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 제7장. 바람이 변하다 (1)
유시(酉時:17~19시) 경.
사패련, 검림 총수의 숙소에서 강정학은 세 명의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안휘 팔공산(八公山) 중턱의 수림(樹林)에 있는 검객들의 마을 검림의 총수대리 청송검(靑松劍) 서저위(書著偉)였고 다른 한 사람은 백수살검(百首殺劍) 맹주태(孟宙兌)였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복면 사내는 비혈단의 자객 주표(朱豹)였다. 서저위는 주표의 모습을 힐끔 내려보고는 다시 강정학을 보았다.
‘이 자가 주표……. 구룡문주가 이 모습을 보면 심기가 불편하겠군.’
비혈단은 일반 무사들과 자객 집단을 동시에 운영하는 문파로 중국 전토에 분타(分舵)를 두고 그 세력을 정보수집과 청부업을 겸업하였다. 그들은 그 세를 이용하여 사패련이 창설되었을 때, 전략적인 제휴를 맺었는데 최근 사패련주로 금태하가 8년 가까이 연임하게 되면서 구룡문과 관계가 매우 가까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현 비혈단주인 천잔귀검(天殘鬼劍) 좌영각(左影角)은 어릴 적 강정학에게 지도를 받은 인연이 있어서 비밀리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패련과 특히 구룡문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정보들은 강정학도 입수하고 있다 봐도 무방했다. 그런 의미에서 주표는 비혈단 동화은잠술(同化隱潛術)의 최고수로서 비혈단과 강정학을 연결하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강정학은 주표가 건네준 서찰을 펼쳐 읽고 있었다. 내용을 전부 파악한 강정학이 주표를 내려다보았다.
“결국은 홍천환이라는 것이 실존한다는 말이군.”
“아직 실물이 확보된 것은 아니지만, 하오문의 움직임을 보면 그 위치는 완전히 특정된 것 같습니다.”
“그 위치가 종남산이다?”
“소화산도 가능성이 있지만, 종남산이 유력하다는 판단입니다.”
“재밌군. 천무방은?”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역시 가장 빠르겠군.”
“남은 사위검총(四偉劍總)이 비혈단의 예측 전언을 듣고 미리 검객들을 끌고 신속히 서진하였을 것이니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서저위가 강정학의 혹시 모를 걱정을 덜어 주었다. 사위검총은 검림에서도 그 재능과 실력 모두를 인정받아 강정학이 직접 사사하거나 지도함으로써 그 지위를 인정받은 네 명의 검객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강정학의 첫째, 둘째 제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위검총의 수장이자 강정학의 첫째 제자 백령검왕(白靈劍王) 강도혁(姜圖赫). 평생 혼인을 하지 않은 강정학이었지만, 30대 때 잠깐 마음을 뺏겼던 여자로부터 얻은 그의 혈육이었다. 강정학은 얽매여 있는 것을 싫어하여 부자 관계를 일부러 맺지 않았기에 두 사람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강도혁의 무재(武才)가 뛰어나고 하나뿐인 혈육이라는 사실은 결국 그를 제자로라도 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사위검총의 한 사람인 둘째 제자는 천잔살검(天殘殺劍) 마산호(馬山號)로 그 출신지가 불명이었는데 20대 때 강정학을 만나 혈투를 벌인 인연으로 제자가 되었었다. 사실 혈투는 마산호의 주장이었고, 따지고 보면 강정학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별개로 그의 천살검법은 마공(摩功)의 색이 뚜렷하여 강정학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의 재능이 비상하기도 하여 홀로 낭인처럼 떠도는 그를 제자로 들이게 되었다. 그와의 인연으로 강정학은 천살검법을 연구해서 백령검법을 더욱 파괴적인 무공으로 개량시킬 수 있었다.
사위검총의 다른 두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청송검 서저위와 추혼검귀(追魂劍鬼) 매연선(梅蓮船)이라는 여류검사로 쾌검의 달인이었다.
“간만에 무림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겠구나.”
강정학이 긴 수염을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곧 구룡문도 홍천환을 차지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었다. 만약 천무방, 검림, 구룡문으로 얘기되는 현 무림 3강 중 어느 한 곳이 홍천환을 확보하지 못하고 지지부진 쟁탈전이 길어지면 무림의 수많은 파리 떼가 꼬일 것이 분명했다. 어느 한쪽이 확보한다고 해도 문제였다. 특히 천무방이나 검림이 차지한다면 금태하의 성격상 구룡문은 물론 사패련까지 동원하려 할지도 몰랐다. 비무제에서 어느 쪽이 우승하느냐에 따라 련주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그 련주직의 인수인계는 내년 1월 1일에 진행되므로 아직까진 사패련이 금태하의 손아귀에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사파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홍천환이라……. 혈마를 만들어 냈다던 환단. 내가 복용해도 과연 혈마화(血魔化)를 일으키는 주화입마를 막지 못할 것인가?’
강정학은 홍천환을 본인이 복용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과거 혈마가 되었다는 원건이라는 자도 당시 천하오절의 경지는 아니었겠지만, 천하제일무림대회 최후의 1인이었다는 측면에서 고강한 무공을 지녔을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확률은 반반. 일단 손에 넣고는 봐야지.’
강정학은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일흔다섯의 나이에 무공의 경지가 화경에 이르면 여러 가지로 삶에 초연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강함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음을 근래에 다시 느끼고 있었다. 본인보다 10년이나 젊은 천무경은 여전히 대등한 평가를 받지만, 직접 눈으로 보면 끝을 헤아리기 힘든 인물임이 느껴졌다. 그보다 앞서가려면 홍천환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혹시 아는가?
그것이 그에게 화경 이상의 또 다른 경지를 보여 줄지?
그때였다.
갑자기 주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구석으로 이동했다. 그러면서 그의 신형이 주변에 동화되더니 결국 눈으로도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 마치 서역에서부터 소문으로 전해져 오던 변색룡(變色龍)을 보는 듯했다. 기척조차 위치를 특정키 어려웠다.
주표의 일로 잠시 주의를 기울이던 맹주태가 방문을 나섰다. 밖에서 작은 소란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나가자마자 강정학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노안(老顔)에 차가운 표정이 떠올랐다. 맹주태를 쫓아가듯 방문으로 걸어가는 그의 묵직한 걸음에선 다분히 노기가 느껴졌고 서저위도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는 뒤를 따라 나갔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소리치진 않았지만, 강정학의 차가운 목소리에 이곳으로 들어온 적도단 부단주 주유현과 단원 두 사람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적도단 무사 두 사람이 함께 양자성을 부축한 채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양자성의 상태가 한눈에 보아도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동문 밖 수림에서 굉음을 들었다는 신고로 갔었는데 양 공자가 이런 상태로 있어서 급히 응급처치 후에 데려왔습니다.”
주유현이 침착하게 답하였지만, 이미 강정학은 그 말이 온전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처럼 깔끔하면서도 적당히 화려한 복장을 즐겼던 양자성의 옷은 여기저기 터지고 굴러 더럽혀져 있었다. 입과 턱 주변엔 검은 피를 토혈한 것이 남아 있었고, 곳곳엔 쓸린 상처들이 보였다. 특히 오른쪽 옆구리가 검에 깊게 베였는지 입을 벌리고 있었는데 그 상처가 그을린 흔적이 있었다. 강정학이 다가와 양자성의 왼손 맥문을 낚아챘다.
‘파천신공…….’
강정학은 단번에 양자성의 부상 이유를 알아냈다.
“크흐흐, 쿨럭!”
강정학이 눈을 돌려 양자성을 보았다. 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리고 있었지만, 강정학이 그의 손목을 붙잡자마자 눈을 치켜떠서 보고 있었다. 강정학이 손을 뻗어 그의 하관을 쥐고 들어 눈을 마주 보았다. 양자성의 입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크크! 개인적인, 쿨럭! …일일 뿐입니다, 사부님. 그런데…….”
양자성의 입에서 자조 섞인 말이 나오자 강정학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다 양자성이 말꼬리를 흐리는데 그의 얼굴에 뜻 모를 웃음이 떠올랐다. 그 웃음에서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분노, 슬픔, 흥미 그리고 그 위로 비웃음이, 뒤틀린 감정이 엿보였다.
“제 뜻대로 사부님께서 한판 벌여 주시겠습니까?”
“뭣이?”
강정학은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양자성이 이런 꼴이 된 것의 원인이 바로 그 자신에게 있었음을. 그는 받쳐 주고 있던 제자의 얼굴을 더 보기 싫다는 듯이 한쪽으로 밀면서 손을 놓았다.
“크흐흐!”
“이 녀석 방에 누이고 의원을 들이거라.”
“예.”
강정학의 시선이 주유현에게 닿았다. 그리고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의 손이 조금 더 올라가서는 승모근 쪽을 꾹 쥐었다.
“……으음! 총수!”
“천 방주에게 볼 일이 생겨서 말이야. 자네가 그의 처남이었지 아마? 앞장 서주게나.”
“……예.”
강정학이 손을 놓아주자 주유현이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는 비로소 직감적으로 양자성의 부상이 천무방과 연관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사패련 적도단의 부단주였다. 이 자리에서 그 연유를 조사하고 싶어도 강정학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될 것이었다. 차라리 천무경 앞에 데려가서 그들의 대화를 듣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자네들은 저놈 상태를 살펴주고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감시해 주게나.”
“알겠습니다.”
“예.”
서저위와 맹주태가 곧장 대답하고 적도단 무사들을 인솔하여 양자성을 그의 방으로 데려갔다.
강정학은 주유현을 앞세워 천무방이 머무는 숙소로 향했다.
그곳에 들어서자 천무방의 무인들 십여 명 정도와 이혁성, 천서은이 정원에 나와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여희선도 함께 있었지만, 강정학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잠시 두리번거리자 천서은이 앞으로 나와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선배님께서 이곳엔 친히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네 아비를 만나러 왔다. 주 부단주는 말을 전하게.”
“예.”
“……혹시 양 공자 때문에 오셨습니까?”
주유현을 따라 움직이던 강정학의 시선이 천서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에게 꽂혔다. 강정학이 가만히 천서은의 눈을 바라보는데 그 심상치 않은 기세에 저마다 할 일을 하던 무사들이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강정학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강정학이 미소를 지었다. 직시하는 눈빛은 그대로 입만 웃는 모양새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네가 한 짓이냐?”
“전 불문에 붙이기로 하였는데 양 공자는 자신이 과(過)를 인정하지 않고 그새 선배님께 일렀나 봅니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하는 것이 좋을 거야.”
나지막이 으르렁거리는 그의 말에 나와 있던 무인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꺼내 들고 강정학을 향해 투기를 드러냈다. 방 안에서 이런 낌새를 느낀 자들이 더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들이 몇이나 더 나온들 강정학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쓸데없는 짓들 할 필요 없다. 이 노부가 마음먹기에 따라 반항의 무의미함을 저승에서 깨닫게 해 줄 수 있음이니.”
백령신검 강정학.
그 절대자의 패기에 전율하지 않은 자 없었다. 그런데도 먼저 공포심에 휩싸여 병장기를 거두는 자들은 없었다. 젊은 인급 무사들은 무너질 수도 있었으나 천급 무사들이 그들을 자신의 뒤에 두고 강정학이 발산하는 패기를 고스란히 받아내 주었다.
‘훈련은 잘되어 있군.’
그 모습에 적잖이 감탄하면서도 강정학은 노골적으로 패기를 거칠게 뿌려댔다.
천서은은 강정학이 계속 협박하게 둘 수 없었다. 그녀가 한 걸음 나와 그의 신경을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선배님. 전 불문에 부치겠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설명을 듣길 원하신다면 ……이 몰염치한 상황에 대해서 양자성이나 선배님 둘 중 한 사람은 대가를 치르셔야 합니다.”
“으하하하핫!”
또박또박 말에 힘을 주어 대답하는 천서은의 모습에 잠깐 말문이 막혔던 강정학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가 마치 사자후(獅子吼)와 같이 터져 나오면서 천급 무사들 몇몇이 비틀거리고 인급 무사들은 상당수가 귀로 피를 흘리며 혼절했다. 여희선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는데 이혁성이 보호해 주었으니 망정이지 그녀도 하마터면 청력에 충격을 받을 뻔했다.
“불문에 부친다? 결국 너의 손으로 그렇게 만들었음이렸다?”
“그렇다면요?”
“후후! 미안하지만 말이다. 이 노부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난 꼭 대답을 들어야겠구나.”
강정학의 왼손을 천천히 들면서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때 이혁성이 검을 뽑았는데 강정학이 제법 놀란 눈으로 그를 보고 멈칫했다.
막대한 공력으로 연결되어 손에서 벗어나 공중에 떠 있는 검.
강정학이 감탄하며 그를 칭찬한다. 눈여겨보았던 재능이었기에.
“네 실력이 이기어검에 닿았더냐? 허허! 그렇지만 유지하기는 버거워 보이는구나. 아직 몸에 맞는 옷이 아니야.”
그렇게 얘기하던 강정학의 머릿속에 문득 양자성의 옆구리 검상이 생각났다. 그을린 듯한 상처는 어지간히 강한 검기로는 만들어 내기 어려웠다. 특수한 무공을 익혔거나 검기성강을 이루었거나 혹은 이기어검 같은 초절정 무학 정도만이 가능한 상처였다.
“그렇군. 너희 두 사람이 자성이를 그렇게 만들었구나.”
두근두근!
천서은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강정학은 정말 공격하려는 것일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파천신공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강 총수, 그쯤 하시지요. 고집이 너무 심하시구려.”
그때 숙소 건물 쪽 방안에서 중후한 음성이 이 주변을 가득 채울 정도로 울려 퍼졌다. 드르륵, 방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으니 바로 천무경이었다. 여유 있는 표정으로, 그러나 무게감 있는 모습으로 걸어 나오는 그의 모습에 주변을 억누르던 강정학의 위압감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잔뜩 경계하던 무사들도 서둘러 기절한 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