 말인가?”
눈 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풍경에 멍하니 시선을 빼앗겼다. 무의식적으로 헤엄치며 마침내 지면 위로 올라서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벌어진 입이 쉽게 다물어지지 않았다.
화강암과 석회암이 섞인 지형이 동굴의 입구에서 시작된 데 반해 이곳은 그 돌과 흙과 풀과 나무와 물과 빛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대충 보아도 큰 원형의 동굴인데 기형적으로 솟아오른 바위 지형들이 원형의 대지와 같이 그 하늘도 덮고 있었다. 암석의 벽을 따라 이끼와 넝쿨들이 무성하게 끼어 있었고 천장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그곳에선 수풀과 가지들로 어설프게 가려져 바깥의 햇빛이 이 동굴 안쪽 곳곳을 비추었고 그 빛이 자주 머무는 지형에는 과실수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또 그런 천장의 구멍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위치가 낮은 지형에서는 지하수인지 강 지류의 일부인지 모를 물줄기들이 세 군데나 폭포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이 폭포들은 그 떨어지는 위치에 만들어진 연못은 함께 흘러들어온 잉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정면으로 보이는 작은 오두막은 세 사람이 이곳에 온 목적을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마치 약방 같구나.”
오두막 좌우로는 작은 텃밭이 있었는데 몇 가지 약초들이 심어졌으나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아 잡초들도 제법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오두막 안은 약방처럼 꾸며져 있었으나 실제의 그것처럼 온갖 약재들을 망라해서 관리하기보다는 특정한 약재만을 취급하는 것 같이 나뭇가지들을 엮어 만든 보관 시설들이 눈에 들어왔다. 벽을 돌아 들어가자 우측엔 침상이 있었고 좌측으론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보였다. 그리 길지 않은 지하의 끝에는 작은 동굴이 하나 더 나왔다.
작은 동굴은 아주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는데 약재의 부패를 지연시키면서 장기적으로 보관하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곽중은 벽에 걸린 횃불을 확인하고 불을 붙여 내부를 밝혔다. 가뜩이나 젖은 몸이라 동굴 내부의 서늘함에 몸이 으스스 떨렸는데 횃불의 열기에 잠깐이나마 위안 삼을 수 있었다. 시선을 돌려 벽면을 따라 살펴보니 추가로 설치된 약재장(藥材欌)들과 더불어 중앙 벽면의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쿵!
곽중은 칼등으로 상자의 자물쇠를 내려쳐 끊었다. 끼익! 하고 열자 안에 정교하게 세공된 목함(木函)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나무를 사용하고 은을 테두리로 세공한 상자였는데 곽중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바로 홍천환의 보관함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끼익.
조심스럽게 보관함을 열자 그 안에서 붉은색 환단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횃불의 불빛을 받아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이 났는데 그것을 보고 있던 곽중은 자기도 모르게 홍천환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텁!
“어?”
마침 근처에 왔던 사공흠은 곽중의 이상한 낌새에 손을 뻗던 그의 손을 붙잡았다. 곽중도 흠칫 놀라 사공흠을 쳐다보았다.
“미, 미안. 나도 모르게…….”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사공흠은 그렇게 말하며 홍천환에 눈길을 주었다. 그는 곧 홍천환이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력이 있음을 깨달았다.
탕!
“이거 보통 환단이 아니군. 마물(魔物)이나 마찬가지야.”
사공흠은 단호하게 보관함의 뚜껑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곽중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면서도 보관함을 자신의 품에 넣었다.
“정신 차리게.”
“큰일 날 뻔했군.”
사공흠과 곽중은 동굴과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밖에서는 매경엄이 다른 출구를 찾는 중이었다.
“출구는 찾았는가?”
“찾는 중이야.”
이 상자를 갖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물이 닿지 않는 길로 빠져나가야 했는데 이곳의 지형이 완전히 파악되지 않아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듯 보였다.
세 사람은 주변 일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바닥도 발을 세게 밟아보기도 하고 수풀로 가려진 벽이 있으면 풀어헤쳐 보기도 했다. 혹시 바람이 통하는 벽면이 있는지도 확인했다.
“이거 잘못하면 천장으로 가야 되는 거 아냐?”
매경엄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다른 곳에서 출구를 찾고 있던 곽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매달리다시피 하여 올라가야 하는 암벽의 역 경사와 높은 천고는 무림인인 그들이라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어 부담스러웠다.
한참 벽을 뒤지던 곽중은 넝쿨을 밀어내는 와중에 손바닥에서 바람이 부딪치는 느낌을 받고 멈칫했다. 그 위치를 자세히 보니 길게 이어진 틈과 같은 바위 구조의 형태가 어렴풋이나마 보였다. 다만 그 틈이 돌들과 흙, 풀뿌리들이 얽혀 있어서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았다. 유심히 살피던 곽중은 자신의 가슴 높이 부근의 틈이 확실히 비어 있는 것 같아 그곳으로 한쪽 눈을 가져다 댔다.
“헉!”
곽중이 놀라 허파람을 들이켰다. 잠깐 틈을 통해 너머를 살피던 중 앞이 어두워지더니 사람의 눈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곽중은 곧바로 눈을 떼고 뒤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곧바로 쾅! 하며 암벽이 무너져 내렸다. 암벽 두께가 얇았던 모양이었는데 돌조각들과 흙먼지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잠시 후 그곳에서 네 사람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역시 먼저 찾아냈구나.”
흩어져 있던 사공흠과 곽중, 매경엄이 한자리에 모여 그들을 바라보았다. 붉은색 바탕에 청색 테두리의 무복을 보고 단번에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비혈단!”
“연결통로가 또 있었구나…….”
그들이 일제히 칼을 빼 들며 서로를 노려보는데 살기가 등등했다.
비혈단 무리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사내, 감평(甘枰)이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홍천환은 찾았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세 사람이 움찔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공흠이 한 발 나서며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허탕이다.”
“하! 그럴 리가?”
감평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라운 비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그 사실만으로도 그동안 찾았던 비밀 거처들과 비교하면 한눈에 보아도 이곳의 특별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후보군이 강력하게 좁혀진 상황에서 상대의 말을 순순히 들어주고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우리 숫자가 더 많은데 순순히 내놓고 가는 건 어떤가? 사파 동류끼리 칼부림을 해서야 되겠는가?”
“우리도 찾지 못했다니까?”
“못 찾은 것들이 나갈 출구를 찾고 있었나? 들어온 곳으로 바로 나가면 될 것을.”
계속 능청스럽게 맞받아치던 사공흠도 이번엔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그의 표정을 확인한 감평은 이들이 홍천환을 갖고 있음을 확신했다.
“천무방을 뒤에 두고 하오문이 호가호위하는 것은 알고 있는데 말이야. 정말 스스로 호랑이라고 착각하면 안 돼.”
“비혈단은 뭐 다른가? 줏대 없이 양쪽에 발 걸치고 있다는 사실은 강호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큭큭! 이것들이……. 너희들 목숨이 두 개라도 되냐?”
저벅저벅.
비혈단이 일제히 걸음을 옮기며 거리를 좁혀 오자 사공흠 등 세 사람이 바짝 경계했다. 그 대치 속의 긴장감에 서로 눈치를 보던 중 감평은 신호를 내렸다.
“쳐라!”
그의 외침에 비혈단과 하오문 간의 칼부림이 펼쳐졌다. 챙챙! 거리는 금속 소리가 이 암동(巖洞) 안을 시끄럽게 울렸다. 한 사람이 더 많은 비혈단 측이 잠깐 우세한 듯 보였지만, 하오문 세 사람의 실력은 감평의 생각과는 다르게 꽤 뛰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 비혈단원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으며 사공흠의 칼솜씨는 여기 일곱 명 중에 가장 뛰어나 감평을 상대하면서도 다른 비혈단원들을 틈틈이 견제하기도 했다.
‘씨발! 이러다 끝이 없겠는데?’
감평은 이들이 하오문이라 하여 얕봤음을 후회했다. 그렇다고 그냥 놔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신호탄을 쏘는 것도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득보다 실이 더 클 것 같았다. 신호탄에 맞춰 가장 먼저 나타날 자들이 하오문일지 비혈단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정보처럼 살문도 이 판에 끼어 있다면, 그래서 살수들이라도 나타난다면 그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슈욱!
“이크!”
불쑥 솟아오른 사공흠의 검에 감평이 화들짝 놀라 옆으로 굴렀다. 그 틈을 타 사공흠은 옆에 있던 비혈단원을 덮쳐 검을 찌르니 단번에 복부를 뚫렸다.
“커헉!”
“이놈!”
감평은 잡생각에 빠져 있었음을 크게 후회했다. 이를 악물고 사공흠에게 덤벼들었지만, 그 잠깐 사이에도 사공흠은 이미 다른 비혈단원에게도 허벅지를 베고 난 뒤였다. 다행히 깊진 않았지만, 운신에 불편함이 생기면서 비혈단은 단숨에 열세에 빠져 버렸다.
“곽중! 길을 열어라!”
사공흠이 버럭 외쳤다. 그는 바로 옆에서 싸우던 비혈단원에게까지 검을 휘두르며 감평을 동시에 견제했다. 그 의도를 알아챈 곽중은 급히 방향을 틀고 비혈단이 빠져나왔던 무너진 암벽의 출구로 달려갔다. 마침내 출구를 넘어선 그는 암굴 반대편이 제법 빛이 들어와 그 주변부가 환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비혈단이 운이 좋게도 쉬운 길로 이곳에 들어선 것이었다.
‘좋아! 출구만 확인하고 돌아가서 돕자.’
그렇게 생각하고 몇 걸음 더 나아갔던 그때.
푹!
“끄윽!”
눈앞에 하얀빛이 갑자기 번쩍하여 급히 몸을 틀었지만, 한 박자 더 빨랐던 어둠 속의 검은 그의 오른쪽 쇄골 아래 가슴에 꽂혔다가 빠져나왔다. 곽중이 신음과 함께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자 우측 어둠 속에서 인영(人影)이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암굴의 어둠 속에서 인영의 모습은 명확하게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몸에 바짝 달라붙는 어두운 옷과 복면은 단번에 그들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곽중은 급히 뒤를 돌아 다시 동료들이 싸우고 있는 쪽으로 내달렸다.
“젠장! 살문이……!”
막 암굴을 빠져나오려는 찰나, 그 어둠 속에서 검은 손이 불쑥 튀어나와 곽중의 어깨를 채었다.
푹!
“끄윽!”
섬뜩한 소리와 함께 곽중의 입에서 신음과 피가 흘러나왔다. 그의 뒤에 나타난 검은 복면인이 그의 어깨를 붙들고 뒤에서 심장을 향해 자신의 암살검을 꽂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오문과 비혈단의 싸움은 곽중의 비명과 같은 외침으로 멈춘 상황이었다. 그들 다섯 명은 즉시 서로 거리를 벌리면서도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은 눈으로 곽중의 목숨을 앗아간 살수들을 노려보았다.
“곽중…….”
사공흠은 이를 빠득 갈았다. 세 사람은 오래 동거동락한 친구로서 사이가 매우 가까웠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한 사람이 먼저 떠나게 되자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분노는 이를 악무는 것으로 버티면서 머리로는 차갑게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살수 두 명. 살수라 하지만 살문 놈들의 무공은…….’
비혈단도 암살을 특기로 한 자객들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은 술수를 부리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와 반대로 살문은 암살을 위한 그들만의 전문적인 무공체계를 만들어 성장한 문파였다. 암살에 특화되었으나 때때로 일격필살에 실패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격전을 벌이면서까지 임무를 완수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개개인의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홍천환을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구분도 되지 않은 똑같은 차림의 검은 복면의 살수 중 한 명이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공흠이 옆을 힐끔 돌아보았다. 매경엄과 단둘이 남아 있는 현 상황에서 저들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혈단도 같은 입장이었다. 서로 같은 생각이라도 한 듯 때마침 사공흠과 감평의 눈이 마주쳤다.
“저것들부터 같이 치우고 얘기하는 게 어떠냐?”
“좋은 생각이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살수들로부터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흐흐! 버러지 같은 벌레 새끼들이.”
“모두 죽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