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 제7장. 바람이 변하다 (2)
그를 발견한 강정학은 그만 손을 내렸다. 그리고 예의 그 차가운 표정으로 천무경을 노려보았다.
“기척을 죽이고 듣고만 있었을 줄은 몰랐군.”
“총수께서 넓은 아량을 보여 주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지요.”
강정학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 재밌는 말을 하시는군. 이 노부가 누굴 함부로 해치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파의 협객 나부랭이들처럼 마음이 넓은 척하는 것은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지.”
“원인이 누구에게 있든 당사자 간에 해결하는 것이 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인혼당주도 개입했는데 개인사라 할 수 있겠는가?”
“조건이 부당했거나, 술수를 부렸거나.”
“억지군.”
“양자성이 내 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내 딸이 다른 놈을 좋아한다면 녀석 자존심이 허락할 것 같습니까?”
“역시 억지…….”
“불문에 부쳐 주겠다는 말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말은 제 아비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라는 거겠지요. 그리고 지금 드는 생각은 딸의 설명을 듣게 된다면 제가 양자성을 때려죽이러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강정학은 쓴웃음을 지었다. 천서은의 불문에 부친다는 말, 인혼당주의 개입 이유, 천무경의 의견들. 이 모두가 가설일 뿐이지만, 양자성의 성격을 떠올려 본다면 사건의 전후 설명이 되는 것이다.
양자성의 몸 상태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감히!’라는 두 글자였다. 그러나 여기 와서 들은 이야기들과 양자성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자 그는 납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뜻대로 한판 벌여달라라…….’
강정학은 옷소매를 펄럭이며 뒷짐을 쥐고 뒤돌아섰다. 그의 변화에 장내를 가득 둘러쌌던 긴장감이 일순 크게 해소되었다.
“천 방주, 자네는 당사자 간에 해결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변함없겠는가?”
“물론입니다. 애들 싸움에 손을 쓴다고 속이 편하겠습니까?”
“자네와 나의 대결 이유가 고작 그런 일로 벌어지게 둘 수는 없지.”
강정학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자 천무경이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내 실례가 많았네.”
강정학이 뒤로 힐끔 고개를 돌리며 천서은과 잠시 눈을 마주 보았다.
“네게도 미안하군.”
“아닙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서은의 표정은 어떤 식으로든 동요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강정학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나고도 한동안 사람들은 정원을 가르는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시 강정학이 나타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저 투기만으로도 사람을 꼼짝하지 못하게 하고 웃음소리만으로 기절시켜버리는 모습은 충분한 두려움을 자아낼 만했다.
“괜찮으냐?”
“예, 괜찮아요.”
천서은이 방긋 웃음 지었다. 그 모습에 천무경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설명을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대화의 흐름을 듣고 미루어 짐작해 보면 천서은이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가 보기에 천서은에게서 어떤 상처나 눈에 뜨이는 흐트러짐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하기도 싫은 불상사를 겪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자네는 난약파 전연 장문인의 제자인가?”
“여희선이라고 합니다.”
“자네가 여기 있는 것을 보면 내 딸을 도와준 것 같은데, 맞는가?”
“제가 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고맙네. 내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여희선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천하의 파천무봉 천무경의 입에서 은혜라는 말을 들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난약파에 어떤 이득을 가져올지 평소처럼 계산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눈에는 천무경의 호방한 모습만 눈에 자꾸 들어왔다.
“이 당주는 몰래 재밌는 기술을 연구했군.”
“송구합니다.”
천무경은 방 안에 있으면서 밖에서 벌어진 상황들에 대해 속속들이 파악했다. 특히 이혁성이 이기어검을 발동했을 때, 기의 흐름으로 파악하고서는 내심 놀라 했었다.
“몇 번이나 쓸 수 있을 것 같나?”
“거리가 짧다면 두세 번 정도…….”
“그럼 한 번 밖에 못 쓰겠구나. 짧은 거리에 써서 뭣하느냐?”
“……그렇습니다.”
“내공을 늘릴 수단을 고민하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거리다. 내공으로 억지로 하려 해 봐야 정교한 조종은 불가능하다. 쏘고 회수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기껏해야 경로를 조금 꺾을 수는 있겠지만, 내공을 말려 버리기만 할 것이야.”
“으음!”
이혁성은 대답하지 못하고 침음성을 삼켰다. 이기어검을 보였을 때 잠깐 기의 흐름을 읽은 것만으로 그가 안고 있는 고민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버렸기 때문이었다.
스릉!
이혁성의 두 손은 가만히 있었지만, 그의 검집에서 다시 검이 빠져나왔다. 검은 공중에서 빙글 방향을 틀더니 이혁성의 가슴 앞에서 멈추었다.
“이기어검의 요체는 바로 여기 중단전(中丹田)과….”
이번엔 검이 한층 더 떠오르면서 이혁성의 이마 앞에서 멈추었다.
“상단전(上丹田)의 개화(開化)에 있느니라. 내공으로 전중(膻中)과 백회(百會)를 뚫어내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신검합일(身劍合一)에 나아가 정신(精神)을 동화시켜야 흉내 아닌 진정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검을 손에서 놓지 말고 명상을 많이 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방주.”
이혁성이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지례를 올렸다. 자신만의 비기를 손에 넣기 위하여 혼자 고민하면서 부딪친 커다란 벽 앞에서 천무경이 한 말은 그에게 사다리를 놓아준 것과 같았다. 벅차오르는 감동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검은 다시 허공에서 빙글 돌더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혁성의 검집에 들어갔다.
정원에 나와 있다가 그 광경을 목격한 무사들 모두 믿을 수 없는 천고의 경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무경이 당연하다는 듯이 설명을 했지만, 그 진의(眞意)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한 손에 꼽기에도 여유로울 것이다.
‘이건 허공섭물(虛空攝物)의 수준이 아니야! 과연 그 명성이 과장된 것이 아니구나!’
여희선도 경악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허공섭물은 그저 물건을 손대지 않고 이동시키는 술수에 불과했다. 천무경이 이기어검으로 이혁성의 검을 다루는 모습은 그야말로 검에 의지를 부여하는 것과 같은 자유로움이 느껴졌었다.
“다 해산들 하거라. 서은이 너도 쉬어라.”
“예, 아버님.”
* * * *
비무제의 4강전은 천서은과 황사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소문적은 황사열에게 아쉽게 패배했지만, 천무경이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크게 활약하였다. 그는 마치 저돌적인 황소처럼 우직하게 거리를 좁히며 박투로 비무를 이끌었다. 그의 움직임이나 거리를 좁히는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서 황사열이 도법을 전개하기에 무척 애를 먹었다. 황사열은 결국 도를 던져 버리고 맨손으로 겨루었는데 금태하에게 사사한 암연소혼신공의 강력한 내공이 아니었다면 계속 투로에서 밀렸던 것이 패배로 이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최후의 승자전은 하루를 쉰 다음 날인 목요일 오후에 개최될 예정이었다. 소문적은 그 쉬는 날에 천무경을 찾아와 충성을 맹세하였고 천무경은 그의 내상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일장로 백두기에게 사제의 연을 맺을 수 있도록 추천하기로 약속하였다. 천무경은 두 사람의 궁합이 환상적일 것이라 장담하였다.
한편 여희선은 이날에도 천무방의 숙소를 찾아왔는데 천서은에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그녀의 눈은 다른 사람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녀는 저녁에 헤어지면서 이혁성의 볼에 입술을 맞추고, 손에 편지를 하나 주고는 달아나 버렸다. 천서은은 당혹스러워하는 이혁성의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진도건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녀는 다음날 있을 최후 승자전을 위해 깊은 명상으로 심정을 다스렸다.
마침내 다음날 해가 떠올라 중천에 도달한 후 다시 서쪽으로 조금 기울여졌다. 관중석과 가까운 성벽에는 비무제의 마지막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가까운 높은 전각의 지붕들에 올라가 관전하려는 사람들도 보였다.
비무제의 최후 승자전을 알리는 북소리가 세 번 터지자마자 천서은과 황사열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이 마지막 비무가 펼쳐지기에 앞선, 이제 해가 동쪽에서 막 떠오른 시점에 종남산에선 하오문의 사공흠, 곽중, 매경엄 세 사람은 종남산 깊숙한 곳 어딘가의 목적지로 예상되는 곳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사공흠과 곽중, 매경엄은 발밑에 놓인 공동(空洞) 입구를 내려다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손에 지도를 들고 있었음에도 이 장소를 찾지 못하여 몇 번이나 이 주변을 맴돌았는지 몰랐다. 결론적으로는 기형적으로 깎아지른 드높은 절벽들이 겹겹이 지붕을 형성하고 절벽과 함께 자란 우거진 나무들이 이 깊은 계곡을 시의적절하게 가려주고 있었기 때문에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특히나 지하로 직접 뚫려 있는 동굴은 흔한 풍경도 아니었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들 가운데 아주 작은 물줄기 하나가 이 공동 입구로 떨어지는 광경을 포착하지 못했다면 지금도 헤매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려가지.”
사공흠이 먼저 앞장서서 발을 내렸다. 튀어나온 돌부리나 작게 형성된 계단 층, 나무뿌리들을 잡으며 발을 딛고 손으로는 체중을 지탱했다. 아래에서 이따금 찬 바람이 불어오는데 짙은 어둠으로 인한 무의식중의 공포감 때문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벗어던지기 위해서는 내공의 9할 이상은 정신을 붙잡고 안력(眼力)과 감각을 깨우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사공흠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다음에 이어 곽중도 조심스럽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자 매경엄도 뒤를 이어 내려갔다.
다행히 지하로 떨어지는 공동이 꼭 낭떠러지처럼 수직으로 뚫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려갈수록 아주 미세하게나마 경사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들쭉날쭉하긴 했지만, 종종 운신하기 좋은 넓은 공간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그래 봐야 허리를 펼 수 있는 정도가 끝이긴 했다.
여전히 내부에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도대체 어디서 불어오는지 아직은 알 길이 없었다.
파스스…….
“조심들 하게. 이거 미끄럽구먼.”
앞서 내려가던 사공흠이 위에서 따라 내려오는 동료들에게 당부했다.
얼마나 더 내려갔을까. 한 식경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경사가 크게 완만해지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발을 딛고 걸을 수 있는 지면이 확보되기 시작했다. 사공흠은 봇짐에서 횃대를 꺼내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횃불 앞에 드러난 암동(巖洞)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본래는 지하수가 흘렀던 자리였는지 물결치는 듯한 형상이 벽면에 나타났고 위아래로 뾰족하게 솟은 크고 작은 종유석(鐘乳石)들도 눈에 들어왔다. 석회질의 암석들도 있는 것 같았다.
아래에서 횃불을 밝혀 주자 곽중과 매경엄도 여유가 생겨 좀 더 빠른 속도로 내려올 수 있었다.
“이거 꽤 장관이군…….”
마지막에 내려온 매경엄이 횃불 사이로 비친 동굴의 풍경에 감탄했다.
“시간이 없네. 어서 움직이지.”
사공흠은 앞서가며 쫓아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눈썰미를 발휘하여 길을 찾아 나갔다. 동굴 자체는 구불구불하기 했지만, 나름의 방향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뚫려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발밑이 꺼지는 지형들이 나타나서 벽면의 유석이나 석순 등을 활용해서 건너가기도 했다. 얼마간 들어서자 길이 막혔는데 주변을 샅샅이 뒤지니 곽중이 바람이 새어 나오는 좁은 틈을 발견했다.
“이리 좀 와 봐. 벽을 좀 파야겠는데?”
무공이 가장 뛰어난 사공흠이 허리춤에 걸린 엽도를 뽑았다. 그리고 내공을 담아서 벽에 있는 틈을 좀 더 넓혔다.
카각! 카각! 카각!
“이 정도면 될 것 같다.”
사공흠은 엽도를 다시 허리의 도집으로 회수하고 벽면의 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그를 따라 왔다.
“동굴이 계속되는군.”
세 사람은 다시 동굴 내부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매번 다르지만, 또한 비슷한 듯한 지형들이 반복되면서 한참을 걸어갔다. 거의 한 시진 가까운 시간 동안 조심스럽게 움직였는데 세 사람은 또다시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이전의 틈이 있는 벽을 찾기 위해 동굴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여기 밖에 없어.”
매경엄이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아래를 비스듬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공흠과 곽중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흐음……. 정말 여기 밖에 없나?”
매경엄이 가리킨 손가락의 방향엔 비탈진 내리막길이 있었는데 문제는 그곳에 어둠이 짙게 껴있어서 눈으로 가늠이 되지 않았다. 횃불에 의한 그림자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매경엄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옆에 있는 돌멩이를 하나 주워 아래로 떨어뜨렸다.
틱틱, 틱… 틱… 틱!
돌멩이가 비탈진 내리막을 따라 한참을 떨어져 내려갔다. 몇 차례 부딪치는 소리가 나다가 결국 그마저도 더 들리지 않자 매경엄이 눈살을 찌푸렸다.
“끝이 있긴 한 거야?”
“쉿! ……물이다.”
“뭐?”
“아주 작지만, 물소리가 들렸어.”
“정말인가?”
사공흠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좀 더 큰 돌덩이를 가져왔다. 그리고 비탈면을 따라 굴렸다.
한참 떨어지던 돌덩이는 그 크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좀 더 명확하게 그 소리를 남겼다.
첨벙!
작지만 분명한 소리를 세 사람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좀 꺼림칙하기도 했지만, 내려가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었다. 이 아래 비탈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다시는 세상 밖으로 돌아갈 수 없는 무저갱(無底坑)을 맞닥뜨릴지도 몰랐다.
“야광주 갖고 있지?”
“여기 있네.”
곽중이 가져온 가죽 주머니를 뒤져 야광주를 꺼내었다. 물속에 들어가면 인도자 역할을 할 사공흠에게 전달할 생각이었다.
“일단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인지 확인부터 하자고.”
매경엄은 별도로 챙겨 왔던 밧줄을 풀었다. 그 밧줄을 곽중이 허리에 묶었다. 매경엄은 반대쪽 끝을 자신의 허리에 감고는 마보 자세를 취하면서 밧줄을 두 손으로 붙들어 매었다. 길이는 꽤 길어서 돌덩이 떨어졌던 거리를 가늠해 보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내려가겠네.”
사공흠도 혹시 모를 충격에 대비해 매경엄의 뒤에서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곽중은 망설이지 않고 비탈길로 몸을 던졌다. 그의 신형은 마찰 소리를 내며 금방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치이이이익-.
첨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