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1화 (31/432)

31화 - 제6장. 작별 (5)

해가 서산으로 기울면서 하늘은 조금씩 노란 빛을 띠고 있었다. 동문 가까이에 있던 마방에서 말 한 필을 빌린 천서은은 밖으로 내달렸다. 잠시간 말을 달린 뒤 도착한 곳은 진도건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입술을 맞춘 그 숲속이었다.

다닥다닥 규칙적으로 들리는 말발굽 걸음 소리와 스슷스슷 잎사귀가 스치는 소리들이 시원한 바람과 함께 더불어 들려왔다. 도시 속의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들은 활기를 느끼게 하지만 때로는 연방 피부를 스치는 북적거림과 무거운 흙먼지는 답답함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저 평범한 수풀림의 풍경과 예의 그 싱그러운 풀 내음은 보이지 않는 손에 꽉 쥐어진 듯한 마음에 청량감을 주고 있었다.

천서은은 말에서 내려 고삐를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다. 근처 이파리들을 뜯어먹는 말은 두고 그 주변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다채로운 향기와 형형색색의 꽃들은 점점 쌀쌀해지는 날씨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노랗고 붉게 물든 활엽수들이 보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 위를 올려다보면 나뭇잎과 가지들 사이를 통해 들어오는 황혼의 빛깔로 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툭!

걸음을 옮기던 중 돌멩이가 발끝에 차였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돌멩이에 무심코 시선을 던져보니 그 주변을 지나가던 다람쥐가 잽싸게 수풀 속으로 숨어 버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읏차!”

천서은이 자리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크기가 제멋대로인 돌멩이들이나 흙덩이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무질서하게 보이는 것들은 틈틈이 비집고 올라온 잡초나 이름 모를 작은 꽃들과 함께 어우러져서 조화롭게도 보였다. 무성한 숲의 지붕 아래에서 꾸준히 이슬을 받아온 흙들은 손에 한 줌 쥐어 살펴보니 적당히 촉촉하고 좋은 냄새를 풍겼다.

툭!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천서은이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가는 시야 속에서 하얀 그림자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경각심에 소름이 쫙 돋으면서 급히 주먹을 휘둘렀지만, 상대의 술수가 한 박자 더 빨랐다.

투투투투툭!

검지로 그녀의 몇 개 혈도(穴道)를 점혈(點穴)했다. 그러자 온몸을 꼼짝하지 못하게 되었다. 기혈이 흐르는 주요 자리를 강제로 틀어막은 것이었다. 그녀의 움직임에 제동이 걸리자 안전을 기하려는지 세 군데의 혈을 주가로 점혈했다.

“흡, 흡…! 너……!‘

부지불식간에 당한 강력한 점혈법에 의해 근수축이 일어나 호흡마저 짧아졌다. 눈과 입은 움직일 수 있었는데 감정이 분노에 휩싸이면서 그 이름을 내뱉기조차 힘들었다.

“양자성이오. 기껏 알려 준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섭섭하다오.”

잘생긴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는 그 여느 때와는 달랐다. 희번덕거리는 눈빛과 혓바닥을 살짝 내밀면서 아랫입술을 적시는 모습이 그에게 낯선 모습임에도 어색하지도 않은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천서은은 다시금 힘겹게 호흡을 붙이며 입을 뗐다.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로 인해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양자성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위아래를 훑었다. 화려한 옷이 아니었지만, 신체의 굴곡을 엿볼 수 있는 무복 차림이 묘하게 그를 흥분시켰다. 금가루가 반짝이는 듯한 황혼의 노란 햇살의 파편들이 천서은의 얼굴을 비추는데 그 아름다움은 보는 것만으로도 달콤하기까지 했다.

양자성이 그녀 앞에 바짝 다가왔다. 얼굴은 상대의 호흡이 느껴지고 그의 왼손은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쓰다듬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글쎄. 무슨 짓일까? 나도 고민 중이야. 이왕 이렇게 일을 벌였으면 정말 무슨 짓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잖아.”

이제 그의 말에서 존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더는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그의 말과 태도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땐 어땠나? 며칠 전에 네 호위무사를 끼고 이곳에 왔었잖아. 둘이 뭘 했지?”

“무, 무슨 말이지?”

“하필 그날 내가 동문 지붕 위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거든. 둘이 말을 타고 신나게 달려가는 모습이 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어. 내가 너의 마음을 살 수 있을 시간을 달라, 네 부친에게 그렇게 얘기했었는데 듣지 못했나 봐?”

천서은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설마 쫓아와서 훔쳐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그런 짐작들이 아니라 당장에 현실로 닥친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 것이었다.

“자, 말해 봐. 둘이 뭘 했지? 정(情)이라도 통했나? 놈의 손이 너의 어디까지 주물러댔지?”

“미친 개자식……!”

천서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보지 않고 양자성은 그녀의 주변을 돌며 몸을 훑어보았다. 특히나 그의 왼손은 주변을 돌면서 그녀의 허리를 같이 쓸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오른손만 붕대로 고정해 두지 않았다면 그 치욕스러운 감촉을 두 배로 감당했어야 할 일이었다.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넌 왜 내게 관심을 두지 않지? 네가 옆에 끼고 도는 진도건보다 내 신분이나 외모나 훨씬 뛰어나지 않나? 날 한 번이라도 본 여자라면 다들 내게 안기고 싶어 안달이 나던데 말이야.”

“패자에게 관심을 주는 여자도 있나?”

“후후! 이런, 꽤 아픈 곳을 찌르는군. 하지만, 그때 손에 들린 것이 진검이었다면 놈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을 거라는 생각 정도는 해 달라고. 너도 그 정도는 알잖아?”

“패배자 주제에 혀가 길구나.”

“큭큭!”

갑자기 양자성이 왼손으로 그녀의 뒤에서 허리를 우악스럽게 끌어안았다. 바짝 밀착된 상태 그대로 그여 혓바닥이 그녀의 귀를 핥았다. 그리곤 그녀의 목과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그 체취를 맡았다.

“하아……, 이 체취!”

천서은의 두 눈이 부릅떠지며 수치심에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흰자위로 핏발이 서고 눈가엔 눈물까지 맺혔다.

양자성의 왼손이 그녀의 몸을 쓰다듬었다. 허벅지부터 엉덩이와 허리로 올라와 봉긋한 가슴의 계곡을 지나 목까지, 손끝으로 가볍게 쓸어 올리는데 그 접촉이 가벼운 만큼 수치심은 더욱 배가 되었다. 결국 눈가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의 왼손이 그 눈물을 훔쳤다.

“왜 울고 그래? 섭섭하게. 난 네게 잘해 줄 생각밖에 없는데 말이야.”

천서은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빨리 이 상태를 벗어나야만 했다. 그녀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오로지 체내의 변화에만 집중했다.

내공을 움직여 막힌 혈도를 두드리자 누군가 그곳을 뾰족한 것으로 누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며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양자성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찡그린 표정을 보았다. 그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그가 그녀의 앞으로 돌아와 허리를 바짝 끌어안으며 이마를 맞대었다. 그리고 살기 가득한 그녀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이 점혈법은 내가 특별히 공부하여 창안한 봉혈지(縫血指)라는 점혈지공(點穴指功)이야. 기혈의 흐름을 아주 작은 점 안에서 꼬아 버리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풀려고 하면 아주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어. 아! 물론 절대 풀리지 않는 점혈법은 없지. 너무 걱정하지마. 반 시진이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그리고…….”

양자성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천서은의 입술로 향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씩씩거리는 호흡이 직접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의 시선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반시진은 우리가 속정을 몇 번이고 통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지.”

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입술로 내려갔다. 그의 왼손이 그녀의 허리에서 등으로 올라오며 입술을 점점 가까이 가져갔다.

“이거 섭섭하네요.”

입술이 서로 맞닿기 직전, 뒤에서 들려온 낭랑한 목소리에 양자성의 행동이 멈추었다.

“하아.”

그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다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난약파의 여희선. 그대에게 뒤를 밟힐 줄은 몰랐군.”

양자성과 그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옮긴 천서은도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여희선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제법 어두워진 숲속에서 거리는 조금 멀었지만, 여희선은 특유의 살랑거리는 걸음걸이로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평범한 속도로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그 어떤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양자성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금빛으로 반짝이던 햇살의 파편들이 점점 붉어지고 어두워지는 단계에서 바람에 의한 수풀들의 소음 외에는 사위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섭섭하네요, 양 공자. 당신께 관심 있던 여자는 정작 저였는데 말이죠.”

“후후후! 그렇소? 아아, 여 낭자. 섭섭할 필요 없소. 당교도 무척 아름답기에 내 기꺼이 찾아가려고 했으니.”

“서은이의 미모가 참 빼어나지만, 그래도 언니로서 동생에게 관심이 밀리니 당혹스럽군요.”

“하하하!”

양자성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천서은의 눈과 입술을 번갈아 보며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쓰다듬고는 씩 웃으며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뒤를 돌아 여희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나섰다.

‘지금이야.’

천서은은 여희선이 만들어 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생각했다. 진기를 운행할수록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면서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도록 버텼다.

한편 양자성은 여희선을 바라보면서도 주변에 대한 경계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 혼자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었지만, 혹여나 다른 꼬리를 달고 왔다면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변수였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무림 최고의 미녀를 품을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긴 싫었다.

“그래도 실망스럽진 않았소? 아니면 내가 두렵다거나.”

두 팔을 벌리며 거들먹거리는 듯한 자세를 보이던 그가 한 손으로 천서은을 가리키며 말을 했다. 그것은 여희선이 따라온 목적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천서은에 여희선까지 품을 수 있다면 정말 환상적이겠으나 그녀가 독을 품은 꽃뱀인지는 확인해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여희선이 보여 주기 시작한 행동들은 그의 예측이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대는 천하에 으뜸가는 검림의 총수께서 총애하는 제자이십니다. 여인의 몸으로 영웅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슬픈 일은 없지요. 천무방의 공녀로서 콧대 높은 동생을 지금 품는 것은 나무 인형을 껴안는 것과 같답니다. 하지만, 저와 먼저 어울리시는 걸 보여 준다면 저 아이의 뻣뻣한 허리도 부드러워지지 않을까요?”

비음에 호흡 소리까지 섞여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여 사람의 긴장을 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거기다 지금 기방의 기녀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말에 포함된 단어 하나하나가 그의 색욕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다.

“하하하…….”

양자성은 나직이 웃음을 흘렸지만, 곧 숨을 참아야만 했다. 그의 눈은 여희선의 손이 움직이는 위치에 저절로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여희선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하얀 장포를 반쯤 벗어 내리자 그녀의 살색 어깨가 고스란히 드러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두 손을 장포 안쪽의 등 뒤로 넣어서 궁장 상의의 가운데를 동여맨 끈을 하나씩 풀어 내려갔다. 마침내 가죽 상의가 땅에 툭! 하고 떨어지자 그녀의 새하얀 살결과 탐스럽고 풍만한 가슴이 출렁하고 떨어졌다. 여희선은 장포의 앞섬을 손으로 살짝 모으니 드러난 가슴을 절반 정도 가려 주었다. 쌀쌀한 바람이 솔솔 불 때마다 장포의 옷자락이 살랑살랑 흔들리니 그 뒤로 보이는 나신에 양자성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때요? 이렇게 벗고 나면 저도 이쁜데.”

“……아름답군.”

조금씩 나부끼는 옷자락 사이로 비치는 그녀의 나신은 빼어난 용모와 더불어 그의 눈을 현혹하기에 충분했다. 옷 사이로 손을 넣어 부드러운 허리를 감아 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사위를 의식한 경계심이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움 앞에 수그러들고 두 발은 의식과는 무관하게 어느새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퍼뜩 들었다. 다시금 경계심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지만, 이미 두 여인의 존재감은 그의 감각 끄트머리에 있었다.

투둑! 툭! 툭!

무언가 부러뜨리는 듯한 또는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싸늘한 예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자 급히 몸을 휙 돌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천서은과의 거리가 어느새 10보 이상 멀어져 있었다.

‘아차!’

양자성은 자신과 봉혈지법에 너무 자신했고, 천서은과 파천신공을 너무 얕봤다.

그가 한눈파는 잠깐 사이에 천서은은 막힌 혈을 뚫고 풀어내는데 고통을 씹어 삼켜 냈다. 파천신공은 이미 모든 기혈의 흐름이 단전부터 말단까지 연결된 상태를 유지하는 강점이 있었다. 아무리 기혈을 막아 놨다고 하더라도 결론적으로는 시작부터 물 새는 둑을 어설프게 건설했을 뿐이었다. 거기에 더해 천서은의 성취가 낮지 않고 극복해야 할 위기감이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잘근 씹어 낸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피가 비릿한 맛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천서은의 눈빛과 함께 두 손에는 이미 조용히 파천신공의 공력을 모아 낸 상태였다. 그리고 그것을 양자성은 늦게 알아채 버렸다.

양자성이 서둘러 그 자리를 회피하려고 할 때였다.

삐이이익!

허리 뒤쪽에 숨겨 두었던 여희선의 옥적이 허공을 베어 냈다. 특수하게 제작된 피리의 입구로 공기가 밀려 들어가며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급히 자리를 뜨려 했던 양자성은 몸이 잠깐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합!”

파앙-!

기합과 함께 옥적경파공(玉笛境派功)의 음공에 의한 금쇄술(金鎖術)이 풀려났다. 그러나 그의 발을 옥죄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슈아악!

예민하게 달아오른 감각으로부터 위험신호가 떨어졌다. 양자성이 본능적으로 제 자리에서 팽이처럼 휘도는 순간 한 자루 장검이 위치를 알 수 없는 숲속에서부터 날아와 그를 지나쳐 땅에 푹! 하고 박혔다. 휘돌고 다시 바로 선 양자성의 가슴팍엔 긴 검상이 선혈과 함께 생겨난 뒤였다. 그는 상처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미 천서은이 그의 지척 앞으로 접근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천신공 벽뢰장(碧雷掌).

천서은의 두 손에 모여 있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번개처럼 그 위세를 뻗대고 있었다. 그것 그대로 양자성을 향해 쌍장을 뻗었다. 그리고 동시에 양자성도 좌장을 황급히 맞받아쳤다.

콰릉!

천둥 소리가 둘 사이에 터져 나오면서 거대한 기운의 폭발이 일어나며 그 후폭풍이 휘몰아쳤다. 흙먼지와 나뭇잎들의 무성한 파편들이 후폭풍의 바람과 함께 시야를 어지럽히는 사이 천서은이 앞에 있어야 할 양자성을 부릅뜬 눈으로 찾았다.

“어디냐!”

천서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버럭 소리쳤다. 분명 두 손에 제대로 충돌한 여파가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흙먼지 등에 의해 시야가 가려져서 눈으로 찾기가 어려웠고 침착함을 많이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기척으로 찾을 수 없는 것이 본인의 상태였다.

후폭풍의 소란 속에서 양자성은 이미 튕겨 나오듯 그 권역에서 빠져나간 후였다. 그 모습을 다소 밖에 있던 여희선이 포착하고 다시 한번 옥적을 휘둘러 옥적경파공을 시전했다.

삐이익-!

“큭!”

공중에서 다시 한번 양자성의 신형이 멈칫했다. 벽뢰장의 공력을 이겨 내지 못하고 내상을 입은 탓에 이번엔 움직임의 금쇄에 그치지 않고 눈앞이 잠깐 혼탁해지면서 땅에 우당탕 떨어졌다.

“제길!”

거칠게 소리치는 그의 입에서 피가 토해져 나왔다. 이미 한 번 천무경의 파천신공에 내상을 입은 터라 더 심해진 것을 깨달았다.

그때 다른 한쪽에서 한 사내가 천서은 쪽을 향해서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존재를 눈치챈 천서은이 급히 경계했지만, 곧 그 사내가 아군임을 깨달았다.

“이 당주님……!”

이혁성은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달리는 와중에도 두 눈으로 땅에 박힌 자신의 검의 위치를 잠깐 확인한 후에 양자성의 위치를 서둘러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검을 쥐고 뽑았을 때 양자성은 그의 등장을 눈치채고 서둘러 달아나고 있었다.

이미 양자성과 그들의 거리는 훌쩍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혁성은 결코 그를 그냥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달려오면서 충분한 공력을 준비해 왔고 검을 쥔 순간 이미 전이되었다. 내공에 의한 강력한 연결을 손에 쥔 감촉으로부터 느끼며 전력으로 양자성을 향해 검을 던졌다.

쐐액!

비뢰어검술(飛雷御劍術).

앞으로 뻗은 그의 손을 떠난 검은 말 그대로 한 줄기 번개가 되어 쏘아졌다. 그것을 본 천서은과 여희선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에 다시 본 적 없던 쾌검이 이기어검(以氣御劍)으로 발현되는 것을 목도한 것이었다.

검은 멀리 보이는 양자성의 신형을 꿰뚫은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이혁성은 다시 공력으로 검을 끌어당겼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스스로 날아온 듯한 검은 다시 이혁성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이혁성은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무릎을 꿇으며 피를 토했다.

“쿨럭!”

“이 당주님!”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 검이 얕았던…. 쿨럭!”

이혁성은 자신의 비기(秘技)까지 꺼내 들었음에도 거리가 너무 멀어 양자성에게 제대로 닿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작은 검상 정도로만 그쳤을 것이라 예상되었기에 그는 천서은에게 송구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이기어검을 선보였지만, 그것은 이혁성의 몸에 큰 반동을 가져왔다. 천서은은 그의 맥문을 짚고는 그의 진기가 날뛰고 있음을 깨닫고는 서둘러 운기조식을 도왔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점차 그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그 사이 여희선이 옷을 추스르고 천서은에게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괜찮니?”

“고마워요, 언니.”

여희선의 얼굴을 본 천서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 당주님께도 너무 고맙습니다. 언니는 괜찮아요?”

천서은은 여희선이 그녀를 위해 부끄러움을 감내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것이 기회가 되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지, 만약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을 겪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천서은의 마음속엔 여희선에 대한 한없는 고마움을 품고 있었다.

“후후! 난 괜찮아. 동문 지붕 위에서 바람 쐬다가 너와 양자성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오지 못했을 거야. 이분이 근처에 마침 있었던 것도 운이 좋았고. 혼자 왔다면 나도 위험했겠지.”

양자성도 동문 지붕 위에서 천서은과 진도건이 가는 모습을 발견했다고 했었으니 운명의 장난이 아닐까 싶었다.

“으흠!”

여희선이 이혁성의 어깨를 쓰다듬자 그 접촉이 어색했던 이혁성이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은 여희선의 눈에 딱딱하고 마른 인상 때문에 다소 차이가 있긴 했지만, 진도건과 비슷한 모습이 이혁성에게서 엿보이자 미소를 지었다.

이혁성은 천서은에게 닥쳤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적잖이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자성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검림에 죄를 묻겠습니다.”

“아니에요. 저희 전력이 바깥으로 많이 움직이고 있으니 자칫 검림과 전쟁으로 이어진다면 좋지 않은 흐름으로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

“참으려고?”

의외의 설명에 여희선이 놀라 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물음에 천서은의 두 눈에 또다시 살기가 떠올랐다.

“결단코 그를 살려 두지 않을 거예요. 당연히.”

마지막을 힘주어 대답했다.

다시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천서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뢰장의 여파로 주변 수풀림이 이리저리 휩쓸리고 뜯겨 나가면서 더러워져 있었다.

‘진 위사와의 추억의 장소가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천서은은 양자성의 더러운 의도로 인해 행복한 기억이 가득했던 장소가 산산이 부서져 버린 이 상황에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양자성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천무방의 공녀로서 냉정하게 정세를 판단하여 이혁성에게 얘기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피를 삼키는 듯한 고통 속에서 한 말이었다.

천서은의 아름다워야 할 눈빛 속에 분노와 살기가 뒤섞여 있자 여희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꼭 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런 그녀의 어깨에 천서은은 얼굴을 묻고 조용히 화를 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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